기억의 정치학을 넘어서 – 『제국의 위안부』 피소 1년

1.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인식의 변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인식을 둘러싸고 이 1년 동안 현저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작년 8월에 나온 <아사히신문>과 <홋카이도신문>의 ‘강제연행’에 관한 과거의 기사를 취소한 사태는 그 첫걸음이었습니다. 그에 이어 지난 5월에는 미국의 저명역사학자들이 이 문제에 관한 의견과 제언을 발표했습니다. 무엇보다 주목 해야 할 것은 한·일 지원 단체들이 기존의 입장을 바꾼 일입니다.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공방은 ‘법적책임’, ‘국가배 상’이라는 두 단어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즉 지원 단체는 일본이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사죄도 보상도 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 20여 년 동안 말해 왔는데, 그 말의 의미는 ‘법적’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보상을 했지만 이른바 ‘도의적 보상’이었고, 그런 것이 아닌‘법적’ 보상을 하라는 것이 그간의 주장이었던 것입니다 (『제국의 위안부』 참조). 따라서 국회에서 ‘입법’ 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지원 단체가, 그런 주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 그런 입법을 하지 않는 방식이라도 좋다고 입장을 바꾼 것입니다 (2015/4/23 <한겨레> 당일 동영상 참조).

이 모두가, 이 20여년의 동향, 그리고2007년에 미국하원이 국회결의를 통해 일본에 사죄를 요구한 이후 세계가 그에 동조했던 이 8년간의 동향에 비추어 괄목할 만한 변화입니다. 그동안 지원 단체와 관련연구자들이 ‘법적 책임’을 주장해 온 근거는 위안부 문제 발생 초기에 여러 가지 이유로 ‘군인이 강제로 끌어간 것’으로 이해되면서, ‘국가배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고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조금씩 처음의 이해와는 다른 연구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의 변화는 ‘공적으로’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인 위안부 의 존재, 업자의 존재, 인신매매 등이 공식적으로 공표되고 논의된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그 단어가 의미하던 ‘강제연행’과는 다른 상황이라는 것이 알려진 이후에는 그런 인식의 변화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 이번에는 일본군이 인신매매를 알고도 받아들였다거나, 알고도 인신매매업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는 뜻으로 ‘강제연행’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관한 일본의 ‘국가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현재의 상황입니다.

위안부 관련 지원 단체들은 더 이상 한반도에서의 강제연행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식민지통치’하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식의 강제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고발장)

실은 이점이 바로 제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말한 내용입니다. 아무리 식민지 라도 ‘법’에 위반하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법적으로 용인된 사상범 단속 외에는 식민지이기에 오히려 조심스럽게 통치해야 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공적으로’ 공표되는 일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역사학자등 관계자들은 ‘군대가 알고도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이하의 자료는 그런 인식이 꼭 옳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9월 들어, 업자들이 위안부의 숫자감소를 이유로 충원을 신청했기 때문에, 지부는 허가했다. 10월, 경한선을 경유해 두 조선인의 인솔 하에 30여명의 여자들이 조선에서 도착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수단으로 모집했는지 지부가 알 수는 없었으나 그 중 한 여자가 육군 장교의 집회소인 가이코샤에 취직한다는 약속을 하고 왔는데 위안부일 줄은 몰랐다고 울면서 취업을 거부했다. 지부장은 업자가 그 여자한테 일을 시키지 못하도록 하고, 적절한 다른 곳에 취직시키라고 명령했다. 아마도 소개업자 같은 사람들이 속임수를 써서 모집한 것일 터였다. (『漢口慰安所』, 221쪽)

무엇보다 이들 중에 일본인도 있다고 생각하면 군인들이 폭력적일 수 있어도 불법적인 행위를 쉽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예외가 있었을 수 있지만 그것이 ‘국가방침’이었는지 여부가 ‘불법’여부를 판단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수많은 오해는, ‘일본군과 조선 등 타국여성’의 관계구도 로 이해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물론 지원자들은 일본인 위안부존재에 대해서 도 알고 있었지만, 오래도록 일본인위안부를 조선인여성과는 다른 존재로 취급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일본인은 매춘부, 조선인은 소녀’라는 이해가 존재했습니다.

