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실,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사태를 바라보며

<제국의 위안부>를 읽은 것은 책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발터 벤야민과 기억의 정치학으로 석사 논문을 썼던 나에게 전쟁과 국가폭력, 생존자들의 목소리와 증언은 중요한 관심사였다. 논문 막바지에 이를 무렵, 뒤늦게 발견한 책들을 통해 피해/가해의 경계, 그리고 피해자들의 목소리와 기억이 단일한 것이 아니며 젠더가 그 비균질성의 핵심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나는 공부를 더 진전시키지 않았고 그 이후 떠난 인도 여행을 계기로 전공을 인류학으로 전환해버렸다.

영국에 와서 두번째 석사 논문을 쓰던 때, 내 주제는 재난과 불평등이었다. 지진이나 허리케인 같은 자연재난에서부터 내전등의 정치적, 사회적 위기의 순간 혹은 에볼라와 같은 질병에 이르기까지 ‘재난’ 이라고 불리는 많은 극단적 상황들은 우리가 안정적이라고 믿어왔던 사회의 질서를 정지시키거나 파괴하고 때로는 (다양한 목적에서의) 군사적, 인도적 개입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우리가 위기나 재난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상황이 사회적인 약자들 (특히 여성과 빈곤층)에게는 이미 상례였으며, 많은 경우 여성들은 중층의 고난에 직면한다. 많은 현장연구들은 재난상황이나 난민캠프 등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약자, 특히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착취의 문제를 지적하는데, 일례로 대지진 이후 아이티의 대피소에서는 구호물자로의 접근과 분배에 대한 통제력을 가진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성을 댓가로 요구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것은 여성에 남성에게 종속된 사회에서는(나는 지구상의 모든 사회가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들이 여성을 그저 ‘무력한 피해자’로만 위치짓는 것은 아니다. 여성들은 그 안에서도 갈등하고 협상하며 연대를 만들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혹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종종 울지 않을 수 없었지만, 또한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분노와 슬픔이 나와 그 여성들을 이어주고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오에 겐자부로가 대담에서 ‘낚시바늘에 걸려 버둥거리는 물고기의 고통’ 에 대해 말했을 때의 인상과 종종 겹쳐진다.

아감벤은 그의 책, <아우슈비츠의 잔여들>에서 바로 그러한 잔여들에 대해 말했다. 진정한 증인은 살아남은 이들이 아니라 바로 죽어간 자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죽은자도 산자도 되지 못했던 ‘무젤만들’ 혹은 자신의 고통을 표현할 언어조차 갖지 못해 의미없는 소리들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던 어린아이, 후르비넥이라고 말한다. 그 고통은 ‘홀로코스트 산업’ 이라고 불릴 정도로 거대화된 추모의 형식 속에서가 아니라, 미국의 유대뮤지엄에서조차 추모의 자리를 얻지 못했던 소수자들, 국가없는 이들의 존재를 통해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침묵’의 형식을 통해 들려온다.

나는 이런 논의가 과거와 현재의 고통을 대하는 아주 ‘상식적’ 인 태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 이라는 단어는 종종 모든 것을 삼킨다. 박유하 교수의 책을 ‘안읽어봐도 뻔하다’ 며 비난하는 이들의 말들에, 과거사를 사과하라며 다짜고자 식사자리에서 일본 여학생들에게 소리를 질렀다는 한 한국 남성 유학생에게(같은 기숙사엔 일본 남학생들도 살고 있는데 왜 그는 여학생들에게만 그런 짓을 했을까),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간 무고한 소녀들’ 에 관해서만 말하는 언론에, 그리고 박유하 교수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욕설을 퍼부었던 이들에게, 다시 한번 깊은 분노를 느꼈다.

나는 운이 좋게도 공부하고 여행했던 여러 나라들에서 좋은 일본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 중에는 조심스럽게 한국인들은 일본을 싫어하느냐고 묻는 이도 있었는데, 몇 해 전의 나는 그 친구에게 내가 한국에서 배웠던 대로 “위안부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들이었다고!” 라고 말했었다. 나는 그 문장을 여전히 몹시 부끄러워하며 마음에 품고 있다. 그들 또한 내가 그러했듯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과거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친구가 된 이후, 우리는 오에의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오키나와 뉴스를 찾아본다. 또한 그 일본 친구들은 나에게 ‘일본제국’의 군인으로 죽어야했던 조선인 병사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내주고 히로시마 평화공원의 조선인 원폭 희생자들의 추모비를 ‘굳이’ 찾아가 애도를 표한다.

영국에 와서 배운 ‘최상의 것’은 그런 신뢰였다. 심지어 같은 전공 안에서도 입장은 천차만별이고 출신 국가도 문화도 다른 이들은 종종 논쟁이란 이름으로 부딪혔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우리가 대화할 수 있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선의를 의심하지 않고 악의를 과장하지 않아야 시작할 수 있다는 것, 이런 누구나 동의하는 전제들이 있었다. 안봐도 뻔한 것이 아니라, 낯설고 불편해도 듣고 질문하고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안타깝게도 나는 이 문제에 ‘지나치게’ 열정적인 이들이 박유하 교수가 연구를 계속하면서, 일본인/한국인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쌓아온 경험과 시간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제 처음으로(어쩌면 당분간은 마지막일지도 모를) 박유하 교수의 세미나에 다녀왔다. 전공은 다르지만, 나 역시 어디에서건 들리지 않은 목소리들을 들으려, 여성들의 말을 기록하려 애쓸 것이다. 남성들이, 국가가 원하는 서사가 아닌 우리들의 말, 우리들의 이야기를.

지난해 노벨상을 수상한 알렉시예비치의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는 전쟁을 경험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나온다. 자신이 얼마나 예뻤는지 혹은 무서웠는지를 말하는 여성에게 그녀의 남편은 “내가 당신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얘기해. 얘기하다 또 울지 말고. 예쁘고 싶었다느니, 긴 머리를 자르고 엉엉 울었다느니, 그런 쓸데없는 여자들 얘기는 제발 좀 하지 마.” 라고 말한다. 이런 상황을 알렉시예비치는 “나는 기념비들만 가득한 과거의 사막에 뚝 떨어지곤 했다.” 고 묘사한다. 나는 기념비들만 가득한 사막에서 ‘여자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 페이스북에 글을 거의 쓰지 않지만 이렇게 쓴 건, 박유하 선생님께 건강하시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후속 연구들을 보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이 폭풍이 지나간 이후가 되겠지요. 여튼,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