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20억 회유설에 대해서

12월 18일 대화를 정리하면서 생략한 부분이 있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 미국에서 소송을 일으킬 준비중이고, 그 재판에서 요구하게 될 금액은 20억이 될 거라는 대화내용이다. 배 할머니는 이 20억 문제에 대해 이 날만 두 번, 이후에도 몇 번 언급하셨다. 대부분 그 금액은 타당치 않다는 말씀이셨다. 당연한 일이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은 가치관도 생각도 같지 않다.
그런데 20년 이상, 한국사회에는 그 사실이 인식되지 않았다. 주변인들에게는 한사람 한사람 다른 “개인”으로서 존재했겠지만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위안부할머니”란 그저 “일제에게 수난을 당한 피해자”이외의 모습으로는 존재하기 힘들었다.
생각하면, 1997년에 일본이 아시아여성기금을 만들어 속죄를 시도했고 (이 때 일본이 모은 국민모금에 붙인 이름은 “속죄금”이었다), 이후 받은 분들이 60명 이상 된다는 사실이 그 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도, “위안부할머니”라는 존재가 그저 “위안부할머니”로서만 존재하도록 만드는 일에 일조했을 것이다. 하나의 사태에 대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감정과 생각이 결코 같지 않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 우리 앞에 가시화 된 것은 고작 한일합의 이후, 그러니까 아직 일 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한일합의 직후에 합의를 받아들이겠다고, 자신의 목소리로 말했던 한 분의 목소리는 곧바로 묻히고 말았다. (기사링크: [위안부 타결] 유희남 할머니 “만족은 못하지만 정부 뜻 따르겠다” 쿠키뉴스)
또, 2000년대에 심미자 할머니라는 분이 피맺힌 목소리로 정대협을 비판했음에도 우리는 아무도 그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위안부 목소리가 묻혔던 90년대 중반이후 10여년 동안, 운동의 목소리는 국내외적으로 한껏 커졌다.
배춘희할머니로 하여금, 처음 만난 나에게 갑자기 일본을 용서하고 싶다고 말씀하시도록 만든 것은 아마도 그런 세월일 것이다. 배할머니는 이미 90세였다.

그리고 그 한마디는 이후에 이어질 긴긴 대화의 서두였지만, 어쩌면 그 이후 대화의 핵심은 바로 그 말씀에 있었다고, 나는 이제서야 생각한다. 일본을 용서하고 싶다는 건 법적책임은 물론 보상조차 필요없다는 말이었다. 심지어 배할머니는 위안부문제가 문제시 된 일조차 납득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배할머니는 하얼빈의 유곽에 있었던 분이다. 그러니 그런 생각은 최전방에서 군인들과 함께 이동해야 했던 위안부들의 체험을 몰랐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위안부문제를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다는 사실을 꽤 오랜 세월 관심을 가져왔던 나조차, 그렇게 늦게 알았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20억에 관한 배춘희 할머니의 이야기까지 쓰기로 한 이유는, 오로지, 제3회 형사공판기에 쓴 것처럼(https://parkyuha.org/archives/5548), 검사가 유희남 할머니의 거짓진술을, 나의 도덕성을 의심하는 자료로서 제출하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사실 최초의 증언에서 2년, 언론보도에서 1년 가까이 지나도록 내가 확실한 반박자료가 되어줄 이 얘기를 공개하지 않았던 것은, 나를 위한 해명이 위안부할머니에 대한 신뢰상실, 나아가 한국에 대한 신뢰상실로 이어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유희남 할머니의 이야기를 실었던 많은 언론 중 일부는 나의 반박도 실어 주었지만 대부분은 무시했다. 가장 악의적으로 보도한 매체중 하나였던 “서울의 소리”라는 인터넷매체는 직접 항의했음에도 이 기사를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사를 반복해 인용하며 나를 “친일매국녀”, “찢어죽일 여자”, “더러운 버러지년”, “왜놈들의 씨받이”라면서 비난하는 이들은 지금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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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18일

(7:28)
그 사람들은 요구는 뭐.. 돈은 뭐 지금 정부는 130만원씩 주고 있잖아요, 갚아주고 있잖아요, 할머니가 죽을 때까지 다 주고 있는데 그것도 다 무시하고, 김대중씨 돈 준 것도 다 무시하고, 다 무시하고, 어디까지…

유희남이도, 유희남이도. 요번에 돈 달라고. (나한테) 온 것은 재판이 열리면 일본돈 20억 달라 하라고, 이칸다고(이런다고), 20억 요구하라고.

(저도 지난번에 들었어요. 지난번에 말씀하시기를, 옛날에 5천만원이었으니까 지금 받으려면 5억은 받아야 된다 이렇게 말씀하시던데.)

아니야 그거 20억. 넉달 전엔가 회의를 했거든. 내가 아플 때, 내가 병원에서 나와서 아플 때 날 보고, 와 가지고 한단 소리가, ‘너도 20억 달라 해라’. 나는 이유를 모르니까, 뭘 20억 달라고 하노, 하니까 ‘재판할때 한 사람 앞에 20억 달라고 대답해’ 라꼬 말하더라고. 아이고…

(넉달전이면 2013년 7·8월경이고 내가 아직 위안부할머니를 만나러 가기 전 일이다.)

(저 그 서류 봤어요. 어떤 내용인지? 제가 처음 갔을 때, 김국장인가… 사무국장. 그 사람이 저한테 그 서류를 보여 줬는데. 할머니 말씀하시는 거 들으니까 그게 그거 같은데요. 저한테 설명하기로는, 지금 현 상태로는 해결이 안 되니까 재판을 다시 하는데, 그 재판 내용이, 일본을 이기자는 내용이 아니라 합의를 이끌어내는 재판이다, 조정을 하는 재판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이렇게 얘기를 했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할머니 열 분 정도 이름 다 있고 다 동의하신 것처럼 되어 있더라구요.)

어 나는 아파서 병원에서 나와서 둘러보는데, 자기들이 회의하더라고, 회의하고 나오는데 김양도 나한테 와가지고, “20억…” 막 그래서 깜짝 놀랐어. 그게, 20억이 무슨 소리냐고.

(아 그럼 김국장도 20억이라고 얘기했어요?)

뭐 그랬겠지. 마지막에, 가다가 우리 방에 들어와서, “할매, 돈 받을 때 20억 달라고, 할매도 그래야 되는데, 내가 이름 적어놓을게” 이러더라고. 그래서 나는 이유를 몰라서, ‘무슨 20억이라고 하노?’ 그렇게 물어보니까, 나중에 가만히 들어보니까, 유희남이가 한 얘기라. 유희남이 20억달라고 하라고 시켜 가지고, 20억 달라고 재판한다고. 전부 다가 요구한다고 하면서 이름을 다 적어놓은 모양이야. 나중에 알고 보니깐.

(아 네… 할머니 그게 한 사람당 20억인가요? 전부해서 20억이 아니고요?)

아니아니 한사람. 그러니까 내가 ????. ~~가 난줄 알고. 아이고 20억이라고? 2억도 아니고.. 그 사람들도 그 사람들인데 어떻게 20억을 달라 하나, 하고 생각하고 가만히 있었다고.

(그건 가능한 일이 아닐텐데… 그거 혹시 김국장이나 안소장이 말한 금액은 아니구요? 할머님들이 생각하는 금액일까요?)

아니 저, 유희남이.

(아 그건 안 될.. 제가.. 여러 사람들, 일본쪽도 만나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데요, 그건 가능한 일이 아니예요.)

그렇지, 꿈에도 생각 못할 일들을 얘기하고 있는 거야.

(근데 왜 그렇게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할까요?)

그래서 내가 아까 둘러 봤거든, 내가 둘러보는데 나한테 와 가지고 “무슨 소리 하거들랑 20억 달라고 해”라고 이 소릴 하더라고. 나는 “20억이 남의 이름인 줄 알고? 근데 이유가 뭔데?”하니까 가 버리고 없어. 나중에 보니까 회담하던 사람들 다 가고 나중에 보니까, 유희남이가 그 의견을 낸 것 같아.

(아.. 그런 방식으로는.. 절대로 해결이 안될 거예요.)

