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위안부’ 대법원 판결 관련 보도

대법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무죄…명예훼손 아냐”(종합) | 연합뉴스 (yna.co.kr)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유죄 파기… 대법 “무죄로 봐야” (chosun.com)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교수 “사상 자유에 관한 판결…감사하다” (chosun.com)

[광화문·뷰] 박유하를 때려잡던 그 몽둥이 (chosun.com)

신당 새로운선택 “박유하 무죄판결 환영”…민주당은 침묵 (chosun.com)

“친일 교수 박유하” 몰아갔던 인사들… 판결엔 입장 안 내 (chosun.com)

 

[주장] 박유하 교수에 대한 비난은 과연 타당한가

세종대학교 박유하 교수의 2013년작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논란은 오랜 세월 표류 중이다. 논란은 학문의 장을 넘어 법정으로까지 번졌다. 명예훼손죄 혐의에 대해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던 박유하 교수는 2017년 2심에서 벌금 1000만 원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최종판결을 내려야 할 대법원에서는 2022년 현 시점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주장] 박유하 교수에 대한 비난은 과연 타당한가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주간 금요일> 편집위원 특별 대담: 박유하

<주간 금요일> 편집위원 특별 대담, 2016. 6. 17 (1092호) 37쪽~39쪽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세종대 교수) X 나카지마 다케시 (도쿄공업대학 교수, 본지 편집위원)

서발턴의 목소리는 전달되었나?

“이 책은 매우 날카로운 일본 제국주의 비판서입니다.” – 나카지마다케시

“’국가이야기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 박유하

한국의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저술한 <제국의 위안부>가 한일 학자들 사이에서 장기적인 논쟁을 부르고 있다. 전 ‘위안부’ 9명에 의한 명예훼손 형사 고소로 작년 11월에 박교수는 불구속 기소되었는데, 이에 미국과 일본의 학자들 54명이 항의성명을 냈다. 한편, 성명에 대한 반론도 일어났다. 성명에 참여한 나카지마 다케시본지편집위원의 요청으로 올해 2월 일본을 방문한 박교수와 대담을 했다.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싸고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카지마: 저는 <화해를 위해서>의 일본어판이 2006년에 나왔을 때, 선생을 알게 됐습니다. 그 후, <제국의 위안부>가 한국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일본어판이 나왔을 때 곧바로 읽어 봤습니다.

이 책의 중요한 틀의 배경에는 서발턴 연구가 제기한 문제가 존재합니다. 서발턴연구란 1980년대에 인도를 중심으로 나온 문제인데,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주체성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의 다원적인 주체성을 다루면서,  그녀들을 여러 고통스러운 정황 속으로 내몬 제국의 폭력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매우 날카로운 일본 제국주의 비판서입니다.

박: 저도 바로 그 문제를 생각했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라는 표현도 비판을 받는데, ‘제국에 동원되었다’라는 것이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  ‘협력을 강요당했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국의 일원으로서의 협력도 말했기 때문에) ‘어느 쪽이 중심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그런 질문을 만드는 것은, 기존에 존재해온 개념으로만 이해하려 하는  사고입니다. ‘위안부’라는 다면적인 주체를 한가지 모습으로 규정하는 일을 유보하고 애매한 상태로 놔 두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일로 느끼는 것은 그러한 사고때문이 아닐까요?

‘애국’은 과잉 적응의 결과

나카지마: 박유하선생이  쓰신 중요한 문제중 하나는 ‘위안부’를 알선한 조선인 업자 문제입니다. 그들은 여성을 데려가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생활이 있었습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본의 뜻에 따를 필요가 있었습니다. 한편, 일부 ‘위안부’들은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내몰리면서도 제국 육군을 지탱하고 있다는 긍지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과잉 적응입니다. 일본의 우파 쪽 사람들이 말하는, ‘거 봐라. 잘 지내고 있지 않았는가’라는 식의 주장과는 정반대 이야기지요. 그런데 잘못 이해되어 우파논의와 같은 레벨로 취급 받고 말았습니다.

저는 인류학을 공부한 후 역사를 연구했습니다만, 우파와 좌파의 담론 사이에서 모두가 잘라내버린 사람들이 아주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제가 <나카무라야의 보오스>를 쓰게 된 커다란 계기입니다. 보오스는 일본의 제국주의에 비판적이면서도 일본의 군사력을 사용하여 아시아, 인도를 해방시키는 수단으로 쓰자고 주장했습니다. 우파, 좌파 각개의 역사이야기만으로는 파악해 내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똑같은 문제가 한국에서 친일파로 불리는 사람들의 평가에도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이광수가 그렇습니다. 그는 그저 일본에 아부하지 않았고 일본에 대해 매우 엄중한 비판론자였습니다. 그러다가 30년대에 들어와서 바뀌었습니다.  ‘일군만민’ 등의 일본의 국체론을 전용해서  “황국신민은 천황폐하 아래에서 평등하다. ‘내선일체’라고 할 거면 평등하게 대해 달라”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반격을 하기 위해서 일본의 국체를 (자기 방식으로) 전용해 나갑니다. 이런 식의 주체성을 주의 깊게 읽어내는 작업이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 동시에,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라는 책이 한국에서 2013년에 출간되었는데, 이 관리인 남성은 ‘황국신민’이라고 할 만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책 후반에 나오는 1944년 설날일기에는 ‘천황의 위광을 온 천하에 떨쳐야 한다’, ‘황군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원했다’(321쪽)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는 1905년생이니 정확히 일본에 의한 병합시대를 산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내면에 ‘애국’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마음이 생겨난 정황은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특히 총력전 체제 이후에는 위안부도 그런 틀 안에서 동원되었다는 것을 제 책에서는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우파의 사고나 논의가 어떤 점에서 문제인지도 썼습니다.

우파에 대한 서포트작업이 아니다.

나카지마: ‘위안부’가 된 여성들과 병사의 이른바 의사(擬似)가족화라는 문제를 우파 사람들은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해석해 버립니다. 하지만 이런상황이 보여주는 슬픔만큼 가혹한 일은 없습니다.

<제국의 위안부>에 쓰여 있는 것은 고향에 가족을 두고 온 일본인 병사가 ‘위안부’에게 의사가족이 되기를 요구해 나가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전선에서 죽음의 공포와 싸우고 있습니다.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유일하게 약한 모습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상대가 ‘위안부’였습니다. ‘위안부’들은 그 슬픔과 고통을 받아주려고 합니다. 일부 병사는 ‘위안부’처럼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징병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병사의 행위는 ‘제국’에 의해 구성된 가해구조 바깥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박: 시기와 공간에 따라 다른 체험을 했으니,  한 사람의 ‘위안부’ 안에 복합적인 감정이 있다는 사실, 같은 시기와 공간 안에 있었어도 연령이나 일본어 능력 등에 따라 경험이나 감정이 달랐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 속에서 제가 쓰고 싶었던 것은 ‘국가 이야기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입니다. 진심에서건 표면적에서건, 인간은 국가 이야기에 자신을 아이덴티파이(동일화)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바람직한) ‘이야기’와 맞지 않는 체험이나 감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이 표면화됐을 때, 국가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은폐하거나 반대로 징벌하거나 합니다. 그런 일에 젠더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지요.

나카지마: 이를 두고 일본의 우파를 서포트하는 논의라고 말하거나, 일본에 대한 면죄론이라고 인식해 버리는 것은 정말로 말이 안 됩니다. 일본의 특공대에서 죽은 젊은이들이 있습니다만, 그들의 ‘이야기’는 우파가 일원화하고 있습니다. 국가를 위해, 천황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런 ‘이야기’와 부합하지 않는 특공대원은 많이 있습니다. 너무 싫어서 도망친 사람 등,,여러 주체성이 있지요. 특공대를 하나의 이야기로 환원하는 것은 주체의 다양성이나 복잡성을 말살시키는 일입니다. 똑같은 방식의 ‘이야기의 폭력’을 좌파가 행해서는 안 됩니다.

박: ‘위안부’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해 온 사람은 소수입니다. 하지만 언론이 위안부’ 문제에 강하게 공감하면서 국민을 개입시켜 논의가 두 쪽으로 갈려 있습니다. 이 분열은 한일 문제처럼 보이지만 저는 좌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어떤 사태를 곧잘 정치적 입장에 입각해서 바라보기 쉬운데, 그런 입장과 상관없이 사태에 대해 생각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설 공간은 좁아졌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들려오지 않았던 목소리를 듣고, 제3의 공간을 넓히는 시도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가 ‘제국’이라는 말에 담은 것은 민족뿐만 아니라 성이나 계급의 지배, 배제/차별의 문제입니다. 즉, ‘위안부’ 문제는 지금까지 일본이라는 국가 주체의 문제로 여겨져 정치 문제로만 이해되어 왔지만, ‘이동’을 유발하는 경제 문제가 주목되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경제적 욕망을 내면화하는 형태로 많은 사람들이 ‘이동’해 갔습니다만, 그런 문제에의 주목이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을 착취하는 일로 경제적 이익을 얻은 것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의식과, 거기에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자기반성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업자 중에는 일본인도 있었고, 그 사실도 썼습니다.

