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사죄했다는)반론을 한국언론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이유

日 “성실히 사죄했습니다만”…美 신문에 거짓 투고

http://imnews.imbc.com/replay/2019/nwdesk/article/5156983_24634.html

아시아여성기금은, 국가예산이 들어갔고 무라야마전수상등 정부관계자가 이사장을 맡은, 실질적 정부보상이었다 (http://www.awf.or.jp/k-preface.htm).

그런데 정대협등 지원단체들이 “민간기금이다!”, ”돈은 필요없다!”, ”일본의 꼼수다!”, ”일본은 정말은 사죄할 생각 없다!”고 언론과 국민을 상대로 20여년 주장하면서 부정적 인식이 확산/정착되게 된다.

기금을 지원단체가 비난한 탓에, 기금관계자들은 할머니들께 공개되지 않은 장소에서 편지를 전달했고, 할머니들은 이후에도 몰래 관계자에게 연락해 받아야 했다. 그것도 한국에 “일본은 사죄하지 않았다”는 인식이 정착된 이유 중 하나다.

그래서 “전액 국가예산”으로 보상금을 편성한 것이 “한일합의”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지원단체는 “박근혜정부의 꼼수다!””법적으로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파기운동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정대협에 10억 이상의 돈이 모이게 되고 재단 설립. “정의/기억재단”이다.

운동에는 돈과 사람이 필요한데, 정대협의 주장만이 더 확산될 수 있는 기반을 한일합의가 만든 셈이다. (이후 정대협은 아예 이름을 ‘정의기억연대”로 바꾸었는데,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정신대=위안부로 착각하게 만든 데 대한 국민적해명은 없었다.)

문희상국회의장이 일본의 사죄를 “법적인 사죄다. 국가간에서 사죄를 하거나 받은 일은 있다”는 엉뚱한 소리와 함께 “‘일왕’이 와서 사죄하라.”는 요구를 한 건, 이 모든 과정이 잊혀지거나 무시되어 왔기 때문이다.

“일본은 사죄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 사죄/보상한 적이 있다는 걸 말하면, 지원단체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법적사죄를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해 왔다.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이중적인 이해상태를 방치/조장해 온 셈이다.

최근들어 “법적 사죄를 안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죄하지 않은 일본”이라는 인식이 이미 깊이 각인된 국민들에게 그 양쪽을 구별할 여유와 관심이 있을 리가 없다.

현재의 모든 혼돈의 원인은 여기에 있다.

한일합의 이후 지원단체와 함께 “법적책임”을 자신의 목소리로 외쳐온 분들은 사실 서너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분들 주장이 옳건 그르건 그 사실 부터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한일합의 이후 “법적사죄가 아니니 사죄가 아니다!” 라고 주장해 온 할머니들은 극소수다. 그 소수가 마치 ‘위안부’할머니 전체 목소리인 것같은 착각이 사회전체에 존재했고, 모든 집회와 규탄은 그 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 이면에서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받아들인 분들은 그저 일본의 (화해치유재단의) 계략에 말려든 것으로만 취급되고 잊혀져 왔다. 보상금을 받은 분들이 많다는 기사는 거의 쓰여지지 않았고, 기사가 나온 이후에도 그런 분들을 취재한 기자도 전혀 없었다. 물론 그 분들 역시 비난이 두려워서 일본과의 화해를 말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킨다.

화해치유재단이 옳았는지, “법적사죄”주장이 옳은지 여부는 차후문제다.

문제는 이 모든 혼란이 거대한 망각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또, 이미 만들어진 그런 거대한 망각의 흐름에 도중에 편승하여 가속시킨 학자들까지 있었다는 점이다.

언론들 대부분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발로 뛰고 자신의 머리로 사고하는 대신 지원단체나 일부학자가 주는 정보만 받아 써 왔다. 그 정보를 믿은 국민들에겐 죄가 없다.

그럼에도, 언론과 국민들의 망각에 기대어 오늘도 일본정부의 사죄/보상을 깡그리 무시하고 그들의 반박이

“반역사적이고, 반인권적이고 국제 상식에도 어긋”난 것이라며 파렴치한으로 모는 주장만이 “진실”로 통용된다. 이런 목소리에만 언론이 의존하는 한, 한일관계는 영원히 회복되지 못한다.

내 방식/내 생각만이 옳다는 아집은, 한일관계 뿐 아니라 모든 관계를 깨뜨린다. 이미 우리 안에서 보고 있듯이.

https://www.facebook.com/100000507702504/posts/2646559372037627?sfns=mo

위안부문제와 일본의 보상

1차—아시아여성기금(1997-2003)

일본정부예산 200만엔+국민모금300만엔.
희망자 61명에게 전달. 한사람에게 전달사고 생겨 실제로는 60명.

2차—한일합의 보상금(2016-2018)

1인당 1억원. 당시 생존자 47명중 34명 수령. 두사람에 대해 수속 진행중이었으나 재단이 해산되어 버림.