유희남이는 원래 根性(근성, 곤죠)가, 통이 크잖아. 생각하는 게, 정말 とんでもない(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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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할머니와의 대화가 마지막으로 녹취된 날짜는 5월 18일이다. 첫 대화 이후에도 여러 번 20억에 대해 언급하셨지만 5월 3일 통화에서도 이 얘기를 하셨다. 이 무렵 배할머니는 이미 건강이 많이 안 좋으셨다. 그리고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유언처럼 하셨다. ‘알아두라’, ‘써 놔라’, ‘기억해 두라’는 말과 함께.

2014/5/3

아니 뭐 이 얘기는 알아두라 이거지. 자꾸 위안부.., 그.., 그 일본 사람들을, 일본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철저하게 장사를… 유희남이 말마따나 한 앞에 20억씩 받아낸다…, 그런 인간들이 있으니까는.

나도 돈 싫지는 않지만, 누구 말마따나 돈 주면 거절 안 해. 그런데 돈에 그런 욕구를 가지고. ..
(이하 생략)

배할머니가 몸이 아픈 와중에도 이런 이야기를 하신 이유를 나는 이 얘기의 앞 부분에서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뭐 이 얘기는 알아두라 이거지.” 할머니는 “(나만)알고 있으라”는 말을 많이 하셨다. 그리고 살아 생전에 그런 얘기가 공개될 경우 할머니께 미칠 영향이 두렵기도 해서 나는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할머니가 두려워한 건 자신의 생각이 세상으로 나가는 일 자체가 아니었다. 오히려 언젠가는 알려지기를 원하셨다. 자신이 있었던 유곽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달라며 받아 적으라고 하신 적도 있다.

20억 얘기를 반복해 하신 이유는, 꼭 유희남할머니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얘기는 오히려, 모두가 멋대로 상상하고 다 아는 것으로 생각하는 “위안부할머니”가, 정말은 결코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 일본 사람들을, 일본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술회가 그것을 말해 준다. 할머니는 분명 당신의 생각을 나뿐 아니라 세상에 전하고 싶어하셨다. 아마 일본에도.

배할머니는 나눔의집에 거주한 20여년 동안 많은 일본인들을 만나셨을 것이다. 그런데 직접 그런 속내를 들은 일본인은 있었을까. 너무나 늦었지만, 이제야 세상에 전한다.

물론 이 또한 한 분의 생각에 불과하다. 그러나 동시에 혹 단 한분이었다면 더더욱, 그 “목소리”는 소중히 여겨져야 했다. 그럼에도 직접 전할 수 있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 나 자신의 무력에 대해, 나는 앞으로도 오래 생각해야 한다.

(5) 위안부, 또 하나의 생각: ‘적은 100만, 우리편은 나 한명’

할머니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했다. 경상도 출신이고, 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녔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직업소개소에 친구와 같이 갔다고 했다.

여성의 초등학교 졸업은, 무학이 많았던 당시로서는 상당한 학력이 된다. 실제로 할머니는 당신이 있었던 곳 등 필요할 때 종이에 한자를 써서 보여주기도 했는데 놀라울 만큼 달필이었다.

이후 시작된 나와 배 할머니와의 대화가 주로 전화로 이루어진 것은, 이 날의 나눔의 집의 경계의 결과다. 가족이 없는 할머니는 자주 전화를 걸어 오셨고 그렇게 할머니가 마음을 열어 주신 것이 나는 감사했다. 배춘희 할머니는 일본어를 가끔 섞으며 말씀 하셨다. 내가 일본어를 안다는 사실이, 일본어로 교육을 받았을 배할머니의 마음을 열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후 반년 여동안, 할머니는 자주 내게 전화하셨다. 그래서 나는 허락을 받아 녹음을 하기 시작했다.

이하는 그 녹취록을 정리한 일부내용이다. 첫 녹음은 12월 18일 저녁. 할머니가 전화하셨고, 우리는 한시간 이상 대화했다.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대화를 좀 정리해 보았다. 맥락을 알 수 있도록 나의 말을 살려둔 부분도 있다. 이 날 할머니는, 강제연행을 포함한 위안부문제에 대한 생각, 우리사회의 대응에 대한 생각, 나눔의 집 할머니들과의 갈등, 나눔의 집 사무소와 할머니와의 관계 등에 대해 말씀 하셨다.

모든 이야기에서 할머니의 그간의 고독이 묻어났다. 물론 여기서 발화된 할머니의 생각이나 의견만이 옳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이 날도 할머니는 다시 ‘적은 백만, 우리편은 나 한명’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할머니는 그렇게 고독을 호소했지만, 나는 그런 할머니의 고독을 결국 덜어드리지 못했다.

(대화에 나오는 개인명은 복자 처리했다. 녹음이 좋지 않아 내용이 확인되지 않은 부분도 일부 있다. 괄호 처리부분은 내가 할머니께 한 말이거나 이 글을 쓰면서 추가한 나의 생각이다.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말 중 유추 가능한 부분은 보완했고, 어미 등 말을 다듬은 부분도 다소 있다. 생략 처리한 부분은, 공개할 의미가 크게 없거나 다른 할머니들과의 심리적 갈등부분이다.)

(녹취일 2013/12/18 18:19:24)

<불신>

할머니는 자주,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자신의 주변상황에 대해 비판하셨다.

이 날은, 위안부가 군대를 따라 다녔다고 쓴 교학사 교과서가 문제가 되었던 날이었다. 나눔의 집에 기자들이 취재하러 왔던 모양이었는데 그 때 대응에 대한 불만을 말씀하셨다.

정리하자면, 교학사 교과서를 부정하려고 내놓은 자료는 “테레비에서 밤낮 그거 하나만 십 몇년… 내가 온게 18년 되어가는데 밤낮 고거 한장만 내놓는” 자료였다.

“그 장면은 중국이 아니다. 필리핀이나 다른 나라일 것이다.” 라면서 “동양의 군인들이 웃통 벗고 서 가지고..” 나오는 사진에 대해 “큰일나지 그거. 헌병들이 막 따라 댕기는데.”라고 하셨다. 이어서

“옛날에도 우리도 봤지만, 일부 사람들이 한국에서 무슨… 해가지고 그런 장사 한 사람 한국에도 없고 중국에도 없고…

전부, 우리끼리 하는 말인데, 전부 한국사람… 또 중국엔 중국사람들이 주인노릇하고, 이제 한국사람들이 중국어 잘 해 가지고.. 전라도 사람? 태안(?)사람들이 장사했지,

일본사람들은 한국에서 옛날에 캬바레.. 캬바레 하고 노미야(술집)같은 그런건 좀 했는지 몰라도, 여기서 뭐 손님들 상대해가지고 몸팔고 하는 그런 장사는 한 적이 없거든 일본사람은. 중국에도 없고.”

(근데 할머니들은 일본사람도 많이 있었다고 얘기들 하세요.)

일본인이 경영하지는 않았다는 건 할머니가 잘 못 아신 걸로 보인다. 할머니는 하얼빈에 계셨는데 하얼빈에 일본인 경영자가 적었을 수도 있겠다.

“그거는 메챠쿠챠(엉터리로)하는 소리야. 그거 뭐… 함 내놓으라고. 주소 어데고 어디서 그런거 하는지. 그런 사람들… 위치(주-있던 장소) 한번 물어봐야지. 그런 것도 내 생각에는 너무 참 사람이 그야말로 또 하는 소리지만 이승에서는 とおるか知らないけど、저승에서는 通らないよ(이승에서는 통할 지 모르지만 저승에선 안 통한다고)”

(그런 얘기 딴 사람한테는 하신 적 없으시지요?)

할머니의 생각이 어디까지 맞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할머니는, 다른 분들 중 일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셨다. 배춘희할머니가 나눔의 집에서 고독했던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어떨때는… 딴 일에… 뭐 이것도 그렇지만, 아이고 뭐 이승에는 그런 일이 통할란지 모르겠지만 저승에는 안 통할껄~ 하고 말하면 삐쳐 가지고…”

(아, 직접 말씀하신 적도 있어요?)

(중략)

<나눔의 집과 위안부할머니>

“***가… 아름다운 재단에 일본 정부에서 비밀로, 정부의 돈이 아니라 민간의 돈을 써서(?) 오천만원 받고, 또 지 돈 5천만원 하고.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했잖아. 그런데 그 사람들도 성격은 또 뭐냐하면. 여기 사무실에 그 때 ?님 있을때 500만원 하고 1000만원 하고… 말로는 그래 2500만원을 사무실에 줬다. 사무실에도 기부금으로 주는건가보다 고맙다 하고 사무실에서는 받았거든. 받았는데, 이게 막 또 할매들끼리 싸움이 일어나면…
(중략)”

(할머니들이 사무실에 돈을 드리는 적도 있군요, 몰랐어요.)

