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나란, 어려운 책이 아니다, 외.

정나란

https://www.facebook.com/jungnaran?fref=ts

 

2월 15일 포스트

내 페친들 중 이런 실수를 하는 분들이 없길 바란다. 어제 오늘 헛물켜는 포스팅을 본다. 특히 모욕적인 댓글들. 이제부터 숨을 고르면서 쓰려 노력은 하겠다.

‘제국의 위안부’ 비판하기 위해서 내용을 살피고 포스팅을 하든 말든 해야 할 것 아닌가. 어떤 문제를 비판할 때 내용을 덮어두고 볼 필요도 없이 이건 아니지 식은 비판도 아니고 자기 말도 아니다. 사안이 무엇이든 어떤 문제를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지 않고 말하는 것은 거듭되어온 낡은 담론에 손을 담그고 편리한 정치적 논리적인 입장을 게으르게 취하고 자기 말인것처럼 하나 집어들고 당위성을 획득했다는 착각 안정감으로 과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닌가. 기사 퍼나르는게 편의점에서 왕뚜껑과 신라면 고르는 것과는 달라야 하지 않나.

끼리끼리 포스팅 담그늘 아래 모여서 양아치 짓들 하는 어른들을 본다. 양아치라 함은 남녀를 안 가린다. 위안부문제 관련 기사에 광분하여 또 한명의 여성을 향해 쏟아내는 비난이 성차별적 발언으로 과도하게 몰리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 아마도 성적 컴플렉스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언론이 정신나가게 욕하면서 씹으라고 그러면서 또렷이 지켜보기 같은 건 개나 줘버리라고 던져주는 밑밥들에 정신없이 주둥이를 담그는, 시궁창에 자신의 입을 주저없이 적시는 당신들 보면 언어와 정신의 생태계가 너무 여실히 보인다.
윤리문제를 떠나 내가 쌍욕을 해댈 수 있는 사람은 간혹 나 자신을 향해서이다. 특히 신체와 성정체성을 건드는 욕들은 모두 고소해버리고 싶다. 내가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윤리문제를 떠나 절대 나 아닌 타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그걸 잊으면 양아치가 된다.
욕은 꾸욱 참고 속으로도 하지 않겠다.

 

2월 16일 포스트

학교에서 공유만 했었다. 나는 이제 의견을 말하고 싶지 않다. 어제 오늘 확인 한 것은 반일 감정은 학살자 전두환이나 이명박 박근혜를 향한 것보다 더 하다는 것. 우리는 언제부터 괴물이 된 걸까. 학자가 주장하는 말들이 논란이 될만하다 ‘설령’ 100프로 잘못 된 주장이다 철회를 요구해야 한다 하더라도 그래서 한 사람을 말로 다 짓이기고 죽일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운전하고 집에 오는데 제국의 위안부 법정에서 광장으로 모임까지 공격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 프랑스나 덴마크와 유럽 국가에서 반이슬람주의자 이슬람 원리주의자들 간의 다툼이 있다면 우리안에도 그런 성역을 두고 다툼이 생기고 있구나 했다. 지역 감정 전라도 홍어 그런 자극적 싸움보다 더 삽시간에 분노 하고 한 사람을 공적으로 만들어 죽어 마땅한 자리로 내치는 (정말 저자의 신변 안전까지 걱정이 되는) 그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바로 위안부 문제 이다.
그녀들의 고통을, 삶을 되살리고 추모하고 애도하고 평화를 기원하고 삶으로 껴안으려는 것인지 후대들이 빼앗기고 더럽혀진 처녀 어머니에 대한 컴플렉스로 발악 하는 것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어제도 말했듯이 위안부를 감싸고 옹호하는 것 같은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해선 손도 못 대게 바르르 떨면서 한 여자를 말로 욕보이고 무참히 짓밟는 것을 집단적으로 해대는 것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설명을 안 하기로 하고서 이렇게 주저리 하는건 정말 두려워서이다. 총은 없지만 우리는 이미 서로를 여러 번 죽였다.

 

2월 19일 포스트

<제국의 위안부는 어려운 책이 아니다. 이웃사람 카더라 통신>
반지성주의 비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건 실은 나한테 해야 할 말인데’ 라고 한편으론 입술을 핥는다. 그런데도 나 같은 사람이 전달하는 이야기 (제국의 위안부 고발사태)에 위안부 할머니는 너무 불쌍하고 참담한 역사의 증언자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어느 정도 책 내용에 동감하고 이해할 정도라면 책이 촉발하는 의혹과 그럴 수 있는 점 등을 들어 뉴라이트 비스무리 결국 친일로만 몰아 붙이는 건 안이하게 **스럽지 않나.