최근에야 일본에서 일본인위안부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서가 나왔는데, 이들은 이제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공창업자뿐 아니라 민간인도 다수 여성의 매매와 사기적 알선에 관계했다는 걸 알았다”, “전쟁이 나기 이전부터 여성을 인신매매 나 사기로 매춘으로 몰아넣는 업자가 실로 많이 존재했”다(西野瑠美子, 『日本 人慰安婦ー愛国心と人身売買と』, 260쪽, 2015)고 말합니다. 또 이 책의 띠지 에는“매춘부면 피해자가 아닌가?”, “간과되어온 일본인위안부의 피해를 묻는 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말하자면, 위안부조달의 기본구조가 ‘강제연행’이 아니라 ‘인신매매’를 통한 것이었고 이른바 ‘매춘부’도 위안부 시스템 속에 있었다는 것을 이제 지원 단체도 말하는 단계에 온 것입니다.

실은 일제 강점기의 한반도에는 일본인이 수십만 명 살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들 중에 위안부로 나간 이도 있었습니다. 가와다 후미코가 쓴 ‘빨간 기와집’에는 부산으로 모집된 여성들 중에 ‘일본 여자도 두 명 섞여 있었다’고 하는 기술이 보입니다. 더구나 조선의 서울이나 북한위안소 앞에 군인들이 늘어서 있는 풍경을 묘사한 글은 적지 않습니다.(가지야마 도시유키, 고토 메이세이 등). 따라서 더 이상, 위안소에 관한 기존인식만으로는 더 이상 위안소를 말한 것이 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위안부 제도를 지탱하는 시스템이 ‘인신매매’였다는 사실은, 기존의 인식-‘강 제로 끌려간 어린 소녀’라는 인식에 담긴 연행주체와 정황에 대한 재이해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직 1990년대 초기에 정착된 ‘강제로 끌려간 위안부’의 이미지가 지배적입니다. 그리고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은 ‘강제연행’인식이 아직 (공적으로는)지배적이던 시기의 상입니다. 2011년 겨울 처음으로 소녀상이 세워진 이후로 서울 이외의 여러 곳, 그리고 미국에까지 세워지게 되었고 해방 70년을 맞아 금년에는 전국적인 추세로 소녀상 건립이 추진되고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는 이 소녀상의 의미도 재고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소녀상이 여전히 기존의 인식인 ‘강제연행’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시마저 광화문이나 시청에 소녀상을 세우겠다고 발표한 바 있는데, 정말 세운다면 위안부의 보다 근원적인 본질—가부장제치하에서 국가의 세력 확장에, 개인의 성을 동원당한 여성들이라는 보편적 의미를 담아야 할 것입니다.

2.‘세계의 생각’과 이해의 편향

그런데 지난 5월초에 미국의 역자학자들이 일본정부에 보낸 공개서한은 이들의 인식이 한국이나 지원 단체의 표면화된 인식과는 다소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자세히는 오늘 자료집에 수록된 내용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만, 이들의 서한은 일본정부와 국민이 대체적으로 납득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비판/비난이 아니라, 설득/권고 논조입니다. 충분히 논의되고 고심한 흔적이 뚜렷한, 결과적으로 섬세하고 합리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성명에서 ‘인신매매’, ‘성매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미국학자들도 더 이상 한국이나 지원 단체가 주장하는‘강제연행’을 말하지 않습니다. 아베수상이 인신매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면서 한국은 비난했지만, 그 인식은 이미 아베 수상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역사학자들 의 성명이나 일본 지원 단체의 책이 그렇듯, 이들의 ‘인신매매’라는 이해는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들은 이 성명이 한국/중국을 비판했다는 사실을 전하지 않았고, 마치 그간의 한국의 주장을 지지한 서한인 것처럼 보도했습니다. 이는 오랫동안 이어져온 한국 언론의 편견과 태만에—직접 취재하지 않거나 번역하지 않는—기인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런 식의 편향적 태도는 위안부 문제가 오래 이어지면서 지원 단체를 중심으로 한 인식만이 너무나 깊이 확산되고 정착된 결과입니다.