여기서 언급된 할머니는 아시아 여성기금을 받으신 분이다. 하지만 배할머니조차 ` 5천만원이 일본정부의 돈이 아니라 민간의 돈을 써서` 지급된 금액이라고 이해하고 계셨다. 그 금액이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되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재단은 그 돈이 `일본국민의 돈`이라는 걸 알고 받았을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박원순 시장이 서울시장에 나설 때 그에게 표를 던진 사람이지만, 박시장은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재판에 `검사`로서 참여한 사람이다. 서울시장 당선후, 정대협에 대한 여러 지원이 이루어 진 것도 그런 관계의 연장선 상의 일로 보인다.

<회의>

(중략)

“아이고 여러가지고 全然 여기 わけがない (사람이, 뭐 지가 사는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어디 학교 나온 사람들이 있나, 아무것도 모르고 이게 저 말로는 2학년 댕기다가 어쩌고 저쩌고. 여기 가면 딸이 있다 누구집 가면 딸이 있다 누구집 가면 딸이 있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그걸 다 알아. 그게 이상하잖아.”

(아.. 아는 게 이상하다구요?)

“여기 사람들한테… 잡혀갔다 이러니까는, 밖에 있는데 잡혀갔다…”

(아 어느 집에 누구 딸이 있는지, 마을사람들이 아니면 어떻게 아냐는 얘기시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어찌 알아서 그렇게 했는지, ??~~~론적인 얘기하려면 이상하잖아.

(중략)”

할머니는 일관되게 지원단체와 일부 위안부할머니들의 이른바 `강제연행` 주장에 대해 회의적인 말씀을 했다.

나를 비판하는 운동가들은, 자신들이 정리한 증언집에 그런 이야기가 다 있으니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막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왜 전달과정에서 `다른 목소리`가 배제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혹은 국내언론과 일본과 국제사회를 향한 운동에서 왜 그와 반대되는 목소리만 강조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나는 이제 알 것 같다. 추후에 다시 쓰기로 한다.

 

<연민/고독>

할머니는 자신이 스님이 되어야 하는 운명이었는데 그 `반대`의 길을 살게 되었다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아프리카 아이들을 돕고 싶어 하셨는데, 돕자하던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고 `우리가 더 불쌍하다`고 했다던 다른 할머니께 섭섭함을 내비치기도 했는데 그런 동정심과 연민은 그런 자의식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중국에서 해방을 맞고 한국전쟁 전후에 일본으로 가셔서 오래 살았고, 56세때 몸이 아파 한국으로 나오셨다고 했다. 귀국을 위해 조카를 한국에서 불러들이셨고 영주권을 반환하고 한국으로 들어 오신 듯 하다.

“일본을 떠날 때 고향에 가봤자 아무도 없는데, 내가 어째서 이런 운명이 됐는가… 하는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 그래 가지고 고향에 또 와가지고, 사촌 형제간도 아홉이 있었는데 다 죽고 한 애 남아있더라고. 그리고 배다른 동생 하나가 부천(?)에 있었는데, (?) 하고 난 뒤에 배다른 동생이 하나 생겼는 모양이지. 옛날에. 그래가지고…. 이걸 小説 아니라 뭐에라도 적을라 하면 참 ..”

처음엔 왜관에 계시다가, 92년도, 김영삼 대통령 때 위안부를 찾는 방송을 보았다고 했다.

“그 때, 배다른 남동생도 있고, 이걸 알면 안되는데 하면서 내가 모른체 하고 있다가…”

“김영삼이 그분이, 그런거 있는 사람은 일체 전부 글 써서 바치라고, 신고하라고, 그런 경험 있는 사람은 바쳐가지고 하라고, (해서). 正直に(솔직히) 나는 대구사람이니, 붙들려가 가지고 한게 아니라… 대구 가서 人事紹介所.. 거기 가서 (네 지난번에 말씀해주셨죠) 그런 얘기 했던게 그게..”

“그때는 민사무소 군청, 그런데서 찌라시, 광고, 광고해가지고 여기에 수원서 어디로 어디로 해가지고 들어오면 된다 하는, 그런.. 찌라시(전단을) 뿌렸으니까 그걸 보고 왔던 거지.”

할머니의 인생 역시 `소설`처럼 기구하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 손에 자랐다가 직업소개소를 찾은 어린 소녀. 친구도 친척도 없는 없는 일본에서 오래 살다가 노년이 되어 귀국한 한 여성.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천애고독`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배춘희 할머니가 초기에 목소리를 낸 건, 그런 고독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침묵/소신>

(제가 궁금했던게, 왜 할머니 얘기를 듣는 사람이 없었나예요. 다른 할머니 얘기들은 다 책이 되어 나와 있거든요. 그런데 왜 할머니 얘기는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나 싶었어요.)

“아니 여기도 대강대강은 하지만, 그 사람들이 뭐 써놓은거 보면, 아이고.. どこまで 뭔지 どこまで (어디까지가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잖아요. 그치만 소설 쓰는 사람들이야 잘 쓰겠지.”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에도 못 담을 거라고 했던 배 할머니는, 이번에는 ‘소설’이라는 단어로 다른 분의 증언에 대해 강한 위화감을 표하셨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소설`에 대한 두가지 이해 (일반인이 겪거나 느끼지 못하는 파란만장한 ‘경험’. 혹은 그 반대 의미로서의 ‘허구’)를 배할머니 역시 갖고 계셨다.

사실 할머니들의 경험은 무거운 경험이지만 자신과 주변인의 체험에 한정된다. 그러니 배할머니가 보지 못한 사실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나는 배할머니의 위화감을 이해했다. 위안부 문제와 거의 같은 세월 함께 했던 배할머니의 의문에, 오랜 세월 함께 하고 운동에 관여해 온 분들이 언젠가 그 위화감에 대해 ‘응답’해 주기를 바라고 싶다.

(중략)

(할머니 말씀이 굉장히 흥미로운데, 왜 다른 사람들은 그 얘기를 안들었나 싶어서 그래요. 할머니가 얘기하기 싫었던 거예요? )

(중략)

“연구자들은 오면, 또 나한테 특별히 와서 묻는 사람은 없지만은, 여기 윗사람, 또 그리고 다시 오는 할매들도 와가지고 노망든 할매들도 있고, 아파 누운 할매들도 있고, 뭘 조금 알다가 말다가 하는 머리가 좀 치매끼가 있는 이런 할머니들도 있고.. 조금 안다 하는 젊은애한테는 뭐, わけ고(말이고) 지랄이고 하기가 싫어. 全然 저거부터 저거.. 막 또 엉터리겠지 또 勝手に(멋대로) 얘기를? 는데, 내가 뭐 싫어도 니 그거 역사를 알아야지 알아야지… 말 할 것도 없고..

배할머니가 말하는 `조금 안다 하는 젊은 애`란 누구였을까. 아무튼 배할머니는 그를 향해 자신의 체험을 `말`하는 일을 무의미하게 여기셨던 듯 하다. 구술 채록자가 `정해진 대답`을 기대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배할머니의 이야기가 정리된 형태로 남겨지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을 듯 했다.
다른 할머니들의 건강강태에 대한 배할머니의 말씀은 자신의 건강과 엘리트의식이 만든 것일 수 있다. 진실은 나눔의 집 사람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이로부터 꼭 반년 후 나는 나눔의 집에 거주하는 아홉분의 이름으로 된 고발장을 받게 된다.

(중략)

“군대한테 붙들려갔다 해놓고 또 나중에 보면 뭐, 군인이 막 뭐 열세살 먹은 앨 죽였다 안죽였다 뭐. 그러면 난 뭐 내가 안 들은 얘긴 들을 필요도 없고. 뭐든지 이건 確かだ(분명하다)하는 그런 얘기같으면 몰라, 그런 얘기같으면(?)残すか知らんけど、(남겨질 지 모르지만) 이런 얘기 들으면, 말이 안되는데 싶으면, 난 말 안한다고.”

(아 그래서 말을 안하셨구나. 다른 할머님들 얘기가 좀 할머니 얘기하고 다른것 같아요.)

할머니의 소신을 엿볼 수 잇는 대목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는 일 자체보다, 할머니에겐 진실이 중요했다.