이분법 바깥의 사태를 그려냈다

나카지마: 일본인 병사와 협조한 ‘위안부’라는 것은 지원단체가 그리는 피해자상과는 다릅니다. 한편으로 일본의 우파가 그려내는 ‘매춘부’라는 상과도 다릅니다. 그런 식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존재를 드러내는 일로  ‘제국’의 폭력구조를 밝혀내려고 한 것이 박유하선생의 저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저를 비난한 사람은 한국의 경우 남성학자가 많았습니다. 일본을 면죄하는 일은 하지 말라고요. 하지만 그러한 비판이 무엇을 면죄하고 억압하며 은폐하고 있는지 거꾸로 묻고 싶었습니다.

일본인, 일본 국가에 의해 조선 민족이 지배 당하고, 피해자가 되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만 보는 동안) 민족 레벨 이외의 구조적 문제가 사라져 버렸지요.

나카지마: 80년대 말부터 90년대에 논의되었던 서발턴의 목소리의 대변/ 표상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스피박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비판해 온 것은 특정 서발턴을 만들어 대변/표상하는 일의 권력성과 폭력성입니다.

박: 맞습니다. 저는 ‘전문가도 아니면서’라든지 ‘운동가도 아니면서’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당사자도 아니면서 화해를 말하지 말라’는 말도 들었는데, 오늘날까지도 뿌리 깊은, 당사자를 일원화하는 사고가 또다른 당사자를 배제하는 권력으로서 기능해 왔습니다. 동시에 ‘대변자(후예)의 당사자성’이 빠진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들을 돌아 보지 않아서 생긴 권력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나카지마: 저도 작년에 박유하선생님의 불구속 기소에 항의하는 성명에 이름을 올린 후, ‘전문가가 아니다’라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저는 사상사와 쇼와(昭和)사도 연구하고 있고 넓은 의미에서 역사학자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조선어 문헌을 읽을 수 있을 것, ‘위안부’ 연구자일 것 등이 ‘위안부’ 문제를 논하는  ‘전문가’의 요건이 된다면 대부분의 논자들은 의논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전문가가 아니다’라는 말의 억압 때문에 문제를 다각적으로 논할 수 없게 되지요.

지워져 버린 ‘주체성’

나카지마: ‘나눔의 집’의 방침에 거리감을 느끼던 전 ‘위안부’분의 존재가 책에 쓰여 있습니다. 특정 ‘위안부’상이 확립되어 버리면 그 자신의 생각은 그 공간에서는 지워져 버리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나눔의 집에 거주하면서 일본고발에 참여하는존재도 중요합니다. 어느 쪽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면이 있으면서도 정치에 휩쓸려 온 전 ‘위안부’의 전체상을 보지 않으면 문제는 한 발짝도 진전되지 않을 것입니다.

박: 그 분은  운동의 방식과 ‘위안부’를 둘러싼 이해에 관해 (지원단체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던 분이었습니다. 가족이 없기도 해서 자주 저에게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일본을 비판하지 않으면 주변으로부터 ‘일본을 좋아하는 거지?’라든가, ‘가짜 위안부’라고 비판 받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또, 먼저 이쪽이 ‘용서하겠다’고 하면 일본이 그에 맞는 대응을 하지 않을까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 목소리를 저는 고소 당하기 직전, 14년 4월 한국에서 개최했던심포지엄을 통해 알렸습니다. 지원 단체를 거치지 않고 보상금을 직접 받고 싶다는 또다른 목소리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한달 반 후에 고소를 당했습니다.

나카지마: 그런 식의 차이나 (어느 한쪽으로 규정할 수 없는) 불규정성이 중요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에서는 그런 부분이 완전히 도외시 되어 버립니다. 박유하선생님은 여기에 메스를 가해 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서발턴 연구의 성과에 바탕한 중요한 문제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2016년 2월 5일, 오사카 시내에서

일본어원문(日本語): 対談原文 – 『週刊金曜日』2016年 6月 17日号より

<기자간담회 요약> – 2016년 7월 11일

기자간담회 자료 전문 다운로드

[요약]

1) “일본군/국가의 책임을 극소화했다”

국가책임을 말했고 그에 따른 사죄보상을 요구했음
당사자 포함한 협의체 제안
“대화로써 일본과 마주해야 한다”(제국,311)
“정부는 일본과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제국,312)

 

2) “일본어판과 다르다”

일본어판은 단순번역이 아니라 일본인독자를 향해 다시 쓴 책. 다시 쓴 책이 표현이 다른 건 당연.

 

3) “일본인과 조선인을 동일시했다”

차이/차별 구조와 고통 지적

 

4) 업자가 주범이라 했다

“법적책임’에 고집한다면 업자책임도 물어야 한다”고 했을 뿐

 

5) 위안부의증언을 찬탈했다

위위안부의 증언은 다양. 한 사람의 체험과 생각이 균일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당연. 기존 연구자와 지원단체가 대변하지 않았던 부분을 보여 주었을 뿐.

 

6) “부정론자들의 담론을 기본적인 수준에서 계승”

근거없는 단정. 그랬다면 일본진보지식인이나 매체가 평가할 수가 없음

 

7) 센다 책에 조선인/애국은 없다

일본인의 증언임을 처음부터 지적. 애국을 읽은 건 박유하의 해석.

 

8) ”동족”이란 위안부 아닌  일본군의 목소리다”

일본군의 목소리임은 처음부터 지적.

 

9) “위안부의 평균나이가 25세”라고 했다”

전체평균이 25세라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자료 중 하나로 제시

 

10) “위안부문제를 한국정부가 포기했다고 했다”

박유하가 지적한 건 위안부문제가 아니라 개인청구권

 

11) “조선인을 거짓말쟁이라고 했다”

“식민지의 거짓말”의 방점은  식민지. 해당부분은 제대로 읽으면 어디로 가는지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거나 못했던 이들의 슬픔을 강조한 부분(일본판에만 있는 이유) – 초보적 오독

일제시대 조선인포로심문 조서

와세다대학의 Toyomi Asano 교수가 중요한 자료를 발굴했다는 기사가 오늘아침 마이니치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한국언론도 많이 보도한 듯 한데,아사노교수의 허락을 얻어 원자료를 번역한 내용을 올려둔다.

하나하나 다 흥미로운 내용이지만,나로서는 특히 18번 위안부문제 관련발언과 일제시대 종식이후에 대한 동시대인의 인식이 드러나는 25번,26번이 흥미로웠다.

사실,`여성들을 강제로 끌어갔다면 남자들이 앉아서 보고만 있었겠느냐`는 건 오늘날도 가끔 듣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말을 동시대인의 입으로 듣는 건 묘한 긴장을 준다.
——————————————————

(역자주: PW는 Prisoner of War (포로), PsW 는 Prisoners of War (포로들), Allied 는 연합국으로 번역하였으며, conscription 은 경우에 따라 징용 (업무의 경우), 징병 (군의 경우), 또는 징발 (위안부의 경우) 으로 번역함. MOO는 Military Operation Officer (군 운영 장교) 로 번역함)
국립 ARC 로부터 재발급
기밀문서
군 정보국
포로 및 물자부
보고일 : 1945년 4월 24일
(포로)심문일: 1945년 4월 11일
(포로)번호 및 계급: 41J-1150, 민간인, 이복도
14J-185, 민간인, 백송근
41J-393, 민간인, 강기남
WME
한인 해군 민간인 3명에 대한 종합 보고서,
리스트 78번. 45년 3월 28일 “한국인에 관한 특별 문의사항” 에 대한 회신
1538

서두
심문자에 의해 질문받은 약 100 명의 한국인 포로들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반일감정을 공유했다. 몇몇 한국인들은 기회주의자일 가능성이 있으나, 이 3명은 자신의 증언에 있어 신뢰할 만한 매우 진실한 증언을 보여준다. 한 포로에 대하여 별도 보고서가 만들어질 것이고 다른 두명은 추가의 심문이 필요하지 않다.

설문지
이 보고서는 45년 3월 28일의 “한국인 심문” 리스트 78번에 기초하였다. 단락 번호는 이 리스트의 질문 번호에 상응한다.

2. 지방정부의 한국인:
마을의 우두머리는 항상 한국인이다. 우두머리는 그의 정직함과 리더쉽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로부터 선출된 연장자이다. 일본인은 이 선거를 조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한국 정부 관청의 관리장:
“면” 대부분의 사무소장은 한국인이다. 10개중 2개 정도가 일본인이다.
“군” 사무소의 장은 보통 한국인이다. “전라북도” 에는 14개의 ‘군’ 이 있고, 1942년 기준 9개소의 장은 일본 정부에 의해 임명된 한국인이다. (상세 정보 없음)
“읍” 사무소의 장은 주요 인구 구성에 따라 일본인과 한국인 양쪽 모두가 있다.
“부” (시) 의 장은 언제나 일본인이지만, 이외 직책은 한국인일 수 있다.
“도” 지사는 대개 일본인이다.
1942년, 전라북도, 충청북도, 강원, 황해도의 도지사는 한국인이었으며, 나머지는 일본인이었다.
1940년 이래 정부 관리 직책을 가진 한국인 숫자 변경은 알려진 바 없다.

