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배춘희 할머니와의 만남

박유하

학자들이 많이 포진해 있는 정대협도, 나를 고발할 생각이었다. 그 생각이 책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건 분명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책 자체를 두고 고발을 검토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순수했다고 생각한다.

정대협이 아니라 나눔의 집이, 그리고 발간 직후가 아니라 10개월이나 지나서 고발에 이르게 된 배경에는 내가 할머니들과 교류를 시작한 일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내가 다시 나눔의 집에 가는 일이 없었더라면 고발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그 기간에 만난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이 사회에 전하기 위한 심포지엄을 다음해 봄에 여는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 심포지엄을 한일 양국 언론이 호의적으로 주목하는 일이 없었다면 고발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고발은 그런 의미에서 사실 책자체가 문제된 고발이 아니다. 나에 대한 경계심이 나를 고발하도록 만든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지원단체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갖는 할머니와 내가 만나게 된 일이 고발의 먼 원인이 되었다. 그들이 나를 경계하고 위험시했다는 것은 고발장 도처에서 나타난다. 지원단체는, 그들의 주장과 운동을 내가 방해한다고 여겼었다. 그에 더해 나눔의 집이나 정대협에 대한 일부 할머니들의 불만을 내가 알게 된 것도 그들이 나를 경계한 또하나의 이유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먼저 말하고 싶다. 나는 그들의 오랜 기간에 걸친 노고를 폄훼할 생각이 없다. 인간이 하는 일에, 하물며 여러사람들이 모여 하는 일에 어떻게 시행착오가 없을 수 있을까. 더구나 하나의 방침을 정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토론과 고민이 존재했을 것이고, (2016년 9월 4일에 일본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발표된 야마시타영애선생의 발표자료ー日本軍「慰安婦」問題とオーラルヒストリー研究の/への挑戦ー를 보고 나는 그들이 증언집을 만들면서 내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많은 고민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고민과 논의과정에 존경을 표한다. 또한 운동의 성공을 위한, 내가 알지 못하는 노력과 눈물에.

그렇지만, 동시에, 나를 고발한 또다른 지원단체의 거짓말과 폭력을 그들이 2년 이상 방관해 온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 검찰이 주도한 조정위원회의 조정과정에서 나도 할머니들께 사과하겠지만 지원단체도 나에게 사과해 달라고 말했던 건 그래서기도 했다. 고발자체도 납득할 수 없었지만 고발이상으로, 고발과정에서 이루어진 경솔과 무지와 그에 따른 세간의 비난에 대해 ,인권운동을 표방하는 지원단체가 오래 침묵해 온 이유를 나는 사실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20년 이상 위안부문제에 관여해 온 이들 중 아직 누구도 나에 대한 고발을 취하하라는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아직 없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슬프지만, 이러한 정황이 작금의 대한민국의 비윤리적 상항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 더 슬프다. 이들이 쉽게 비난하는 정치가나 경제인들에게만 비윤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눔의 집에는 일본정부가 90년대에 사죄와 보상을 위해 만든 아시아여성기금관계자이기도 했던 일본인들과 함께 갔다. 그들은 일본정부의 예산으로 할머니들을 온천에 모시고 가거나 음식을 대접하고 용돈을 드리기 위해 1년에 수 회 한국을 방문한다고 했다. 이들을 알게 된 건 2006년에 일본에서 <화해를 위해서> 일본어 번역본이 나온 이후다. 방문 전날 나눔의집 소장에게 연락했더니 자신은 다른 일이 있어 없지만 사무국장을 만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들을 만나기 전에 사죄와 보상에 관한 나눔의집의 생각을 사무국장에게 물었다. 그리고 나눔의 집이 정대협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은 당사자중심으로 해결할 생각이며 ‘법적배상’이 아닌 조정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재판을 미국에서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이 재판에 찬성한다는 의미로 할머니들의 도장이 찍힌 서류까지 사무국장은 나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할머니들이 계시는 건물로 이동해 호텔에서 만났던 유희남 할머니 외 몇몇 할머니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머니들이 열 분 계시다고 했지만 다 나와 계시지는 않았다. 몸이 불편해서 못 나오시는 거라고 사무직원이 말했다. (이하에선 위안부할머니들에 대해 극존칭은 쓰지 않으려 한다. 이 글의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서 봉고차를 타고 식사장소로 이동했다. 할머니들이 초밥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우리는 일식집으로 갔다. 그리고 적당히 자리를 잡았는데 그 때 우연히 맞은편에 앉은 분이 후에 깊은 교류를 이어가게 된 배춘희 할머니였다. 이 분은 이미 나눔의 집에서도 뵈었지만 그 때는 이 분과 따로 대화하지 않았었다.

배할머니가 우리와 함께 앉은 것은 우연이었을까. 이때는 아직 몰랐지만 일본을 좋아하셨으니 처음부터 일본인이 있는 자리에 앉을 생각이셨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분 옆에 일본인이 앉았고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일본어로 대화했다. 영상에서도 그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배할머니는 가끔 주변사람들을 의식하는 듯 했다.