(나눔의집 거주자도 6명 수령)

https://www.facebook.com/100000507702504/posts/2646527092040855?sfns=mo

위안부문제와 일본의 사죄

1992년 가토관방장관 담화

“..정부는 국적 및 출신지를 불문하고 소위 종군위안부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운 고통을 겪은 모든 분들에 대해 다시금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뜻을 전해드리고 싶다. “
http://www.awf.or.jp/k6/statement-01.html

1993년 고노관방장관 담화

“….본 건은 당시 군의 관여 아래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다. 정부는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출신지가 어디든, 이른바 종군위안부로서 수많은 고통을 겪고 몸과 마음에 회복이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뜻을 밝힌다.”
http://www.awf.or.jp/k6/statement-02.html

1995년 이가라시관방장관의 기금발표문

“…특히 종군위안부 문제는 많은 여성들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고통을 주고 여성의 명예와 존엄을 크게 손상 시킨 것으로, 저는 이 기회에 진심으로 사죄를 드리는 바입니다.”
http://www.awf.or.jp/k6/statement-07.html

1995년 무라야마수상 담화

“….소위 종군위안부 문제는 여성의 명예와 존엄성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이며 저는 이 기회에 다시 한번 진심으로 반성과 사죄의 뜻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http://www.awf.or.jp/k6/statement-04.html

1996년 하라아시아여성기금이사장의 편지문

“…그것은 실로 여성의 근본적인 존엄성을 짓밟은 잔혹한 행위였습니다. 귀하에게 가해진 행위에 대해서는 총리의 서한에도 인정되어 있는바와 같이 현재의 정부와 국민도 도의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저희들도 귀하에게 진심으로 사과 드리는 바입니다.”
http://www.awf.or.jp/k6/statement-13.html
(일본국회 중의원/참의원 의장이었던 하라 분베이/무라야먀 전 수상 서명)

1997년 하시모토수상의 편지

“…저는 일본의 수상으로서 다시한번, 이른바 종군위안부로서 수많은 고통을 경험하시고 심신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으신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전합니다.”
http://www.awf.or.jp/pdf/0211.pdf
(하시모토류타로, 오부치게이조등 역대수상들이 사인한 편지를 아시아여성기금의 보상금과 함께 할머니들께 전달.)

1998년 하라아시아 여성 기금 이사장의 편지

“아시아여성기금의 사업은 일본정부와 국민이 협력하여 도의적인 책임의식하에서 실시하고 있는 것이며, 일본정부와 국민으로부터의 사죄와 보상의 마음으로서 그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결단한 할머님들에 대해 사업을 실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http://www.awf.or.jp/k6/statement-22.html
(김대중대통령에 보낸 편지)

2005년 고이즈미수상 담화

“..또한, 일본국은 일찍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제국의 사람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과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함과 더불어 지난 대전에서의 내외의 모든 희생자께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
http://www.awf.or.jp/k6/statement-36.html

2010년 간수상담화

“저는 역사와 성실하게 마주하고 싶습니다. 역사의 사실을 직시하는 용기와 이를 받아들이는 겸허함을 갖고,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일에 솔직하고 싶습니다. 고통을 준 쪽은 잊기 쉬우나, 당한 쪽은 이를 쉽게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다대한 손해와 고통에 대해,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과 함께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합니다.”
https://www.kantei.go.jp/jp/kan/statement/201008/10danwa.html

2015년 기시외무상의 한일합의 발표

“..당시의 군이 관여한 가운데 다수 여성들의 명예와 존엄을 깊이 상처입힌 문제이고, 일본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

2015년 아베수상 발언(기시외무상이 전언)


“위안부로서 수많은 고통을 경험하고 몸과 마음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으신 모든 분들께, 다시한번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합니다.”
https://www.mofa.go.jp/mofaj/a_o/na/kr/page4_001664.html


이만큼 했으니 더이상 사죄가 필요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이 오랜 시간 표해 온 마음과 “제대로” 마주하는 일부터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https://www.facebook.com/100000507702504/posts/2646499628710268?sfns=mo


김복동할머니를 생각한다 3

3. 일본패전 이후

<정대협설명>


1945년, 싱가폴에서 일본군 제16사령부 소속 제10육군병원에서 간호사로 위장당하여 일본군인들 간호노동, 버려짐. 미군포로수용소에 수감.
1947년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 지 8년 째 되던 22세에 귀향

<증언집>

“어느 날 갑자기 위안소의 일본 군인들이 오지 않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관리인인 한국 사람의 밥을 해 주면서 위안소에 그대로 있었다. 한 보름쯤 지난 어느 날, 일본 군인들이 빨간 십자가 그려져 있는 차를 타고 위안소에 와서 우리를 태우고 떠났다. 이때 그 한국인 관리인은 어디론가 도망가 버렸다. 차에 타고 보니 차 안에도 없었다. 그 길로 어디론가 숨어버렸나 보다. 우리는 그때까지 해방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 알았다면 그놈을 죽여버렸을 것이다.”

“일본군인들이 우리를 데려간 곳은, 싱가포르에 있는 제10 육군병원이었다.””일본군인들은 우리에게 간호훈련을 시켰다.”

“하루는 누가 나를 찾는다고 해서 나가보니, 어떤 조선인 남자가 와서, 자기가 나의 형부되는 사람이라고 했다. “
“형부는 미군 수용소에 있는 중이었다. 여기 이러고 있지 말고 수용소로 가자고 했다.”
“형부가 병원에다가 나를 데리고 가겠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안 된다고 했다. 형부가 왔다갔다 교섭을 하더니, 병원에 있는 조선인 여자300명이 다같이 떠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사람이 굉장히 높고 큰 미군트럭을 가지고 와서 여자들을 전부 태우고 미군 수용소로 왔다.”

(어머니와의 해후)”열다섯 살에 집을 떠났다가 스무살에 돌아왔으니,5년만인 것이다.”