3. 한국 남성은 1942 이래 일본에서 일을 하도록 징용되어 왔다. 그들은 면사무소에 의해 통지되었다. 한번에 300 에서 1,000 명이 징용되어 일본에 이송되기도 했다. 이런 이송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93 가옥이 있는 한 마을에서는 30명의 남성이2년의 기간 (1942-44) 동안 징용되었다. 징용 기간은 2년이지만, 많은이들이 3년 또는 그 이상 기간동안 체류했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일본에 거주하던 한 포로는 석탄과 철광 광산 및 비행장 건설에서 일하던 한국인들과 여러 개인적 연결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광산의 가장 깊고 뜨거운 곳에서 일하는 등 가장 열악한 노동이 요구되었다.
탄광에서 일하는 인부는 일당 ¥ 3.50 을 받았고 그중 ¥ 0.10 은 우편 적립으로 공제되었다. 그들에게는 음식과 숙소가 제공되었다. 징용자들의 가족을 위한 보조는 없었다. 그들은 그들이 절약할 수 있는 만큼의 돈을 그들의 집으로 송금할 수 있었다. 친나이 카라푸토 (Chinnai, Karafuto) 탄광에서는 현지인과 일본인 노동자는 일당 ¥ 7.00 에서 ¥ 24.00 을 받았으나, 징용자들은 고정 급여만을 받았다. 통신은 허용되었으나 모든 서신은 검열되었다.
이들 한국인들에 대한 처우는 연합국 포로들보다 열악했다. 일본에 살던 포로는 요시마 후쿠시나켄 (Yoshima, Fukushina Ken, 역자주, Fukushima Ken 일수 있음.) 근처의 탄광으로부터 3명의 한국인이 탈출하는 것을 도와주는데, 거기엔 500 징용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이들 중 한명은 그가 아키라(Akira) 로 데려가 한 탄광에서 일하게 했지만, 그가 가족에게 쓴 편지로 인하여 체포되었다. 그는 요시마 (Yoshima)로 끌려가 15일간 고문을 받고, 타이라 (Taira) 에 수감되었다. 다른 2명은 잡히지 않았다.

4. 한국인은 1942년 이후 중국 북부, 만주 또는 일본으로 이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한 포로는 한국인들이 만주에서 일하도록 징용되었다고 하며, 다른 두명은 만주로 보내어진 징용자는 없었다고 한다.

5. 징용을 거부하는 자는 투옥되었고 그의 가족은 식량을 빼았겼다.

6.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사진과 서명이 부착된 신분증을 반드시 소지해야 한다.

7. 농민들에게는 하루 2 합 5국 (*역자주: 2 合5局,2 go, 5 shaku, 구글 검색 결과 현대의 0.415 리터에 해당) 의 쌀이, 그리고, 사무 직원에게는 하루 2 합 4국 (*역자주: 2 合4局,2 go, 4 shaku = 구글 검색 결과 현대의 0.433 리터에 해당)의 쌀이 할당되었다. 추수 전, 정부 관리는 곡식을 검사하고 추수량을 예상하여 그해 농부와 그 가족 할당량을 공제한다. 나머지는 정부 관리에게 판매해야 한다. 추수량이 예상치보다 많을 경우 농부에게 행운이고 여분의 쌀을 숨길것이지만, 추수량이 예상치보다 적을 경우, 그는 자신에게 할당된 양에서 빼내 요구조건을 맞춰야만 한다.

8. 한국인들은 일본인 농민들은 그런 배급할당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대단히 분개하고 있다. 농민들이 반쯤 굶주리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냥 열심히 일한다. 비가 거의 오지 않아 1942년 전라북도의 쌀 농사는 흉년이었다. 같은 이유로 1945년의 쌀농사 결과도 그것보다 조금 나은 정도일 뿐이었다. 1941년 이후, 상용 비료가 모두 사라져, 모든 농사가 평균 이하의 결과를 가져왔다. 노동력 부족이란 이유로 사용되지 않고 내버려진 농토는 없다. 여성들과 어린이들은 전쟁 전에 비해 더 많은 농사 일을 한다. 마을 사람들은 필요한 곳에 어디든 함께 돕는다.
한국의 남부지방에서는 경작지의 절반은 쌀경작에서 제외되고 면 농사를 하도록 농민들에게 요구된다. 검사원은 수확량을 예상하였다. 농민은 필요할 경우 여유분을 생산한 사람에게 빌려서 이 예상치를 맞추어야 했다.

9. 소작농은 신분증을 소지하도록 요구되지는 않는다. (다른 계층에 대한 정보는 없다) 그러나, 개개인의 인적사항은 “면 사무소” 에 보관되었다.

10. 1942년과 1944년에 각각 한국을 떠난, 농민이었던 두명의 포로는 어떤 형태로든 배급표라는 것을 본적이 없다. (다른 한명은 1935년부터 일본에서 살아왔다.) 의류 구매 요청은 직접 “면 사무소” 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음식은 그들 자신의 경작물로부터 할당되었다.

11. 1944년 4월, 한국인의, 경찰의 승인 없이 차량에 승차하여 100 km 이상을 여행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보행자는 통제되지 않는다. 시민들은 정부 관리에 의해 그들의 집에서 아무때나 검문될 수 있었다. 검문은 자주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일어나는 경우, 집 구성원 전원의 모든 증명서가 있어야 했다. 1943년, 한 포로의 집은 위생 상태 점검 목적으로 두번 검사되었다. 2400 (*역자주: 밤 12시) 에는 모두에게 통행금지령이 발령되었다. 이 시간 이후 자신의 집 밖에서 발견된 모든 이들은 체포될 것이다. 가끔씩 등화관제가 실시되었다. 청취 가능 거리내의 모든 마을에 사이렌이 경고의 의미로 이용되었다.

12. 전라북도 전주 근방 출신의 포로는 1938년 처음 시작된 이른바 “자원 입대” 하의 군사 훈련을 받은 여러명을 알고 있었다.
1938년부터, 6개월 반 동안의 기본 훈련이 경성 (Keijo) 또는 나남 (Nanam, Ranam) 에서 실시되었다. 훈련은 일본인들과는 별도로 실시되었으나, 일본군 운영장교에 의해 수행되었다. 기본훈련 후 지원병들은 2-3 개월의 휴가기간을 부여받은 후 전투 병과에 배속되었다. 한국인들은 항상 일본부대 속에 각각 분산 되었다. 훈련과정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일본어 말하기 능력과 최소 2년의 교육이 요구되었다.

13. 징병 전 일본어 훈련 학교가 각 ‘면’ 마다 설치되었다. 학생들은 매일 3-4시간씩 1년간 출석했을 것이다.

14, 15. 포로들은 징병법 (*역자주: 또는 징용법)이 발효되기 전에 한국을 떠났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 그들은 이것과 징용으로부터 도망친 한국인들로 부터 전해 들어왔으나 그들의 이름을 말할수는 없었다. 한국 북부지방 출신들은 그 법에 대해 남부지방 사람들보다 저항하는 경향이 크다.

16. 포로들은 “Tonari Gumi” (*역자주: 일종의 반상회) 를 알고 있었으나, 한국 내의 그런 조직에 대해 들어본 바는 없다.

17. 이 전쟁은 철도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의 비율 또는 직책에 거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정거장 감독을 제외한 차장, 철도 엔지니어, 또는 다른 어떤 직책도 한국인이 종사할 수 있다.

18. 포로들이 태평양에서 보아온 한국 매춘여성 모두는 자원자였거나 또는 부모에 의해 매춘업에 팔려온 여성들이었다. 일본인에 의한 직접적인 여성 징발이 있었더라면 노인과 젊은이들이 모두 이것을 감내하지 않고 격분했을 것이기에, 이것은 한국적 관점에서 적절한 것이었다. 남자들은 분노로 궐기하여 이후 그들이 당할 고통이 무엇이든 간에 일본인들을 죽였을 것이다.

19. 한국이 독립했던 당시를 살았던 나이든 한국인들은 변함없이 일본인을 미워한다. 몇몇 일본 학교를 다닌 젊은이들이 표면적으로는 친일본성향이더라도, 그들중 여럿은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그들의 기분을 대담하게 말한다.

20. 모든 포로들이 그들이 강제로 징병되었다고 말한다.

21. 한국인들은 그들이 겪어온 이 전쟁의 효과를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여럿은 이것이 결국은 그들의 독립으로 이끌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일본을 향한 그들의 태도는 관용이다.
러시아가 일본을 상대로 전쟁에 참전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다. 한 포로는 명백히 친 러시아이며, 한국에 공산주의 형태의 정부가 들어서기를 바라고 있다.
중국은 자신의 문제도 해결할 능력이 없고, 한국보다도 훨씬 무능한 나약한 국가로 간주되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미국을 그들의 해방자로 기대하고 있다.

22. 태평양 섬들의 한국인들은 일본인들로부터 매우 잔혹한 대우를 받았다. 모든 포로들이, 자신들을 연합군에 넘길까봐 두려워한 일본군에 의해 죽은 민간인 노동자들을 알고 있었다. 티니안 (Tinian) 에서 잡힌 포로는 미군 전선으로 향하는 3명의 여성들을 (그들중 둘은 등에 아기를 업고 있던) 보았다. 포로와 함께 같은 동굴에 숨어있던 한 중위가 그들 모두를 보안의 이유로 죽였다. 그 포로는 자신이 한국인이란것이 알려졌다면 자신도 분명히 죽었을거라고 확신했다.

