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홍진, 중세적인 종교재판

 

배홍진

3월 6일 ·

박유하 교수를 비판하는 진보 지식인들은 박교수가 진보주의의 가면을 쓴 채, 국가주의나 제국주의의 담론에 교묘하게 봉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이지 씁쓸한 건, 책에 명시적으로 나오는 박교수의 논지나 의견엔 침묵하고, 그 논지의 배면에 흐르는 박교수의 무의식이라 할만한 것을 다분히 자의적으로 추측해 비판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논리적 전개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박 교수는 물론 A는 오렌지다, 라고 말하고 있지만, 따져보면 박교수는 A는 오렌지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통해 A를 호도하고 왜곡하려는 교묘한 시도를 하고 있다.” 이렇게 그들은 거의 백년동안 꽈배기만 만들어온 사람처럼, 혹은 문맥의 심층까지 내려가 뭔가 비판할 건덕지를 찾는 탐험가들처럼, 이 책은 어쨌든 꼬아봐야 진짜 의도를 알 수 있어, 혹은 이 책은 분명 다른 속셈을 지니고 있을테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텍스트의 지하로 내려가 봐야돼, 라고 말한다.

사실 그들이 얘기하는, 진보의 가면을 쓴 국가주의를 먼저 비판하기 시작한 건 박유하 교수다. 민족, 역사, 애국이란 미명이 지식과 운동에 이용될 때 어떻게 정의를 가장한 반목과 증오의 담론을 생산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폭력의 멘탈리티로 귀결되는지를 박유하 교수는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제국의 위안부에 나오는 어떤 논지들은 이미 지식인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었던 것들도 있다. 그러나 그걸 책으로 용기있게 구체적으로 쓴 사람은 없다. 그들은 자기들도 알고 있던 거야, 라고 얘기하는데 정작 자기들은 목소리를 구체적으로 내지않고 있다가 박교수가 목소리를 내니, 우리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당신은 그 사실을 이용해 교묘하게 사실을 왜곡하고 있어, 라고 성토한다. 도대체 뭐하자는 짓인가.

박교수를 얼마든지 부정하고 비판해도 좋다. 심지어 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해도 좋다. 다만 한국 사회가, 인문학자가 자신이 쓴 책으로 감방을 갈 이유가 없는 사회라면 말이다. 정의감에 넘치는 지식인들은 먼저 박유하를 물어뜯기 전에, 한 지식인의 인문학 저서를 범죄 행위의 증거 따위로 생각하는, 이 사회의 그 대단한 상식부터 물어뜯어야 할 것이다. 역사의 진실은, 당신들이 믿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종교적 신앙의 대상은 더더욱 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이번 사태를 명백히 중세적인 종교재판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