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와 폭력–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한일합방 36년이라고 하지만, 일본이 이 땅에서 본격적인 권력을 누리기 시작한 것은 이미 청일전쟁때 부터였다. 그리고, 청일전쟁에서의 전쟁터는 일본도 아니고 중국전체도 아니고, 중국의 극히 일부와 조선땅이었다. 민비암살이라는 끔찍한 폭력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그런 유린의 연장선상의 일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민비가 암살당했을 때、일본언론은 그 사실을 충격이 아니라 당연한 일처럼 보도했다. 심지어 훗날 일본의 문호로 추앙받게 되는 26살청년, 나쓰메 소세키조차 “최근에 가장 고마웠던 일은 왕비 살해…”라고 친구 마사오카 시키에게 감상을 적어 보낸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일본인들이 원래부터 냉혈한이기 때문일까.

일본언론은 일찍부터 민비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도했다. 질투많고 권력욕 강한 악녀. 그것이 민비에 관한 보도들이 만들어내 일본인 안에 심어놓은 이미지였다. (<암살이라는 스캔들>.나이토 치즈코)
젊은 엘리트로 하여금 자신이 무엇을 한건지 모르도록 만든 것은 그런 식의 편향적 보도들이었다. 또 훗날 일본군이 중국 전쟁터에서 중국인을 대상으로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도록 만든 것도, 편견을 바탕으로 교육되고 확산된 차별의식이었다.
폭력행사는,타자를 고통을 모르는 물건으로 봐야 가능한 일이다. 미움과 차별은, 때로 그 필수조건이 된다.

어제 한국정부가 구마모토에 뒤늦게 구호물자를 보냈다고 한다. 또 위안부할머니의 성금을 둘러싸고 찬반이 격렬한 듯 하다. 뒤늦은 대응과 기부에조차 차갑게 닫힌 2016년 대한민국의 심성에 대해서 일부언론이 비판적인 칼럼을 내놓았지만, 그런 신문들조차 “일본에 대한 미움”은 당연한 듯 전제된다.
그리고 미움의 크기는 늘 위안부문제에서 가장 크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대하는 파렴치한 태도, 과거의 잘못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뻔뻔스러움”(2016/4/21.국민일보)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90년대 들어 시작된 위안부문제해결운동은, “파렴치한” 일본상, 그리고 이제 악마같은 일본상 구축에 성공했다. 미운 건 일본이 아니라 일본정부라고 뒤늦게 말해본 들, 이대로 가면 일본과 전쟁을 한다 해도 기꺼이 참여할 피끓는 청년들과, 그들을 등두드려 내보낼 국민들이 대다수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현재의 북한이 그런 것처럼.

이 모두가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이 20여년의 보도–독자적인 조사도 관계자들에 대한 취재도 없이 그저, 지원단체가 주는보도자료들을 언론이 받아써 온 결과다.
물론 그런 보도들을 추인하거나 리드하기조차 했던 지식인들이나 전문가들의 책임 역시 작지는 않다 . 또 최근 몇 년동안 위안부문제를 어떻게 끔찍하게 형상화할지에 골몰하고 졸속공부에서 경쟁했던, 그림과 영상 제작자들 역시 책임이 없을 수는 없다.

대한민국 국민다수의 생각을 만드는데 일조한 이들이라면, 이미지와 지식의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일상속에서의 적대와 그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더 큰 폭력에 대한 책임의식을 뒤늦게라도 가져봤으면 좋겠다. 물론 수용하고 전달해 왔던 우리 모두도.
악마화 하지 않고도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니 악마화는 오히려 본질을 놓친다.
“뻔뻔한 일본””사죄않는 일본”이미지의 재생산 속에서 우리가 해 온 일은 고작,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며 죽었다는 이승복 소년을 소녀상으로 대치한 일 뿐이다.
어른들은 언제나,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이들을 이용한다.

우려되는 것은 사실 일본에 대한 몰이해가 아니다. 그 몰이해가 만든 미움이, 우리를 조금씩 냉담하게 만들고 있는 정황이다. 또 우리를 그렇게 편협하고 차가운 한국인으로만들어버리고 만 상황이다.
인간의 죽음에조차 쾌재를 부르는.
26 살 나쓰메소세키처럼.

일본인들을 돕는지 여부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2016년 봄, 대한민국은 대만과 달리 구마모토에 냉담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정황이, 20여년동안 남의 말에 결코 귀를 기울이는 법 없이, 양극단 사람들의 적대와 과장과 은폐에 휘둘린 결과라는 점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건 바로 그런 적대와 증오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은 그 증오를 누가 만든지도 모르는 채 먼저 희생된다. 불화 역시 마찬가지. 적대담론의 폭력성을 봐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추신)
재해때마다 화제가 되는 “일본인의 아름다운 모습”은 재해가 많아 체념적이 되어서도 아니고, 그저 어릴 때부터 방재훈련을 많이 받았기 때문만도 아니다.
일본어머니들이 자식에게 가장 많이 말한다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배려심이 몸에 밴 결과일 뿐이다.
긴급한 순간에 남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제어해야 가능하다. 자아보다 조화, 나의 욕망보다 타자의 평안에 가치를 두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5078217828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