23. 포로들은 그들이 하와이에 있는 동안, UN 서약에 따른 적정 절차에 의해 “독립 한국” 이 될 것이라는 것을 모두 들었다. 그들이 이 정보를 한국으로부터 들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24. 모든 포로들은 모든 한국인들이 일본과 싸우는데 뛰어들 것이라는 것을 단호하게 믿고 있었다. 일본이 전쟁에서 질것이라는 사실이 전에 알려졌다면 이 명백한 일본에의 충성은 빨리 톤을 바꾸었을 것이다. 한국의 남부 지방 출신의 포로는 남부지방 사람들은 더 수동적이고 일본인들과 싸우는데 활동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적다고 말한다. 독립 운동은 보통 북부지방의 더 활동적이며 자유로운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기원한다. 이 3인의 포로들은 군사 훈련을 받고 일본인들을 상대로 싸울 기회를 환영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게릴라전에 적합하게 특화되있다고 느낀다.

25. 한국인이 관직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분개는 없다. 개개인은 미움을 받을 수 있으나, 미래 한국의 정부를 위해 전체적으로 그들이 관직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6. 한 포로는 모든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제거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말한다. “일본인은 언제나 심장부터 일본인이다.” 라고 말하고, 일본과의 미래의 문제 때문에 일본인의 잔류는 한국에 손해라고 말한다.
다른 포로는 단지 고위 공직자들만 제거되어야 한다고 느낀다. 일본에 있는 한국인이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과 역발란스를 맞출수 있을수 있다고 본다.

27. 포로들은 한국이 UN 대표들로부터 임시적으로 통치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모든 한국인들로부터 받아들여질 수 있을것이다. 미국의 직접 통치는 많은 이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으나, 다른 나라의 경우 반대에 직면할 수 있다.

28. 마을 정부 (주: 면, 읍 등) 는 나라가 UN 통치하에 놓이면 별도의 도움 없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각 군에 평균 60 명의 경찰이 있으며, 50% 가 한국인이다. 이 비율은 더 많은 경찰 병력이 훈련될 때까지 성공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으로 느껴진다.

29. 여운형은 한국 독립 운동의 활동적인 멤버로 알려져있다. 그는 1942년 경성 (Jeijo) 에 살았다. 다른 상세사항은 알려지지 않았다.

30. 한 포로는 1943년에 일본에서 일했던 한국 공산당의 리더 한명에 대해 들었다. 알려진 유일한 이름은 ‘김’ (가네모토, Kanemoto) 이다.

 

원본 : 「参考資料5」

https://www.facebook.com/media/set/?set=a.1088796251178782.1073741825.100001452518600&type=3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87576867935890

 

19금 도서 지정 관련 보도

성남도서관에서 나의 책들을 19금 도서로 지정한 배경을 취재해 준 기자분이 있었다. 깊이 감사드린다.

우연히도 오늘, 서울의 한 남자 고등학생 둘이 <제국의 위안부>가 “방과후수업”의 과제도서였다면서 남은 질문을 하고 싶다고 찾아왔었다. 고등학교 1학년. 책을 읽고 찾아온 학생중에는 최연소다.

책을 너무 좋아한다는 두 학생한테 성남시 조치 얘기를 했더니 학생들도 기막혀 했다.

아이들은 때로, 어른들을 훌쩍 앞서간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606090107263917300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86654784694765

 

渦中日記 2016/5/13

오랫만에 다시 “渦中日記”를 쓰기로 한다.

고발이후 한동안, 재판관련 그리고 책관련 일을 이 제목으로 썼었다. 그러다가, 기소 이후부터 이 제목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워낙 경황이 없어서, “渦中日記”라는 제목조차 사치스럽단 생각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1월에 민사패소하고 2월에 가압류를 당하면서,그 외에도 한일합의 이후 부쩍 심해진 공격을 하루가 멀다고 받으면서, 약간의 무기력증이 오기도 했었다. 어차피 일일이 대응할 수도 없고 여론을 살피는 사람을 따로 두고 있는 것도 아니니 비난글들을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1월말에 한겨레가 비판글을 올렸기에 반론을 썼지만, 요즘처럼 재판준비에 쫓기고 있는 시기에 시사인,오마이뉴스, 그리고 녹색평론,..이런 식으로 연달아 나오면 반론을 쓰는 일도 부담스럽다.

정말 써야 하는 책을 쓸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는다.

앞으로는 책/재판관련 해서 “일어난” 일만 간단히 쓰기로 해 본다. 渦中日記를 쓰는 날이 많지 않기를.

————
아침에 박경신교수의 SNS발언에 항의포스팅. 이런 작업은 늘 우울하다. 비판하는 이들이 두려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짧게 얘기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다.

하루종일, 법원에 제출할 자료준비를 위한 작업.책에 사용한 자료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굳이 밝혀야 하는 작업의 무의미성에 견뎌야 했던 시간. 명백히 소모적인 시간들에 의미를 부여해보려 하지만, 그 노력자체에도 가끔은 지친다.

1940년 전후의 수양딸제도관련기사와 인사소개업자들의 호적위조관련기사가, 나눔의집 할머니들 중에 수양딸로 갔던 분들이 있었던 걸 생각나게 만들었다. 되돌아 온 딸을 다시 내다 판 아버지 때문에, 자살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소녀들. 그러나, 그런 주변인들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자고 했던 나의 제안은, 여전히 공중에서 부유중이다.

“책임”에 대해 생각하려면 자아가 강해야 한다. 물론 그런 “시대”에 대한 연민도 필요하다.

변호사사무실에서 돌아오면서, 많이 졸렸다. 운전하면서 졸렸던 건 별로 없었던 일이다.
피로가 누적된 탓이거나, 노화현상이거나.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66352310058346

0328 연구집회가 남긴 것 – 아라라기 신조(蘭 信三, 죠치대 교수)

 

1. 들어가며

2016년 3월28일에 열린 연구집회 “‘위안부’ 문제에 어떻게 마주하는가―박유하 씨의 저술과 그 평가를 소재로”(이하 0328 연구집회로 약칭)는 참가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0328 연구집회의 의미를 어떠한 위치로 정립시키느냐는 내게 있어서 상당히 어려웠으며 지금도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집회 후반의 전개, 집회 종료 후의 전개, 미디어의 보도 등을 통해 ‘위안부’ 문제의 어려움을 통감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상호간에 많은 부분에서 인식을 공유하고 본래 함께 투쟁해야 하는 쌍방이 서로 비판을 하는 모습에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본 연구집회의 발기인인 도노무라 마사루(外村大) 씨의 노력과 의도와는 동떨어진 방향으로 사태는 움직여갔다. 그렇지만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연구집회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이른바 중간파들에게 계속해서 큰 임팩트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2. 0328 연구집회의 경위

우선, 이 연구집회가 개최되게 된 경위에 대해 짚어 보도록 한다.

박유하의‘제국의 위안부’가 2013년에 한국에서, 2014년에 일본에서 간행되자 일본에서는 바로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 간행 1년 후인 2014년 6월에 한국에서 민사소송이 제기되었며 같은 해 11월에 검찰청에 의해 불구속 기소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태, 특히 검찰 기소를 우려하여 2015년 11월26일에 미국과 일본의 54명이 ‘박유하 씨 불구속 기소에 대한 항의성명’을 발표하여 한일 양국 사회에 임팩트를 던져 주었다. 그때 본 연구집회의 발기인인 도노무라 마사루 씨는 성명에 찬동을 하느냐 마느냐 고민을 했었는데, 또 하나의 액션으로서 일본군 ‘위안부’문제에 대한 문제 제기의 연구집회를 발족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제1탄으로‘위안부’문제와 박유하 씨를 둘러싸고 의견을 달리하는 두 그룹이 토론의 장을 공유하고 상호간의 의견을 서로 이야기하는 획기적인 장이 마련되었다. 이것이 0328 연구집회가 실현되게 된 대략적인 경위이다.

도노무라 씨와 오랜 기간 공동연구를 계속해 오면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일찍이 도노무라 씨에게 이 이야기의 제안을 받아 전면적인 협력과 전면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도노무라 씨가 김부자, 나카노 도시오(中野敏男), 양징자, 정영환 씨들과, 그리고 또 한 축의 당사자인 니시 마사히코(西成彦), 모토하시 테츠야(本橋哲也) 씨들과 대화하는 과정을 지켜봐 왔다. 물론 중간에 몇 번이고 무리일지도 모른다고 마음속으로는 포기 직전까지 갔었으나, 도노무라 씨의 끈질긴 협상과 양쪽의 대표(본 연구집회의 실행위원이 됨)의 용기있는 결단으로 0328 연구집회는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당초의 경위도 있고 도노무라 씨가 부탁하기 쉽다는 이유로 연구집회의 사회를 맡게된 나는, 서로 다가갈 수 있는 집회가 될 수도, 결렬로 끝날 수도, 획기적인 집회가 될 수도, 최악의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몇 가지의 시나리오를 떠올리면서0328 연구집회에 임했다. 조선근현대사의 전문가로 이 문제에 대해서도 발언을 계속하고 있는 이타가키 류타(板垣竜太) 씨와 공동 사회였는데, 나는 여하튼 연구집회가 무사히 개최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으며, 그런 기회에 양쪽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서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의견의 상이점을 서로 확인하는 것이 두 번째 목적이었으며, 또한 바라건대 다음 집회에 대한 단계를 시사하고 끝내는 것이 세 번째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도노무라 씨가 여러가지로 꼬여있는 이‘위안부’문제라는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면서도, 이번 한 번 만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논의를 통한‘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지향하고, 박유하 씨를 둘러싼 인식과 행동의 상이점을 풀어내는 실마리를 지향하는 제 1탄이 본 연구집회였다.