“형부는 내가 위안부 생활을 한 것을 아는 것 같았지만 어머니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후에 결혼을 하라 해서)”내가 위안부 생활을 한 것을 말하니 어머니는 통곡을 하셨다.””부모 잘못 만나서 이 고생이라고 (결혼하라고)애원하셨다.”

<박유하해설>

전쟁이 끝나고 김할머니를 “버린”건 일본군이 아니라 업자였다. 여기서의 “해방”은 명백히 ‘업자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위안부가 도망을 시도하다 구속당하는 대상은 군이 아니라 업자였다.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의 미움/분노의 대상이 일본군이 아니라 업자인 이유이기도 하다.

김할머니가 “간호”를 하게 된 건 “위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헌혈을 당하기도 했지만, 어지럼증을 호소하면 군인이 “포도당”주사를 놔 주기도 했다고 김할머니는 말한다.

수용소에 가게 관건 일본군에게 버려져서가 아니라 형부가 데려갔기 때문이다. 처음엔 거부당했지만 결국 “조선인 여자 300명”은 모두 무사히 미군에게 갈 수 있었다. ‘버려지고 학살’당했다는 스토리는, 전쟁터 극한상황에서 어쩌다 일어날 수 있었던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그런데도 일각에선 ‘버려짐과 학살’이 전체양상인 것처럼 강조된다.

또, 김할머니는 그저 “수용소”라고 말하고 있을 뿐, “포로수용소”라고 말하지 않는다. “일본인”으로 간주되어 “포로”가 된 경우도 있지만, 점령군으로서의 미국이 점령지 사람들을 그저 ‘관리’차원에서 ‘수용’한 곳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위안부’를 포함한 조선인들은, 때로 일본인들과 함께, 미국의 도움을 받아 귀국했고 김할머니 역시 그렇게 귀국했다.

위안소에 있었던 기간을 김할머니는 “5년만”이라거나 “내가 없는 6년동안”이라고 표현한다. “8년”이 아니라.
김할머니의 “어머니의 통곡”은 “위안부”생활이 유발했지만, “부모 잘못 만나서 이 고생”이라는 회한에 ‘일본군의 강제연행’이라는 인식은 없다.


과거 어떤 시기에 많은 여성들이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건 맞다. 하지만, ‘누가’ ‘왜’ 끌어 갔는지, ‘누가’ 한 여성을 불행하게 만들었는지는 총체적으로 봐야 한다. 규탄대상이 단순화될수록, “김복동”이라는 여성은 ‘역사’에서 멀어진다.

https://www.facebook.com/100000507702504/posts/2640605469299684?sfns=mo

김복동 할머니를 생각한다 2

정대협의 발표자료엔 위안소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따라서 여기선 증언집만 사용한다.

2. 위안소생활

<증언집>

“우리를 데려간 일본남자와 조선인남자가 사복을 입고 문 앞에서 우리를 감시했다.”

“관리인은 우리를 부산에서부터 인솔했던 한국인이었다. 그는 일본 군복을 입고 계급장은 달지 않고 있었다.”

“관리인은 전쟁이 끝나면 큰 돈을 주겠다고 우리에게 말하곤 했다. 저렇게 큰 집을 살 만큼의 돈을 주겠다고 바깥의 큰 건물을 가리켰다.”

“한국에서부터 같이 간 일본사람과 조선 사람이 계속 우리를 데리고 다녔다.”
“싱가포르에서 몇달 있다가 수마트라로,인도네시아로 말레이지아로 자바로 우리는 계속 이동했다.”

“나는 어느 곳에서건 특별히 정을 준 사람은 없었다. 얼굴이 익을 만 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했으니 정들 사이도 없었고, 나는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일본이 이겨야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일본이 승전하기를 빌기도 했다.”

“우리는 일본인 여자들과는 말도 하지 않고 우리끼리만 어울려 다녔다. “

“위안부 시절 내 이름은 가네무라 후유코라고 하기도 했고, 요시코라고도 했다. 모두 군인들이 지어줬다.”

“관리인은 처음부터 같이 다녔던 일본에서 자란 40대 한국인이었는데 우리는 이사람을 ‘니상(오빠)’이라고 불렀다. 이 사람은 마음에 드는 위안부를 골라 데리고 자기도 했으며, 위안부들이 말을 안 들으면 막 때리고 욕도 했다. “

<박유하 해설>

여기서는 관리인들이(업자)”군복”을 입고 있었다고, 보다 명확하게 표현된다. “군인이 나타나 끌고 갔다”는 증언을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일본인들도 있는데 , 대개는 이러한 경우일 것으로 추정 가능하다.

업자는 ‘위안부’에게 지급해야 할 돈을 데려오면서 지불한 빚으로 충당시킨 경우가 많았다. 다만, 꼬박꼬박 대신 저금해 준 경우도 있었으니 이 부분은 일괄적으로 말하기 힘들다.

김할머니는 이 때 “이동”했다고 표현한다. 물론 이 때의 인솔자는 업자들이다. 군부의 요청을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 “이동”은 경제논리로 이루어졌다.

“정을 준”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오히려 정을 주고 받는 정황이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할머니의 경우 15세에 갔으니 어렸기 때문일 수 있다. 일본군과의 관계는 나이와 일본어 능력이 크게 좌우한 듯 하다.