“아 뭐 그 사람들도 개인(대인?)으로는 말 안하지. 딴 사람들이 오면 말 할런지는 몰라도, 할매들… 뭐 그런것도 잘…”

(그러셨구나. 고맙습니다, 저한테는 이런저런 얘기 많이 해주셔서.)

“거긴 뭐 偶然に(우연히) 일본말도 알고, 내가 할라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偶然に 참 이래 말 하고 싶다 하는 그런…”

(저번에도 우연히 테이블에 앉았는데 할머님이 이런저런 얘기 많이 해주셔서 정말 놀라고 기쁘고 그랬어요.)

“내가 일본하고 親戚でもないし(친척도 아니고), 일본에 뭐 特別な(특별한), 뭐 날 따라 와 가지고 이리해 주고 저리해 주고 한 것도 없고, 난 돈 받은 일도 없고..

난 정당하니, 난 그야말로 부처님을 믿어서 그런지, 정정당당하게, 지 속만 알고 있지. 여기있는 사람은 가끔 물어보면 직접은 안들었지만, OOO는 뭐, 말만 하면 막 전부 ~부터 죽였다 ~부터 죽였다, 뭐 죽여도 소문은 언제든지 그 후에 뭐 몇달 후에라도 소문 나는게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더라 하면 소문나는데, 나는 뭐 소문 들은 일이 없는데 뭐, 내가 (이야기를) 만들어가지고 해야 돼? 뭐 어째. 사람은, 短い命(짦은 인생) 아니가, 산다 해도. 잠깐 이 세상에 왔다가 가야 될 사람들인데 뭐할라고 거짓말을 하고 없는 말을 만들고 뭐 하고. 그런 일 절대로없다고. (중략)”

배 할머니의 소신은 불교도인데서 온 듯 하다. 배할머니는 다른 누구보다 자신에게 솔직하려 했고 그 상태를 `정정당당`하다고 표혔했다. `짧은 인생` `잠깐 왔다가 가는 `인생. 내가 배할머니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실제로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좋아하게 된 건 이런 그 분의 성정과 가치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자신이 생각하는 진실을 말하는 이유가 일본과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강조하고 싶어하셨다. 물론 다른 할머니들에 대한 배할머니의 시각이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는 제 3자가 섣불리 판단할 일은 아니다. 배할머니는 다른 분들은 원하는 `비싼 주사`를 마다 하고 덜 비싼 주사를 맞았다는 이야기도 했는데 그 분들이 더 몸이 아팠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배할머니는, 건강과 생명에 대한 욕심이 적었다.

<일본인 방문자>

(중략)

( 어떤 할머니들은 증언하실 때, ‘일본 수상은 우리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어 그 사람들이… 그, 수상이 오면 그렇게 하는게 아니라, ‘우리 죽었나 안죽었나 보러왔나’ 막 이카는데 뭐.

그러니까 막 학생들이 나중에 보면 그걸 알고 막 울고간다고.

아이고 내가 막, 그러니까 (생략) 할머니들이 막 본대로 말하고 나온대로 … 나온대로 일본사람한테, 뭐 속이야 어찌됐든지 말았든지 오면은 그저 ようこそいらっしゃいました (잘 오셨습니다) 하고 인사나 하고, 일본도 참, 이런 일 저런 일 고생이 많죠 하고 빈 말이라도 그런 말은 안하고, ‘너그들 뭐하러 왔는데, 여기 뭐 할머니들 다 죽었나 안죽었나 망 보러왔나’ OOO이 그카면서 달려든다니까 손님한테.”

(학생들한테도요?)

“어어, 그렇게 막 한국말로 그렇게 눈깔을 부릅뜨니까는, 학생들이 이유를 모르니까 울고 있거든.”

(그래도 느낌으로 알겠죠.. 뭔가 싫어하고 그렇다는거를..)

“어, いいこと言わないね(좋은 소리 아니라는 건) 알지.”

(참 마음이 여린 아이들이 많은데 왜 그러셨을까…)

이상이 길었던 어느날의 통화를 간추려 본 내용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할머니의 ‘태도’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그저 ‘예의’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의 태도는 대상에 대한 감정과 이해, 그에 더해 성격과 가치관이 만든다. 사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런 할머니의 ‘태도’를 전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에 대한 태도를 넘어 `세상`에 대한 태도와 평화의 관계에 대해서는, 제 3장에서 쓸 예정이다.

(4) NHK문제에 대해

할머니를 두번째 만나러 갔을 때 나는 NHK 서울지국 기자들과 같이 갔다. NHK기자는, 책이 나온 이후 어느 날 연락이 와서 인터뷰에 응한 것이 인연이 되어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내게,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한국언론이 긍정적인 것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이 책이 어떤 식으로 한국사회에 받아들여지는지 기록해 두고 싶다고 하면서 나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위안부 관련된 일에 관한 나의 행적을 가능한 한 기록하고 싶으니 관련된 행보를 알려 달라고 했었다. 나는 그에게 협조했다.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을 향해 쓴 책이기도 했고, 아시아여성기금 해산 이후 위안부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일본의 국영방송이 위안부문제에 관심을 갖는 일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그 기자는 마침 내가 다닌 대학을 나온 후배이기도 해서 여러번 만나는 사이에 친밀감도 생겼다. 위안부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의 그런 마음을 신뢰했다. 그래서 어느날, 배춘희 할머니와 전화 후, 찾아가기로 약속이 잡혔을 때, 그에게 나의 일정을 알렸다.

그리고 전 날, 나눔의집 소장에게도 내일 방문하겠노라고 문자를 보냈다. 대답이 없어서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문자를 보냈다. 그런데 그는 그 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NHK기자와 함께 찾아온 나를 노골적으로 경계했다. 그리고 영상촬영은 안된다고 못박았다. 그 날의 방문 목적은 식당에서 잠시 대화 나누었던 배춘희 할머니를 개인적으로 만나 차분하게 이야기를 듣는 일이어서 많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배춘희 할머니 영상녹화를 단념하고 할머니 방에서 그냥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궁금했는지, 나눔의 집 직원이 여러 번 동정을 살피러 왔다. 할머니에게는 당신의 뜻대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자유가 없어 보였다.

고발 직후 나눔의 집 소장은 이 날의 방문에 대해 내가 마치 ‘봉사활동을 하는 장면’을 찍고 싶어 했다는 식의 악의적인 거짓말을 페이스북에 썼다. 이후에도 관계자들에게 같은 이야기를 메일로 보냈다고 들었다. 2015년 12월, 내가 기소당하고 항의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도 똑같은 이야기를 퍼뜨렸다. 급기야는 더 나중에 일본인 지원자들을 상대로 한 모임에서까지 같은 말을 했다. 일본의 지원자들 중에는 그 말을 믿고 소장의 말을 SNS를 통해 확산시킨 이들도 있다.

그동안 소극적인 해명 밖에 하지 않았지만, 이제 다시 명확히 해명해 둔다. 이탤릭체는 나눔의 집 소장의 메일이 살포한 메일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박유하 씨 나눔의 집 OOO 소장에게 전화를 하여 정대협 반대 행동에 동참 강요

2014년 2월경 일면식도 없는 박유하 교수가 나눔의집 OOO 소장에게 전화를 하여, 소장님도 이제는 정대협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활동에 동참하자고 강요하였고, 전화를 끝내면서, 친절하게 전화를 받아 주어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박유하씨가 한번 만나자고 이야기 하기에, OOO 소장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만 제외하고 주말에도 나눔의 집에서 근무를 하니, 나눔의 집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이에 박유하씨는 외교부에서 발표를 하는데, 시간상 나눔의 집을 갈수 없어, 세종대학교에서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OOO 소장의 일정상 세종대학교에서 만나지는 않았다. (이상, 안신권. 2015년 12월 메일)

남아 있는 핸드폰 문자에 의거하자면 내가 나눔의 집 소장에게 처음 전화한 건 2013년 11월 15일이었다. 나는 위안부관련 외교부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고(나는 한 학자로서 의견을 말했을 뿐 `발표`하지 않았다), 참석자 명단에 소장의 이름이 보이기에 서울에 올 때 만날 수 있으면 만나서 사죄와 보상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그것이 그에게 전화한 이유다. 그리고 회의 이전에 서울에 올 일이 있으면 연락 달라고 했다. 나는 세종대에서 만나자고 한 적도, 정대협에 반대하자는 말도 한 적이 없다. 당연히 `강요`한 적도 없다.

