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 – 1. 역사의 사법화 (4)

1.역사의 사법화

(4)일본인과 천황–대통령과 문희상의장께

위안부문제 관계자들은 2000년에 있었던 여성국제전범재판을 통해 히로히토천황을 ‘유죄’로 단죄했다. 변호사였던 박원순 시장은 그 판결을 내리도록 종용한 ‘검사’중 한사람이었다.

아키히토전천황을 ‘전범의 자식’이라고 규정한 문희상의장의 인식이 2000년 여성국제전범재판의 영향을 받은 것일 가능성은 커 보인다. 그렇다면 이 역시도 ‘법적판단’이 한일관계를 악화시킨 케이스가 된다.

물론, 국제여성전범법정은 위안부문제 발생 이후, 냉전붕괴와 세계화의 영향으로 더 가까워진 세계여성들이 급격히 교류의 장과 시간을 늘릴 수 있었고 그 결과로 국경을 넘어 하나의 목소리를 내놓은 장이라는 점에서 평가할 만 하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인’ 위안부는 이 자리에서도 배제되었고 그런 한 이 ‘여성’법정은 반쪽짜리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법정’의 권위는 위안부문제에 대한 이해를 오히려 정체시켰다.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한 연합국조차 히로히토 천황을 ‘전범’으로 판결하지는 않았다. 군부와 천황을 따로 놓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판결이 맞는지 여부는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아직 위안부문제에 관해 충분한 이해가 없는 채로, 또 왜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처벌하는 대신 ‘상징’으로나마 천황으로 남겨두었는지를 모르는 채로 50여년 후 ‘현대’의 법관들이 성급한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처벌’을 강조하는 이들은 곧잘 매춘을 강요한 군인을 사형시킨 스마랑 사건을 강조하지만, 스마랑사건판결은 국가의 수장이나 군대의 수장이 아니라 개인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천황이 ‘처벌’당하지 않은 이유는 일본국민의 동요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연합국은 일본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황은 전쟁을 하지 못하게 한 헌법9조와 맞바꾸어져 말 그대로 ‘평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이후 44년을 살았다.

그런데 과거의 연합국의 판단에 대한 국제여성전범재판의 관심은 오로지 ‘처벌’여부에만 있었던 듯 하다. 그 판결은 시대적 진보의 양상을 띠었지만 실제로는 시대를 정체시켰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판결은 위안부문제에 대한 일본의 여론을 급격히 악화시켰다.

일본의 천황은 일본인들에게는 정치가 아니라 문화다. 일본인들에게는 국제여성전범재판의 판결이나 문희상의장의 발언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부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다만, 문의상의장이 천황의 사죄를 요구한 건 다른 한편으로는 지원자들이 주장해 온 ‘법적사죄와는 대치되는 발언이기도 하다. 일본은 그런 맥락도 읽을 필요가 있다. )

더구나 설령 천황이든 상황이든 일본을 상징/대표하는 이의 사죄가 있다고 한들 위안부문제자체와 해결과정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는 그것이 곧바로 한일관계우호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런 일이 가능하기엔 오해와 과장과 독주가 만든 상호불신과 혐오의 세월이 너무 길었다. 지금은 그런 일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한국사회는 그저 ‘사죄하지 않던 뻔뻔한 일본이 국제사회 압박에 못이겨 드디어 무릎을 꿇었다’고만 여길 것이다. 

이 4반세기동안, 법률가에 의해 역사문제가 좌지우지되고, 법정은 개인의 입을 틀어막고 정부를 조종하고 타국을 겁박하는 도구로 기능하게 되었다. 정의롭고 공정해야 할 법의 공간, 책임을 져야 할 주체조차 존경의 념을 가져야 할 공간을 그렇게 만든 건 누구인가? 복잡다단한 역사를 외교/정치문제화시키고, 단순한 예스 혹은 노로 대답하도록 만든 건 누구인가?

‘재판이 (일본재산의) 가압류판결을 내린 건 당연한 일이다. 일본과 한국정부가 사법부의 말을 들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최봉태)는 주장은 가히 오늘의 사법의 권력화 현장을 보여준다.

물론 그 조치가 옳다면 사법이라는 권력사용은 고귀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지원자들은 정부가 지원자들과의 논의를 거쳐 일본과 협의한 끝에 ‘한일합의’를 내놓자, 이번에는 그 내용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서 반대에 나섰다. 곧바로 수용하겠다는 의견을 낸 위안부할머니도 있었지만 그런 분의 목소리는 곧바로 묻혔고 지금까지도 그 정황엔 변함이 없다. 그 분들을 그저 회유당한 것으로만 보는(보게 만든 이들이 물론 있다)시선은, 정작 ‘당사자’의 목소리는 듣지 않았던 이 4반세기 한국사회를 상징한다. 

한일합의에 대해서는 다시 쓰겠지만, 그 정당성 여부와 상관없이 이 사실은 기억되어야 한다. 사법이 역사를 관장하는 주체로 나서 개인과 정부와 타국에 대한 압박의 도구로 쓰여졌으나, 정작 ‘당사자’의 목소리는 무시되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대통령과 국회의장께 제안한다. 한일관계를 회복시키고 장기적인 화해평화를 지향한다면 대화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동시에 그 논의과정을 언론이 국민들에게 전달해 모든 국민들이 듣고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고. 시급히 접점을 만들어야 하는 문제는 1년 단위로, 긴 시간이 필요한 프로젝트는 5년 10년 단위로 대화하면서 학자와 관계자들에게 논의를 맡기고 언론이 보도하도록 하면, 국민들은 그 보도내용을 바탕으로 생각하면서 싸우지 않고 교류할 수 있다. 10년, 30년, 50년,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간의 논의를 정리하고 합의된 사항을 각각의 교과서에 반영해 나간다면, 언젠가는 한일양국은 역사인식에서 접점을 만들 수 있다. 물론 그 프로세스에는 북한도 참여해도 좋을 것이다. 백년대계란 그런 것이다.

동시에 정부는, 2005년 한일협정 문서가 공개되면서 나온 징용문제는 한일협정으로 해결되었다는 민관합동위원회의 견해와 이후, ‘피해자’들을 위해 한국정부가 해 온 일을 제대로 공지할 필요가 있다. 논의는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 국민은 아직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얻지 못했다.

홍길동전의 작가가 허균이 아니라는 것이 이제야 밝혀진 것처럼, 역사에 대한 이해는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도 지원자들과 법정은 자신들만의 이해와 판단만이 옳다고, 그것에 따르라고 무려 4반세기동안 주장해 왔다. 심지어 알게 된 사실을 언론이나  국민들에게 공식적으로 밝히는 일도 없었다. 그 결과가, 현재의 한일관계다.

이 글은 그 과정에 참여한 이들의 사고를 재검증하기 위한 글이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목차 (전체보기)

1.역사의 사법화
(1) 들어가며
(2) ’법적사죄’주장과 ‘소송’의 무기화
(3) ‘역사의 사법화’에서 역사 ‘대화’로
(4)일본인과 천황–대통령과 문희상의장께

 

[형사1심] 제4회 공판기

제4회 공판기 (2016/11/8)

박유하

11월 8일에 네번째 공판이 있었다. 이번에는 나와 변호인이 제출한 서증(주장의 근거자료)을 검증하는 순서였다.하지만 시간이 충분치 않아 지난 5월에 제출했던 증거자료 43개 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을 뿐이다. 하나의 문서 안에서 여러개 자료를 제시한 경우도 하나로 묶었으므로 실제로는 휠씬 더 많다. 결국 참고자료로 제출한 160개 정도 문서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할 수 없었다. 배춘희 할머니와 나눈 대화의 녹취록도 참고자료로 제출했다.
나의 책이 허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협력이나 자발성 자체를 강조해야 했기에 이번 공판은 특별히 마음이 무거운 자리였다. 나의 책은 그런 것을 강조하는 일 자체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정에서의 공방이란 책의 취지를 협애한 것으로 만드는 행위였다. 물론 그것은 내가 시작한 사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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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 가난한 여성이 매춘업에 종사했다는 사실이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ICJ 보고서에도 나온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는 마을 이장이 공장 일자리 구해주겠다 약속했고 집이 가난해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ICJ 보고서에도 위안부의 대부분이 ‘가난한 소작농 가족 출신’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원고측 고소보충서에는 센다 가코의 책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보여주는 식민지 지배나 문제, 가부장제 문제를 정확하게 볼 수 없다고 쓰여 있는데, 이런 문제를 지적한 것이 바로 피고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고소보충서 내용과 피고인의 제국의위안부 내용이 큰 차이가 없다. 근대 공창제 하에서 형성된 여성 인신매매 매커니즘과 농촌경제 파탄에서 비롯된 빈곤한 사회경제적 생활이 ‘위안부’ 동원의 배경이 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위안부는 자발적으로 간 것’이라고 피고인이 말했다고 주장할 수가 있는가? 검사의 논리라면 위안부와 ‘매춘’을 연계시켜 언급한 쿠마라스와미는 물론, 정부위원회 보고서 작성자들, 원고측 대리인조차 이 자리에 서야 할 것이다.

검사: 그렇게 씌어 있다.