일본을 좋아해서든 아니든 “일본의 승전”을 빌었다는 것은 “일본”이 구조적으로 “적”의 관계가 아니었음을 말한다.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 역시(위계관계가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일본군 위안부”의 첫번째 대상은 일본인여성이었다.
조선인들과 잘 어울리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지만, 민족적차별은 똑같은 일에 동원된 여성들 사이에도 존재했다.

조선인을 포함한 업자들이 위안부와 ”자기도”했다는 건, “업자”가 그저 일본군의 명령으로 관리했을 뿐이라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 상상이자 희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선 간단히 기술되고 있지만, 위안부들의 몸에 잔혹한 폭행을 가한 주체들은 압도적으로 업자였다. “성노예”들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군인들 또한 때로 폭행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규율로 금지되었고, 어길 경우 무겁지 않았어도 처벌받았다.

위안부들은, 군인들의 부당한 행위를 ‘헌병’에게 호소할 수 있었다.

문옥주 할머니는 칼로 위협하는 군인과 싸우다가 상대를 죽였는데, 재판에서 무죄를 받기도 했다.

https://www.facebook.com/100000507702504/posts/2640367349323496?sfns=mo

김복동 할머니를 생각한다 1

지난주에 김복동 할머니가 작고했을 때 굳이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삼우제도 치러졌다니 뒤늦게나마 써 두기로 한다.

김복동 할머니가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는 각 언론사가 보도한 바 있다. 그 자료를 제공한 건 아마도 정대협일 것이다.

그런데 김할머니는 1997년에 정대협이 출판한 증언집 에 자신의 체험을 아주 구체적으로 남겨놓고 있다.

물론 여기서 먼저 눈에 띄는 건, 가난, 성병검사,폭행, 강간, 자살시도, 병원에서 일하면서 당했던 부상병들을 위한 채혈등, 다른 대부분 위안부 할머니들과 비슷한 고통과 고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한번 깊은 애도의 마음으로, 저 세상에서나마 편안하시길 빌고 싶다.

김복동 할머니는 정대협이 관리하는 거주지에 계신 두어분 중 한분이었다. 함께 한 세월도 긴 만큼, 정대협 에는 아주 특별한 분이었을 것이다. 다른 분들과 달리 4일장에 시민장 형식으로 화려한 영결식을 치른 심경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런데 그렇다면 더더욱 그 분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전달했어야 하지 않나 싶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지만, 할머니들이 사망하면 지원단체나 관계된 학자들이 전하는 건, 한결같이 단순화된 생애와 일본에 대한 분노 뿐이다. 심지어 유지를 왜곡하는 경우도 봤다.

이번에는 어땠을까. 외국언론들까지 선입견과 상식으로만 기사를 내보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누군가는 써야 할 것 같아서 쓴다.

  1. 위안부가 되기까지

<정대협 설명>(페이스북)

1926년, 경상남도 양산에서 출생

1940년 만 14세에 일본군‘위안부’로 연행.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일본군의 침략경로를 따라 끌려다니며 성노예가 됨.

<증언집>(다 인용 할 수 없어서 부분 인용한다. 맥락이 명료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질문해 주시면 답변할 생각.)

“동네 구장과 반장이 계급장이 없는 누런 옷을 입은 일본사람과 함께””한국말을 잘하는 일본사람”

“데이신타이(정신대)에 딸을 보내야 하니 내놓으세요”””아들이 없으니 딸이라도 나라를 위해 보내야”
“군복 만드는 공장”
“서류에 도장”(어머니가 못 찍겠다고 실랑이)

“일본사람이 버스에 태워 부산까지””일본에서 오래 살았다고 하는 조선 사람”이 “다른 처녀들을 끌고 온 듯.”
이 두사람이 인솔해서
“시모노세키에서 화물선””대만””광둥”으로 이동.

“우리를 인솔했던 일본 사람과 조선사람이 우리를 높은 사람에게로 데려갔다””높은사람에게 서류를 냈다””이들은 우리에게 높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그저 하이,하이(예,예)라고만 대답하라고 일렀다.”

<박유하해설>
— 어느집에 딸이 있는지를 잘 아는 동네 조선사람이 업자를 데리고 나타났고, 정신대에 보낸다는 명목으로 데려갔다.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는 것은 부모의 동의서일 가능성 높음.
그동안 지원단체들은(일부학자들도) 이런 정황을 전부 “연행”이라고 표현. 결국 영화 <귀향>의 이미지로 구체화하고 국민들에게 전파했다.

업자들이 데려온 여성들이 속임수에 의해 끌려 왔는지 여부를, 일본군은 체크했다. “높은 사람”에게 낸 “서류”란 계약서와 부모의 동의서등 당시 정부방침으로 요구된 서류들일 것이다. 그 정황에서 ‘그저 하이하이로 대답’하기를 종용받았다는 건, 데려간 소녀/처녀들이 일본어를 잘 모르는 것을 업자들이 이용했다는 얘기.
“계급장이 없는 누런 옷”의 주인공은,군속대우를 받은 업자일 가능성이 있지만 당시엔 흔한 옷이었으니 보통 민간인일 수도 있다.

22년전 증언집은, 제목과 소제목에서 소녀가 “전전”했다고 표현한다. 당시의 채록자들은 그렇게 이해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https://www.facebook.com/100000507702504/posts/2640305832662981?sfns=mo

<허스토리>에 대한 일본인 지원자들의 항의

페이스북을 쉬고 있었는데, 관부재판을 오랜 세월 지원해 왔던 후쿠오카의 일본분들이 영화 <허스토리>에 대한 항의문을 발표했기에 오랫만에 씁니다. 저도 얼마 전에 언급한 적이 있었지요.