반대로, 일본 언론에는 커다랗게 보도된 베트남 한국군위안소 보도는 한국에 는 거의 보도되지 않거나 뒤늦게야 알려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런 식의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정보의 차단과 왜곡이, 한국에서는 이 20년 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미국학자에 이어 5월말에는 일본역사학자들의 성명도 발표되었습니다, 하지 만 여기엔 미국학자들의 성의를 다한 성명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들의 성명 내용은 일본 정부와 이 문제에 회의적인 일본 국민들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인 내용이었습니다. 내용이 틀려서라기보다 는, 해야 할 이야기의 반 밖에 없는 성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본 신문 중에 이 성명을 보도한 곳이 <아사히신문>과 <도쿄신문>뿐이라는 사실이 그런 정황을 설명해 줍니다.

이 성명에 대해 침묵한 일본 언론들 중에는 위안부 문제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 하는 언론도 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대신 이들의 주장 성명 발표 직후에 일본인터넷에서는 이들에 대한 비판과 야유가 들끓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갖게 된 인식을 이 성명이 담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그런 언론과 국민들에 대한 이해가 없는 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언론들은 이 성명이 일본을 대표하는 것처럼 대서특필했고 참여인원이 얼마나 많은지만 강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도 회원인데 학회 가 자신에게는 의견을 묻지 않았고, 앞으로도 참여할 생각이 없다고 페이스북에 쓴 일본인학자의 존재는, 그러한 접근의 문제점을 보여줍니다.

일본인 학자들의 성명은, ‘본인의 의사에 반한’ ‘연행’도 ‘강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군인에 의한 직접 연행’을 ‘강제연행’이라고 말해왔던 기존인식 과의 차이에 대한 설명은 여전히 없었습니다. 공식적인 설명을 하지 않기 때문에, 주요논점의 내용을 설명 없이 바꾼다는 식의 야유를 샀던 것입니다.

또 ‘본인의 의사에 반한 연행’의 주체를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설사 군인이었다 해도 그런 케이스가 오히려 소수이고 그렇게 간 경우도 군이 돌려보내거나 다른 곳에 취직시킨 경우도 있다는 사실, 즉 ‘본인의 의사에 반해’ 가게 된 것까지 국가나 군의 공식정책이나 방침이 아니었다는 것, 즉 어느 쪽이 예외적인 일이었는지도 말해야 공정할 것입니다. 업자가 인신매매했을 경우 군이 어디까 지 관여할 수 있었는지도, 비판이든 옹호든 명확하게 그 구조를 언급해야 오해를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신매매의 주체가 일본인 것처럼 오해하게 되고 결국 언제까지고 정확치 않은 비판과 일본정부가 경직되는 일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성명은 위안부를 ‘성노예’라고 규정했습니다. 물론 위안부에 ‘성노예’적 인 측면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성매매적인 측면이 있다 해도 불공정한 차별구조가 있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노예적’인 구조를 지적하는 일과 ‘성노예’라고 말하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듣는 이들이 떠올리는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에, 결국 일반인들의 이해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습니다. 성노예였다고 한다면 그들의 직접 ‘주인’이 업자였고 강제노동을 시킨 것도 이윤을 얻은 것도 업자였다는 사실도 말했어야 총체적인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청업자보다 일감을 준 이를 비판하는 일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이름만으로 비판할 경우에는 뒤에서 언급할 여러 가지 모순이 생깁니다. 그런 모순을 무시한 것이 그간의 지원 단체 혹은 지원자들이 반발을 산 이유입니다.