13시 오픈, 130명 정원의 회의장은 거의 꽉 차 양 옆쪽으로 의자를 임시로 설치했는데 이 자리도 거의 차서 연구집회에 등록한 참가자와 매스컴 관계자들로 회의장은 만원을 이루었으며 잠시 후 시작되는 연구집회에 대한 주목과 기대감으로 회의장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13시반에 시작되어 도노무라 씨의 개회인사에 이어 양쪽 보고자와 코멘테이터의 보고와 코멘트가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앞에 나와 발언한 전원이 일본군‘위안부’문

제가 식민지 지배와 제국 일본의 근원적인 책임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대전제로 하고 있었으며, 이에 아무런 인식의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박유하 저‘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문제의 이해에 공헌한 의의를 강조하느냐, 그 작품의 결점을 가차없이 비판하느냐로 입장이 확실이 갈렸다. 물론 이러한 점에서 차이가 있었던 양쪽을 같은 테이블에 앉게 한 도노무라 씨의 의도를 생각하면 당연한 흐름이었다.

양쪽의 보고는 각자의 입장을 반영하면서도 양쪽 다 훌륭했다. 직접 보고를 들으니 재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여기서 특필할만한 것은 박유하 씨가 검찰에 기소된 것에 대하여 “본래 바라는 바가 아니다.”라는 점에서 양쪽 모두 일치했다는 점이다.

나는 박유하 씨를 비판하는 발언자의 보고를 듣고 많은 것을 배웠지만 이 한가지 점이 가장 강하게 와 닿았다. 그렇구나, 바라는 바는 아니었구나 라고. 물론 내가 박유하 씨와 공동연구를 하고 있고 성명에도 서명을 한 사람으로서 이런 부분에 지나칠 정도로 감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후 휴식시간을 갖고 사회를 맡은 이타가키 씨와 내가 문제들을 정리하고 지정 토론자가 각각 5명씩 연단에 올라와 의견을 짤막하게 이야기했다. 여기까지는 양쪽이 얼굴을 마주대고 서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의견의 상이점을 서로 확인한다는 두 번째 목적은 실현되었다, 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는 마지막 종합토론에서 다음 단계를 향한 나름의 성과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느끼게 했다. 입장이 다른 양쪽이 확 접근을 한 분위기가 있었다, 고 나는 그렇게 느꼈다. 단, 내 안에서 ‘희망’이 ‘욕심’이 되어 양쪽에서 몇 명만 대표로 나와 마지막 논의로 향한다는 시나리오를 순간적으로 생각했던, 시간은 17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양쪽의 의견을 들은 결과 마지막으로 무엇을 논해야 하는가, 과제는 무엇인가를 명확히 하고 싶어서였다. “다음 일정이 있어 시간이 없으니까 연단에 오를 수 없다.”라고 하는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 씨에게 무리한 부탁을 해서 앞에 나와 말씀을 들었다.

니시, 우에노 씨와 양, 정, 오노사와 아카네 씨의 양쪽을 대표하는 논객이 연단에 올라 마지막 논의가 이루어졌다. (검찰청에 의한) “기소를 취하할 수 없는가”라는 우에노 씨의 과감한 발언으로 (이는 본래 박유하 씨를 지원하는 성명파(声明派) 모두가 생각하는 바였지만) 회의장은 어수선해졌고, 마지막으로 모토하시 씨와 나카노 씨의 총괄 시간으로 넘어갔으나 대립점이 표면화되면서 사회자인 도노무라 씨를 비롯한 실행위원 분들에 대한 감사나 등단해 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의 뜻도 표명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다음 집회에 대한 단계를 제시하는 일 따위는 불가능했다.

3. 증언에서 이야기로 -0328 연구집회의 하나의 과제

마지막 장면에서의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과 사회자의 불찰로 인해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 했으며, 무엇보다도 눈 앞에 보였던 큰 성과마저도 우리의 손 안에서 빠져나감으로써 나는 망연자실했으며, 폐회 후에도 자책감에 빠졌다. 마지막 장면의 자초지종이 납득이 안 갔다.

그러나 시간의 경과와 함께, 그리고 양쪽의 의견에 순순히 귀를 기울였던 이른바 중간파 청년으로부터의 열의가 가득한 감사의 메일에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이 연구집회에서 ‘얻은 것’을 더 제대로 바라봐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하튼 양쪽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논의를 한다고 하는 당초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므로. 그리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논의될 것이므로.

 

이 연구집회를 바탕으로 한 제 2탄이라고까지는 자리매김할 수 없으나, 0328 연구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올 9월4일에 일본 오럴히스토리 학회에서 ‘전시 성폭력과 오럴히스토리’라는 심포지엄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 심포지엄의 등단자의 대부분이 이 연구집회에 참가하고 있으며 강한 임팩트를 받고 있다. 원래 이 심포지엄은 작년 가을부터 준비가 진행되어 오히려 본 집회보다도 먼저 기획된 것인데, 0312의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열린 전시 성폭력에 관한 비교연구적 심포지엄과 본 연구집회를 경험하는 가운데, 이 두 개의 논의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야 한다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 연구집회는 1회성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도노무라 씨의 액션은 이어져 나갈 것이다.

 

9월로 예정되어 있는 ‘전시 성폭력과 오럴 히스토리’라는 심포지엄이 이어받을 논점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즉, 본 연구집회에서도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가 ‘당사자의 이야기’로서 ‘특권화’되어 보고되었는데, 그 증언으로서의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도 나약한 것이었다. 현재의 오럴 히스토리 연구의 수준으로 말하자면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다양해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면적인 ‘이야기의 장’이나 사회적 문맥으로서의 ‘이야기의 자기장’에 의해 규정될 수 밖에 없다고 이해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오랜 운동과 법정 투쟁을 겪으면 당사자의 이야기는 그 운동과 운동체 안에서 규정되어지며(이것은 소위 ‘재판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국 사회의 모델 스토리(일종의 동형적(同型的)이고 표준화된 이야기)에 의해 규정되어진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그때, 그곳’에서의 과거의 사건에 관한 이른바 ‘증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곳에서’의 사회적인 문맥으로 규정된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과거의 체험은 복잡하며 다양한 문맥들이 폭주하고 있다. 다양한 장면들이 있으며 이에 대한 체험자의 해석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때, 그곳’에서의 과거의 사건은 같은 장소에 함께 있었으면서도 서로 다른 시각이 생겨날 수 있으며(이른바 ‘라쇼몽(羅生門)적인 현실’), 그 이후의 전후에 놓여진 상황(이를 전후 체험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속에서 그 해석이 바뀔 수 있으며, 특히 재판의 이야기가 주류가 되면 아무래도 이에 규정을 받게 된다. 지금은 이러한 시각은 오럴 히스토리 연구에서 구축주의 뿐 만 아니라 실증주의도 공유하고 있는 시각이다. 즉, 확고한 부동(不動)의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 이야기, 이야기 속의 다성성(多声性), 이야기의 변화를 어떻게 들어내고 읽어내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아라라기 신조(2015)「오럴 히스토리의 전개와 과제」『이와나미강좌 일본의 역사 제21권 사료론』이와나미쇼텐)

 

박유하 씨의 작업의 획기적인 점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건져내어 한국사회에서의 ‘위안부’ 문제에 관한 모델적 스토리를 상대화시켰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평가하는 부분은 이것이다. 오키나와전투에 관한 논쟁에 있어서도 ‘당사자의 증언’의 진위가 실증성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문제화되었던 경위가 있다. 이 논쟁에 바탕을 둔 도베 히데아키(戸邊秀明) 씨의 최근의 작업(도베 히데아키(2105)「오키나와

전투의 기억이 오늘날에 있어서 촉구하는 것」나리타 류이치(成田龍一) ・요시다 유타카(吉田裕) 편저『기억과 인식 속의 아시아・태평양 전쟁』이와나미쇼텐, 2015)에서 이러한 점이 훌륭하게 해부되고 논해졌다. 오키나와전투와 ‘위안부’ 문제의 문맥은 물론 크게 차이가 있지만 도베 씨가 제시하는 시점은 “당사자의 증언 또는 이야기”에 의거한 논의에 있어서 크게 참고가 될 것이다.

