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위안부문제와의 만남, 『제국의 위안부』까지

박유하

1. 배춘희 할머니를 생각하며

1.1 위안부문제와의 만남, 『제국의 위안부』까지

이미 쓴 적이 있지만(‘외교란 무엇인가’), 나는 1990년대 초, 아직 유학 막바지 무렵에 도쿄에서 위안부할머니들의 증언집회에서 통역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위안부문제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러니 위안부문제는 내게도 4반세기 함께 한 문제인 셈이다. 물론 운동이나 본격적인 연구를 이 무렵 시작한 이들에 비하면 나의 이 ‘만남’이란 아주 작은 체험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 세월 이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갖고 할머니들과 연구 혹은 운동이라는 형태로 함께 해 온 분들께 먼저 경의를 표하고 싶다.

나의 연구대상은 일본근대문학이고, 그런 의미에서도 위안부문제는 이 무렵의 내겐 아직 본격적인 고찰대상일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귀국 후에도 나는 이른바 ‘위안부문제’와 나는 가까워질 수 없었다. 냉전종식후 한국의 90년대는 강력한 민족주의시대였고, 위안부문제는 그러한 시대에 기대는 형태로 사회문제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시 일본근대를 대표하는 작가 나츠메소세키의 민족주의가 어떤 식으로 제국주의를 지탱하게 되었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나아가 민족아이덴티티자체가 여성에 억압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무렵이기도 했다. (훗날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라는 책에 그 인식을 담게 되었다.) 따라서 그런 민족주의에 여성운동이 의지하는 정황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위안부문제의 중심에 있었던 이들과 교류할 만한 네크워크도 없었다. 80년대 후반을 일본에서 유학을 하며 보낸 탓에, 민주화운동관계자도, 이화여대를 중심으로 한 여성운동관계자도, 그리고 실천적 기독교관계자마저 내 주변엔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의 위안부문제에 대한 관심이 지속된 것은 역시 1990년 대 초반에 동시통역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흘렸던 눈물체험과 절규하던 할머니들의 하얀 치마저고리 모습이 내 안에 깊이 각인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십대부터의 나의 독서물리스트 안에 한국전쟁전후의 소설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른바 ‘양공주’에 대한 따뜻한 시각이 담긴 몇몇 소설가들 덕분에 나는 그녀들을 내 안에서 편견없이 바라볼 수 있다. 물론, 한국에서 일본학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학생들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나 일본을 좋아하는 일에 대한 죄의식에 무관심할 수 없었던 것도, 나의 관심을 지속시켜 준 중요한 동인이었다.

할머니들을 가까이 만나 이야기하는 기회를 갖게 된 건 그로부터 무려 10년이나 지난 2003년 겨울이었다. 당시 김군자 할머니 등 나눔의 집에 계신 몇 분이, 한국정부의 무관심을 질책하면서 항의의 표시로 국적을 포기하겠다고 발표한 일이 있었다. 마침 한국을 방문한 일본의 페미니스트학자 우에노치즈코 선생도 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어 우에노선생의 제자와 셋이서 나눔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이 때의 방문에서 나는 밖에서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알 수 있었다. 경기도 광주의 나눔의 집 건설에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기부금을 냈다는 사실, 우에노치즈코 선생도 그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 나눔의 집에 와서 봉사를 하는 이는 대부분 일본인이라는 사실 등.

특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은 김군자 할머니의 미움이 일본군보다 (수양)아버지를 향해 더 크다는 사실, 일부러 나눔의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사시는 분이 있고, 그 분의 가슴에는 한 일본군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살아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날 얻은 인식도 나는 2년 뒤에 낸 <화해를 위해서>에 썼다. 한 사람 안의 기억과 사회의 관계, 과거 기억과 현재의 상관작용 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이때부터였다. 작고한 니시카와 나가오 선생의 부인이신 니시카와 유코 선생이 중심이 되고 우에노 선생, 역사학자 나리타류이치 선생이 함께 한, 일본학술지 <思想>이 기획한 근대가족과 국가문제특집에 재일교포작가 이회성론을 발표하면서, 기억이 어떤 식으로 인간을 무너뜨리거나 지탱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 때이기도 했다.

2005년, 나는 처음으로 위안부문제를 다룬 책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를 냈다. 그건, 그 동안 위안부문제의 중심에 있었던 연구자와 운동가들에 대한 내나름의 말걸기이기도 했다. 90년 대에 할머님들을 향했던 일본인들의 마음, 당시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일본의 사죄와 보상에 대해 한국에 소개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몇몇 서평을 얻었을 뿐, 위안부문제의 중심에 있는 이들의 반응은 기대와는 달리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 해 말, 그 전년도인 2004년에 일본의 고모리요이치 교수, 김철 교수, 최원식 교수 등과 함께 만든 <한일, 연대 21> 주최로 와다하루키 선생, 우에노치즈코 선생을 발제자로, 그리고 고모리 요이치 선생을 토론자로 하는 위안부문제 심포지엄을 열면서 (<한일 역사인식의 메타히스토리> 수록), 그리고 윤미향 정대협 현대표를 토론자로 초대했다. 하지만 소통은 쉽지 않았다.