변호인: 공소사실 12번에 있는 ‘강간적 매춘, 매춘적 강간’의 의미는 ‘위안’이란 매춘과 강간 둘 다 포함한다는 뜻이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도 “대가로 돈을 받았고 돈 대신 전표를 받기도 했다. 전쟁이 갑자기 끝나서 자신이나 가족 먹여 살리겠다던 희망도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는 위안부의 증언이 인용되어 있다. 맥두걸 보고서에는 “성노예는 강제매춘의 거의 모든 행태를 포함한다.”고 쓰여 있다. 그러면서 강제매춘에 대해서도 ‘명예와 존엄을 심각하게 훼손한 행위’로 인정했다. ‘전쟁법을 위반한 강제 매춘, 강제 강간’ 등의 표현이 나온다.
또한 검찰이 증거자료로 제출한 정부간행 증언집 <들리나요 열 두 소녀>이야기에도 수익에 대한 부분이 명확히 나온다. ICJ 보고서에는 아예 요금표까지도 나온다.

판사: 정리하면, 변호인의 주장은 <제국의 위안부>에 나오는 매춘, 강간의 혼용 표현이 비단 이 책만이 아니라 쿠마라스와미, 맥두걸 등 여러 국제 보고서에서도 나온다는 주장이다.

검사: 이 책에 기재된 문구는 “위안부를 부정하는 이들은 위안부를 매춘으로만 생각했고 우리는 강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두 요소를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고 되어 있다. 위안은 매춘과 강간 두 요소를 포함한 것이라는 거다. ‘위안’에 어떤 매춘적 요소가 포함 되어 있었다는 것인가?

변호인: 일본군은 위안부를 관리매춘의 형태로 운영했다. 그 지적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인가?

검사: 일본군이 체계적인 요금 노동시간 등 책정해서 위안부 제도를 처음부터 철저하게 계획하고 관리했다. 변호인이 말한 보고서의 취지는 오히려 그만큼 체계적으로 관리해서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취지로 이해된다. 보고서는 매춘으로 인지했다는 취지의 것이 아니다.

판사: 어쨌든 맥두걸 보고서에도 강제매춘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거 아닌가?

검사: 위안부가 된 건 자발적인 게 아니라 본인 의사에 반해서, 사기나 유인의 방법에 의해서였다. 이게 중심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이 책에서 매춘도 위안의 두 요소 중 하나라고 쓴 뜻은, 위안은 매춘이고 자발성에 기초했다는 거다. 이게 문제라는 거다.

변호인: 피고인이 위안부의 성노예성을 부정했다는 것인가? 하지만 피고인은 책에 이렇게 쓰고 있다. “물론 위안부들은 자신의 몸의 주인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성노예임에 틀림없다. 식민지가 된 나라 백성으로서 일본 국민동원과 모집을 구조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다. 정신적 자유와 권리를 빼앗겼다는 점에서 분명 노예였다. 그들이 총체적인 피해자였음은 틀림없다.” 피고인은 성노예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검사: 위안부들은 자발적으로 가지 않았다. 본인 의사에 반해서 간거다. 그런데 피고인이 말하는 성노예라는 건 위안소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성노예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강제로 끌려 왔다는 말이 이 책에 어디 있나? 296쪽 보자. ‘자발적 매춘부라는 기억을 부정’. 그건 우리가 애써 부정해왔다는 말 아닌가?

변호인: “근본적으로 매춘의 틀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라는 부분도 기소대상이 되었지만 이 부분은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 대해 언급했을 뿐이다. 여성들이 기만당해 성노예가 된 것이다.
성노예성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라면 검찰의 주장과 결국 다르지 않다.
기소된 30번을 보자. “조선인 위안부란 이렇게 해서 조선이나 중국 여성들이 일본 공창제도에 편입됐다.”이 부분도 다른 학자의 말을 인용한 부분인데 기소되었다. 한국정부산하위원회 보고서 발간서 등도, 공창제에 편입됐다는 식으로, 같은 취지로 설명하고 있다.

검사: 그러면 위안부제도가 합법인가? 아니다, 불법이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똑같이 취급해놓았기 때문에 명예를 훼손한 거라고 주장하는 거다.

판사: 당시 일본 제국 하에서 공창은 합법인 것으로 안다. 위안부의 경우는 어떤가?

검사: 당시 국제법상 불법이다. (판사: 그럼 일본법상으로는? )
다수 학자들이 일본에서 미성년자매춘은 법률로 금하고 있다. 그런데 위안부에는 미성년자가 많았으므로 불법으로 보고 있다.

판사: 위안부가 불법제도라는 건 피고와 검사 다 인정하는 부분. 그런데 검찰은 지금 위안부가 합법제도가 아닌데 그 제도에 위안부를 편입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변호인: 합법인지 불법인지가 왜 문제되는 지 이해되지 않는다.
책에는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는 이미지를 우리가 부정해온 것 역시 그런 욕망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쿠마라와스미 보고서에 보면, (1)이미 매춘부였으며 자발적으로 일하고자 하는 여성과 소녀, (2)식당이나 군인을 위해 요리하고 빨래하는 보수 좋은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속임수에 속아서 온 여성들, (3)대규모의 강제적 폭력적인 여성 납치, 이렇게 다양한 경우가 있다고 쓰고 있다.
위안부의 이미지를 부정해왔다는 문장은 다양하게 해석 가능하다. 무엇보다 이 부분은 분명한 인용이다. (일본우익들이) ‘그들이 주장하는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 라는 이미지. 그리고 우리가 자발적 매춘부라는 이미지를 부정해왔다는 건 명시적 사실일 수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문장을 오로지 “피고인이 자발적 매춘부라고 주장했다.”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자의적이다. 이런 식으로라면 쿠마라스와미, 맥두걸, 고소보충서, 더 나아가 각종 위원회가 발간한 책자들, 위안부 할머니 증언서, 이런 것들을 전부 부분 발췌해서 당신의 취지는 매춘 강조에 있지 않느냐면서 명예훼손 걸 수 있다.

검사: 이게 인용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각주도 없다. 인용했으면 어디서 인용했다고 써야 한다. 그리고 이 책에 그렇게 안 쓰였지만 다른 인용은 괄호 안에 문헌 이름과 쪽수가 쓰여 있다. 검찰 혼자 이 책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게 아니다. 이 책이 나온 이후 많은 역사학자와 연구자들이 머리 맞대고 토론해서 나온 책이 있는데 보았나?

박유하: 이 부분은 총정리하는 부분이다. 즉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되짚은 것이고 앞 부분에 나오는 ‘자발성의 구조’ 라는 절의 내용을 반추한 부분이다. 말하자면 그 부분내용을 총체적으로 가져온 부분이기 때문에 따옴표를 친 것이다. 문헌 인용은 앞부분에 있다.
명예훼손이 되려면 대상이 특정되어야 하는데 검찰은 목소리를 낸 사람들 숫자가 적어서 특정된다면서 여가부에 올려져 있는 자료에 생존위안부할머니들 이름이 나와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하지만 그 분들 중에는 가명을 사용한 분들도 계시다. 지원단체가 낸 증언집도 마찬가지다. 즉 특정되지 않는다.
정대협이 재작년인가에 서울시에 위안부문제관련 대학생이벤트를 신청하면서 만든 포스터에는 <20만명의 조선 소녀들 끌려가서 2만여명이 학살당하고 2백수십명만 돌아왔다>고 쓰여 있다. 나는 위안부경험을 한 조선인 전체를 대상으로 책을 썼다. 특히 가장 감정적으로 이입한 건 전쟁터에서 죽어간 분들이었다. 생존해서 목소리 낸 사람만 피해자일 수 없고, 지원단체의 주장에 따르면 20만명이나 되는데, 책에 나오는 케이스를 어떻게 누군가의 것으로 특정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작년에 일본에서 <일본군위안부>라는 책이 나왔다. 부제목은 <애국심과 인신매매>다. 지은이는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위안부문제해결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온 지원단체다. 일본인위안부문제는 그동안 묻혀져 있었는데 뒤늦게 문제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부제목에 있는 것처럼 위안부란 ‘인신매매와 애국’의 틀이 중심이었다는 사실이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표지에는 ‘매춘부는 피해자가 아닌가’라고도 쓰여 있다. 바로 이것이 나의 문제의식이기도 했다. 검찰은 ‘매춘부’라는 말에 비난을 담아 말한다. 나의 책에서 그 단어는 인용일 뿐이지만, 무엇보다 검찰이 말하는 그런 의미로는 ‘매춘부’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강제성에 관해서도, ‘공적으로는’ 없었다고 쓴 취지는, 일본군이 위안소를 만들고 관리하기도 했지만 납치나 속임수까지 써서 데려오라는 것이 일본의 공식방침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너무 어린 사람은 업자를 다그쳐 돌려 보냈다는 증언이 존재한다. 다른 곳에 취직시키기도 했다는 자료도 있다. 그 경우 업자를 처벌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지만, 업자에게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지도 않고, 위안부의 실질적 주인은 돈을 주고 사 온 업자였으니 제재에도 한계가 있었을 수 있다. 식민지나 본토의 유괴현장을 단속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묵인도 포함해 책임을 물었다. 내가 강조한 것은 ‘일본군에 의한 물리적 강제연행’이 결코 위안부동원의 중심모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검사: 21세 이하는 중국 등지로의 이동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단속을 일본 본토에서만 적용했고 식민지에선 아니었다. 많은 학자들이 이 책을 비판했다.