 

박유하 씨의 작업은 물론 완벽하지는 않다. 큰 장점과 큰 결점을 함께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박유하 씨의 논의는 운동체를 비판하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서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고 싶은 사람들(수정주의자)에게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박유하 씨를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의 비판 내용의 하나는 바로 이러한 점에 있다. 그러나 요시미(吉見)・우에노(上野) 논쟁 때에도 방법론적으로 실증주의가 구축주의가 의견이 맞지 않았으며, ‘역사의 재심(再審)’과 ‘역사의 수정’은 표리의 관계에 있어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다. 식민지 지배는 범죄였다고 규탄하면 끝날 정도로 ‘역사의 진실’은 단순하지 않다. 사실 이러한 점에 수정주의자가 현 사회에서 이렇게까지 영향력을 가지게 된 배경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시점을 바꾸면 궁극적으로 “식민지 지배 속에서의 주체성은 단어의 본래의 의미에 있어서 주체적인가”라는 어려운 문제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거시적인 의미에서 식민지 지배의 죄는 명확하다. 물론 이 연구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이 점에 있어서 수정주의자들과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 하에 있어서도 사람들은 보다 더 좋은 삶의 방식, 보다 더 좋은 생활을 지향하며 노력을 한다. 식민지 지배 하에서 아이들은 천지난만하게 노력을 하며, 세상살이에 익숙한 어른들은 수단으로서 노력도 한다. 그러면, 이러한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일종의 ‘주체성’을 식민지 지배라는 큰 틀에서의 ‘몸부림’ 밖에는 안 된다고 치부해 버릴 수 있는가? 거시적인 규정성(規定性)을 주시하면서도 미시적인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을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여기에 존재하는 중간적 차원(mesolevel)의 상황들을 꼼꼼하게 봐 가는 것이 식민지 지배를 생각하는 시점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식민지 지배의 폭력성의 진정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현재의 식민지 연구의 하나의 흐름을 박유하 씨는 수용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0328 연구집회에 결여되어 있었던 것은 이러한 식민지 지배라는 시스템이 지니는 복잡함과 교활함에 입각한 치밀한 논의의 장이었다. 그러나 0328 연구집회는 강한 임팩트를 남겼으며 적어도 다음 심포지엄에 강렬한 자극과 숨결을 남겨주었다. 도노무라 마사루 씨의 ‘만용’은 계속 살아 있으며, 나는 적어도 계속 살아 있게 할 것이다.

0328 연구모임 – 센다 유키(千田有紀, 무사시대 교수)

센다 유키(千田有紀)

 

아라라기 :그럼, 이제 지정토론자 두 분만 남으셨는데, 젠더 연구의 주역을 맡고 계신 센다 유키 씨 부탁드리겠습니다.

 

센다 유키:센다 유키입니다. 저는 처음에 이 코멘트에 관한 제안이 왔을 때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조금 망설였습니다만, 저는 예전에 외국어대학교에 근무를 했었는데 B쪽에 앉아 계신 분들과 함께 연구를 한 적도 있고, 또 그런 가운데 박유하 씨와도 함께 프로젝트를 했었던 경험도 있어서 말씀을 좀 드려야겠다 싶어서 이렇게 나오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이 이 종군 ‘위안부’ 문제에 접하게 된 것은 1991년 할머니께서 커밍아웃하시기 전에 대학시절인가 고등학교 시절에 우연히 저와 성이 같습니다만, 센다 가코(千田夏光) 씨의『종군위안부』문고판을 읽고 종군 ‘위안부’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유하 씨도 센다 씨의 책을 인용하고 계신데, 저는 오히려 센다 씨의 책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점도 있었지만, 동시에 굉장히 강렬한 위화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역시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가 기술되어 있는 부분에서, 일본인 ‘위안부’는 창부였다고 하는 부분입니다. 공창제도 하에 있었던 일본인 ‘위안부’는 나이가 좀 든 여자이며 성병을 가지고 있었고 창부였다는 식으로 상당히 모욕적인 기술을 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조선인 소녀들은 젊은 처녀의 소녀들이 연행되어 왔기 때문에 가엾다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물론 방금 전에 김부자 씨도 말씀을 하셨지만, 사실로서 젊은 여자아이들이, 소녀들이 징용되었다는 사실이 존재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때 역시 그 피해를 강조할 때, 그럼 일본인 ‘위안부’는 성병이 있고 창부였으니까 괜찮다, 나이가 든 여자들이었다 라는 식으로 멸시하는 형태로 종군‘위안부’를 이야기해도 좋은가 라는 의문이 계속 제 안에 남아 있고, 확실히 해소가 되지 않는 제 안의 의문이기도 합니다.

 

다만, 니시노(西野) 씨나 오늘도 팸플릿이 있습니다만, 방금 전에 발표하신 오노자와(小野沢) 씨나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연구가 진척이 되고 있다는 점은 제 자신에게 있어서 굉장히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역시 세계대전 전의 공창제도 하에서 창부가 되었던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들이었는가, 특히 쇼와공황 후에 생계가 어려워진 동북지방에서 팔려온다거나, 팔려온 소녀같은 사람들이 공창제도 하에서 창부가 되었는데, 이러한 일본인 ‘위안부’에 관해서도 저는 깊은 문제점과 슬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것들을 ‘종군위안부’ 문제가 문제화된 이후에 추궁하려 하면 오히려 말을 못 하게 되었다고 할까, 일본인인 당신이 왜 일본인 ‘위안부’에 대해 말하는가,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식민지주의의 문제라는 식으로, 제 자신의 문제의식이 소거되어지는 점과, 같은 ‘위안부’여도 일본인 ‘위안부’는 문제가 아니다 라는 식의 언설이 있다는 데 대해 계속 위화감을 느껴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 자체는 해소된 것 같으므로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어서, 제 자신은 아까도 나왔습니다만, 모델적 피해자 같은 것을 만들지 말고, 나이가 어리다든가 처녀라든가가 아니라, 역시 어떠한 형태이든 ‘위안부’라는 제도가 비참했다 라는 형태로 이야기가 문제화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박유하 씨의 이 책이 문제가 없다라든가, 하자가 없다라든가, 역사 자료들을 꼼꼼히 다뤘다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문장도 좀 더 뭐랄까 기술방식이 상당히 거칠다는 여러분들의 생각은 물론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바탕 하에 평가를 한다면, 역시 폭력의 문제의 복잡성이라는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조선인 업자들이 상당히 직접적으로 조선인 ‘위안부’에게 폭력을 휘둘렀다고 하는데, 폭력을 휘두르는 형태로의 지배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원시적(primitive)이며 지배로서는 파탄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폭력을 휘두르지 않으면 말을 듣게 하지 못 한다는 것은 페미니즘의 문맥에서도 포스트 구조주의 이후에 지배로서는 파탄되었다고 봅니다. 오히려 보다 더 교묘한 폭력이라는 것은 예를 들면 증언집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눈치를 보는 식으로 이런 행동을 하면 마음에 들어해 줄 지도 모른다는 형태로 상대방의 눈치를 보는 것, 이러한 것이 보다 더 교묘한 지배이며, 또한 한 단계 위의 지배라는 것은 자발성을 끌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눈치를 보지 않더라도 스스로 이런 식으로 해야 한다 라는 형태로 주체화되어 갑니다. 이것이 가장 비참한 지배의 완성형으로 그러한 의미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이 황민화 정책 하에 일본인으로서 자신이 국가에 봉사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박유하 씨는 모두가 그러한 동지적 관계라든가, 애국적이라는 기술을 하고 있는 인상이 있습니다만, 저는 그러한 것들이 없었다 라고는 단언할 수 없으며, 또한 그러한 것 자체가 실로 비참하며, 그러한 분위기에서, 그러한 것 자체가 비참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이라는 것은 여성이라는 존재가 하나로 결속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최근 10년,20년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만, 제 자신은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많이 망설여집니다만, 마찬가지로 민족도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하나로 결속된 존재는 아니며, 박유하 씨가 업자의 문제를 다룬 것 자체도 중요한 문제 제기이고, 그러한 것 자체가 국가의 책임을 면책하는 것은 물론 아니며, 오히려 같은 민족 하에서 그러한 폭력적인 관계, 이해관계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식민지주의의 비참함을 두드러지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역시 저는 이러한 논의는 논의 자체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을 하며, 여러분들도 거듭 말씀을 하셨지만, 형사라든가 민사라는 그런 장소가 아니라, 이렇게 열린 장소에서 제대로 논의를 해 가는 것 자체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치겠습니다.

논의를 깊게 하고 싶은 일 – 와카미야 요시부미(전 아사히 신문 주필)

연구 집회에서 다양한 주장을 듣고 큰 공부가 되었으나, 동시에 논의가 상당히 어긋나는 안타까움이 쌓였다. 네 가지 관점에서 감상을 적어 두고 싶다.

 

(1) 왜 어긋났을까?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하는 쪽은 오로지 박유하 씨가 든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사실과 인용의 ‘잘못’을 집어냈다. 지지자들은 그러한 사안에 대한 의견 개진을 거의 하지 않은 채 저서의 ‘전체적인 의의’를 강조했다. 반대로 비판하는 쪽은 박유하 씨가 던진 근본적인 문제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공격으로 일관한 감이 있었다. 이렇게 엇갈림이 이어졌다.

우선 집회는 말하자면 박유하 씨가 없는 ‘결석재판’으로 개개의 사항까지 그녀를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비판에 반론하든, 혹은 해당하는 부분이 있다면 정정하든지 해서 박유하 씨의 솔직한 변을 듣고 싶다.

반대로 ‘모두 잘못된 날조본이다’라는 비판은 아무리 그래도 너무 극단적이며 설득력이 떨어진다. 박유하 씨가 던진 근본적인 의문은 왜 위안부 문제가 여기까지 장기화하고, 해결이 막혀 왔는가에 있다. 일본 정부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일까? 상당수의 위안부가 받은 아시아 여성기금을 지원단체가 일방적으로 단죄하고, 수령을 막는 것 만으로 된 것일까? 또 박유하 씨가 일본이라는 국가에 ‘법적 책임’은 없다고 한 점에 대한 논의는 많이 있어서 좋은데, 그럼 일을 직접 착수한 업체는 국가에 의해 조종됐다는 것만으로 책임은 없는가. 박유하 씨의 문제제기를 ‘일본을 면책하는 논리’라고 단정하지 말고 연구 집회에 어울리는 토론을 하길 바랬다.