성명은 위안부 문제가 “당시의 국내법 및 국제법에 반하는 중대한 인권 침해였 다”고 했지만 이는 ‘강제연행’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인신매매와 이송에 관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부분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인신매매’임을 공적으로 말하는 경우 지원 단체와 연구자들이 그간 주장해온 내용은,

1. “인신매매임을 알고도 받아들였으면 불법”

2. “일본에서는 매춘업에 종사하는 여성이라도21세 이하는 도항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조선에서는 21세 이하도 가능하도록 해서 어린 소녀들을 위안부로 동원 가능하도록 했다”

3. “일본에서는 취업사기나 인신매매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법적규제 가 존재했는데 식민지에서는 그렇지 않아 사기나 인신매매가 쉽게 이루어지 도록 했다”

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본 것처럼 이 주장들엔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또한 ‘조선반도의 일본인여성’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탓에 일본-내지와 조선에 서의 모집방법에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전제한 결론으로 판단됩니다.

중요한 건 일본이건 한국이건 지원 단체나 역사학자들은 조선인 위안부에 관해서는 더 이상 “강제연행”이 아니라 ‘인신매매’를 바탕으로 이런저런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지원 단체는 그렇다는 사실을 오래도록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아, 국민의 다수가 여전히 군인이 강제연행 한 것으로 생각하거나 소수만 속임수나 인신매매였다고 생각하는 식의 인식편차와 그에 따른 혼란을 낳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외국에서는 그 의미하는 바를 달리 하는 ‘강제연행’설을 주장했고 그에 따라 한일국민간의 갈등은 커졌습니다. 그리고 설사 위안부 문제가 해결된다 해도 한일 간 앙금은 쉽게 풀어지지 않을 상황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된 원인을 한일이 함께 생각해야 하고 그런 상황을 전제로 해서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일본 지원 단체의 용어사용 변화에도 주목해야 하고, 왜 일본에서 호응을 얻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도 종합적으로 생각하고 다른 틀로 접근하지 않으면 위안부 문제 해결은 요원합니다.

3.역사와 마주하는 방식

1) 지적 태만으로부터의 탈피

그러나 그런 문제의식을 담은 저의 책은 고발을 당했고 결국 일부를 삭제 출간하는 사태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국의 위안부』 및 저의 다른 책들은 ‘친일’의 의구심 속에 이 일 년을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친일’이라는 딱지는 익숙하지 않은 생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는 지적 태만을 드러내는 사고의 표현입니다. 복잡하고 섬세한 문제들을 단순하고 거칠게 풀어 결과적으로 폭력을 만드는 사고로 이어집니다. 무엇보다 그런 딱지를 두려워해 침묵하거나 딱지를 붙이는 쪽으로 돌아서고 마는, 전체주 의에 가담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에 저항하지 않는 한 모두가 대세와 다른 말을 하지 못하는 자폐적 공간은 확장되고 사고가 자유로워야 할 젊은 학생들조차 자기검열에 급급한 상황은 이미 익숙한 풍경입니다.

그런 지적태만은, 지원 단체 등이 중심주체가 된 일본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을 허용했고, 결과적으로 한국사회에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만드는 데에 일조했습니다. 특히 정대협을 비롯한 피해자관련 혹은 영토문제 관련단체 들은 위안부 문제에 관해 언급할 때마다 일본을 군국주의국가로서 비난해왔고 그 결과, 2015년 현재, 한국인의 70퍼센트 이상이 일본을 군국주의 국가로 생각합니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지나도록 사죄와 반성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전히 타국의 영토를 호시탐탐 노리는 국가라는 이미지를 갖도록 만든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인식이 불식되지 않는 한 한일 간의 화해는 어려울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과정의 결과로, 2015년 현재의 언론과 외교와 지원운동이 지극히 자폐적인 상황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현재의 일본에서는 위안부를 위한 ‘아시아여성기금’ 의 모금에 참여하는 이들의 존재를 더 이상 상상하기 힘들만큼 일본의 국민감정이 악화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 도 아직 우리의 언론과 외교와 운동은 여전히 일본의 혐한파를 늘릴 수밖에 없는 사고와 주장만을 반복 중입니다. 위안부 문제를 생각하는 일은, 늦었지만 이러한 현 상황을 파악하고 일본을 총체적으로 아는 일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2) ‘폭력의 사고’를 지양하기