박유하: 통첩문이 식민지에서 발견되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없다. 실제로 식민지 경찰도 유괴 등을 단속했다. 그런 자료는 강제성을 주장하는 일본학자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25년 전에 위안부 할머니를 만났고 10년 전에 위안부문제에 대해 책을 썼다. 검사는 짧은 시간에 많은 공부를 한 것 같지만 모르는 일이 여전히 많다. 그런데도 기존 연구와 지원단체 말만 믿는 이유가 무엇인가? 많은 학자들이 이 책을 비판했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은 위안부연구자가 아니다. 즉 실제 자료에 접한 이들이 아니다. 나를 위해 증인으로 나오겠다는 역사학자도 없지 않지만 서로 증인을 채택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부탁하지 않았을 뿐이다.

검사: 피고인은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 따옴표가 인용 표시라고 했지만, 그 부분의 따옴표는 작은 따옴표다. 피고인은 다른 인용은 큰 따옴표를 썼다. 그러니 인용이 아니라 강조다.

판사: 작은 따옴표는 인용할 때도 쓰고 강조할 때도 쓴다. 검찰은 인용이 아니라고 하고 피고는 인용이라고 한다. 서로 견해차이가 있으니 판단에 맡길 문제인 것 같다.

변호인: 그러면 증거자료에 대해 설명하겠다. 우선 증거 1호, <마리아의 찬가>. 일본인 위안부가 쓴 수기다. 일본인도 인신매매 틀 안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제출했다. “2500엔 빌려주어 그걸로 가구라자카의 빚을 갚고 700엔을 아버지에게 드리고 대만으로 건너갔다.”고 쓰여 있다.
또 하나의 자료는 같은 책에서 발췌한 것인데, 일본인 여성도 하루에 수많은 군인을 상대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피고인이 ‘위안부의 고통이 일본인 창기와 다르지 않다’고 쓴 부분에 대한 보충 설명자료다. “한 여자에게 10명이고 15명이고 달려드는 모습이란 마치 짐승과 짐승간의 싸움 같았다.”고 쓰여 있다.

검사: 증거 1호는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내용이니 이 사건 공소사실과 무관하다. 마리아 찬가 발간일이 1971년도다. 91년 8월 김학순할머니 진술 이후에 대해 쓰여진 것이 제국의 위안부다. 공소사실과 무관하다.

판사: ‘일본인창기’라는 말에 관계되는 부분이니 무방하다.

변호인: 증거 2.< 빨간 기와집>.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인 여성이야기다. 식민지에서 배로 떠날 때 일본인 여성이 2명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반도에 살던 일본인 여성도 위안부로 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제출했다. 식민지라고 해도 <일본제국>의 국민이 되어 있는 이상 군인이 강제로 끌어갈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다.

검사: 일본 매춘부는 성병 감염자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인 여성이 많이 끌려갔다. 일본 창기 일부는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갔다. 그걸 나타내기 위한 책이다.

박유하: (일본인 여성도 가난한 집 소녀들이 조선으로 팔려 오기도 했다. 그들도 위안부로 갔다. 그런 이들의 존재가 간과되고 있다. 조선인 소녀들도 물론 많았지만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여성도 있었다. 식민지는 순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만든 생각이다. 당시 조선사회는 성병이 만연해 심각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 위안부는 대우에 차이가 있었고 직접 차별받기도 했지만, 가부장제 하의 가난한 여성으로서 동원된 구조는 다르지 않다.

판사: 피고인은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말하지 말라. 변론은 원칙적으로 변호인이 해야 한다.

변호인: 증거3호 1, 2, 3은 위안부동원이 주로 인신매매로 이루어졌고 후반에는 14세이상 40세까지 400만명이 국가를 위한 근로봉사대 등 다양한 이름으로 총동원체제에 동원되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다. 이때 유곽의 창기까지 애국청년단등의 이름으로 애국을 강요당했다.
직업소개소가 속여서 보낸 정황, 그런 직업소개소를 경찰이 단속한 상황, 허가를 강화하려는 상황 등을 볼 수 있다. 식민지의 일본인 여성도 함께 했고, ‘병원선’에서 일해야 했던 정황도 나온다.
3-3은, 당시 사람들이 ‘만주’를 꿈의 땅으로 생각하고 이주하려 했음을 알 수 있는 자료다. 그런 틀 속에서 업자들이 인신매매등으로 여성들을 모아 데려간 것이었다. 물론 의뢰를 받은 경우도 있지만, 받기 전부터 움직인 사람들은 있다.
당시도 사기 등으로 이루어진 인신매매는 처벌받았다. 피고인은 그러한 정황도 전쟁을 일으켜 식민지의 가난한 여성들이 전쟁터로 동원된 것을 식민지화의 결과로 보고 구조적강제성이라고 말했다. 업자에 대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한 것은 당시도 사기에 의한 인신매매는 불법이었고 처벌받았기 때문이다. 군의 개입 자체는 충분히 서술했다.
4호증은 배춘희할머니의 영상 녹취록이다. 에프런을 두르고 군인들을 위해 천인침을 받았으며 위안부는 ‘군인을 돌보는 존재’라고 했다.
5호증 <들리나요>에도, 마찬가지로 물리적 납치 주체가 일본군이 아니고 유괴범들이라는 사실이 다수 적혀 있다. 부모를 위해 몰래 가거나 소개업자를 통해서 간 케이스도 많다. 소개소가 세탁을 한다고 거짓말을 한 경우도 나와 있다.

검사: 인신매매로 와도 묵인하고 넘어간 경우가 많았다.

판사: 일본군이 인신매매임을 알면서 묵인했다는 건지, 아니면 몰랐는데 아무튼 위안부가 필요했기에 받았다는 건지?

변호인: <제국의 위안부>에는 일본군이 묵인했으며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판사: 결국 헌병이 와서 직접 잡아간 게 아니니까 물리적 강제가 없었다는 것이고, 묵인하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면 되나? (피고인을 바라봄)

박유하: 그렇다. 하지만 부대마다 어떻게 처우했는지는 다를 수 있고 다양한 케이스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군이 관리했다는 것은 업자를 통해 부대로 왔을 때 업자가 계약서를 부모에게 받았는지 확인하는 게 원칙이었다는 이야기다. 속았다면서 우는 경우에 다른 곳에 취직시킨 경우가 있고, 나이가 너무 어리면 돌려 보낸 경우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부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전부 돌려 보냈을거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공식적인 규율은 업자로 하여금 계약서를 확인토록 했다는 사실이다.

판사: 20만명의 위안부가 있다. 8만인지 20만인지 몰라도 그 경우는 원칙대로 안 된 경우인데, 원칙이 안 지켜진 경우가 더 많은지 확인되는가?

박유하: 그건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안 지켜진 경우가 많다 해도 그 이유는 대부분 업자들이나 다른 주변인들에게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변호인: <빼앗긴 청춘, 돌아오지 않는 원혼>이라는 증언집에는 “3~40대 가량 보이는 남자가 오더니 배불리 먹을 것을 주고 좋은 신발도 주는 곳을 알아봐 준다고 따라오라 했다.”고 쓰여 있다. 가 봤더니 여관에 농민의 딸들 14~15명 있었다고 한다. 무엇 때문에 어디로 끌려가는지 모르고. 자물쇠로 잠겨있어 도망도 못해. 현장에 도착했더니 카키색 군복입고 각반을 찬 일본군 3명이 기다렸고 중국 상해역으로 갔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다. 농민의 딸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대상으로 위안부 모집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검사: 이 이야기는 오히려 강제로 위안부가 모집이 됐고, 군인이 모집 과정에 가담했다고 봐야 한다. 강제동원, 강제연행의 주체는 일본군이다. 그게 역사적 사실이다. 근데 이 사건 도서에서는 강제동원, 연행의 주체가 결코 일본군이 아니라고 서술하고 있다.

변호인: 물리적 주체가 일본군이라는 건가?

검사: 물리적, 구조적 주체 모두 일본군이다.

판사: 공소사실보면 일본군이나 국가가 강제연행을 지시했다고 볼 증거는 없다는 입장이다. 업자가 어떻게 데려왔든 이걸 묵인한 것에 대한 책임은 있을지라도… 일본국이 강제 연행이라고 끌고 갔다는 증거가 없다고 말했으니.

변호인: 증 7호-1-3. 이하는 <강제로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들>이라고 하는 정대협이 만든 증언집이다. 위안부가 국방부인회에 가입해서 협력을 강요당한 정황이 나온다. 어깨띠를 걸고 모자 쓰고 병사를 배웅하기도 하고 훈련을 받기도 했다. 황국신민서사를 외워야 했고 기미가요를 부르고 방공연습도 했고 간호활동도 했다. “안에 들어가 계급 높은 사람 만났다. 조선에 가고 싶다 말했다. 간호원이 부족하니 가겠냐고 물었다. 간호원은 3층에서 잤다.” 성노동 이외에 전쟁 협력을 강요받았다는 이야기이고, 강요된 애국, 강요된 협력에 대한 증언자료다.