11월30일, 첫 방문 날에도 미리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사무국장을 만나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말, 12월 7일에 ‘오후에 방문하겠다’고 보낸 문자가 내겐 아직 남아있다. 이 날이, 위에 적은 나눔의 집 두 번째 방문이자 배춘희 할머니와의 두 번째 만남 날이기도 했다. 그 이외 이야기는 일체 한 적이 없다.

다음날 나는, 불편하게 만든 데 대한 사과 말과, ‘나도 해결방법을 모색중이니 가능하면 책을 읽어 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나서 다시 만나자, 필요하면 책을 보내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는 내게 ‘바쁘신데도 나눔의 집을 방문해 주어 감사하다, 책은 직접 구입하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러니 그가 나에게 적대적으로 변한 원인이 꼭 이 방문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미 여러 번 쓴 적이 있지만 그가 나를 고발한 이유는 배춘희할머니와 긴밀하게 교류하게 된 일, 그리고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심포지엄을 통해 세상에 내보낸 일에 있다. 나눔의 집 소장은 이후 NHK기자의 인터뷰에 응하기도 했다.

박유하 씨 나눔의 집 방문 신청이나 할머님들 허락도 없이 NHK-TV 촬영 시도

박유하씨 나눔의 집을 방문하여 OOO 소장을 처음 만났을 때, 사전에 <나눔의 집 >이나 할머님들에게 통보나 허락 없이, 일방적으로 일본 NHK-TV 방송을 대동했습니다. 그리고, NHK-TV 기자는 할머님들과 박유하씨가 만나는 모습을 촬영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OOO 소장이 할머님들한테 사전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라고 했더니. 박유하씨가 미안하다는 소리를 하지 않고, <나눔의 집 >은 누구나 촬영하는 곳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이후 NHK-TV 기자가 OOO 소장에게 박유하씨 자원봉사활동하는 모습을 촬영하고 싶다고, 몇 번이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OOO 소장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 위해 박유하씨가 봉사를 한 적이 없는데, 뭐를 촬영하죠. 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래서 촬영은 불허 되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배춘희 할머니와 약속을 하고 갔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NHK기자가 있으니 함께 갈 거라는 이야기도 할머니께 미리 말씀 드렸다. 촬영대상은 내가 아니라 할머니였고, 내가 ‘자원봉사하는 모습을 찍고 싶다’고 NHK기자가 말했다는 것은 소장의 거짓말이다.

우리는 그날 한시간 여 동안 배춘희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3) 배춘희 할머니와의 만남

박유하

학자들이 많이 포진해 있는 정대협도, 나를 고발할 생각이었다. 그 생각이 책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건 분명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책 자체를 두고 고발을 검토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순수했다고 생각한다.

정대협이 아니라 나눔의 집이, 그리고 발간 직후가 아니라 10개월이나 지나서 고발에 이르게 된 배경에는 내가 할머니들과 교류를 시작한 일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내가 다시 나눔의 집에 가는 일이 없었더라면 고발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그 기간에 만난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이 사회에 전하기 위한 심포지엄을 다음해 봄에 여는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 심포지엄을 한일 양국 언론이 호의적으로 주목하는 일이 없었다면 고발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고발은 그런 의미에서 사실 책자체가 문제된 고발이 아니다. 나에 대한 경계심이 나를 고발하도록 만든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지원단체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갖는 할머니와 내가 만나게 된 일이 고발의 먼 원인이 되었다. 그들이 나를 경계하고 위험시했다는 것은 고발장 도처에서 나타난다. 지원단체는, 그들의 주장과 운동을 내가 방해한다고 여겼었다. 그에 더해 나눔의 집이나 정대협에 대한 일부 할머니들의 불만을 내가 알게 된 것도 그들이 나를 경계한 또하나의 이유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먼저 말하고 싶다. 나는 그들의 오랜 기간에 걸친 노고를 폄훼할 생각이 없다. 인간이 하는 일에, 하물며 여러사람들이 모여 하는 일에 어떻게 시행착오가 없을 수 있을까. 더구나 하나의 방침을 정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토론과 고민이 존재했을 것이고, (2016년 9월 4일에 일본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발표된 야마시타영애선생의 발표자료ー日本軍「慰安婦」問題とオーラルヒストリー研究の/への挑戦ー를 보고 나는 그들이 증언집을 만들면서 내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많은 고민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고민과 논의과정에 존경을 표한다. 또한 운동의 성공을 위한, 내가 알지 못하는 노력과 눈물에.

그렇지만, 동시에, 나를 고발한 또다른 지원단체의 거짓말과 폭력을 그들이 2년 이상 방관해 온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 검찰이 주도한 조정위원회의 조정과정에서 나도 할머니들께 사과하겠지만 지원단체도 나에게 사과해 달라고 말했던 건 그래서기도 했다. 고발자체도 납득할 수 없었지만 고발이상으로, 고발과정에서 이루어진 경솔과 무지와 그에 따른 세간의 비난에 대해 ,인권운동을 표방하는 지원단체가 오래 침묵해 온 이유를 나는 사실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20년 이상 위안부문제에 관여해 온 이들 중 아직 누구도 나에 대한 고발을 취하하라는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아직 없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슬프지만, 이러한 정황이 작금의 대한민국의 비윤리적 상항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 더 슬프다. 이들이 쉽게 비난하는 정치가나 경제인들에게만 비윤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눔의 집에는 일본정부가 90년대에 사죄와 보상을 위해 만든 아시아여성기금관계자이기도 했던 일본인들과 함께 갔다. 그들은 일본정부의 예산으로 할머니들을 온천에 모시고 가거나 음식을 대접하고 용돈을 드리기 위해 1년에 수 회 한국을 방문한다고 했다. 이들을 알게 된 건 2006년에 일본에서 <화해를 위해서> 일본어 번역본이 나온 이후다. 방문 전날 나눔의집 소장에게 연락했더니 자신은 다른 일이 있어 없지만 사무국장을 만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들을 만나기 전에 사죄와 보상에 관한 나눔의집의 생각을 사무국장에게 물었다. 그리고 나눔의 집이 정대협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자신들은 당사자중심으로 해결할 생각이며 ‘법적배상’이 아닌 조정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재판을 미국에서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이 재판에 찬성한다는 의미로 할머니들의 도장이 찍힌 서류까지 사무국장은 나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할머니들이 계시는 건물로 이동해 호텔에서 만났던 유희남 할머니 외 몇몇 할머니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머니들이 열 분 계시다고 했지만 다 나와 계시지는 않았다. 몸이 불편해서 못 나오시는 거라고 사무직원이 말했다. (이하에선 위안부할머니들에 대해 극존칭은 쓰지 않으려 한다. 이 글의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서 봉고차를 타고 식사장소로 이동했다. 할머니들이 초밥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우리는 일식집으로 갔다. 그리고 적당히 자리를 잡았는데 그 때 우연히 맞은편에 앉은 분이 후에 깊은 교류를 이어가게 된 배춘희 할머니였다. 이 분은 이미 나눔의 집에서도 뵈었지만 그 때는 이 분과 따로 대화하지 않았었다.

배할머니가 우리와 함께 앉은 것은 우연이었을까. 이때는 아직 몰랐지만 일본을 좋아하셨으니 처음부터 일본인이 있는 자리에 앉을 생각이셨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분 옆에 일본인이 앉았고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일본어로 대화했다. 영상에서도 그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배할머니는 가끔 주변사람들을 의식하는 듯 했다.

할머니가 일본을 용서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을 때, 허락을 얻어 핸드폰카메라로 할머니를 녹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이 날의 영상을 다음해 배할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배할머니도 국가배상을 원했다’고 나눔의 집 소장이 말한 보도를 보고 처음으로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2014년 6월 10일이었다. 할머니께 불이익이 갈지도 몰라 그때까지 공개하지 않았던 영상이기도 했다.

이하에, 이 첫 만남에서 배할머니가 했던 이야기를 페이스북에서 옮겨 둔다.


(この話が入ったら。。。だが、この話が入ったら、それこそ敵は百万、こっちは一人、そういうことになるわけ。)하지만, 이 이야기가 들어가면..그야말로 적은 100만, 나는 혼자. 그렇게 된다고.