간단히 말하자면 이 영화가 역사왜곡을 했다는 항의입니다. 이 모임의 대표는 저도 잘 아는 노부부인데, 그저 죄송스러운 마음입니다.

이런 지적은 그동안 별로 나오지 않았지만, 더 기탄없이 지적하고 반성하고 대화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언론사에도 보낸다고 하니, 기자님들 특히 주목 해 주세요. 또, 이 영화 관계자들 아시는 분들은 좀 알려주세요. 감독과 대화하고 싶답니다.

—————

<영화 『허스토리』의 제작자에게 항의한다!>

우리는 후쿠오카에 살고 있는 「전후 책임을 묻고・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의 회원들입니다.

이 영화는 관부재판을 소재로 한 실화에 바탕한 영화라고 선전했는데, 변호사도 지원모임도 취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원고들조차 취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을 먼저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번에 이 영화를 보고 경악했고, 분노와 슬픔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원고들의 바램과 지원모임의 바램이 무시되고 왜곡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부재판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측이 함께 원고로서 임했던 재판입니다. 열 분의 원고중 일곱분이 근로정신대피해자입니다.

그 분들은 자신들의 피해가 한국사회에서 정확히 알려지지 않는 환경 속에서 고독하게 투쟁해야 했습니다. 정신대가 곧 「위안부」라는 한국사회의 기존 인식 속에서 가족들과 지역사회의 편견의 눈초리를 받으며 싸워 왔고, 이제 겨우 그런 차이와 근로정신대의 피해실태가 인식되게 된 시점에서 그간의 편견을 증폭시키는 듯한 스토리를 만들어 근로정신대의 실태를 관부재판에서 지워 버린 것은 범죄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겠습니다.

더구나, 「위안부」 원고들의 피해실태에 관해서도 증언기록이 존재하는데 왜 이 재판과는 관계가 없는 몇몇 피해자들의 경험을 짜집기해서 과다하게 각색한 걸까요. 이러한 제작자세로 보건대, 피해가 심하면 심할수록 좋다는 식의 상업주의에 감독이 사로잡혀, 피해자의 고통에 귀기울이는 작업은 하지 않고 제작한 것은 아닌가 싶고, 감독의 불성실함과 태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최고재판소(대법원)에 이의를 제기하며 시모노세키판결을 내렸던 재판관들의 성의와 용기에 대한 헤아림도 전혀 없어 보입니다.

절대로 픽션화해서는 안되는, 진실이라는 것이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바로, 원고인 피해자가 목숨을 걸고 법정에서 호소한 「피해사실」입니다.

영화 속에서, 후지코시에 근로정신대로 동원되어 「위안부」가 된 것으로 설정된 분은, 이 재판 원고였던 박SO할머니입니다. 이분은 98년 당시 시모노세키판결얘기가 한국에 보도되면서, 지역사회와 교회 사람들로부터 「위안부였던 거네」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고, 「창피하니까 재판은 하지 말아요!」라는 말로 가족들이 애원하는 정황 속에서 분노와 슬픔으로 인해 가벼운 뇌경색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훗날 치매 증상을 보이게 된 것은 이때 일이 계기가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기도 합니다.

박SO 할머니는 물론 「위안부」가 되지 않았고, 이 분을 정신대에 보낸 것으로 설정된 스기야마선생님은 국민학교 4학년 때 담임교사였으며 박할머니께서 많이 존경하고 사랑해 온 분입니다. 실제로 정신대로 보낸 교사는 6학년때 담임, 그러니까 다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스기야마선생님과의 후쿠오카에서의 감동적이었던 상봉장면을 완전히 다른 스토리—픽션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만약 박SO할머니가 살아계셔서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분노하고 상처받으셨을까요. 스기야마선생님은 황민화 교육에 관계했던 자신을 깊이 후회하고, 한일간 진정한 우호를 위한 활동에 일생을 바쳐오신 분입니다. 아직 생존중이신 스기야마선생님이 이 영화를 우연히라도 만나는 일이 없기를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재판이 시작된 이후로, 우리는 원고분들께 지원모임회원들의 집 혹은 교회에서 숙박하실 수 있도록 해 드렸습니다. 그곳에서 재판관련 회의를 했고 할머니들과 함께 식사를 했으며, 노래도 불렀고 춤도 추었습니다. 친해지면서 그때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고민을 토로하실 때도 있었고, 그러면서 우리는 피해자들이 입은 깊은 상처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은, 원고들과 지원자들간의 상호신뢰와 사랑과 존경심이 깊어지면서 자신을 바꿔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영화에서 원고들이 여관에서 숙박한 것으로 묘사된 부분과 그곳에서 발생한 일 전부가, 감독의 황당무계한 공상일 뿐입니다.

지원모임이 바랐던 것은, 원고 피해자들과 함께 하며 함께 싸우는 일, 그리고 일본사회에 그녀들의 피해를 알리면서 일본정부를 향해 해결을 촉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일본국내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제작하는 모임」등의 역사수정주의자들과 싸우면서 전쟁피해진상규명법을 국회에서 성립시키기 위한 활동도 했고,「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사죄배상법을 만들 수 있도록 우리 지역인 후쿠오카에서 국회의원을 배출하기 위한 선거전등의 활동도, 부족하나마 해 왔습니다. 재판을 통해 만들어진 원고들과의 소중한 인연이, 우리모임의 역량을 넘는 싸움에까지 우리를 나서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원고들과 지원자들의 그런 교류와 운동은 전혀 묘사하지 않았고, 당시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우익들의 조롱이나 시민들의 차가운 태도를 여기저기 끼워 넣어 일본사회에 대한 반감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재판의 진실을 전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원고들의 바램과 명예에 또한번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관부재판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려 하지는 않았던 영화 『허스토리』제작자들에게 통렬한 반성을 요구합니다!