검사: 이 증언집에 조선으로 보내줬다는 게 나온다. 그런데 떠나기 전 새로운 조선인 여자가 보충돼 왔다는 내용이 있다.
동원양상에는 일본인이 데려간 경우도 많다. 9-3에는 총검을 들이대고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을 외쳤고 강제로 트럭에 실려 끌려갔다고 나온다. 이는 직접적으로 강제로 끌고 갔다는 걸 말한다. (여복실의 경우)

변호인: 피고인은 책에 “군인이나 헌병에게 끌려간 경우도 있다.”고 명시했다. 다만 그 경우는 개인적 일탈로 봐야한다고 했을 뿐이다.

박유하: 현재 학계의 이해는, 점령지에선 강제연행도 있을 수 있으나 식민지에서는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이 중심적이다. 학계나 관계자라면 다 아는 이야기가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한 이야기는 일본군이 모집과 관리는 했지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데려오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물론 군인이 강제로 데려갔을 경우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지만 그 경우는 개인적 일탈이라고 해야 한다. 식민지라 하더라도 표면적으로는 국민의 한사람이니 강제로 끌어가는 건 불법이기 때문이다. 군인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많지는 않고 그 경우도 군복을 입은 업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보충-물론 진짜 군인이 함께 왔을 수 있으나 그 경우 오히려 더 형식적으로는 자원의 형태를 띈 듯한 정황이 <여자의 병기>에 보인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통치 방식이다.)

판사: 업자가 군복을 입었을 수도 있다. 개인의 일탈일수도 있다. 업자가 군복을 입었다는 사료가 있나?

박유하: 업자가 군복을 입었던 것으로 보이는 자료들이 있다. 추후 제출하겠다.

(하단에 재판정에서 말하지 못한 추가 내용을 덧붙인다 이하에서는 “박유하 보충”으로 표시: 7-4에는 위문단에 참가해서 간 여성의 증언이 나온다. 그런데 그 위문단 중에는 일본인 여성도 있었다고 나온다. 이 역시 한반도에서 강제연행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었다는 증거다
8호증은 요금표 등 위안소규칙들이다. 부상병을 돌보고 빨래하고 전쟁터로 배웅한 이야기가 나오고 병원에 입원한 위안부를 군인이 문병 온 이야기도 있다. 9-1에는 위안부생활이후 군수공장을 한 여성 이야기도 나오고, 그 행위를 이적행위로 인식해 그런 경험은 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9-2에는 조선에서 떠난 일본인 여성 이야기가 나오고, 9-3/4에도 위안소의 또다른 정황들이 나타난다.)

변호인: 10호증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에는 “나라를 위해서 나갔다.”는 증언이 나온다. 그러니까 보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이 가난에 빠져서 돈벌러’가야 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검사: ‘나라를 위해서’라는 말은 일본제국을 위해서라는 뜻이 아니다. 당시는 나라를 못 세워놨으니까 ..

변호인: 11호증도 같은 증언집 5권이다. 위안소의 정황을 알 수 있다.

검사: 증언집에 오히려 명쾌하게 정리 돼 있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군위안소 유형으로는 군직영위안소, 군전용위안소 및 일반위안소 중 군도 이용하는 위안소 세 가지다. 군 직영, 형식상 민간업자가 경영하나 군이 관리통제하는 위안소, 셋째는 군이 지정한 위안소. 이 요시미 교수의 정의는 아주 적절하다. ‘형식상 민간업자가 경영하나 군이 관리통제하는 군인군속전용의 위안소였다.

(박유하 보충: 12호는 <해남도로 연행된 조선인 성노예에 대한 진상조사> 는 정부산하 위원회가 만든 것이고 조선인 일본군의 증언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인 위안부 나이가 군인들보다 많아서 누님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대부분 일본여성이었다거나 일본여성이 조선인보다 젊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러한 이야기는 일부분의 이야기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이야기들이 무시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장소와 시간에 따라 수많은 다른 경우들이 있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13호증은 <일본군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라는 책이다. 위안소경영에 위안부의 ‘작부허가서’, ‘취업허가서’, ‘폐업허가서’등이 필요했고 그 서류를 군대에 보고해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안소 업자들은 같이 조합을 만들기도 했고 업자가 위안부를 대신해서 조선에 송금했다.
이동의 자유가 있었고, ’여자청년대’로서 응급처치법을 배우는 등 협력강요정황도 나온다.)

변호인: 14호증은 조선인 일본군이 쓴 책이다. 위안소에 대한 내용인데, 번역한 부분을 보면 위안소이름이 ‘애국봉사관’이었다. 일본군이 위안소의기능을 군인 전투력 향상을 돕는 것으로 ‘애국’하는 곳으로 생각했다는 증거다.
15호증은 일제시대 작가 최명익이 쓴 <장삼이사>라는 단편이다. 소설이지만 조선인 업자가 주체적으로 일본군인을 따라다니면서 위안소를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 자발적인 것은 업자였다.

검사: ‘애국’은 공소사실 중 하나다. 위안부가 애국적 동지적 관계였다, 나라를 위해 기꺼이 했다, 띠를 둘렀다… 이런 서술을 하고 있는데 이건 모두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 위안부의 내면에 대한 기술이다. 아무런 근거없이, 이 사건 도서에서는 조선인과 계속 등치시키고 있다. 유곽여자들이 하찮은 존재로 자신을 인식했는데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자긍심을 갖게 했다는 이야기다. 이 사건 도서에서는 아무런 근거없이 등치시키면서 위안부가 위안부와 동지적 관계였다고 적시하고 있다.

변호인: 그 부분이 일본인 위안부 경우라는 것은 피고인 자신이 책에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앞에 조선인위안부가 빨래하고 간호했다는 증언을 인용했고, 그래서 “조선인 위안부도 기본적인 관계는 같다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패전 전후 위안부가 부상병 간호하고 빨래, 바느질했던 배경을 이해할 수 없다. 조선인 위안부들도 사유리 등으로 불렸다. 대체 ‘일본인’이 되는 일…” 이 부분은 조선인 위안부에 부여된 역할이 일본 위안부와 같다는 걸 말하고 있다. “‘거짓 애국’ 과 ‘위안’에 몰두하는 게 그녀들에게 하나의 선택일 수 있었다.”고 쓴 것이다.
구조적으로는 일본인위안부와 같은 처지에 놓였지만 일본인 위안부와 다르다는 것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박유하 보충: 16호는 국방부인회에 대한 책이다. 위안부들이 왜 에프론을 입고 띠를 두르고 ‘애국’적인 행동을 해야 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다. 이른바 창기들도 ‘우리도 일본여자’, ‘나라를 위해’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동원에 적극 나서도록 만든 것은, 사회의 매춘에 대한 차별이었다. 조선인 위안부도 그 틀에 포섭된 것이다.
17호는 동시대 위안부모집광고다. 소개소가 18-30세 여성을 모집한 것을 알 수 있다. 신문에 이런 광고가 났다는 것은 위안부라는 존재가 공적인 존재였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하는 일을 명시하지 않고 있고 이러한 점이 사기모집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변호인: 증 18호는. 위안소 입구 사진인데, <몸과 마음을 바치는 일본 여성의 서비스>라고 입구에 씌여 있다. 다른 하나는 위안소 이름이 <고향>이거나 <애국 식당>이다. 이는 위안소에게 요구된 역할이 신체적/정신적 위안이었음을 말한다.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 위한.

검사: 조선인위안부는 동지적 관계가 아닌데 동지적 관계로 허위사실을 표현했다는 사실을 두고 기소한 것이다.

변호인: 피고인은 조선인위안부를 자발적인 동지적 관계라고 하지 않았다.
19호증은 당시 일본군인이 위안부는 ‘군속’이었다고 쓴 자료다.

검사: 그건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것 아닌가. 공소사실과는 관련이 없다.

변호인: 20호증이다.
<여자의 병기>라는 조선인 위안부의 수기다. 모집되어 강간당하고 울지만 나중에는 국방부인회에 가입하여 기뻤다고 하고 애국봉사단이 되어 일반창기와는 다르다고 자신을 인식한다. 그런 식으로 변해갔던 경우도 있다.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서일 것이다.
21호증은 일본인 위안부 경우지만, 많은 군인을 상대한 데 따른 고통이 나타나 있다.
22호증은 일본군군의가 쓴 <한구위안소>. 게이코(조선인 위안부)에게 사령관이 표창했다는 내용도 있다. 군인이 업자의 착취에서 보호하려 했던 내용도 나온다. 이 책에 나오는 위안소 이름도 ‘평화관’이다. 위안부가 사모님 취급을 받은 이야기도 나온다.
앞서 말한, 사기를 당해서 왔는데 다른 곳에 취직시킨 정황은 이 자료에 나온다.
23호는 금년 6월에 마이니치신문에 발표된 자료다. 미군의 포로를 심문한 자료이고 조선인이(군속일 가능성이 높다) 증언한 부분이다. 포로들에게 일본의 식민지통치 전반에 대한 생각을 물어 본 자료인데, 이 중에 위안부관련 언급이 나온다. 이들이 “한국 매춘여성 모두는 자원자였거나 또는 부모에 의해 매춘업에 팔려온 여성들이었다. 일본인에 의한 강제적 징발이 있었다면 남자들이 격분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쓰여 있다.

