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홍진, 오독과 표현의 자유에 관해

 

배홍진

December 5, 2015 ·

제국의 위안부 – 오독과 표현의 자유에 관해..

제국의 위안부 사태는 엄밀히 말해 학문과 표현의 자유의 문제는 아니다. 실상 저자와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가부장적 시스템과 이데올로기, 제국주의와 식민의 문제, 민족주의(저자는 반일과 혐한 민족주의, 비판자들은 일제에 의한 조선인의 차별)와 그 폭력의 문제를 동일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같은 대상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도출한 결론도 문제해결의 방법론을 제외하곤 그다지 다르지 않다. 다만, 저자는 문제의 맥락을 심화하고 그 외연을 넓혀 그동안 분명 알고 있었으나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거나 외면하고 있었던 것들을 상기시키고 있을 뿐이다. 문제의 진정한 해결은 그 지점에서부터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실 저자와 비판자는 아예 서로 상반되는 적대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한 마디로 표현의 자유의 문제가 아니라 오독 혹은 왜곡의 문제란 것이다. 표현 자유의 문제가 되려면 적어도 그 누구들처럼 무궁화회 할머니들을 제외한 다른 위안부 할머니들은 가짜다, 이 정도까진 얘기해야 한다.(내가 한말이 아니다. 세상에 오독이 범람하여, 이런 구질구질한 사족을 덧붙인다.)

그럼 오독 왜곡의 문제가 어째서 표현의 자유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일까. 어째서 오독이, 오독한 문장을 공권력으로 구속하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그리고 그 오독의 주체들은 왜 자신이 표현의 자유를 구속한 건 아니라고 알리바이처럼 깨끗한 손을 내미는 것일까? 고발과 기소는 전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했다고, 마치 그게 정의의 실현인양 목청을 높이며 외쳐대는 것일까? 난 여기서 왜 자꾸 학창시절 요리조리 돌아다니며 이간질하던 얘들이 생각나는 것일까. 제국의 위안부를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세상에 편견과 분노를 일으키더니 그게 학문의 자유를 침탈하는 문제로 번지자, 이번엔 반대로 고발은 할머니들이 했다, 라고 사방팔방 떠들며 학문의 자유는 존중한다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것도 정도껏.
내가 이 상황을 일부러 비틀어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치 친일파의 얼굴을 고발하듯 전면에 나섰던 이들이 정작 중요한 순간에 피해자 할머니들의 얼굴 뒤로 숨어 고개만 삐죽 내밀고 할머니들의 권리야, 어쩔건대, 라고 떠들고 있는 모습은 글쎄, 별로 솔직해 보이진 않는다.

오독 왜곡의 문제가 표현의 자유의 문제를 핵폭탄처럼 터트렸다. 사실 문장을 오독하면 오독한 걸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말이다. 그러나 이번엔 오독이 맹수처럼 달겨들어 문장을 넘어 책 자체를 잡아먹어 버렸다. 어째서일까? 혹시 그건, 위안부 문제가 지금까지 굳건히 믿어왔던 거와는 달리, 악랄한 가해와 숭고한 피해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는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고 해결도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복잡한 것을 단순한 것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이 그 복잡의 해결책으로 단 하나의 깔끔한 정답만을 믿어온 사람들은 단순의 가면 아래서 숨막혀하던 복잡의 얼굴을 누군가 꺼내려 할 때 분노하고 두려워한다. 그때 그들은 단순의 가면을 벗기려는 사람의 몸짓을 극단적으로 과장해서 보게되고, 그 과장된 몸짓이 온 시야를 무섭게 압도하기 때문에 그들은 맹수처럼 달려들어 그 과장의 몸짓을,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신기루를 물어뜯는다. 그 몸짓, 신기루의 뒤편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자신들이 허상 혹은 오독을 물어뜯을 때, 죽는 건 더이상 허상이 아니란 걸 모르고……

때로 오독하는 사람은 자신이 오독한 내용을 두려워 한다. 그리고 그 오독의 내용을 주둥이 수세미로 빡빡 지우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