배할머니는 구체적으로 대답하기 전에, 자신의 이야기가 나눔의 집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표했다. ‘적은 백만, 나는 혼자’. 나는 뜻밖의 단어와 표현에 놀랐다. 오랜 세월 함께 해 온 이들을 ‘적’ 이라고 말하도록 만든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그건 꼭 진짜 적대감에서 온 표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그냥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해온 데 대한 절대고독을 표현한 단어였을 것이다.

이어서 나는 할머니가 일본을 용서하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에 대해 물었다.

(いや、思うって、うちは仏教で、あの世の事、この世の事、ずっと聞くでしょう。ひとがこの世に来て、何か一ついい事しないで、そのまますっと帰るというのはあれだし。うちが一人だったら、許せば、許して、うちがこっちでこういうこと、あういうことあまりしないとかね、それで黙っていたら、むこうは何かが他の、何かほかのお礼を返すかも知らん。) 뭐, 생각한다기보다… 나는 불교도이고, 이 세상에 대해 또 저 세상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듣잖어. 사람이 이 세상에 와서 뭔가 좋은 일 하나 하지 않고 그대로 떠나버린다는 건 좀 그렇잖아. 나 혼자라면, 용서하고.. 용서해서 우리가 여기서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하지 않는다거나.. 그렇게 아무말 않고 있으면 그들은 뭔가 다른, 뭔가 다른 보답을 할지도 모르잖어.

할머니는 처음 만난 나에게 곧바로 한국의 운동방식을 비판했다. 그건 왜였을까. 배할머니는 다른 이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은 일이 있었을까. 어쩌면 그건 ‘일본어’로 발화되어야 할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특별한 이야기가 ‘일본어’로 발화된 일의 의미를 나는 제3장에서 다시 생각해 볼 예정이다.

(こういう相談する人もおらんし、一人でテレビを見ながら、一人で考えるわけ。だから、一生一代ね、この世に産まれてきてね、いいことするのね、一人だったらできるけど、)이런 식으로 상의할 사람도 없으니까, 혼자서 테레비를 보면서 생각하지. 그러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 딱 한번,좋은 일을 하는거야. 혼자라면 가능한데..

배할머니는 90년대부터 나눔의 집에 계시다고 들었었다. 배할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았다면, 그 긴 세월을 ‘혼자’ 가슴에 품고 지냈다는 얘기가 된다. 중요한 건 할머니가 용서라는, 아직 한번도 발화되지도 실현되지도 못한, 일본과 마주하는 자신의 방식을, ‘좋은 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だから、こっちも言ったのね。それもらってあの世に持っていくのかって、冗談で言うわけやん。にこにこ笑いながら、あの世に持っていくの?ってね。すると自分の子供らにやるってね。親だからね。その欲まで持ってくのかと思って黙っていたの。何も言わないで。)그래서 나도 말했지. 그 돈 받아서 저세상에 가져 갈꺼야? 농담처럼 말하지. 웃으면서. 저 세상에 가져갈 거냐고. 그러면 자식들 준다고 하지. 부모니까. 그런 욕심까지 가져갈 건가 생각하면서 가만히 있었어. 아무말 않고.

배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이 많은 보상을 요구하는 걸 못마땅해 하셨다. 하지만 다른 할머니들의 그런 태도가 ‘부모’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해하고 있었다. 비판을 “농담처럼” 말하는 배할머니의 태도에서 나는 할머니의 고독을 읽는다.
할머니들간의 생각과 태도의 차이는, 세간에 보이는 것처럼 할머니들이 그저 투명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무구하고 맑은) ‘소녀’나 ‘투사’로서의 위안부상을 비판한 것은 그래서이기도 했다. 1990년대에 시도된 일본의 보상 이후 벌어진 할머니들의 분열, 지원단체와의 갈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화해를 위해서 2장). 일본인 지원자들 중 일부는 할머니들을 그저 무색투명한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 (그럴수록 강한 감정이입상태가 되는 것도 볼 수 있다. 주변인들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지에 대한 나의 생각은 2009년에 쓴 한 논문에서 밝힌 바 있다. 「あいだに立つ」とはどういうことかー「慰安婦」問題をめぐる九十年代の思想と運動を問い直す) 예를 들면 기타하라 미노리씨가 나를 격하게 비난한 것도 그런 심리적 결과가 아닐까 한다.

보상에 대한 다른 할머니들의 생각을 그저 욕심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배할머니가 그러한 생각에 거리를 둘 수 있었던 건 불교신자로서의 덕목이기도 하겠지만 가족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 날, <제국의 위안부>를 내고 난 후, 2013년 늦가을에 내가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생각을 갖는 할머니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なんで、あれ送れないのかといって、もうしゃべるでしょう。しゃべったらうちは黙っているでしょう。あなたは日本人がそんなに好きなのかって言うわけ。日本人のお客さんが来たら好きでしょう!って。それで言い返すわけ。うちは何も言わないで、黙ってテレビだけ見るー いや、黙ってテレビだけ見て、自分たちは(日本人の)ワルグチいって、うちも一緒になって言ったらいいけど、言わないでしょう。言わないから、みんなうち一人を注目するわけ。いやっていうのは、テレビ見ても、お金のこととか、そういう、あの、首相が出て来てもうちは黙っておるでしょう。だから、一緒になってワルグチ(いわないのが行けないの。)悪口言ったらいいのに、黙っているの見ていたらね、わたしとかね、自分の、、に言ってるわけ。)왜 그거 안 보내느냐면서 뭐라 그러거든. 그래서 내가 가만히 있잖어. 그러면 당신은 일본인이 그렇게 좋아? 그런다고. 일본사람 손님이 오면 좋지? 그러는 거야. 그렇게 말하지 그러면 나는 아무말 않고 테레비만 봐. 아무 말 않고 테레비만 보고 있으면 자기들은 (일본사람) 욕을 하면서, 나도 같이 해야 하는데 안 하잖어, 같이 비난하지 않으니까 모두 나를 주목하는 거야. 테레비를 봐도, 돈 얘기나…그 왜, 수상이 나와도 난 가만히 있거든. 그렇게 같이 비난을 하면 좋은데 하지 않는 걸 보고는, 내 얘기를.. 자기의.. 에게 말하지..

분명 배할머니는 일본을 좋아하셨다. 해방이후에도 일본으로 들어가 30년 정도 사시다가 80년대에 들어오셨다고 했다. 물론 오래 산다고 해서 그 지역에 꼭 애착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대화를 한 이후 할머니는 종종 나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대화가 거듭되면서 나는 할머니가 북한이나 중국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고, 중국에서 들어오신 할머니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배할머니는 해방 이후 냉전체제를 살아온 한국인 대부분처럼, 냉전 후유증을 깊숙이 내면화하고 있었다.

나눔의 집은 일본에 대한 호감을 공식적으로 드러내서는 안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나눔의집 건설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기부했고, 상주하는 봉사자들은 많은 경우 일본인이었다. 그럼에도 그곳에는 표면적인 적대와 실질적인 호감이 공존할 수는 없었던 셈이다. 표면적인 적대가 감정배치에서 우위에 놓이는 구조 속에서, 배할머니는 고독했다.

(そう、うちは仏教。家の中でも、他の人は仏教って、あの、何か、、、したから、、、だけで仏教じゃないの、他の人たちは。その、クリスチャンが四人おるわけ。心から徹底して、「うちはなんでもないです」っていって、でもうちら、お寺に寄付やったことでわかったわけ。あ、あのおばは仏教だなってそういうことわかったけど、その金をうちがね、ちょっとだけ服やらあったらね、たくさん要らないし、まぁ、他の人は親がなくなっていないけど、うちはその金を仏様にあれしたほうがいいなと思って、お寺に寄付したほうがいいなと思って、他のところより。お寺に寄付した。それで、気がさっぱりするもん。お寺の仏様に、何かあれに使ってくださいっていって寄付したわけ。) 그래. 나는 불교도야 . 나눔의 집에는… 크리스챤이 4명 있지. 아주 철저한. 그래서 나는 종교없다고 말하지. 그런데 내가 절에 기부한 일이 알려졌어. 아 저 할머니는 불교구나 라고. 그 돈을, 내가 말이지, 옷 조금 있으면 많이 필요하지 않거든. 글쎄 다른 사람이야 부모가 있지만(?). 나는 그 돈을 부처님께 드리는게 좋겠다 싶어서 절에 기부하는 게 좋겠다 싶어 다른 곳보다. 그래서 절에 기부했지. 그러면 마음이 비워지지. 절에 계신 부처님께 뭔가 (좋은) 일에 사용해 주세요 하면서 기부했지.