검사: 이 보고서에 군속이라고 나온다. 민간인 이박도, 백승규, 강기남 이렇게. 위안소를 경영한 업자들로 추정된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여기 에 끌고 온, 협조한 사람들은 처벌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원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가 강제로 데려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온 것이라고 말하려고 이렇게 증언을 한 거다. 따라서 이 증언은 신빙성이 낮아 위안부 자발성을 뒷받침하는 진술로는 보기 어렵다

변호인: 검사의 추측만으로 이 자료가 신빙성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판사: 이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한 내용이 신빙성 있느냐. 이건 좀 봐야 할 문제다.

변호인: 24호증은 70년 8월14일자 서울신문 기사다. ‘화류계 여성을 동원하던 일제는 점차 인원이 달리자 일반처녀들까지 소집’이라고 서술했다.
25호는 센다가코 인터뷰 내용이다. “일종의 매춘부였다.”고 하면서 “그녀들 스스로가 그것은 나라를 위해서라고 믿고 있었다.”고 말한다. <종군위안부>라는 책에도 같은 인식이 나타나 있다.

검사: <종군위안부>라는 책에는, 일본인 위안부에게는 ‘조국을 위하여’,’군인을 위하여’ 라는 의식이 있었고 자신의 행위를 애국심이라는 설탕으로 장식했다. 그러나 조선인은 강제연행되서 위안부로 일했던 여성들이다. 조선인과 일본인 위안부를 다르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 사건 도서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등치시켜서 같다고 말해 동지적 관계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판사: 강제연행이란 구조적 강제성이라는 얘기가 없을 때 아닌가. 물리적 강제성을 말하는 것일텐데.

변호인: 강제라고 해도 업자에 의한건지, 군에 의한 건지를 구별해야 한다. (동의함)
27호는 한국정부보고서다. 외교부 정신대문제실무대책반이 1992년 7월에 낸 것이다.
여기서도 군이 위안소 직접 경영하기 보다는 경영은 매춘업자에게 맡기고 군은 위탁 관리 등을 한 게 일반적이라는 인식이다. 모집 방법도 38년까지는 도시지역 여공모집, 식당종업원 등 인신매매 수법이고 38년~40년까진 빈곤 농부의 딸들을 모집했다고 쓰여 있다.
위안부에게 수입이 있었고 업자와 나누었다는 것 등 관리매춘형태임을 알고 있었다.

검사: 이 보고서는 일본군이 목적을 위해 군대를 위한 매춘업을 했고 군대가 직접 전면적으로 개입하여 철저하게 관리할 수 있도록 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군대에 종속된 집단이었다. 매춘업이라는 단어를 보고, 한국 정부도 매춘업이라고 인식했다고 입증취지로 제시했지만 한국 정부가 위안부를 매춘업으로 인식한 게 아니다. 보고서를 보면 일본군 시각에서 볼때 군대에 의한 강간 예방하고 성병 예방하는 등. 이를 위해 매춘업에 군대가 개입해서 철저하게 관리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위안부 연구 초기 시점이고 그래서 제목도 중간보고서다. 한국정부는 위안부를 매춘으로 인식한 적이 없다.

변호인: 이 당시 한국정부는 위안부를 관리매춘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그에 근거해 고노담화가 작성되었다.
28호 증4에는 각 대장에게 내리는 지시가 있다. 이 부분에는 ‘정신적 위안’에 대해 쓰여 있다. “현재 특수위안소는 위안부 수가 적어 단지 정욕 채우는데 불과하니 좀더 수를 늘려서 정신적 위안도 주도록 지도해라.”고. 신체적 성욕 뿐 아니라 정신적 위안도 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위안부의 역할이었다는, 강요된 역할이라는 증거자료로 제출한다.

검사: 오히려, 계획적으로 위안부가 운영됐다는 걸 보여준다. 자료 29에서 33은(<종군위안부 관계 자료집성>)은 아시아여성기금에서 펴낸 자료이다.

(박유하 보충: 이 자료들에는 계약서,영업허가서,취직허가서등이 나와 있다. 허가제라는 것은,미성년을 고용하거나 사기 등으로 데려온 사람이 없도록 하는 취지였다.
군인이 폭행도 많이 했지만 헌병이 단속했다. 말하자면 폭행은 있었지만 공적으로 허용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유곽을 위안소로 지정한 정황도 나온다. 군속에게 제복을 착용하도록 한 정황도 보인다. 군속취급을 받은 업자에게도 군복이 지급되었으니 위안부가 군인이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다. 위안부는 처음엔 동향사람이 모집되었다. 그 쪽이 더 정신적위안에 안성맞춤일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위안단중에 일본인이 90명 있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변호인: 다음은 위안부 문제해결 방안 연구 ‘여가부 용역 보고서.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낸 보고서. 연구책임자는 민디 코틀러(아시아정책연구소) 다. 이 사람은 미국하원결의를 이끌어내는데 공헌한 사람인데도, 위안부모집은 인신매매를 통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검사: 인신매매에서 매매주체는, 대상자가 아니고 ‘대상자를 강제 또는 기망에 의해 취득한 사람과 그 사람으로부터 대상자를 사려는 사람’이다. 대상자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을 팔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변호인: 이것은 단순강제연행이 아니라 부모등에 의해 팔려가는 등 형태였다는 말을 하기 위한 자료다

검사: 그럼 부모들이 아이가 위안부 일 한다는 걸 알고 팔았겠느냐. 인신매매 대상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팔았다는 거냐?

변호인: <제국의 위안부>는 속아서 간 경우도 스스로 간 경우도 모두 있다고 한다.
36호증은 2015년에 미국의 일본(역사)학자들이 내놓은 성명서다. 2015년 위안부 할머님들을 위하는 입장에서 나온 보고서다. 성폭력과 인신매매 없는 세계 만들기 위해, 아시아의 평화와 우호를 촉진시키기 위해 과거 잘못을 청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위안부 문제는 인신매매라고 인식하고 있다.

검사: 위안부는 군대에 의한 조직적 관리가 행해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일본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가난하고 약한 여성들을 착취했다는 점에서 문제다. 여성의 이송과 위안소 관리에 대한 일본군 관여를 밝히는 자료가 상당수 발굴됐다. 피해자들 증언에도 중요한 증거가 포함되어 있다. 증언들 차이가 나는 점이 있을지라도 전체로서 호소력 있고 공문서로 입증되고 있다. 증거도 존재하지 않고 증언은 일관성 없어 보이지만 전체적 증언은 분명 한 곳으로 향하고 있다.

변호인: (피고인은 그 부분에 대해 의견이 다르지않다.) 위안부와 공창제도에 관한 학자들의 연구도 많다. 일부를 읽겠다. “폐업신고는 폐업신고서를 내야 하는데 그 서류에는 주인업자들이 연명날인을 하도록 돼 있었다. 업자들이 자신들 이익에 반해 창기의 자발적 폐업을 인정할 리가 없었다.”, “군인의 성욕 처리와 성병 예방을 위해 공창을 설치했다.”…등

검사: 증거 38~41호가 공소사실과 무슨 관계가 있나. 위안부가 공창제와의 관계가 무슨 관계가 있나?

변호인: 위안부는 공창제도에 편입된 것이라고 여기에 기재되어 있다. 그러니 명예훼손이 아니라는 증거제출이다.

검사: 모집 장소는 일본 내지다. 차마 군에서 직접 손 댈 수 없는 일이어서 생각해 낸 것이 위안소다. 군속으로 되어 있지만 정식 군 소속이 아니며 내부에서 ‘어용 상인’으로 여겨지는 이시바시 도꾸다로오 같은 존재를 이용했다.

변호인: 인용한 부분은 필요성에 의해 인용했을 뿐이다. 동지적 관계라는 틀 안에서 물건 취급을 받는 것으로 명시적으로 말했고, 말 그대로의 네덜란드, 중국인 위안부 등 전쟁상대국 여성들과 비교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을 뿐이다.

검사: 연합뉴스 자료 보겠다. 정대협 조치 제안이 2015년 4월23일 나왔다. 군 위안부문제 해결 시민단체와 김복동이 23일 도쿄에서 제시한 방안이다….(생략) 피고인은 책임을 인정한다고 하는데 법적책임이 아닌 무슨 책임을 인정한다는 말인가.

변호인: 그런 것을 왜 문제삼아야 하는가. 하지만 정대협도 법적 책임에 관한 허들을 낮췄다고 표현한 바 있다. 법적 책임을 요구사항에 명시적으로 포함하지 않았던 것이다.

판사: 일본국에 법적 책임이 있느냐 아니냐는 쟁점과 상관이 없다.

박유하 :간단히 보충하겠다.
1)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를 동일시한다고 하는데 차이에 관해서도 썼다. 장교를 상대하면 인원이적으니 환경과 입장이 더 편할 수는 있다. 하지만 조선인 위안부도 장교를 상대한 경우가 없지 않았다.
조선인 위안부들 중에 일본인처럼 행동한 이들이 있는 건 오히려 이중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 창부조차, 일반여성처럼 ‘동등한 일본여성’ 취급을 받기 위해 국방부인회에 적극 가입하고 군인을 전송한다든지 하면서 사기를 드높이기 위한 행동을 했다.