2018년 10월 2일

전후 책임을 묻고/관부재판을 지원하는 모임

https://www.facebook.com/100000507702504/posts/2438559472837619

서울대 인권센터 연구팀에게 묻는다

어제 동북아시아역사재단에서 있었던 위안부문제 관련 학술모임에서 , 어떤 토론자가 서울대 인권연구팀이 지난 2월말에 대대적으로 발표했던 “위안부 학살 영상” 속의 인물은 실은 남성이라고 주장했다.

나 역시, 사용된 사진들이 이미 대부분 20년전에 일본인 학자가 발표한 논문에서 발표된 자료이고, 그 학자는 학살이 아닌 옥쇄로 해석하고 있다는 지적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언제나처럼 언론은 서울대의 발표만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이후에 그런 기사들은 나의 “범죄자료”로 법원에까지 제출된 상태다.

그런데 그런 정황을 말한 내 포스팅과 일본인 학자의 의견에 대해 서울대 인권팀 관계자들은 그동안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고, 이 토론문에 의하면 남성이라는 지적에도 답변을 하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일일이 지적하지 않고 있지만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기만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기만을 지적당해도 답변도 하지 않는다.

팀원 중 한사람인 강성현 교수는 내 책을 “틀렸다”고까지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주장했는데, 무엇이 틀렸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고 했음에도 그 역시 묵살당했다.

하긴 너무나 여러번 겪은 일이어서 이런 일은 나에겐 더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 모두가 대한민국을 침몰케 하고 그 이전에 신뢰를 떨어뜨리는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니 서울대팀이 제대로 답변해 주기를 다시한번 촉구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이루어진 연구이니(여가부와 서울시) 국민과 언론에 대해 설명할 의무가 더 있다.

(2018/8/23)

https://www.facebook.com/100000507702504/posts/2381191515241082?sfns=mo

<위안부의 아이돌화>발언에 대해

얼마전에, 초청받았던 한 세미나에서 위안부 문제 관련해서 했던 이야기중 일부를 한 언론이 가져다가 나의 취지와는 다르게 보도한 탓에 또다시 세간의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미 여러번 반복된 일이기도 하고, 수정요청을 한다 해도 바뀐 적도 별로 없기 때문에, 나는 그 사태에 대해 따로 해명하지 않았다. 페이스북에 그날 사용했던 발언요지자료를 올리기는 했지만, 아직 문장으로 만들지 않은 채로 방치중이다.
늦었지만, 그 문제에 대해 쓰기로 한 건, 최근에
미국(Why Is the Plight of ‘Comfort Women’ Still So Controversial?),
영국(Vietnamese women raped in wartime seek justice for a lifetime of pain and prejudice),그리고
독일(Debatte Trostfrauen in SüdkoreaZum Nutzen der Nation)의 매체가, 한국의 위안부 운동에 대한 직간접적인 우려가 섞인 기사를 내보냈기 때문이다. 그 기사를 한국에 전달해 공론화한 매체도 아직은 없어 보이는 것도,내가 굳이 언급하는 이유중 하나다.

8월10일에 서울에서 한 시민단체가 주최한 <위안부문제와 한일관계 전망>이라는 세미나에서 내가 `위안부의 아이돌화`라는 표현으로 지적하려 했던 것은, 우리사회에서 위안부가 너무나 `가볍게` 소비되는 현상이었다. 많은 이들이, 악의적으로 보도한 기자의 의도대로, 내 발언을 위안부에 대한 마음을 비판하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비난했지만, 내가 비판한 건 위안부에 대한 마음이 아니라, 위안부가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표현되고 있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의 수용과 표현이 나올 법 한 소녀상의 원제작자(조각가 뿐 아니라 운동단체 포함)들의 조선인 위안부 이해와 표현방식이었다.
나는 그 날 세미나에서, 소녀상 자체에 관해서는 오히려 `철거는 역효과`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소녀상`관련 의견을 전하고 싶었다면 가장 우선시되었어야 할 그 부분은 빼놓고 기자는 `아이돌화`만을 헤드라인으로 뽑아 보도한 것이었다. 심지어, `소녀상을 둘러싼 갈등` 이라는 소제목 아래 몇가지 `갈등`양상에 대해 설명한 부분을 가져와 기자는 `소녀상을 둘러싼 갈등이 위안부의 아이돌화`를 가져왔다고 내가 말한 것처럼 보도했다.
하지만 그건 기자의 해석일 뿐, 나의 생각이 아니다. 이런 식의 단선적이고 탈맥락적인 보도에 접한 건 한두번이 아니지만, 이런 기사가 보여주는 성급함과 강퍅함에서 나는 오늘의 한국사회의 위기를 본다.