나눔의집 할머니들 사이에는 냉전체제 후유증 뿐 아니라 종교차이도 존재했던 것 같다. 세간에도 흔히 있는 그런 차이도 배춘희할머니를 더 고독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눔의집은 불교재단이 만든 곳이다. 나눔의 집에 상주하는 여승과도 가까운 듯 했다.

배할머니의 고독은 냉전체제 50년의 후유증이 만든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본’을 호명하는 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해방 이후 70년 동안의 한국사회가 만든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배할머니의 고독은 우리 모두가 만든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우리역시 그 구조 속에 함께 놓여 있다는 점이 우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자신 혹은 타자를 검열하는 일로 누군가를 억압하는.

배할머니와의 교류는 그런 고독과 마주하는 일이기도 했다.


 

(2) 할머니들과의 만남

박유하

앞서 쓴 것처럼, 위안부문제론을 한 권의 책으로 제대로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2012년 봄이다. 사실 나는 위안부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은 <화해를 위해서>에 거의 썼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굳이 다시 써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한일양국에 (혹은 좌파와 우파에게) 말걸기를 시도한 <화해를 위해서>는 일본에서는 과분한 반응을 얻었지만 한국(지원단체)에서는 묵살당했다. 그리고 정대협의 소녀상 건립과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이후 양국 언론은 혐오와 증오만이 넘치고 있었다. 무엇보다, 어른들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는 청소년들이, 상처받고 적개심을 다지면서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었다. 지난 4반세기이상으로 심각한 4반세기를 예상해야 할 상황이었다.

귀국 후, 촌음을 아껴 집필에 매진했다.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가급적 줄였다. 책 한 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작은 물동그라미(파문)가 또다른 물동그라미를 만날 수 있도록 하려면, 우선은 나부터 돌을 던져야 했다. 빠르면 빠를 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원한을 안고 이 세상을 떠나는 분이 한분이라도 적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3년 여름에 <제국의 위안부>를 내놓을 수 있었다.

<제국의 위안부>는 역사서가 아니다. 역사와 마주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한 책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최소한의 정보를 담으려 한 책이다. 학술서로 만들 수 있는 자료를 사용하면서도 일반서 형태로 낸 것은, 양국국민이 널리 알게 된 문제인 이상, 아카데미즘 안에서의 논의만으로는 이 사태를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쫓기는 듯한 기분으로 책을 내고 나서, 나는 할머니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집필 중에 할머니를 만나지 않은 것은, 오래된 증언집들에 오히려 더 풍부한 서사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곳에는, 단일화되기 이전의, ‘국민의 상식’이자 ‘국정교과서’가 되기 이전의 “여성의 이야기”가 온전하게 담겨 있었다.

나는 증언집을 통해 그렇게, 훼손되지 않은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또 그에 근거해 조선인위안부가 어떤 존재인지 분석했다. 그리고 새로운 사죄와 보상이 필요하며 그를 위한 협의체에 당사자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썼다. 그러니 책을 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뒤늦게나마 “지금 이곳”의 힐머니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위안부문제 초기부터 할머니들을 위해 애써왔음에도 90년대 후반에 아시아여성기금일을 하면서 정대협과 갈등을 빚고 입국금지를 당한 일본의 저널리스트가 있었다. <화해를 위해서>에서 그 이야기를 쓴 것이 인연이 되어 그 여성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여성은 기금해산 이후에도 이어진 일본정부에 의한 예산으로 할머니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여성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함께 만나고 싶다고 부탁했다. 그리고 시내 한 호텔에서 위안부할머니들 세 분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증언집에서 이미 체험을 읽은 적이 있는 분도 계셨다. 그 만남은 긴장되는 체험이었다. 내가 모르는 세월, 내가 모르는 신산한 체험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고 긴장을 요한다. 그날, 나는 그분들과 주로 일본의 사죄와 보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체험을 듣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위안부문제로 또다른 책을 쓸 생각이 없는 이상, 그분들께 나 하나를 위해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불러내도록 해야 할 권리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분들이 원하는 사죄와 보상이 지원단체가 말해오던 주장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이후에 자택으로 찾아가 만난 또다른 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분은 강제로 끌려간 체험을 스스로 말씀하시는 분이었는데, 그럼에도 ‘법적책임’요구같은 건 필요없고 보상금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놀라지는 않았다. 이미 아시아여성기금을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 그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오랜 세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해 온 주변인들의 생각이 주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그런 목소리가 그동안 ‘들려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것을 새삼 다시 확인하면서, <화해를 위해서>와 <제국의 위안부>에서의 나의 시도가 무력했음을 알았다. 나의 책의 주요목표는, 이 문제에 대한 할머니들의 생각을 전하는 일이었지만, 나의 시도가 여전히 실패중임을 아프게 깨달아야 했던 시간이었다.

또다른 할머니들을 만나려면 한국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나 나눔의집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수요시위에 참석하고 온 나의 제자는,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고 했다. 지원단체가 할머니와 외부인의 만남을 극력 꺼리는 듯 했다고 말했다. 정대협에 내가 직접 연락하지 않은 것은, 정대협이 나를 발간직후에 고발하려 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 발간직후인 9월 경에, 정대협이 변호사를 불러 나에 대한 고발에 관해 의논했다는 것을, 나는 정대협관계자가 올려놓은 일지에서 봤다. 그리고 이 때 의논했던 변호사는 고발에 부정적이었다는 것을 훗날 다른 변호사를 통해 듣기도 했다. 그런데 2016년3월, 나의 책에 대한 논의를 하는 모임이 도쿄에서 열렸을 때 제출된 이나영교수의 자료에는, 전 정대협대표인 정진성 교수 등과 논의했으나 내 책이 대응할 만한 ‘가치가 없어’서 대응하지 않은 것으로 쓰여 있었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고발장에 지적된 100곳 넘는 부분 중에는 정대협에 관한 기술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책에서 정대협을 비판했으니 이들의 당혹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나에 대한 나눔의 집 고발에 정대협이 관여했는지 여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원고측 서면과 자료에서 운동가와 학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은 적은 없다. 그리고 그런 연구와 자료들을 만든 것이 정대협운동인 건 분명했다.

정대협을 통해 할머니를 만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그래서 나는 또하나의 지원단체인 나눔의집에 연락을 했다. 전화로 연결된 나눔의집 소장에게, 학기 중이어서 광주에 내려갈 수 있는 시간을 만들기가 당분간 쉽지 않으니, 혹 서울에 용무가 있을 경우 연락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 후 서울에서 만날 수는 없었다. 그가 나의 책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대협에 대한 비판서이기도 한 나의 책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나에게 예의를 갖춰 대했고, 11월 말에 내가 나눔의집에 가겠다고 했을 때, 당일 자신은 나눔의집에 없지만 사무국장과 얘기하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그래서 나는 앞서의 일본인 여성과 나눔의 집에 함께 갔다. 호텔에서 만난 할머니 중 한 분이 나눔의 집에 계시기도 했기 때문에 그 분과는 재회의 만남이 될 터였다.

(1) 위안부문제와의 만남, 『제국의 위안부』까지

박유하

1. 배춘희 할머니를 생각하며

1.1 위안부문제와의 만남, 『제국의 위안부』까지

이미 쓴 적이 있지만(‘외교란 무엇인가’), 나는 1990년대 초, 아직 유학 막바지 무렵에 도쿄에서 위안부할머니들의 증언집회에서 통역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위안부문제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러니 위안부문제는 내게도 4반세기 함께 한 문제인 셈이다. 물론 운동이나 본격적인 연구를 이 무렵 시작한 이들에 비하면 나의 이 ‘만남’이란 아주 작은 체험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 세월 이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갖고 할머니들과 연구 혹은 운동이라는 형태로 함께 해 온 분들께 먼저 경의를 표하고 싶다.