반지성주의라는 말을 듣거나 책을 읽으라는 말을 할 때 불편한 건 그게 어떤 일정 수준 이상의 학력이나 지식, 문해력을 요한다는 말로 들려서이다. 오히려 머리에 짜여진 틀이 많아서 걸리는 게 많고 나머지는 일반 정서에 걸리는 거겠지. 근데 그 너무 가슴 아파서 할머니들에게 너무 하지 않냐 되묻는 사람들과는 차근차근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는 어떤 희망을 가져본다. 왜냐면 그들은 가슴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인데 지금 그들의 가슴이 ‘너무 참담하고 불쌍한 어린 소녀들’로 엉엉 우는데 자꾸 사실관계를 논리로 들이미는 건 일단 가혹하다. 동감하지만 그걸 부정하는 게 아냐. 오히려 이 문제는 양쪽이 대표적인 사례를 서로 유리한 쪽으로 들어서 절대 이해 할 수 없는 극단으로 가고 있는데 일단 그걸 내려놓고 이야기 해보자고 하는 친절한 설명은 귀를 기울이게 한다. 이런 표현을 과감하게 쓰자면 가슴대 가슴. (매우 쉬운 긴 글이 될 싹이 보인다. 그러나 구구절절 소심하게 쓰는 이야기도 있어야 하는 것 같다. 그 망설임들엔 무시할 수 없는 인간적인 면들이 있으니까.ㅜㅜ)
어쩌다보니 일하는 곳과 시골어른 중졸 학력이 전부인 분, 정통 민족주의자 ㅋㅋ 통진당 당원들 여러 층의 사람에게 잠깐씩 문제가 되는 것만 이야기 했다. ‘그렇네’, ‘근데 그믄 그책 판매금지 될 수도 있다고?’, ‘원래 옛날에 업자들이 있었지.우리가 그것만 기억할라고 한거니까 그렇지’, ‘아~근데 책을 안 읽은 사람들이 욕한다고..헐..’ 등등의 반응을 들었다. 믿거나 말거나 이웃사람 카더라 통신이다. 학자들의 박유하 교수 태도문제 거론, 진실성에 치명타, 개인에게 상처를 주는 떠도는 소문이 마치 객관적인 비판으로 위장하는 데 슬쩍 얹히는 것을 보며 (나는 이게 왜 자꾸 열등감이나 시기심..으로 보이지) 학자들간의 카더라 통신이 있다면 나는 동지적 관계 매춘등을 이해도 조사한 이웃사람 카더라 통신이 있다. 물론 내가 그들에겐 악의적인 기사 인용문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일 수 있다. 그 점 생각해 봐야겠다.

점점 배가 산으로 간다.

나는 아마도 77년생중에 무지 상위 1프로에 속하는 역사와 한문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그러다 보니 역사와 한문이 연결되는 다른 분야도 잘 모르는 사람이다. 집단을 좀 무서워하고 집단 속에 있게 되면 유체이탈하듯 한 번씩 빠져나와 저 새까만 머리통들을 보라지 하는..
일본 문화에도 큰 관심 없다ㅡ 내 또래들이 일본영화 어둠의 경로로 보던 때도 나는 굳이 힘들여 그런 걸 접하는 현상이 이상해 보였다. 어찌보면 뭐든 심드렁한 순수무지인간이다.
딱 하나 내게는 성폭력에 대한 공포가 있다. 그건 어쩌다보니 내가 직간접으로 경험한 것들이며 이걸 극복했는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가장 나를 힘들게 한건 내가 남자를 낳았다는 거였다. 그건 병과 같아서 공포를 떨치는데 시간과 훈련이 필요했고 밤중에 뛰쳐나가 울면서 다니는 이상한 밤들도 함께왔다.
내가 위안부 문제를 처음 들었을 때 그건 내게 더도 덜도 아닌 강간 성폭력 문제였다. 그런데 한편으론 그렇다면 그 짐승으로 전락한 다수 남자들, 그들의 인생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떠올렸다. 그들은 일상에서 성폭력을 저지른 사람들이 아니라 성폭력을 종용당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생명을 연장 시킨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국의 위안부를 읽기 전에도 어렴풋이 참담한 연민으로 가졌던 것이다. 책을 읽기 전 내 인식은 병사도 위안부도 불쌍하다, 전쟁을 일으킨 나쁜 일본! 까지였다.
미렵스럽게 구분을 시도해 보자면 책에서 이동당한 존재들을 읽어내면 알 수 있고 강조되는 점. 전쟁을 일으키고 병사를 강제 이동시켜 ‘목숨 바쳐 천황에 대한 충성”황국신민의 영예로운 의무’를 강제한 일본은 자국 남자들에게 죄를 저질렀다. (일본이 이것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하는지 궁금하다. 이부분은 지금 기억이 안난다.) 거기다가 위안소를 차리고 일본인 위안부를 동원하여 죽음으로부터 도망하고 싶은, 불쌍한 인간들을 위무하여 본국의 일상, 향수를 조금씩 넣어주며 교묘한 전쟁수단으로 만든 일본의 책임을 묻고 있다. 조선에서는 조선인 업자들이 조선 여자들을 데려온다. 이것 역시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1차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조선에서 업자들에게 속아 갈 수 밖에 없던 여자들을 가게 만든 우리의 책임도 분명 있다. 이것을 부정하고 없었던 사실로만 기억하려는 것은 억지다.