2) 한반도에서도 일본인 여성들이 위안부로 나갔다. 위안단에도 섞여 있었다. 한반도에서 일본인여성이 나가는데 조선인만 따로 강제연행하는 일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힘들다. 당시에 갑자기 연행된 것은 주로 반체제 사상범들이었다. 전쟁터와 식민지의 차이를 봐야 한다.
검사는 안병직교수가 ‘위안단’ 모집을 강제라고 말했다고 했지만, 그 안에 일본인 여성도 많았다는 사실을 간과한 인식이다. 그들도 하루에 수십명 상대하기도 했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었겠지만 여성으로서 동원되어 당한 고통의 질은 같다.

3) 군복지급에 관한 지적이 위안소출입뿐이라고 검사가 말했는데, 한반도로 업자가 모집하러 왔을 때 군복을 입은 것으로 보이는 자료가 있다. 추가로 제출하겠다.

4) 위안소로 가는 걸 알고도 딸을 일부러 판 부모가 있겠느냐 했는데 그런 부모도 적지 않았다. 단 수양딸인 경우도 많았다. 가난에 따른 제도의 희생양이 된 케이스가 많은 것으로 본다.

<중국으로 끌려간 위안부 2>의 일부를 읽어 보겠다

“ 그때가 뭐 열몇살인지 몇인지. 아, 열여섯살 났을 거요. 술집에도 한 2년 있었으니까는.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도장 받아오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도장을 찍어 주겠나.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내 말이라면 또 믿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데리고 손을 잡고 도랑카에 나가서 사정을 했지요. “아바이 나, 누가 색시 사러 왔는데, 얼마얼마 주겠다는데, 내가 먼 데로 가서 돈 벌러 가갔소.” “여, 그럭하면 어떠카갔니? 내가 너 하나 보고 사는데 안된다.” “안될 일 없다구. 아버지 잘 사는 걸 보구 죽어야지.우리 아버지 돈 쓰고 그저 잡숫고 싶은 거 잡숫구, 나 하나 없는줄 알고 아버지, 나 소개해 주소. 어떡하갔어. 술집에 빠져서 2년동안 돌아 먹었는데 나 촌에 안 있갔시오.” “정 그렇다면 내가 소개해주지.” “그래 어머니 아버지 이름 다 쓰고 도장 다 찍고” “근데 할머니 할아버지 도장 다 찍으랍니다. 어카갔나? 아버지” “그럼 내가 쓰지” 아버지가 써가지구 할머니 도장 할아버지 도장 찍어서 그 다음에 다 동의를 받았수다. 그래가지구 박천으로 올라갔죠 올라가니까네 보더니 우리 아버지 하는 말이 “당신에게 내 딸을 팔았으니까는 다른 데 못넘긴다.” 그렇게 약속을 했단 말요.”

이런 이들은 적지 않았고,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이다.

판사: 중요한 자료같다. 왜 제출하지 않았는가? 제출하라.

박유하: 검사의 질책을 들으면서 제출필요성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자료는 너무나 많다.

5)허가 신청서를 업주 측 서류라고 검사는 말하지만 ‘작부’(당시는 위안부를 작부라고 부르기도 했다)로 본인들의 허가원도 필요했다. 또 센다가코를 인용한 것을 부정적으로 말하는데, 센다를 책에서 앞부분에 인용한 건 ‘애국’ 의 틀에서 이 문제를 본 저자가 내가 아는 한 센다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10년전에 같은 인식을 가졌지만 그 때는 읽지 않았었고 나중에 봤기 때문에 앞선 인식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인용한 것이다.

6) 검사는 위안부가 군속이어도 성노예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일본 국회에서 논의된 자료에 대해 쓴 글을 보면, 일본 위안부들이 전투자로 인식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수류탄 나르거나 빨래 하거나 한 것에 대해서다. 보상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추후 제출하겠다.

7) 18번 연합군 자료를 신빙성이 없다고 하는데, 그 발언의 앞뒤는 일제의 가혹함에 대해 쓰고 있다. 그러니 그 부분만 검사가 원하는 뉘앙스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신빙성이 없을 이유가 없다. 더구나 세 발언자 중 한사람에 대한 개인조서가 있는데 탄광부였던 사람이다. 검사가 추측하는 ‘책임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업자’가 아니다. 일제의 가혹함에 대한 비판을 전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사람이 위안부 관련 사항만 다르게 말할 이유는 없다. 추후 제출하겠다.

8) 미국역사학자들도 위안부문제에 관해 나와 비슷한 인식을 내놓았다. 2015년 5월의 일이다. 내가 <제국의 위안부>에 이들의 성명을 수록한 이유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위안부문제에 대해 가장 양심적으로 보도해 온 아사히신문이 2014년 8월에 노예사냥을 했다던 요시다세이지 증언을 검증하고 허위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한국에는 그런 취지가 잘 보도되지 않았다.

9) ’동지적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설명드린다. 우선은 형태적인 의미다. 그저 한국이 일본제국에 포섭되었으니 ‘일본’인으로서 동원되었다는 의미다.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위안부를 전쟁터에서 처녀들을 끌고 가 군인들이 강간한 것으로만 이해되어 왔기 때문이다. 식민지 통치 하에서의 국민동원의 일종으로 보아야 한다. 그랬을 때 실제로 얼마나 마음으로부터의 행위였는지 여부의 판단은 지극히 어려운 문제다.
그런 속에서 군인과 위안부가 사회 가장 최하층의 인간으로서 고향을 멀리 떠나온 사람들로서 감정적 교감을 할 수 있다. 형식적 틀은 민족적 관계지만, 실제관계는 남녀관계거나 계급적 관계다. 민족 관계로서의 동지적 관계일까봐 겁내고 부정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 정황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를 하나 더 읽어 보겠다.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라는 책이다. 작고한 분이다.

“ 나는 군인들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게, 즐거워하도록 할 수 있는 한 노력했다. 병사들의 가족이나 고향 얘기를 들어주었고, 같이 일본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가정이 있는 병사들도 불쌍했다. 그 사람들은 늘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는 것 같았고 그 중에는 울면서 이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전장에 있는 군인들의 마음과 우리들의 마음은 결국 같았던 셈이다. 전쟁터에 온 이상은 아내도 아이들도 목숨도 버리고 천황을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열심히 위로하고 그런 생각을 잊어 버릴 수 있도록 얘기해주곤 했다.”

이 분은 좋아하던 군인도 있었는데 그가 전쟁 끝나면 일본에 가자고 해서 자신은 조선으로 가야 한다고 했더니 그 군인이 “그렇다면 내가 조선으로 가지. 요시코가 일본인이 되어도 좋고, 내가 조선인이 되어도 좋아.”라고 했다고도 말한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번 야마다이치로가 찾아오는 걸 삶의 낙으로 여기며 나는 위안부 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또,

“ 그 칼은 천황 폐하로부터 받은 거잖아. 적에게 향할 것을, 왜 이렇게 험하고 먼 곳까지 당신들을 위안하러 온 나를 향해 겨누는 거야. 조센삐, 조센삐 하며 사람을 바보 취급하고. 우리들 조선인도 일본인이고, 일본인이 되었다고 그랬잖아.”
“ 세상이란 것이 정말 뒤집히는 경우가 실제로 있긴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입장이 바뀌면 인간관계도 변해 버린다. 그것이 또 다르게 나의 슬픔을 자아냈다. 그때까지 “일본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다. 일본인은 가장 우수한 인간이다.” 라고 했던 군인들이 나라가 전쟁에서 지자 순식간에 작아 져버렸다. 그건 너무 비참하지 않나 생각하자 또 눈물이 났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여전히 일본인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 타테8400부대의 군속이었다.”

판사: 그 두권의 책을 증거로 제출하라. 다음에는 피고인 심문 진행을 2~3시간 진행하겠다. 다음 기일에 피고인심문까지 하고 자료를 다음기일까지 받겠다. 최종변론은 3주후쯤 최종변론하고 결심하면 어떨까. 11월29일 오후 2시로 바꾸면 어떻겠느냐. 3주 후인 12월20일 화요일에 결심공판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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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NHK문제에 대해

할머니를 두번째 만나러 갔을 때 나는 NHK 서울지국 기자들과 같이 갔다. NHK기자는, 책이 나온 이후 어느 날 연락이 와서 인터뷰에 응한 것이 인연이 되어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내게,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한국언론이 긍정적인 것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이 책이 어떤 식으로 한국사회에 받아들여지는지 기록해 두고 싶다고 하면서 나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위안부 관련된 일에 관한 나의 행적을 가능한 한 기록하고 싶으니 관련된 행보를 알려 달라고 했었다. 나는 그에게 협조했다.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을 향해 쓴 책이기도 했고, 아시아여성기금 해산 이후 위안부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일본의 국영방송이 위안부문제에 관심을 갖는 일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그 기자는 마침 내가 다닌 대학을 나온 후배이기도 해서 여러번 만나는 사이에 친밀감도 생겼다. 위안부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의 그런 마음을 신뢰했다. 그래서 어느날, 배춘희 할머니와 전화 후, 찾아가기로 약속이 잡혔을 때, 그에게 나의 일정을 알렸다.