나의 연구대상은 일본근대문학이고, 그런 의미에서도 위안부문제는 이 무렵의 내겐 아직 본격적인 고찰대상일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귀국 후에도 나는 이른바 ‘위안부문제’와 나는 가까워질 수 없었다. 냉전종식후 한국의 90년대는 강력한 민족주의시대였고, 위안부문제는 그러한 시대에 기대는 형태로 사회문제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시 일본근대를 대표하는 작가 나츠메소세키의 민족주의가 어떤 식으로 제국주의를 지탱하게 되었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나아가 민족아이덴티티자체가 여성에 억압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무렵이기도 했다. (훗날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라는 책에 그 인식을 담게 되었다.) 따라서 그런 민족주의에 여성운동이 의지하는 정황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위안부문제의 중심에 있었던 이들과 교류할 만한 네크워크도 없었다. 80년대 후반을 일본에서 유학을 하며 보낸 탓에, 민주화운동관계자도, 이화여대를 중심으로 한 여성운동관계자도, 그리고 실천적 기독교관계자마저 내 주변엔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의 위안부문제에 대한 관심이 지속된 것은 역시 1990년 대 초반에 동시통역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흘렸던 눈물체험과 절규하던 할머니들의 하얀 치마저고리 모습이 내 안에 깊이 각인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십대부터의 나의 독서물리스트 안에 한국전쟁전후의 소설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른바 ‘양공주’에 대한 따뜻한 시각이 담긴 몇몇 소설가들 덕분에 나는 그녀들을 내 안에서 편견없이 바라볼 수 있다. 물론, 한국에서 일본학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학생들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나 일본을 좋아하는 일에 대한 죄의식에 무관심할 수 없었던 것도, 나의 관심을 지속시켜 준 중요한 동인이었다.

할머니들을 가까이 만나 이야기하는 기회를 갖게 된 건 그로부터 무려 10년이나 지난 2003년 겨울이었다. 당시 김군자 할머니 등 나눔의 집에 계신 몇 분이, 한국정부의 무관심을 질책하면서 항의의 표시로 국적을 포기하겠다고 발표한 일이 있었다. 마침 한국을 방문한 일본의 페미니스트학자 우에노치즈코 선생도 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어 우에노선생의 제자와 셋이서 나눔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이 때의 방문에서 나는 밖에서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알 수 있었다. 경기도 광주의 나눔의 집 건설에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기부금을 냈다는 사실, 우에노치즈코 선생도 그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 나눔의 집에 와서 봉사를 하는 이는 대부분 일본인이라는 사실 등.

특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은 김군자 할머니의 미움이 일본군보다 (수양)아버지를 향해 더 크다는 사실, 일부러 나눔의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사시는 분이 있고, 그 분의 가슴에는 한 일본군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살아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날 얻은 인식도 나는 2년 뒤에 낸 <화해를 위해서>에 썼다. 한 사람 안의 기억과 사회의 관계, 과거 기억과 현재의 상관작용 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이때부터였다. 작고한 니시카와 나가오 선생의 부인이신 니시카와 유코 선생이 중심이 되고 우에노 선생, 역사학자 나리타류이치 선생이 함께 한, 일본학술지 <思想>이 기획한 근대가족과 국가문제특집에 재일교포작가 이회성론을 발표하면서, 기억이 어떤 식으로 인간을 무너뜨리거나 지탱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 때이기도 했다.

2005년, 나는 처음으로 위안부문제를 다룬 책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를 냈다. 그건, 그 동안 위안부문제의 중심에 있었던 연구자와 운동가들에 대한 내나름의 말걸기이기도 했다. 90년 대에 할머님들을 향했던 일본인들의 마음, 당시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일본의 사죄와 보상에 대해 한국에 소개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몇몇 서평을 얻었을 뿐, 위안부문제의 중심에 있는 이들의 반응은 기대와는 달리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 해 말, 그 전년도인 2004년에 일본의 고모리요이치 교수, 김철 교수, 최원식 교수 등과 함께 만든 <한일, 연대 21> 주최로 와다하루키 선생, 우에노치즈코 선생을 발제자로, 그리고 고모리 요이치 선생을 토론자로 하는 위안부문제 심포지엄을 열면서 (<한일 역사인식의 메타히스토리> 수록), 그리고 윤미향 정대협 현대표를 토론자로 초대했다. 하지만 소통은 쉽지 않았다.

다음해 말, 일본에서 <화해를 위해서>가 번역되었다. 내가 가장 신뢰했던 주변 연구자들은 진지한 관심을 갖고 서평회를 열어 주었지만, 그 연구모임에서 함께 했던 서경식, 김부자 선생을 비롯한 재일교포연구자들과 몇몇 연구자들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토론자로 참석했던 야마시타 선생의 말에서, 정대협사람들이 나의 책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 2007년 여름, 이 책에 대한 첫 비판이 나왔다. 한국에서 정대협활동을 하기도 했던 김부자 선생의 비판이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의 비판이 이어졌는데 그들은 나의 책이 아사히신문의 고 와카미야 주필이나 와다 선생과의 개입이 있었던 걸로 생각하는 오해마저 하고 있었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근거없는 의구심들은 이미 10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셈이다.

그리고 2008년, 2009년에 서경식 교수, 윤건차 교수 등의 나에 대한 비판이, 주로 한겨레신문을 통해 한국에서 시작되었다. 나의 책이 일본우익의 상찬을 받았으며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들이 박유하의 책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들조차 정말은 식민지지배에 대한 진정한 사죄의식이 없어서라는 요지의 글들이었다. 생각지도 않던 공격에 나는 많이 놀랐지만, 결국 글을 쓴 해당기자에게 항의했을 뿐, 더이상의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나의 이 때 행동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알 게 된 건 그로부터 몇 년 지난 2014년 6월, 고발장을 받아들었을 때다. 박유하가 말하는 화해란 한미일 동맹을 강화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이 녹아든. 나의 역사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서경식교수나 윤건차 교수의 영향이 뚜렷이 보이는 그 고발장은, 내가 방관하는 사이 나에 대한 의구심이 한국에 확산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니면 나를 비판했던 이들이 직접 관여한 것일까. 나는 아직 그 내막을 모른다.

아무튼, 내가 앞서, 이 고발이 정말은 위안부문제에 관한 지식인들의 생각의 차이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런 시간 속에서 위안부문제에 대해 또 책을 쓸 생각은 하지 않았다. 2010년대 들어서자 한일관계는 시시각각 더 나빠졌고, 그런 정황의 중심에는 늘 위안부문제가 있었지만, 나는 다른 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지배란 무엇인가>로 제목을 붙일 예정이었던, 일본인들을 향해 쓰일 예정이었던 그 책 안에, 나는 위안부문제에 한 챕터를 할애하기로 했다. 아시아여성기금 해산 이후 위안부문제에 대한 관심이 현저하게 낮아진 일본인에게, 특히 위안부는 그저 매춘부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1년 가을 , 연구년을 맞아 머물게 된 도쿄시내 와세다 대학 근처 작은 집에서 그 글을 쓰기 시작했다. 훗날 고발대상이 된, 위안부할머니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지적된 ‘매춘적 강간, 혹은 강간적 매춘’이라는 말은 사실 그 글 안에 사용된 말이다. 말하자면 ‘매춘!’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향해 실은 그것은 구조적으로 ‘강간’적인 것임을 환기시키려는 단어였다. 다시 말해 매춘이 아니라 강간에 방점이 찍힌 표현이다. (후에 한국어 책을 먼저 내면서 구성을 바꾼 탓에 원래의 나의 취지가 불명확해지고 말았지만, <웹 논좌>라고 하는 아사히신문사 계열의 그 매체의 원래 글에는 나의 그런 의도가 남아 있을 것이다.)

2012년 4월과 5월에 위안부문제를 향한 일본정부의 시도가 좌절되는 걸 보면서 나는 한국을 향한 말걸기를 다시한번 시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원래의 예정을 바꾸어 <제국의 위안부>혹은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이라는 제목이 될 한국어 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이 책은 원래 일본을 향해 쓰여진 책이다. 따라서 당연히 일본의 책임을 묻기 위한 책이다. 다만 기존연구자들과 지식인, 그리고 지원단체와는 다르게 풀어본 책이다

그동안 전쟁범죄로만 다루어져 왔던 위안부문제는, 조선인위안부에 한정해서 보았을 때는 식민지 지배가 야기시킨 문제로 생각해야 한다는 점, 그러나 그동안 일본이 그 점을 명확히 인식한 적은 없었다는 점, 그러니 그에 기반한 사죄와 보상이 새롭게 필요하다는 것이 이 책의 중심취지였다. 그러나 동시에, 업자나 마을사람. 혹은 부모 등 우리 안의 책임을 묻는 일 역시 피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이 한국어판이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유였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건 할머니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