어떤 분이 제국의 위안부 논리가 ‘강간당한 여자에게 실제로는 너도 즐겼지’ 라는 것이니 절대 용납할 수 없다 했는데. 생계형 자발적 매춘은 무언으로 속한 집단에게서 종용당한, 사회로부터 내침당한 이들이 선택한 마지막 수단이다. 그러니 자발적 매춘이라 함은 거기에 매춘 소굴에 자신의 발로 걸어들어간 그 걸음이 바로 절망 혹은 삶을 포기당한 자의 자각하지 못한 걸음으로 그려진다. 그런 자발적 매춘부들을 만들어 낸것은 바로 일본 제국주의 전시상황 여자들을 불러들인 구조와 그 구조에 편승해 이익을 얻으려는 포주들 조선인 업자들의 가담, 그러한 가담을 양산한 다시 구조적 문제이며 한편 결국 여자들을 항시 남자들의 분노와 추잡한 욕망의 끝을 받아내는 양동이로 서슴없이 몰아내는 조선의 가부장제, 고깟 딸 버리거나 희생시키는 남성주의의 문제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일본의 가라유키상을 보아도 조선과 일본 아니 전세계의 뿌리 깊은 여성에 대한 차별 문제이기도 하다. 이것들이 전반 책에서 확인 되는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간다. 내가 처음 위안부 문제를 들었을 때 그것을 강간 성폭력으로 들었다면 그것은 단지 일본병사와 위안부사이에만 있었던 특수한 성폭력으로 인지하고 고통스러워 한 것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어디까지가 강제 징용이고 지발적 매춘이고를 떠나 이야기 한다) 위안부들은 자기 몸에 가한 고통을 절대 잊지 않지만 자신들의 참담과 병사의 처지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아냈을까 나는 상상을 했다. 물론 상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 내가 위안부 참상을 이야기로 들었을 때 몸으로 떠올린 기억이다. 내몸은 무섭고 떨리고 병사들은 개 같고 불쌍하고 곧 죽음 직전에 벌벌벌 똥을 지르는 짐승 같았다. 서로는 서로를 비춰본다.
제국의 위안부에는 전쟁터에서 잠시 병사들이 돌아와 일본인 위안부나 조선인 위안부와 시간을 보내는 좀 평화로운 한 때도 자료로 나온다. 만약 비극인 시간이 있다면 그 얼마간의 평화는 또한 정말 환각 상태 혹은 다 잊어버리고 싶은 순간들이었을까. 그 부분을 읽다가 울었다. 위안부가 성노예 오로지 고통만으로 점철되어 살아도 산 게 아닌 어떤 이미지로 박제되어 있었고 내가 그걸 떠올릴 때 실은 나는 내몸이 떠올리는 기억을 공포스러워한 거고 저주했던 것이다. 내게 가해지는 것 같은 폭력에만 분노했다.