중요한 것은 그런 지적태만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보는 일입니다. 사실, 현재의 한국의 일본관은 순수한 일본관이라기보다 위안부 문제가 그런 것처럼 일본의 진보/이른바 양심적 시민/지식인/운동가들의 전후/현대 일본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전후일본의 반성과 협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했던 불신의 태도가 이들의 .자국에 대한 반성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의 자국비판은 정권 획득—즉 정치와 이어져 있고 옳고 그르고를 떠나 일본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국가’를 상대해야 하는 한일 간 문제에서, 90년대 이후, 진보나 보수의 반쪽 자국관에 근거해 일본을 이해해 왔다는 것은 그 인식의 옳고 그르고를 떠나 한국의 대일인식이 절름발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요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80년대 후반까지 한국은 반공국가였고 그 기간 동안철저하게 탄압받아온 진보좌파가 한일시민교류의 주역이 되었다는 것이 이러한 대일인식의 배경에 있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현대일본의 정치에 비판적이었던 이들이 여야합 작의 사죄 보상방식이었던 ‘아시아여성기금’을 불신하고 배척했고, 한국 지원 단체가 이에 동조함에 따라 결국 90년대의 일본의 사죄와 보상은 완수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15년 후, 우리는 지금 일본 언론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보도조차 하지 않는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철저한 ‘정의’를 말하고 일본규탄의 선두에 섰던, 일부 재일교포를 포함한 일본 진보의 사고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한번쯤은 볼 필요가 있습니 다.

재일교포 일부와 일부 진보세력의 일본에 대한 시선은 대단히 부정적입니다. 그들은 전후 일본이 실은 계속된 식민지주의를 이어받은 공간이었다고 말합니 다. 그렇게 부정하는 근거는 천황제 유지, 재일교포 차별, 일본인을 납치한 북한 때리기 등입니다. 분명, 그들이 말하는 대로전후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고 식민지를 만든 천황제를 청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현대일본이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이 청산되기는커녕 재일교포를 포함한 혐한스피치가 문제시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것만 본다면 이들의 전후관이 옳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논리라면, 천황제가 폐지되지 않는 한 한일 간의 화해는 불가능하다 는 결론이 나옵니다. 국민간의 화해-감정적인 신뢰회복 문제를, 천황이라는 시스템문제로 환치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국민들 간의 화해가 천황의 존재여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케 하는 지극히 가부장적인 사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설사 현 천황이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다 해도 국민들이 그에 따라 불신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되면 소수 정치가의 생각에 모든 국민이 휘둘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간의 한일 갈등은 바로 이러한 생각에 바탕 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한 두 명이 식민지 지배 사죄에 부정적인 말을 하면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나라전체가 대립하는 소모적인 정황이 반복되어 왔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천황제 유지는 실은 일본의 전쟁금지헌법9조와 맞바꾸어진 것입니다.(小関)

그러나 전후 일본에 대한 불신을 담아 한 재일교포학자는 일본사회에 가장

비판적인 일본의 진보지식인들조차 비판하고 일본을 전부정합니다. 일부재일교 포의 인식이 한겨레 독자들에게 공유되고 전파되면서 일본에 대한 불신을 심고, 전후일본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전달하려 한‘화해를 위해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확산된 것은, 그런 식의 일본불신의 확산과 궤를 같이 합니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한국의 일본관은 일본의 재일교포에 의해 만들어진 부분이 큽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① 지배-가부장적 사고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지만, ‘화해를 위해서’가 비판받게 된 것은 제가 재일교포의 가부장제비판을 한 이후부터입니다. 그리고 이후 한국에서도 『제국 의 위안부 비판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 위안부 문제연구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남성학자였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일정치의 주역은 체제의 중심에 있어 왔던 그들—남성들이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제국 의 위안부나 『화해를 위해서』는 아버지와 오빠의 허락을 얻지 않고 일본과 연애를 시작한 누이이자 딸 같은 존재입니다. 이들의 분노는 자신들의 지휘권을 벗어난 여성에 대한 분노입니다.