그리고 전 날, 나눔의집 소장에게도 내일 방문하겠노라고 문자를 보냈다. 대답이 없어서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문자를 보냈다. 그런데 그는 그 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NHK기자와 함께 찾아온 나를 노골적으로 경계했다. 그리고 영상촬영은 안된다고 못박았다. 그 날의 방문 목적은 식당에서 잠시 대화 나누었던 배춘희 할머니를 개인적으로 만나 차분하게 이야기를 듣는 일이어서 많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배춘희 할머니 영상녹화를 단념하고 할머니 방에서 그냥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궁금했는지, 나눔의 집 직원이 여러 번 동정을 살피러 왔다. 할머니에게는 당신의 뜻대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자유가 없어 보였다.

고발 직후 나눔의 집 소장은 이 날의 방문에 대해 내가 마치 ‘봉사활동을 하는 장면’을 찍고 싶어 했다는 식의 악의적인 거짓말을 페이스북에 썼다. 이후에도 관계자들에게 같은 이야기를 메일로 보냈다고 들었다. 2015년 12월, 내가 기소당하고 항의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도 똑같은 이야기를 퍼뜨렸다. 급기야는 더 나중에 일본인 지원자들을 상대로 한 모임에서까지 같은 말을 했다. 일본의 지원자들 중에는 그 말을 믿고 소장의 말을 SNS를 통해 확산시킨 이들도 있다.

그동안 소극적인 해명 밖에 하지 않았지만, 이제 다시 명확히 해명해 둔다. 이탤릭체는 나눔의 집 소장의 메일이 살포한 메일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박유하 씨 나눔의 집 OOO 소장에게 전화를 하여 정대협 반대 행동에 동참 강요

2014년 2월경 일면식도 없는 박유하 교수가 나눔의집 OOO 소장에게 전화를 하여, 소장님도 이제는 정대협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활동에 동참하자고 강요하였고, 전화를 끝내면서, 친절하게 전화를 받아 주어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박유하씨가 한번 만나자고 이야기 하기에, OOO 소장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만 제외하고 주말에도 나눔의 집에서 근무를 하니, 나눔의 집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이에 박유하씨는 외교부에서 발표를 하는데, 시간상 나눔의 집을 갈수 없어, 세종대학교에서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OOO 소장의 일정상 세종대학교에서 만나지는 않았다. (이상, 안신권. 2015년 12월 메일)

남아 있는 핸드폰 문자에 의거하자면 내가 나눔의 집 소장에게 처음 전화한 건 2013년 11월 15일이었다. 나는 위안부관련 외교부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고(나는 한 학자로서 의견을 말했을 뿐 `발표`하지 않았다), 참석자 명단에 소장의 이름이 보이기에 서울에 올 때 만날 수 있으면 만나서 사죄와 보상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그것이 그에게 전화한 이유다. 그리고 회의 이전에 서울에 올 일이 있으면 연락 달라고 했다. 나는 세종대에서 만나자고 한 적도, 정대협에 반대하자는 말도 한 적이 없다. 당연히 `강요`한 적도 없다.

11월30일, 첫 방문 날에도 미리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사무국장을 만나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말, 12월 7일에 ‘오후에 방문하겠다’고 보낸 문자가 내겐 아직 남아있다. 이 날이, 위에 적은 나눔의 집 두 번째 방문이자 배춘희 할머니와의 두 번째 만남 날이기도 했다. 그 이외 이야기는 일체 한 적이 없다.

다음날 나는, 불편하게 만든 데 대한 사과 말과, ‘나도 해결방법을 모색중이니 가능하면 책을 읽어 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나서 다시 만나자, 필요하면 책을 보내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는 내게 ‘바쁘신데도 나눔의 집을 방문해 주어 감사하다, 책은 직접 구입하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러니 그가 나에게 적대적으로 변한 원인이 꼭 이 방문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미 여러 번 쓴 적이 있지만 그가 나를 고발한 이유는 배춘희할머니와 긴밀하게 교류하게 된 일, 그리고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심포지엄을 통해 세상에 내보낸 일에 있다. 나눔의 집 소장은 이후 NHK기자의 인터뷰에 응하기도 했다.

박유하 씨 나눔의 집 방문 신청이나 할머님들 허락도 없이 NHK-TV 촬영 시도

박유하씨 나눔의 집을 방문하여 OOO 소장을 처음 만났을 때, 사전에 <나눔의 집 >이나 할머님들에게 통보나 허락 없이, 일방적으로 일본 NHK-TV 방송을 대동했습니다. 그리고, NHK-TV 기자는 할머님들과 박유하씨가 만나는 모습을 촬영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OOO 소장이 할머님들한테 사전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라고 했더니. 박유하씨가 미안하다는 소리를 하지 않고, <나눔의 집 >은 누구나 촬영하는 곳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이후 NHK-TV 기자가 OOO 소장에게 박유하씨 자원봉사활동하는 모습을 촬영하고 싶다고, 몇 번이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OOO 소장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 위해 박유하씨가 봉사를 한 적이 없는데, 뭐를 촬영하죠. 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래서 촬영은 불허 되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배춘희 할머니와 약속을 하고 갔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NHK기자가 있으니 함께 갈 거라는 이야기도 할머니께 미리 말씀 드렸다. 촬영대상은 내가 아니라 할머니였고, 내가 ‘자원봉사하는 모습을 찍고 싶다’고 NHK기자가 말했다는 것은 소장의 거짓말이다.

우리는 그날 한시간 여 동안 배춘희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장정일, 과거사 보도의 ‘자극 경쟁’과 ‘사실 경쟁’ (한국일보)

장정일 소설가

일본군이 만든 위안소의 조선인 위안부 숫자는 어떤 연구를 통해서도 아직 숫자가 확정된 바 없다.

그저 가해국(일본)은 숫자를 줄이려고 하고, 피해국(한국)은 숫자를 늘리려고 한다. 한국의 경우 위안부 문제 활동가들과 언론은 관행적으로 ‘20만’설을 채택한다. 2015년 12ㆍ28 합의 이후 신속하게 기획된 ‘시사IN’(제435호 2016.1.16.)의 군위안부 특집이 “일본군 강제 위안부 피해자는 최소 8만명, 최대 20만명으로 추정된다”고 쓴 것이 대표적이며, ‘한겨레’ 1월 12일자에 나온 이윤제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칼럼도 “약 20만명의 한국 여성이 성노예가 되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관행적으로 쓰고 있는 20만 설은 앞으로 늘어나든 줄어들든, 활동가와 연구자가 사료와 논리로 뒷받침해야 할 숙제다. 그런데 사고(社告)나 마찬가지였던 ‘한겨레’ 6월 22일자 기사는 “2차 대전 당시 일본 정부는 30여만명으로 추산되는 식민지 조선의 어린 소녀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끌고 가 성노예로 삼았다”라고 썼다. 20만에서 10만이 늘어난 30만 설을 주장하려면, 사료나 근거를 제시하면서 기존의 설을 논박해야 한다. 예컨대 ‘뉴욕타임스’가 600만명이라고 관행적으로 알려진 나치의 유대인 학살 숫자를 700만명으로 조정하고자 할 때는 그만큼의 설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언론이라면 당연히 거쳐야 할 확인 절차를 ‘찌라시’는 괘의하지 않는다.

만주사변 이후 조선, 중국, 남양군도(남태평양제도)에 일본군 300만명이 있었다. 20만명 설이 맞는다면 일본군은 병사 15명당 1명의 조선인 군 위안부를 둔 게 된다. 그런데 공인된 중국 연구자들은 최소 20만명의 중국인 군 위안부가 있었고, 강간을 당한 중국 부녀자의 수는 그것보다 많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일본군은 타이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식민지와 점령지마다 현지인으로 이루어진 군 위안소를 추가한 데다, 그것도 모자라 강간을 일삼았다. 이 모든 게 사실이면, 일본은 원자폭탄 두 방에 나가떨어진 게 아니다. 전쟁을 해야 할 군인들이 불철주야 성폭행만 하느라 패망한 거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인 인구를 1,500만명으로 잡고 남녀 성비가 같았다고 상정할 때, 20만명이라는 군 위안부 숫자는 37.5명당 한 명의 여자가 끌려갔다는 뜻이다. 그런데 적어도 750만명의 여자 가운데 위안부로 삼기 힘든 10세 아래와 30세 이상의 여자를 빼고 나면 결혼 적령기의 여자 가운데 대부분이 일본군의 마수에 걸려든 게 된다. 민족의 가슴에 불을 지르기 위해 찌라시나 같은 언론이 ‘자극 경쟁’을 계속 벌인다면, 슬금슬금 10만명씩 늘어난 끝에 100만명의 조선인 군 위안부가 있었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불놀이가 신문을 한 부 더 팔게 해줄지는 몰라도 이런 국내용 선동으로는 결코 일본의 국가 범죄를 추달하지 못한다.