위안부 문제에 분노하는 여성들은 몸으로 치를 떨고 남성들은 잠재적인 자신의 폭력성을 그악스럽게 부정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공포와 분노는 잠시 이성과 분리된 상태다. 그건 마치 목숨만 본능적으로 살아나려는 몸부림 같다.
내 스스로 소화하기에 고통스러워 얼른 이것은 위안부 문제, 소녀들, 너무 아파, 어떻게 그런일이, 몇 개의 단어로 고이 박제시킨 것들을 ‘실제 사람들이 살아야했던 사실’ 로 불러오고 살려내게 한 것이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이다. 공포로만 여기거나 싸울 거대한 담론으로만 여기면 나는 힘을 쓸 수 없다. 위안부 힐머니들의 마음이나 그 시대의 사람들이 살아낸 비극상황, 사람사이 관계, 당연히 그러했을 그들의 삶, 그것을 제국주의는 어떻게 간파하고 이용했나. 가슴이 풀어지며 어루만지고 내가 깨지고 그녀들이 인간으로 느껴져서 그래서 더욱 연민하게 된 것은 그녀들의 일상과 위안소의 폭력을 오가는 상황을 읽을 때였다. 이것까진 내 개인적인 책을 읽을 때의 심정 고백이다.

그런데 자발적 매춘이나 조선인 업자의 가담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이 자발적 매춘이었다, 우리에게도 가라유키 상이 있듯 조선인 위안부도 그런 역할을 한 것이다, 조선인이 실은 같은 조선인을 매춘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라고 말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국에선 일본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일본의 책임이다’라고 말할 근거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근거들은 위에 설명한대로 일차 책임은 어디로도 물을 수 없는 일본 제국주의 폭력에 있다는 것을 책에서 강조한다.

어제부터는 학자들이 비판에 나선 모양인데. 그들의 비판이 아직까진 카더라 통신과 혼재되어 어떻게 와도 내 동막골 같은 의식이 이해한 저 자리는 절대 일본의 죄과를 약화시키려는 물타기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또 하나 독도는 우리땅이란 노래를 우리는 띄어띄엄 노래를 따라 부를 줄 알게 되는 네 다섯 살 부터 들어왔는데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문제는 나를 무식하다 해도 된다.
2007년인가 2006년? 내가 육아에 시달리며 세상 소식이 우울증을 더하게 해 모든 미디어를 끊었을 때였다. 어느 날 읍내에 나갔더니 모든 차들에 태극기가 꽂혀 있었다. 또 월드컵인가 했더니 독도문제 때문에 온 국민이 태극기를 달고 있다고 했다. 내 의식의 동막골에선 독도가 그다지도 문제면 양쪽 주장이 한치의 의심도 없이 치열하게 진짜만 있을텐데 그거 그만 반복하고 합의하면 안 되나, 전세계 공동 평화영토로 하면 안되나, 그리고 서로 영해분할선이던가 이런 거는 합의하고 나면 전세계의 괜찮은 응원 받으며 잘 해결되지 않을까, 전문가도 많은데, 이런 생각을 했는데 한 번도 말한 적은 없다. 어쩌다 보니 이런 말까지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내편에선 어 정말 저런 게 가능하다고도 생각하네, 하며 힘을 실어줄 것이다.
나는 민족주의를 전세계 사람이 자신과 한 민족이다로 인식하는 사람들과 뜻을 함께 한다. (헛다리지만 다 서로 다른 민족으로 가를 거면 문학도 음식도 전부 갈라서 절대 이해불가 물타기 하면 안돼. 국익에 반하니 음식도 우리 것만. 신토불이. 그런데 전세계인의 축제 월드컵 켁 이 따위 짓은 서슴없이 가담해 오 필승 코리아 외치는 그러면서 지면 열 받아가지고 외국 김독 수입해 오고 이거 말이 앞뒤가 하나도 안 맞고 구분 어차피 안 되는 거다. 죄송 갑자기 열받는다) 동막골 사람처럼 이 방면으로 무지하지만 위에 말한 것처럼 이런 이해가 아무리 전문가가 필요한 사안의 해석에도 무시당해선 안된다는 생각이다. 세계 곳곳엔 정말 순리대로 있는 그대로 서로간의 약속으로 평화를 유지하게 하는 조용한 집단들이 있는 것 같아서다. 그럼 이만 총총..부끄러움을 감당하지 못해 오늘은 페북을 쉬겠다. 믿거나 말거나.

 

2월 20일 포스트

욕설은 줄었지만 논리 싸움 시작. 댓글들을 주욱 읽어보는데 내용을 들먹여 비판하시는 분들이 집요하게 싸우면서도 책은 그다지 읽을 필요가 없다 하시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음. ‘또라이들 뭐라는거야. 헛소리 하고 있네.’ 이런 욕 한마디 던지고 가는 사람들 붙잡고 전도사처럼 책을 읽으세요라는 헛소리 필요없다는 거 알겠는디 그토록 책내용, 용어의 쓰임 반박하고 싶다면 정독하고 이야기를 하든가. 상대의 답을 듣고 반나절이라도 생각해보고 다시 이야기 하든가. 이 잡고 늘어지는 핑퐁은 그냥 항복 소리 받아내고 이기고 싶어 투정 하는 거 아닌지.. 배는 이미 먼산까지 가고.