물론, 위안부의 연애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화해를 위해서’를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이라고 규정하고 마치 국가야합주의이 거나 위험한 스파이의 시도로 간주하도록 만드는 시선은 다름 아닌 가부장적 시선입니다. 그 책들이 ‘민족’의 것으로 지켜져야 하는 소녀이미지를, 혹은 어머니의 이미지를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고발은 반대한다’면서도 침묵하는 일로 고발에 동조한 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매춘’, ‘동지’라는 단어를 그들이 특별히 불편해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반체제를 표방하는 진보세 력이 ‘국가의 힘’을 빌어 처벌하려 하는 모순이 일어나는 이유도 그런 심리기제의 결과입니다. 한 지방시장이 저를 수천 명의 군중에게 ‘친일파’라는 딱지를 붙여 먹잇감으로 던져주고 난도질 하는 일이 발생한 것도 마찬가지 구도 속의 일입니 다.

소녀에 대한 집착은 가부장제적 한국사회의순결성에 대한 욕망을 말해 줍니 다. 또한 매춘에 대한 차별의식을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소녀상을 통해 지켜지는 것은 위안부가 아니라 ‘한국인’의 순결성 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인’의 긍지를 위한 것입니다. 지배당했던 자신—유린되었던 자신을 소거시키고 싶은 욕망의 발로입니다. 즉 한 번도 강간당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상상이 소녀상을 욕망케 하는 것입니다. 가부장제적 의식은 자신의 순결성과 순혈성을 상정하고 ‘한국’이라는 고유명 을 움직이지 않는 아이덴티티로 호명합니다. 그건 ‘일본’ 에 대적할 아이덴티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사고가 주도적인 상황에서는 국제결혼 한 이들은 목소리를 낼 수가 없습니다. 혼혈인들은 목소리를 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근대국가는 그런 순혈주의에 근거하여 가부장제를 지탱하고 소수자를 소외시켜 왔습니다. ‘일본인’, ‘한국인’의 순수성을 벗어나는 아이덴티티를, 잡종으로 취급하고 변방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중앙중심주의를 지탱하

고 내셔널 아이덴티티를 재생산해 왔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의식은 천황제를 신봉하는 일본우파와 같은 의식이라는 점입니

다. 비판자들이 곧잘 ‘싫으면 떠나라!’라고 말하는 의식은 그런 의식의 발로입니 다. 그들에겐 하나의 공동체는 균질한 공동체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일본에서 재일교포를 소외시키는 사고와 동일한, ‘혐한스피치’와 다를 바 없는 폭력적 사고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고는 가부장제적 지배의식이 만듭니다.

② 공포-면죄/의심

다른 모습들을 보려하는 시도가 그저 일본의 책임을 희석시키는 ‘물 타기’로 규탄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성’의 문제인 한 그 첫 번째 책임은 ‘남성’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고유명에만 책임을 집중시키 는 방식은 계급과 젠더책임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가부장제적 사고를 가진 이들이 민중과 국가의 힘을 빌려 탄압에 나섰던 것은 그런 구조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런 행위는, 민간인과 국가에 의해 자신의 삶을 빼앗기고 그저 일본인남 성의 비호라도 있어야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위안부에 대한 남성/국가의 거부감과 궤를 같이 합니다.

업자나 남성의 책임을 부정하고 ‘구조적인 악과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서경식, 104)라고 간주하는 발언은 일본-거대악, 조선-소악으 로 간주하는 일로 ‘소악’을 면죄합니다. 다른 책임을 보는 일이 ‘일본을 면죄’한다 는 생각은, 그렇게 다른 책임—소악의 책임을 은폐합니다. 그렇게 책임주체를 고정시켜 ‘피해자’라는 이름의 ‘무책임체계’를 만듭니다.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한 남성학자들이 한결같이 ‘위험’하다는 표현을 썼던 것은 그런 의식의 발로입니다. 그 때문에, 이 책이 순수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의도가 있고 그를 위한 치밀한 전략에 의거해 쓰인 것이라는 식의 주장을 하게 됩니다. 반복적으로 『제국의 위안부』나 『화해를 위해서』의 기술이 ‘레토릭’, ‘전략’이 담긴 표현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도 공동체의 규범을 어긴자로 보이도록 하는 배제전략입니다.