할머니가 일본을 용서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을 때, 허락을 얻어 핸드폰카메라로 할머니를 녹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이 날의 영상을 다음해 배할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배할머니도 국가배상을 원했다’고 나눔의 집 소장이 말한 보도를 보고 처음으로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2014년 6월 10일이었다. 할머니께 불이익이 갈지도 몰라 그때까지 공개하지 않았던 영상이기도 했다.

이하에, 이 첫 만남에서 배할머니가 했던 이야기를 페이스북에서 옮겨 둔다.


(この話が入ったら。。。だが、この話が入ったら、それこそ敵は百万、こっちは一人、そういうことになるわけ。)하지만, 이 이야기가 들어가면..그야말로 적은 100만, 나는 혼자. 그렇게 된다고.

배할머니는 구체적으로 대답하기 전에, 자신의 이야기가 나눔의 집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표했다. ‘적은 백만, 나는 혼자’. 나는 뜻밖의 단어와 표현에 놀랐다. 오랜 세월 함께 해 온 이들을 ‘적’ 이라고 말하도록 만든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그건 꼭 진짜 적대감에서 온 표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그냥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해온 데 대한 절대고독을 표현한 단어였을 것이다.

이어서 나는 할머니가 일본을 용서하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에 대해 물었다.

(いや、思うって、うちは仏教で、あの世の事、この世の事、ずっと聞くでしょう。ひとがこの世に来て、何か一ついい事しないで、そのまますっと帰るというのはあれだし。うちが一人だったら、許せば、許して、うちがこっちでこういうこと、あういうことあまりしないとかね、それで黙っていたら、むこうは何かが他の、何かほかのお礼を返すかも知らん。) 뭐, 생각한다기보다… 나는 불교도이고, 이 세상에 대해 또 저 세상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듣잖어. 사람이 이 세상에 와서 뭔가 좋은 일 하나 하지 않고 그대로 떠나버린다는 건 좀 그렇잖아. 나 혼자라면, 용서하고.. 용서해서 우리가 여기서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하지 않는다거나.. 그렇게 아무말 않고 있으면 그들은 뭔가 다른, 뭔가 다른 보답을 할지도 모르잖어.

할머니는 처음 만난 나에게 곧바로 한국의 운동방식을 비판했다. 그건 왜였을까. 배할머니는 다른 이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은 일이 있었을까. 어쩌면 그건 ‘일본어’로 발화되어야 할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특별한 이야기가 ‘일본어’로 발화된 일의 의미를 나는 제3장에서 다시 생각해 볼 예정이다.

(こういう相談する人もおらんし、一人でテレビを見ながら、一人で考えるわけ。だから、一生一代ね、この世に産まれてきてね、いいことするのね、一人だったらできるけど、)이런 식으로 상의할 사람도 없으니까, 혼자서 테레비를 보면서 생각하지. 그러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 딱 한번,좋은 일을 하는거야. 혼자라면 가능한데..

배할머니는 90년대부터 나눔의 집에 계시다고 들었었다. 배할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았다면, 그 긴 세월을 ‘혼자’ 가슴에 품고 지냈다는 얘기가 된다. 중요한 건 할머니가 용서라는, 아직 한번도 발화되지도 실현되지도 못한, 일본과 마주하는 자신의 방식을, ‘좋은 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だから、こっちも言ったのね。それもらってあの世に持っていくのかって、冗談で言うわけやん。にこにこ笑いながら、あの世に持っていくの?ってね。すると自分の子供らにやるってね。親だからね。その欲まで持ってくのかと思って黙っていたの。何も言わないで。)그래서 나도 말했지. 그 돈 받아서 저세상에 가져 갈꺼야? 농담처럼 말하지. 웃으면서. 저 세상에 가져갈 거냐고. 그러면 자식들 준다고 하지. 부모니까. 그런 욕심까지 가져갈 건가 생각하면서 가만히 있었어. 아무말 않고.

배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이 많은 보상을 요구하는 걸 못마땅해 하셨다. 하지만 다른 할머니들의 그런 태도가 ‘부모’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해하고 있었다. 비판을 “농담처럼” 말하는 배할머니의 태도에서 나는 할머니의 고독을 읽는다.
할머니들간의 생각과 태도의 차이는, 세간에 보이는 것처럼 할머니들이 그저 투명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무구하고 맑은) ‘소녀’나 ‘투사’로서의 위안부상을 비판한 것은 그래서이기도 했다. 1990년대에 시도된 일본의 보상 이후 벌어진 할머니들의 분열, 지원단체와의 갈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화해를 위해서 2장). 일본인 지원자들 중 일부는 할머니들을 그저 무색투명한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 (그럴수록 강한 감정이입상태가 되는 것도 볼 수 있다. 주변인들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지에 대한 나의 생각은 2009년에 쓴 한 논문에서 밝힌 바 있다. 「あいだに立つ」とはどういうことかー「慰安婦」問題をめぐる九十年代の思想と運動を問い直す) 예를 들면 기타하라 미노리씨가 나를 격하게 비난한 것도 그런 심리적 결과가 아닐까 한다.