최근에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한 책 세 권이 나왔고, 어떤 책은 ‘한겨레’에 대서특필됐다. 이 기사는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 극우 ‘산케이신문’의 격찬을 받았다는데 새빨간 거짓말이다. 지은이가 기소되자 “한일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책”이라고 쓴 것이 ‘산케이신문’이 보여준 가장 수위 높은 격찬(?)이었다. ‘한겨레’ 기사는 박유하의 책이 일본인으로 하여금 한국인 전체를“‘거짓말쟁이’ ‘사기 집단’으로 치부”하도록 만들었다고 말하는데, 행여 위안부 문제에서 한국인이 거짓말쟁이나 사기 집단이 되었다면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따로 있다.

위안부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언론 사이의 자극 경쟁은 비용(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자극을 하면 할수록 ‘민족 정론지’라는 영예를 차지하게 된다. 반면, 가령 위안부의 수를 낮추는 것과 같은 ‘사실 경쟁’은 비용이 드는데다가 ‘반민족 언론’이라는 오명마저 각오해야만 한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과거사를 다루는 세계의 모든 언론은 이 딜레마에 빠져있다. 언론이 사실보도와 진실추구라는 준칙에 근거한 사실 경쟁을 외면하고 자극 경쟁에 뛰어들 때, 그 나라 국민은 거짓말쟁이나 사기 집단이 된다.

원문: [장정일 칼럼] 과거사 보도의 ‘자극 경쟁’과 ‘사실 경쟁’ (한국일보)

渦中日記 8/10

비바람이 친다. 보통때 같으면 그 풍경에 그냥 자신을 내맡겼을텐데 오늘은 감상에 빠질 수도 없다. 광화문에서 단식투쟁할 이들의 곤혹스러움도 함께 떠오른다.

재판자료준비를 하면서 우울한 건, 책을 쓰면서 사용하지 않았던 자료들까지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점이다. 내가 쓴 얘기가 부정, 혹은 곡해당하니, 소송에서 지지 않기 위해서는 굳이 사용하고 싶지 않았던 자료까지 사용해야 한다. 그런 아이러니 앞에 놓이게 된 것이 많이 우울하다.

사진은, 위안부에게 의뢰받아 모르핀 외 군용약품을 반출하려다가 “영창20일”의 처분을 받았다는 자료. 1941년, 일본 육군군인/군속들의 <非行표>.
수많은 일탈행위들 속에서, 수많은 드라마를 본다.

본문: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936355716391343&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장정일,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시사IN)

장정일 소설가

한국과 일본은 군 위안부 숫자를 5만명에서 20만명까지 달리 추산한다. 여러 이유로 총체적 연구가 쉽지 않다. <제국의 위안부>는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려는 지은이의 강박 때문에 총체적 관점이 휘발되고 말았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대한해협이 아니라 군 위안부 문제가 놓여 있다. 실체를 발견하는 작업에서부터 해결 방안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는 경험의 소유권을 가진 피해 당사자가 엄연히 생존해 있기에 오히려 총체적 연구가 쉽지 않다. 이미 ‘일본군에 의한 조선 부녀자 강제 연행’이라는 단 한 줄로 군 위안부에 대한 상식이 완성된 터에, 그것과 다른 접근이나 그 어떤 보충도 친일파라는 지탄을 피하기 힘들다. 하지만 군 위안부의 복잡성은 아직 그 숫자마저 명확하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은 ‘20만명’설을 선호하고, 일본 연구자는 5만~7만명으로 추산하며, 만주에 주둔했던 한 일본군 병사는 “사단 군인 2만명에 50명” 정도라고 증언한다.

만주사변 이후 조선·중국·남양 군도에 일본군 300만명이 있었으니, 20만명설이 맞다면 일본군은 병사 15명당 1명의 조선인 군 위안부를 둔 게 된다. 현재도 우리나라에 주둔하는 미군 부대 근처에 반드시 기지촌이 있듯이 동서고금의 모든 군대는 병사의 성 욕망을 해결할 수단을 강구한다. 그 사실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저 수치는 정상이 아니다. 일본군은 새로운 점령지마다 현지인으로 이루어진 군 위안소를 추가한 데다, 그것도 모자라 강간을 일삼았다. 이 모든 게 사실이면, 일본은 원자폭탄이 아니라 불철주야 성폭행만 하느라 전쟁에서 진 거다. 참고로 최근 중국 연구자들은 최소 20만명의 중국인 군 위안부가 있었고, 강간을 당한 중국 부녀자의 수는 그것보다 많다고 주장한다.

20만명설은, 일제가 전쟁에 필요한 노동력을 징발하려고 만든 정신근로대와 군 위안부를 구별하지 않은 숫자다. 한국은 피해를 강조하고 일본의 야만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군 위안부의 숫자는 늘리고, 그들의 평균연령은 낮춘다. 하지만 20만명이 아닌 5만~7만명이면 일본의 야만성이 경감되고 책임이 없어지는가? 또 조선인 군 위안부의 평균연령이 25세면 10대는 아니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일제를 가리켜 인간적이었다고 할 것인가? 어느 경우든, 실체를 밝히는 것이 일본 옹호의 논리가 될 수는 없다.

일본은 고노 담화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군인들이 ‘관리’는 했지만 직접 모집하거나 영업은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해왔고, 바로 이것이 군 위안부 실체를 규명하는 가장 큰 쟁점이 되고 있다. 그러니 ①모집 ②영업 ③관리로 나누어 이 문제를 살펴보자.

①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일제 35년의 성격을 들여다봐야 한다. 2012년, 중국·인도네시아·베트남 등지에서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 연행 증거가 나오기도 했다지만, 조선은 전쟁터가 아니었다. 한·일합방이 된 1910년 이후, 조선은 일본과 형식상 한 나라가 됐다. 1등 시민인 일본인과 2등 시민인 조선인의 차이는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에게 당하는 차별보다 더 컸으면 컸지 작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조선은 행정제도와 법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군 위안부 대량 조달에는 잘 구비된 행정력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등에 업은 업자와 포주가 활동했다. 이때 취업 사기를 치러 온 업자에게 현지의 정보를 귀띔해주고 그들에게 공신력을 빌려준 장본인이 주민 사정에 밝은 면장이나 이장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강제 연행 사례가 전무하다고 뻗대는 것은 억지일 것이다.

일본군의 군 위안소 운영 여부를 따지는 ②는 상식적으로 풀이할 수 있다. 무기와 식량은 군대에 필수적이지만, 군인이 직접 총을 만들거나 땅을 갈지 않는다. 총은 방위 업체가, 쌀은 농부가 생산한다. 마찬가지로, 지역과 시기에 따라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군 위안소는 민간 업자에게 맡겨졌을 것이다.

③은 일본 정부가 인정한 것이다. 군대가 위안부의 위생을 직접 관리한 이유는 성병이 전력 차질을 낳기 때문이다. 국내 같으면 보건소가 했겠지만 전쟁 지역에서 그 일을 도맡아 할 기관은 군대밖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군대는 군 위안부의 이송에도 관여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① ②와 직접 연관된 정황이 미미하다고 해서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 그리고 천황(일왕)이 면죄되지는 않는다. 우선 일본군이 일본 정부에 위안부 설치를 요청했던 증거가 뻔히 나와 있다. 더욱이 애초에 일제 식민이 없었고,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군 위안소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광수나 윤치호의 친일을 단죄하는 이유

일제강점기의 조선은 저항과 협력이 공존했던 공간이다. 2등 시민이라는 차별에도 불구하고 한·일합방 이후에 태어난 가난한 계층과 여성 가운데 혹여 일본을 조국으로 착각하고 ‘동지의식’을 느낀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20여 년 넘게 일제 통치에 내면화(세뇌)된 때문이지 결코 그들의 허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견문을 넓힐 수 있었던 이광수나 윤치호의 친일을 단죄하는 것이다. 그들은 일제에 세뇌된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일본을 선택했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는 “‘강제 연행’을 하지 않았다 해도 ‘강제로 끌려가는’ 이들을 양산한 구조를 만든 것이 일본군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며, 그런 반성 위에 일본 정부가 “새로운 사죄와 보상”을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이라고는 “우리 안에도 위안부들에게 ‘사죄’해야 할 이들은 있다”라는 것 정도다. 하지만 사태를 하나로 묶고 파악하는 이런 총체적 관점은, 군 위안부를 착취한 일본군의 “하나가 아닌”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려는 지은이의 강박 때문에 휘발되고 말았다. 군 위안부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기억과는 다른 기억을 보충하겠다고 그들과 일본군 사이에 흘렀던 감정적 교류마저 나열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총체성을 흠집 내는 이런 다양성(나열)이 오해를 양산한다.

2013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 시민공원에 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부끄러웠다. 원래 저 소녀상은 미국에 있기 전, 먼저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조성된 독립공원에 세워져야 했다. 하지만 2008년 광복회를 비롯한 독립운동 유관단체들은 독립공원 내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난을 보여주는 박물관을 세우는 것은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운동을 폄하시키는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면서 박물관 건립을 저지했다. 그래서 서울 마포구 성미산에 따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지었다. 이처럼 민족의 역사는 자신의 가장 영광스럽고 순수한 기억만 보존하고 거기에 맞지 않는 것은 억압한다. 한때는 저런 잘못된 구습의 피해자였던 일본군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가 <제국의 위안부>를 놓고서는 자신과 다른 기억을 발굴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했다.

원문: 장정일의 독서일기,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시사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