나는 `소녀상의 피상적인 소비양상에 대한 비판 필요`라고 자료집에 썼다. (기자는 그 날 세미나에 참석하지 않고 자료집만으로 기사를 썼다) 그리고 `피상적인 소비양상`이란, 바로 여고생들이 그렸다는 순정만화풍 스티커등에 대해 한 말이었다. 그 스티커를 페이스북에 올려 두었더니 `위안부의 모에`현상이라고 지적한 이도 있었는데, 타당한 분석으로 보인다. 밝고 활기차고 앙증맞기까지 한 그 그림 속 캐릭터는, 소녀상을 만든 이들이 환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의미를 부여한 노란 나비와 함께 놀고 있는, 글자그대로 때묻지 않은 천진난만한 `소녀`였다. 말하자면 그 그림은, 위안부로 동원되기 이전의 천진하고 행복한 시절을 형상화한 그림이었다. 심지어 대사관 앞 소녀처럼 분노나 저항의 눈빛조차 담고 있지 않았다.

두말 할 것 없이, 그 그림은, 위안부의 불행했던 과거—현실이 아니라 있을 수 있었던(존재하지 않았던) 행복했던 시절, 즉 위안부 이전의 시간을 형상화한 그림이다. 물론 그림을 그린 여고생들은 위안부 할머니에게
사라지고 만 행복한 소녀시절을 돌려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담았겠지만(실제로 많은 이들이 `청춘을 돌려다오!라고 일본을 향해 외쳤다), 그림 속의 시간이 위안부체험 자체와 괴리된 시간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한, 그 그림은 참혹한 위안부생활은 망각하도록 만든다. 말하자면 그림을 그리는 소녀의 의식은, 타자의 위안부 체험을 마주하기보다, 가급적 마주하지 않는 쪽에 서 있다. 본인이 의식하든 하지 않든. 그리고 아마도, 한 학자가 아이러니하게도 지적했듯 자신을 투영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현실의 위안부란, 이미 모두가 아는 것처럼 끔찍한 신체적 고통을 수반한 체험이었다. 또 그 후유증으로 인해, 돌아와서도 대부분은 `병`과 함께 해야 했으니 위안부란 대부분 훼손된 신체의 주인공들이다. 더구나, 현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피하는 대상—노쇠한 신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그림을 그렸다는 여고생에게 그런 할머니를 방문해 목욕 서비스라도 해 보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초등학생을 죽이고 타교학생이나 동급생에 대한 구타/폭행도 마다 하지 않는, `타자의 몸`의 존귀함과 고통에 무감해진 오늘의 한국의 10대들중에, 위안부할머니의 현실의 ` 늙은 `몸–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상처로 가득한 몸` 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보여줄 소녀들은, 없지 않겠지만 많지는 않을 것이다.
봉사점수를 따기 위한 것이든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든, 그들은 할머니를 위한 시위에 참석하고 소녀상에 목도리를 둘러줄 수는 있겠지만, 그런 행위는 일정부분, 위안부할머니의 그 옛날 진짜 체험과 오늘의 현실을 마주하지 않도록 만드는 효과를 갖는다. 말하자면 위안부 `동상`이나 `그림`에 대한 `기림`이 현재의 소비방식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그와 마주하는 시간은 오히려 과거의 위안부와 등신대로 마주하는 일에서 “효과적으로 `멀어지게 하는 일일 수 있다.

위안부의 아이돌화라는 말로 내가 우려했던 건 위안부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앞에 서면 설수록 다른 한편으로 진짜 위안부와 멀어지게 만들 수 있음을 나는 나는 우려했다. 달리 말하면 너무나 가볍게 소비하면서, 아무도 그 안의 진실을 제대로 보려고는 하지 않는.
여고생들이 그린 천진난만한 그림에야 죄가 없지만, 위안부들이 겪은 고통을 <여성의 보편체험>으로서 이해하고 `노인`의 고독과 진정으로 마주하며 인간과 역사에 대한 이해를 한단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표현들이 공유되고 확산되는 현상에 대해 나는 우려를 표했을 뿐이다. 그저 일본에 대한 단죄를 요구하는 상으로만 기능하는 한, 소녀상 역시 언젠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동상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나는 우려했다. 이승복소년상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말한 `위안부의 아이돌화`란, 얼마전에 군함도 영화에 대해 썼던 글에서 `군함도에는 피해자가 없다`고 썼던 맥락과 다르지 않다. (<군함도〉엔 '피해자'가 없다)

여고생이 그린 그저 `귀여운` 소녀, 한번도 능욕당한 적이 없는 천진한 소녀캐릭터는, 굳이 말하자면 한번도 식민지화되지 않은 우리자신이다. 하지만, 조선이 그랬듯, 위안부로 가야 했던 소녀/처녀들은 대부분 가기 전에도 행복하지 않았다. 물론 예외도 없지 않지만, 그들은 대부분,가난한 집에 태어나 남의 집에 양녀로 가야 했거나, 남편이나 오빠, 혹은 아버지의 박대에 시달려야 했던 이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위안부의 아이돌화>란, 위안부할머니에 대한 마음과 존중을 비판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과거를 회피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직면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그 때문에 이제 오히려 외부사람들에 의해 마주하기를 요구받게 된 우리의 모습에 대해, 우리 먼저 나서서 생각해 보자고 나는 말하려 했다.