보상에 대한 다른 할머니들의 생각을 그저 욕심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배할머니가 그러한 생각에 거리를 둘 수 있었던 건 불교신자로서의 덕목이기도 하겠지만 가족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 날, <제국의 위안부>를 내고 난 후, 2013년 늦가을에 내가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생각을 갖는 할머니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なんで、あれ送れないのかといって、もうしゃべるでしょう。しゃべったらうちは黙っているでしょう。あなたは日本人がそんなに好きなのかって言うわけ。日本人のお客さんが来たら好きでしょう!って。それで言い返すわけ。うちは何も言わないで、黙ってテレビだけ見るー いや、黙ってテレビだけ見て、自分たちは(日本人の)ワルグチいって、うちも一緒になって言ったらいいけど、言わないでしょう。言わないから、みんなうち一人を注目するわけ。いやっていうのは、テレビ見ても、お金のこととか、そういう、あの、首相が出て来てもうちは黙っておるでしょう。だから、一緒になってワルグチ(いわないのが行けないの。)悪口言ったらいいのに、黙っているの見ていたらね、わたしとかね、自分の、、に言ってるわけ。)왜 그거 안 보내느냐면서 뭐라 그러거든. 그래서 내가 가만히 있잖어. 그러면 당신은 일본인이 그렇게 좋아? 그런다고. 일본사람 손님이 오면 좋지? 그러는 거야. 그렇게 말하지 그러면 나는 아무말 않고 테레비만 봐. 아무 말 않고 테레비만 보고 있으면 자기들은 (일본사람) 욕을 하면서, 나도 같이 해야 하는데 안 하잖어, 같이 비난하지 않으니까 모두 나를 주목하는 거야. 테레비를 봐도, 돈 얘기나…그 왜, 수상이 나와도 난 가만히 있거든. 그렇게 같이 비난을 하면 좋은데 하지 않는 걸 보고는, 내 얘기를.. 자기의.. 에게 말하지..

분명 배할머니는 일본을 좋아하셨다. 해방이후에도 일본으로 들어가 30년 정도 사시다가 80년대에 들어오셨다고 했다. 물론 오래 산다고 해서 그 지역에 꼭 애착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대화를 한 이후 할머니는 종종 나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대화가 거듭되면서 나는 할머니가 북한이나 중국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고, 중국에서 들어오신 할머니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배할머니는 해방 이후 냉전체제를 살아온 한국인 대부분처럼, 냉전 후유증을 깊숙이 내면화하고 있었다.

나눔의 집은 일본에 대한 호감을 공식적으로 드러내서는 안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나눔의집 건설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기부했고, 상주하는 봉사자들은 많은 경우 일본인이었다. 그럼에도 그곳에는 표면적인 적대와 실질적인 호감이 공존할 수는 없었던 셈이다. 표면적인 적대가 감정배치에서 우위에 놓이는 구조 속에서, 배할머니는 고독했다.

(そう、うちは仏教。家の中でも、他の人は仏教って、あの、何か、、、したから、、、だけで仏教じゃないの、他の人たちは。その、クリスチャンが四人おるわけ。心から徹底して、「うちはなんでもないです」っていって、でもうちら、お寺に寄付やったことでわかったわけ。あ、あのおばは仏教だなってそういうことわかったけど、その金をうちがね、ちょっとだけ服やらあったらね、たくさん要らないし、まぁ、他の人は親がなくなっていないけど、うちはその金を仏様にあれしたほうがいいなと思って、お寺に寄付したほうがいいなと思って、他のところより。お寺に寄付した。それで、気がさっぱりするもん。お寺の仏様に、何かあれに使ってくださいっていって寄付したわけ。) 그래. 나는 불교도야 . 나눔의 집에는… 크리스챤이 4명 있지. 아주 철저한. 그래서 나는 종교없다고 말하지. 그런데 내가 절에 기부한 일이 알려졌어. 아 저 할머니는 불교구나 라고. 그 돈을, 내가 말이지, 옷 조금 있으면 많이 필요하지 않거든. 글쎄 다른 사람이야 부모가 있지만(?). 나는 그 돈을 부처님께 드리는게 좋겠다 싶어서 절에 기부하는 게 좋겠다 싶어 다른 곳보다. 그래서 절에 기부했지. 그러면 마음이 비워지지. 절에 계신 부처님께 뭔가 (좋은) 일에 사용해 주세요 하면서 기부했지.

나눔의집 할머니들 사이에는 냉전체제 후유증 뿐 아니라 종교차이도 존재했던 것 같다. 세간에도 흔히 있는 그런 차이도 배춘희할머니를 더 고독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눔의집은 불교재단이 만든 곳이다. 나눔의 집에 상주하는 여승과도 가까운 듯 했다.

배할머니의 고독은 냉전체제 50년의 후유증이 만든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본’을 호명하는 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해방 이후 70년 동안의 한국사회가 만든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배할머니의 고독은 우리 모두가 만든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우리역시 그 구조 속에 함께 놓여 있다는 점이 우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자신 혹은 타자를 검열하는 일로 누군가를 억압하는.

배할머니와의 교류는 그런 고독과 마주하는 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