다음해 말, 일본에서 <화해를 위해서>가 번역되었다. 내가 가장 신뢰했던 주변 연구자들은 진지한 관심을 갖고 서평회를 열어 주었지만, 그 연구모임에서 함께 했던 서경식, 김부자 선생을 비롯한 재일교포연구자들과 몇몇 연구자들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토론자로 참석했던 야마시타 선생의 말에서, 정대협사람들이 나의 책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 2007년 여름, 이 책에 대한 첫 비판이 나왔다. 한국에서 정대협활동을 하기도 했던 김부자 선생의 비판이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의 비판이 이어졌는데 그들은 나의 책이 아사히신문의 고 와카미야 주필이나 와다 선생과의 개입이 있었던 걸로 생각하는 오해마저 하고 있었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근거없는 의구심들은 이미 10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셈이다.

그리고 2008년, 2009년에 서경식 교수, 윤건차 교수 등의 나에 대한 비판이, 주로 한겨레신문을 통해 한국에서 시작되었다. 나의 책이 일본우익의 상찬을 받았으며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들이 박유하의 책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들조차 정말은 식민지지배에 대한 진정한 사죄의식이 없어서라는 요지의 글들이었다. 생각지도 않던 공격에 나는 많이 놀랐지만, 결국 글을 쓴 해당기자에게 항의했을 뿐, 더이상의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나의 이 때 행동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알 게 된 건 그로부터 몇 년 지난 2014년 6월, 고발장을 받아들었을 때다. 박유하가 말하는 화해란 한미일 동맹을 강화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이 녹아든. 나의 역사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서경식교수나 윤건차 교수의 영향이 뚜렷이 보이는 그 고발장은, 내가 방관하는 사이 나에 대한 의구심이 한국에 확산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니면 나를 비판했던 이들이 직접 관여한 것일까. 나는 아직 그 내막을 모른다.

아무튼, 내가 앞서, 이 고발이 정말은 위안부문제에 관한 지식인들의 생각의 차이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런 시간 속에서 위안부문제에 대해 또 책을 쓸 생각은 하지 않았다. 2010년대 들어서자 한일관계는 시시각각 더 나빠졌고, 그런 정황의 중심에는 늘 위안부문제가 있었지만, 나는 다른 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지배란 무엇인가>로 제목을 붙일 예정이었던, 일본인들을 향해 쓰일 예정이었던 그 책 안에, 나는 위안부문제에 한 챕터를 할애하기로 했다. 아시아여성기금 해산 이후 위안부문제에 대한 관심이 현저하게 낮아진 일본인에게, 특히 위안부는 그저 매춘부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1년 가을 , 연구년을 맞아 머물게 된 도쿄시내 와세다 대학 근처 작은 집에서 그 글을 쓰기 시작했다. 훗날 고발대상이 된, 위안부할머니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지적된 ‘매춘적 강간, 혹은 강간적 매춘’이라는 말은 사실 그 글 안에 사용된 말이다. 말하자면 ‘매춘!’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향해 실은 그것은 구조적으로 ‘강간’적인 것임을 환기시키려는 단어였다. 다시 말해 매춘이 아니라 강간에 방점이 찍힌 표현이다. (후에 한국어 책을 먼저 내면서 구성을 바꾼 탓에 원래의 나의 취지가 불명확해지고 말았지만, <웹 논좌>라고 하는 아사히신문사 계열의 그 매체의 원래 글에는 나의 그런 의도가 남아 있을 것이다.)

2012년 4월과 5월에 위안부문제를 향한 일본정부의 시도가 좌절되는 걸 보면서 나는 한국을 향한 말걸기를 다시한번 시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원래의 예정을 바꾸어 <제국의 위안부>혹은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이라는 제목이 될 한국어 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이 책은 원래 일본을 향해 쓰여진 책이다. 따라서 당연히 일본의 책임을 묻기 위한 책이다. 다만 기존연구자들과 지식인, 그리고 지원단체와는 다르게 풀어본 책이다

그동안 전쟁범죄로만 다루어져 왔던 위안부문제는, 조선인위안부에 한정해서 보았을 때는 식민지 지배가 야기시킨 문제로 생각해야 한다는 점, 그러나 그동안 일본이 그 점을 명확히 인식한 적은 없었다는 점, 그러니 그에 기반한 사죄와 보상이 새롭게 필요하다는 것이 이 책의 중심취지였다. 그러나 동시에, 업자나 마을사람. 혹은 부모 등 우리 안의 책임을 묻는 일 역시 피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이 한국어판이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유였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건 할머니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