 

(2) ‘동지적 관계’였나?

비판 중 하나는 병사와 위안부 사이에서 한정적이든 간에 ‘동지적 관계’였다고 한 박유하 씨의 담론에 집중됐다. 이것은 주디스 허만이 『트라우마』에서 지적한 ‘피감금자가 고립됨에 따라 감금자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심해져 간다’는 현상으로, ‘동지적 관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반론도 있었다. 이는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도 불리는 현상으로 논의의 출발점으로서 귀중한 지적이었다고 본다.

다만, 모처럼이었으니 좀 더 깊은 논의가 있기를 바랬다. 병사들은 단순한 ‘감금자’였을까? 그들도 국가의 명령으로 전쟁에 동원된 피해자(피감금자)의 측면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더구나 거기는 전쟁터다. 잘못하면 부대가 모두 적의 공격에 처하기 쉽고, 병사도 위안부도 생사를 같이 하는 운명이다. 위안부에게 있어서도 결정적인 적은 외부에 있었다. 그런 열악한 처지에 있는 병사들에게 여성들이 민족의 벽을 넘어 인간으로서 약간의 동정이나 공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도 아닐 것이다.

애당초 일본군 병사 중에는 조선 출신도 있었는데, 아무리 차별이 있든 그들이 전쟁터에서 일본인 병사와 ‘동지적 관계’에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위안부와 병사의 관계도 그와 닮은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위안부가 상대를 한 병사 중에는 조선인도 있었다. 이러한 구조야말로 식민지 지배와 전쟁의 커다란 죄악, 그리고 여성의 비애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박유하 씨가 ‘동지적 관계’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그렇게 해석했는데, 틀린 것일까? 다음 기회에 논의를 깊게 하고 싶다.

 

(3) ‘자발적’이었나?

부끄러운 일인데, 70-80년대 한국에는 ‘기생 관광’이 성행하여,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많이 방문했다. 일찍이 서울에서 유학한 나는 젊은 여성을 뻔뻔하게 호텔로 데리고 들어가는 남자들을 보면 외면하고 싶어졌다. 여성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러나 그녀들은 업자에게 지배당하고 임금을 빼앗기는 존재였지만, 공권력에 강요당한 것은 아니었다. 심각한 가난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음에 틀림없고, 본래의 의미의 자유의지는 결코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물리적인 강제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자발적’이었다. 이것도 슬픈 현실이다.

식민지 시대에 이와 같은 처지의 여성들이 있었다 것은 틀림없다. 가난도 남존여비의 풍조도 보다 심한 시대라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희망을 가지지 못한 그녀들은 ‘어차피 해야하면’이라고 모집에 응해서 전쟁터로 간 예도 있었다. 박유하 씨는 그러한 현실에 눈을 돌리고, 모든 ‘소녀를 강제로 데려 갔다’는 것처럼 보는 시선이 부자연스럽다고 지적. 더욱이 그녀들이 ‘자발적’으로 모집에 응할 수 밖에 없었던 사회 구조에 분노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 해석도 틀린 것일까?

 

(4) 명예를 훼손했는가?

박유하 씨 기소에 대해서 ‘이 책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가 훼손됐다고는 볼 수 없다’라고 항의 성명을 한 점에 대해 ‘소송한 위안부들의 마음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었다. 항의글이 오해를 주었다면 유감이지만, 명예 훼손은 당사자의 ‘기분’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박유하 씨의 책으로 그녀들의 마음이 다쳤다면 오해를 불러일으킨 저작의 역량 부족을 물어도 좋다. 그러나 정말로 ‘명예’가 훼손되었는지의 여부는 객관적인 기준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항의 성명에 있는 것처럼 이 책을 통해 오히려 ‘위안부 분들의 슬픔의 깊이와 복잡함’을 느낀 사람이 많고 일본에서 자유주의로 불리는 사람들이 큰 공감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거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더붙여 말하자면, 박유하 씨의 책은 위안부에 다양한 케이스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지, 원고인 각각의 여성들에 대해 ‘이렇다’라고 쓴 것이 아니다. 명예훼손으로 재판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국의 위안부』의 내용을 둘러싼 논의는 많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은 언론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며 재판을 하고, 특히 형사 처벌까지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사리에 어긋나며,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비판하는 파가 그 논의를 피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형사 처벌을 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아쉬웠다.

『제국의 위안부』가 여는 것 – 가노 미키요(게이와가쿠엔 대, 여성사・젠더사)

‘박유하 씨 기소에 대한 항의 성명’에 불민한 나도 <저명한 문화인>에 섞여 이름을 올렸다. 성명 발표 후 여러 친구로부터 전화와 메일을 받았다. 모두 『제국의 위안부』에 비판적이고 고소의 <정의>를 확신했다. 연락을 해 준 건 나의 무지를 염려해서였던 것 같다.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만큼 박유하 씨는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편하지 않을 거라는 걸 느꼈다.

3 월 28 일 연구 집회는 논의가 맞물렸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각각의 발상의 차이를 확인했다는 건 스타트 라인으로서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늦었지만, 내가 왜 성명에 이름을 올렸는지 염려해 준 친구들에 부응하기 위해서도 여기에 써 두고 싶다.

 

  • 위안부 할머니의 ‘명예훼손’에 대해서

‘항의 성명’에는 ‘이 책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가 훼손됐다고는 볼 수 없다’라고 쓰여져 있다. 명예가 훼손됐는지 어떤지는 당사자가 정할 문제이니, 이 표현은 문제가 될 거라고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올린 건 ‘명예훼손’이라는 말에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왜 전작 『화해를 위해서』 는 문제가 되지 않고, 『제국의 위안부』는 됐는가 하는 점이다. 고소를 한 나눔의 집 위안부 할머니들은 『제국의 위안부』의 ‘자발적 매춘’이나,  일본 병사와의 ‘동지적 관계’, ‘애국’이라고 기술한 부분에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은 『화해를 위해서』의 「위안부」 장에도 있다.

「‘매춘’을 하게 될 것을 알고 간 여성들이었건, 당시의 일본이 매춘을 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 온 여성도 당시 일본이 군대를 위한 조직을 발상했다는 점에서 그 구조적인 강제성은 결코 희석되지 않는다」(헤이본샤 라이브러리판 p90, 역자 주: 이 부분은 『화해를 위해서』 한국어판(뿌리와이파리)에서 발췌)

「그들이 ‘일본인’으로서 ‘애국’하기 위해 갔다면, 그것을 구조적으로 종용했다는 의미에서 더욱 ‘일본의 책임’이 커질 수밖에 없다」 (헤이본샤 라이브러리판 p91, 역자 주: 이 부분은 『화해를 위해서』 한국어판(뿌리와이파리)에서 발췌)

이것은 『제국의 위안부』 의 취지 그 자체이다. 왜 같은 취지이며 표현인데 『화해를 위해서』는 명예훼손을 묻지 않았을까?

아무래도 답은 단순한 것 같다. 1월에 일본에 방문한 나눔의 집 소장에 따르면 위안부 할머니들은 책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제국의 위안부』의 해당부분을 수 차례 읽어 드렸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면, 3 · 28 집회에서 양징자 씨가 발언한 것처럼, ‘거짓말과 속임수를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꿰뚫어 본’(자료집 p63)다는 그들이, 읽어주는 사람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감지하지 못했을 리 없을 것이다.

또 하나, 의문이 든 이유가 있다.  20 년 전, 모리카와 마치코 씨가 구성하고 해설한 『문옥주  버마 전선 방패 사단의 ‘위안부’였던 나 』(나시노키샤(1996), 증보 신장판(2015))는 뛰어난 여성 문제 연구서로 제 16 회 야마카와 기쿠에 상을 수상했다. 나는 수상 심사 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이 책을 추천했는데, 반대도 있었다. ‘운동의 발목을 잡는 꼴이 되지 않을까’라는 게 이유였다. 당시 운동의 주류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 의해서 ‘위안부 = 성 노예’라고 정의되어 국가 보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언급된 문옥주 씨의 ‘위안부’ 생활은 ‘성 노예’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았다.

문 씨는 일본 노래를 외우는 등 일본 병사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인기인이 되어,  랑군 시장에서 하이 칼라 옷과 보석을 구입하거나 큰 돈을 저축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일상이 비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중에서 상병 야마다 이치로와의 <사랑>은 문 씨에게 얼마나 구원이 되었을까? 그는 문 씨에게 청혼하며 조선인이어도 좋다고 했다고 한다. 고상하고, 상냥하고, 익살스럽고, 지혜로웠다고  50 년이 지난 후에도 문 씨는 거리낌없이 야마다를 칭찬한다.

이러한 문 씨의 모습에 나는 감동했다. 어떤 가혹한 상황에서도 사람은 생존 전략을 구사하고 정체성을 찾으며, 사랑을 키우는 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명예를 훼손하기는 커녕 자랑할 만한 일처럼 보인다.