 

2월 21일 포스트

일본은 히로시마 원폭으로 희생자 코스프레를 하고 한국은 일본에 피해자 코스프레하고 그럼 베트남은, 필리핀은, 힌국군이 저지른 양민 학살은? 사죄와 화해와 풀어야 할 것들은 아직도 멀고 멀다. 국가와 구조의 잘못을 묻기 위해 미시를 거시로 가져가야 하는데. 일본을 나쁜 개인으로 인식해 버리면 그 구조가 양산한 무수한 다른 피해들은 어떻게 책임을 물 것인가.
까놓고 이야기 해야 될 거 아니냐고요.

 

2월 21일 포스트

나는 박유하 선생님이 ‘야생의 학자’라고 생각한다. 정치적 학문적 위치를 떠나 최선의 진심의 언어를 사용한다. 나는 이런 정치·학문적 생태계에서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것을 ‘진성’으로 말 하는 사람을 만났고 그 목소리가 곡해 되는 것을 우려한다. 아니 슬퍼한다.

나는 선동 정치적 이용을 경멸한다. 세월호 발언에 있어서도 미약한 인간적인 발언들이 묻히지 않길 바란다. 선동적인 발언들은 밉다. 선동은 항상 다른 목적을 가진다. 어머니들은 연약한 피부를 지니고 아이와 어른의 경계를 떠나 무너지고 슬프다. 인간은 연약한 신경선들로 이루어진 그러나 끊어지지 않는 섬세하고 강인한 존재다. 섬세한 결을 최대한 들여다보며 묻히지 읺길 바라는 소외되지 않길 바라는 사람의 행보를 지지한다.

나는 공교롭게도 박유하 선생님이 공격받는 부분까지 세상에 꼭 필요한 ‘심성’ 으로 지지한다. 우리의 심성들은 살해당한 육고기 양지 사태로 구분하듯 너무 재단 당해 왔다. 그녀의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 나쓰메 소세키론’ 을 보면 그녀의 심성이 읽힌다. 정치 학문적으로 세상에 통용되기엔 약한 고리가 있으나 그녀의 심성이나 진심이 가짜라고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녀의 약한 부분을 지지하고 보충해주시라. 특히 학자들, 그녀는 개인의 일신을 위해 이 퍼포먼스를 벌인 게 아니다.
제발 도와주시라. 내 페친분들께 죄송하다. 나도 내가 할일을 미뤄가면서 일주일 이 일에 묻혀있다. 그래야 한다.

취했다. 나는 술을 많이 마시면 안 되는 사람이다. 내 일에 지장이 있다. 그러나 술 한잔을 빌어 말한다. 그녀가 일본의 어떤 좌파 지식인의 논리를 체화했다는 그런 말 제발 하지 마라. 나는 이성과 감성이 살아있는 생목소리를 들었다.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 읽어보시라. 아쉽게도 화해를 위해서는 절판이라 못 읽었다. 그러나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 나쓰메 소세키론은 박유하 선생님과 개인 대화로도 확인한 매우 중요한 저서이다.
비판자의 입장을 떠나 말을 읽어가듯 읽어보시라. 나는 세월호 발언 어떤 선동적인 문구를 경계한다. 우리는 살아서 아프고 어느 누구 하나 매도 해선 안 된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는 가장 비천한 인간적인 타협 약함까지도 그 자리에 이르게 한 더 큰 힘 권력구조를 보아야 할 것 같다.

이 포스팅은 독주에 힘을 빌린 용기를 낸 포스팅이다. 그러나 주정이 아니라 삼켜왔던 말이다. 기지촌 여성에 대해 앞으로 예를 들어 생각을 주절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일본과 화해 해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아이가 있고 노인이 있고 시인이 있고 하루키가 있고 고진이 있고 좌익 우익이 있고 천황을 침배하는 무리가 있고 지한 친한이 있고 위안부였던 할머니가 있고 내일 죽을지 오늘 죽을지 모를 ‘사람’이 살기 때문이다. 우리와 같다. 다른 그림을 내보이는데 그들이 우리를 욕하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도 쪽바리로 몰아붙이면 안된다.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다. 똑똑히 묻고 따지자. 누기 욕할 자격이 있는가. 용서를 받자. 그리고 우리는 이웃이 될 수 있다. 천년만년 살 것 아닌데 이 싸움을 대물림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