③ 저항이라는 이름의 폭력

문제는 이러한 사고가 폭력을 지탱하는 구조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한 재일교포는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는 나머지, 9/11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이는 태도까지 취합니다.(서경식, 『언어의 감옥에서』) 말하자면 그자신이 부당하다 고 생각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저항이라는 명목으로 폭력을 용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용인되는 한 세상에서 폭력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일본 전후에 대한, ‘이어지는 식민지주의’라는 이름의 불신은 결국 ‘저항’이라는 이름의 ‘이어지는 폭력주의’를 생산합니다.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저항처럼 보인 비판과 고발이, 국가를 동원한 폭력에 그치지 않고, 군중들의 적개심이라는 폭력을 불러일으키려 했던 것도 그 연장선상의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저항’이라는 기제를 용인케 했던 ‘서벌턴’의 의미도 다시 재고되어야 합니다. 피해자의식은 하층계급은 고정되어 있지 않은데도 고정된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고, ‘저항’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허용합니다. 일본에 대한 무차별적/폭력적인 발언이 허용되는 것도 그런 구조 속의 일입니다. 이제 피해자 도 강자가 될 수 있다는 점, 서벌턴의 위치성도 전도될 수 있다는 점도 인식되어야 합니다.

하나의 고유명에 의거해 민족/국가 대립을 강조하는 일로 여성들에 대한 착취를 덮고 ‘민족’의 딸이 되기를 요구하는 가부장적 담론—지배와 저항과 공포의 담론은 폭력을 막지 못합니다. 혼혈과 변방의 사고를 억압하고 모두가 똑같은 ‘일본인’, 혹은 ‘한국인’이 되어 대립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틀에서 벗어나는 시도에 대해서는 마녀사냥적인 배제를 촉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역사를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총체적으로 기억해야 합니 다.

‘예외/단편/파편’등의 단어로 존재한 기억을 소수화하고 억압하지 않아야 합니다. 차별과 억압이 중심인 공간에서의 ‘다른’ 기억은 대세에 저항했다는 의미에서 오히려 기억해야 하고 이어받아야 할 하나의 ‘정신’입니다.

동시에, 중심적인 다수의 체험도 기억되어야 합니다. ‘아시아여성기금의 기금 의 망각’은 기억의 소거입니다. 한국인에게 사죄했던 이들을, 그들이 ‘국가’를 대변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그들의 마음을 역사에서 배제한 폭력입니다. 그 결과로 일본인의 다수의 선한 마음은한국인의 기억에서 무시되고 소거되었습니 다. 그들은 ‘아직 전쟁을 기억하던 이들이 많았던 시대의 중심기억’이기도 했습니 다. 그들이야 말로 ‘전후일본’을 대표하는 이들이었고 그것이 바로, 그들이 기억되어야할 이유입니다. 최근 십여 년의 혐한은 더 젊은 층이 중심입니다. 전쟁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의 기억보다 전쟁과 지배를 기억하는 이들의 기억이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선택적인 기억을 강요하거나 은폐하는 ‘기억의 정치학’을 넘어서서, 있는 그대로의 과거와 마주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해든 협력이든, 봉인된 기억을 보는 일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시도야 말로 오히려 과거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보다 명확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이덴티티는 하나가 아니고, 동시에 용서와 비판의 대상을 보다 구체화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거부는, 우리를 언제까지고 트라우마를 안은 허약한 자아로 살아가도록 만듭니다.

한일협정 50년, 해방 70년을 맞는 금년, 더 늦기 전에, 한일이 함께하는 그런 새로운 시작이 필요합니다.

출처: 동아시아 화해와 평화의 목소리 심포지엄 – 역사를 마주하는 방식
일시: 2015년 6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