 

  • 『제국의 위안부』가 여는 것

그러나 물론 문옥주 씨의 예를 일반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이 책은 ‘위안부 문제’ 를 부정하는 논거가 되고 있다.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저금 센터 원부라는 공문서에 남은 문 씨의 다액의 군사우편 저금을 가지고 ‘역시 위안부는 막벌이 창녀다’라는 소리가 난무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염려한 대로 운동의 발목을 잡게 됐다. 나눔의 집 위안부 할머니들이 ‘명예 훼손’이라고 한 것도 이런 견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옥주 씨의 필사적인 생존 전략은 ‘위안부 문제’의 부정으로 이어지지 않고, ‘성 노예’에서 <특권적>인 일본인 ‘위안부’까지 다양한 ‘위안부’를 감싸 안는 큰 틀 ーー. 박유하 씨가 사념을 집중한 ‘제국의 위안부’라는 관점은 여기에 연결되는 게 아닐까. 3 · 28 집회에서 요시미 요시아키 씨는 업자의 책임보다 군의 책임 쪽이 무겁다고 말했다. ‘박유하 씨는 이같은 구조적인 인식이 되어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자료집 p71). 그러나 박유하 씨의 ‘제국의 위안부’는 군대도 통합 식민지 지배라는 큰 구조를 묻고 있다.

‘제국’이라는 틀을 세울 때, 영역 내의 <민족>의 경계는 모호하다. 특히 전시 하의 ‘대일본제국’은 ‘내선 일체’를 내걸고 조선반도의 ‘황민’화를 도모했다. 물론 일본인과의 사이에서 차별은 있다.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사이에도 분명한 차별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인 ‘위안부’가 ‘초센초센(조선, 조선)이라고 바보 취급 하지마, 텐노헤이카(천황폐하)는 같다’라고 대꾸 못할 건 아니었다.

<민족>의 경계는, 젠더 관점을 넣어 보면 더욱 까다로워진다. 1925 년의 보통 선거법은 여성을 배제했지만, ‘내지’거주 식민지 남성은 참정권을 받았다. 참정권은 ‘권리 중의 권리’이며, <국민> 권리 중  가장 큰 권리라고 한다면, 일본 여성은 <국민>이 아니었지만, 재일 조선 남성은 <국민>이었던 것이다. ‘제국’에게 식민지 가부장제 이용이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패전으로 인한 ‘제국’의 해체로, 그것은 역전됐다. 일본 여성은 <국민>으로, 식민지 남성은 <비국민>으로. <민족>의 경계가 전면에 드러난 것이다. 올해 4 월 매스 미디어는 ‘여성 참정권 70 년’을 보도했지만, 동일한 선거법 개정으로 식민지 남성이 참정권을 박탈당한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하려고 하지 않았다.

헌데 ‘위안부’에 맞추면 <민족>의 차이보다도 젠더의 문제가 된다. 가혹한 전선에서는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 병사의 <민족>을 넘은 ‘동지적 관계’가 성립해도 전후의 처우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일본군 병사는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지고, 살아 남으면 연금도 지급된다. 그러나 ‘위안부’는 연금은 커녕 <더러운 여자>로 낙인찍혀 가족과 고향조차 잃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일본인 ‘위안부’도 마찬가지다. 미와 아키히로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노래부르고 있다. 「싸움에 지고 돌아 가면 나라 사람들에게/훈장 대신 침을 맞고/손가락질 당하고, 험담을 듣고/ (생략) /대일본제국 만세 만세 만세 “(「조국과 여자들」)

 

『제국의 위안부』는 <민족>과 젠더가 착종하는 식민지 지배라는 큰 틀에서 국가 책임을 묻는 길을 열었다. 3 · 28 집회에서 역사학 분야로부터 실증주의적 비판이 잇따랐는데, 물론 그 점에는 이론상에서도 실천상에서도 많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니시 마사히코 씨가 말한대로, 이 책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그 앞에 열리는 문제를 함께 단련해 가기를 바란다.

3.28 집회를 끝내고 –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 도쿄대 명예교수)

당일날 나에게는 지정토론자의 역할이 주어졌다. 5분이라는 시간 제약 아래 충분히 말하지 못했던 것을 여기에서 설명하고 그날의 소감을 덧붙이고자 한다.

첫째로, 집필물을 법정에 세우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이 집회는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형사 기소에 반대하는, 뜻 있는 자들의 성명이 계기가 되어  성립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성명에 동의한 다른 사람들을 포함하여 나의 입장은 사상이나 연구 상의 대립은 어디까지나 시민영역(이와 같은 자리의 학자 간의 의견 교환을 포함)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박유하 비판파는 형사고발의 원고가 ‘위안부’ 피해당사자라는 점을 절대시하고 있는데 설사 원고가 고소를 해도 기소에 이르기까지는 검찰권력의 의사결정이 수반하게 된다. 당사자가 ‘상처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과, 사직 당국이 ‘명예 훼손’ 판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나는 이와 같은 판정을 검찰이라는 행정권력이 행사하는 것에 위화감을 느낀다. 그리고 검찰이 ‘명예훼손’이라 판정을 내린 데 대하여 그 판정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판단이 엇갈리는 연구 상의 견해를 사법적  판단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성명’이 당사자의 고소에 대해서가 아니라 검찰의 형사 기소에 대하여 발표된 것에 주의해야 한다.) 많은 연구자가 동의하리라 생각되는 이러한 최소한의 동의조차 이룰 수 없었던 것에 대하여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리고 어떠한 문제가 있더라도 집필물의 저자를 형사 피고인으로  법정에 세움으로써 본인이 받게 될 사회적, 심리적 타격의 심각성을 생각하지 못하거나, 혹은 그렇게 당해도 당연하다는 듯이 비판을 하는 사람들의  징벌적인 태도에도 커다란 위화감을 느낀다.

둘째로, 이 책의 평가에 대하여. 분명히 이 책에는 비판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같은 문제점이 많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설혹 형사기소에 반대를 하고 있어도 이 책에 대해 전부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집회에서도 문제로  지적된 ‘동지적’, ‘애국적’, ‘자발적’이라는 단어의 쓰임에 대해서는 오해를 초래할 표현과 허점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문맥으로 판단한다면 ‘구조적 폭력’ 아래에서 ‘동지적이라고 간주되는’이라든지 ‘강제된 자발성’으로 읽을 수 있음은 저자가 이 책 전체에서 거듭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다. 정영환씨의 해석처럼 ‘업자  주범・군 종범설’이라는 주장으로는 도저히 읽히지 않는 것은 문맥을 통해서 봐도 분명하다. 또한 인용 의 하자를 가지고 이 책의 가치를 모두 부정하는 것은 과연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내 견해로는 이 책의 평가해야 할 점은 ‘제국’, 즉  식민지 지배의 죄를 전면에 끌어낸 데 있다. 그것은 조선인‘위안부’문제에  일반적인‘전시하의 성폭력’의 문제로 해소할 수 없는 ‘식민지 지배’의  특수성이라는 차이를 가지고 들어 온 데 있다. 일본 전통의상, 일본식 이름, 일본어 사용을 강요 당한 조선인‘위안부’는 저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일본인 여성의 대체물’이었으며 그런 뜻에서 일본군의 ‘동지’적인 입장에 있었으며, 전쟁터에서는 피점령자와 연합군으로부터 ‘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오히려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과거 이상으로 엄격하게 추궁하고 있으며, 이 책을 평가하는 많은 일본인 지식인은 그러한 지적을 엄숙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비판자는 그 점을 간과하고 있다).

‘전쟁의 성폭력’ 비교사가 전망되고 있는데, 거기에서는 강간, 매매춘, 연애에 이르는 연속성과 차이를 논할 필요성이 지적되고 있다. ‘구조적 폭력 아래서  강요당한 협력관계와 공범관계’라고 하는 복잡한 상황을 복잡한 상태인 채로  이해하지 못하면 오키나와전의 ‘집단자결’의 자발성과 강제성의 관계를 논할 수도 , 또한 조선인 일본군 병사에 대하여 논할 수도, 애도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한편 이 책의 저자가, 오늘날 사태가 교착상태에 빠진 상황에 대한 책임을  한국 내의 운동 단체에 묻고 있는 것에 대해서 나는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지적은 공정하지 않다고 공공적인 자리에서도 발언했으며 저자 본인에게도  직접 전달했다는 점을 명시해두고자 한다.

이 집회는 지금까지 함께 자리하는 일이 없었던 연구자가, 대립되는 견해를 넘어 한자리에 앉아 토론을 하는 획기적인 기회였다. ‘성명’ 동참자의 상당수는  사태의 경직성을 우려하고,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으며, 또한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결코 면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으며  비판파에게 문제제기 하고 다가가는 자세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비판파는 그것에 답하려고 하지 않은 것으로 나에게는 보인다. 같은 편이 될 수 있었을 지 모르는  사람들을 적으로 상대함으로써 소수자의 운동은 더욱 더 분단되어 버린다. 그렇지 않아도 우파로부터 부당한 공격을 당하고 있는 ‘위안부’문제를, 온전한 ‘공론’의 자리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공동투쟁’이 필요할 텐데 원칙적인 논의를 되풀이하는 그들은 도대체 무엇으로 ‘해결’할 생각인가. ‘다음으로 이어지는 논의’를 바라는 우리들의 생각은 실현되지 못하고, 참석자에게 허탈감만 남기고 끝났다고 한다면 대단히 유감이다.

끝으로 어려움을 딛고 이 토론 집회를 실현시켜주신 실행위원 여러분께 짐심으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