가볍게 소비되든 진심으로 모셔지든, 과다표현은 대부분, 대상자체보다는 자기자신을 위한 것이기 마련이다. 버스 안 플라스틱 소녀상을 향해 “아이고 여기 계시구나“라고 말했다는 서울시장의 한마디가 그것을 증명한다. 오늘의 한국인, 특히 남성들은, 그 옛날 소녀에 대한 오늘의 자신의 배려를 확인하는 일로, 오늘에 대한 자기만족은 물론, 과거로 돌아가 `지켜주지 못했던(않았던) 나`까지 무의식 속에 면죄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극복하는 방법은, 실제와는 다른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마주하는 일에 있다. 실재한 과거에 대한 직시와 분석만이,과거와 다른 내일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사실 고향에 돌아와 깨끗하고 아름다운, 독립한 내 나라의 수도를 구경했어야 할 소녀들이 없지는 않다. 전쟁당시, 칠십 몇년전에 위안소와 전쟁터에서 병사, 자살, 폭사, 혹은 옥쇄라는 이름의 집단자살의 희생양이 된 이들이 그들이다.
따라서, 하얀 저고리/까만 치마모습의 플라스틱 소녀상이 누군가를 상징한다면 그런 이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이었어야 한다 . 제작자들은 의식하지 않았겠지만 그런 의미에서는 소녀상은 돌아온 `귀신`이었고. 버스 소녀상을 처음 본 이들이 으스스하다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는 사실 올바른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어디까지나 산 자로 소환되었기에(대사관 앞 소녀상 뒷면에는, 동상이 (운동에 참여한 노인과 운동단체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조형물이라고 쓰여 있다),그녀들은 모처럼 소환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허핑턴 포스트 바로가기

학자의 기만과 태만

얼마전에는 김문길교수가, 일본정부가 이미 이십여년전에 발간한 자료를 마치 자신이 처음 발견한 것처럼 발표하기에 문제를 지적한 적이 있는데, 이번엔 호사키 교수가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같다. 호사카교수는 자신이 자료를 발견했다고는 말하지 않은 듯 하지만, 호사카 교수가 말한 내용은 이미 오래전에 일본 학자들이 한 이야기다. 20년 전에 일본 정부가 발간한 자료집을 일본 학자들이 연구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을 거라고 호사카 교수는 생각했을까. 나조차도 이 자료집은 4년전에 <제국의 위안부>에서 사용했다.
(이 기사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709192205025&code=940100) 는 그나마 이 자료집이 일본에서 나온 거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호사가 교수가 발견한 것처럼 쓰고 있는 언론도 많다.)
위안부문제 연구는 수십년 축적이 있어서 독창적인 의견을 말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호사카교수가 위안부문제 연구에까지 뛰어든 거야 이해되지만, 그럴려면 기존 연구를 다는 읽지 못한다 해도, 중심적 연구 정도는 읽고 발언했어야 했다. 그건 석사과정생도 아는 얘기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니고 내가 재직하는 학교에서 이런 내용을 대대적으로 기자회견까지 하면서 발표했다니 부끄럽고 참담하다. 일본이 알아도 웃을 것이고, 이정도 자료 존재는 알고 있을 전세계 연구자들도 당연히 웃을 것이다(일본 정부가 한 일과 아시아 여성 기금에 대해서 관심이 너무 없어서 아는 이가 적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다)
호사카 교수자신이 말하는 대로, 위안부 동원은 기본적으로 호주의 동의서를 포함,본인이 국가에 도항(이동)을 요청하는 서류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요건을 갖춘 사람에 한해 “합법적”으로 허가하고 이동하도록 했다. 이 기사에서 말하고 있는 건 말하자면 오늘의 여권 같은 것이다. 설사 서류부족을 묵인( 호사카 교수가 지적한 맥락인지는 다시 확인해봐야겠지만)했다 해도, 중요한 건 기본방침이 어땠는지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합법이었으니 문제가 없다는 건 아니다. )
이 기사에서 주목해야 하는 건, 위안부문제에 대해 일본이 부정하고 있는 책임은 책임 자체가 아니라 “법적” 책임이라는 사실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 사실조차 알려지지 않아 일본이 모든 책임을 부정하는 것처럼 이해되고 있었지만, 이 시점에서 이 사실만이라도 제대로 공유되면 좋겠다.
또하나, 일본군 위안부의 중심은 일본인여성이었다는 사실이다. 훗날 위안부숫자는 조선인이 더 많아진 것 같지만, 위안부 중에는 늘 일본인이 있었고, 최후에 일본군과 함께 전쟁터에서 옥쇄라는 이름의 집단자살로 희생된 여성 중에는 일본인 여성이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남의 해석을 빌린 거지만(일본의 배를 탔으니 강제연행, 이라는 해석도 이미 다른 학자가 내놓은 해석이다)., 호사카 교수의 발표가 말해 주는 건, 오히려 우리가 생각하는 “강제연행”에 대해서는 학계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런 무리한 해석까지 내놓으면서 “강제성”을 증명하려 하는 것이 학계의 현황이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1991년 문제제기 시점에서 학계가 조선인위안부문제도 글자 그대로의 “강제연행”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고, 그런 이해에 기반해 주장했던 “법적책임”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오늘의 혼란은, 연구가 진전되었는데도 무시하거나 스스로 해석을 달리 하면서, 초기의 “운동적 주장”을 고수하려는 태도가 만든 결과다.
조선에서는 더 강압적 동원이 이루어졌을 거라고 호사카교수는 말하는데, 그 부분도 이미 연구들이 있으니 참고하시라. 물론 그것을 비판하는 연구도 또 있다.
또하나, 호사카교수는 일본이 무슨 목적으로 이 자료집을 만들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는데, 당연히 위안부 문제 관련해서 자료를 공개하라는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정보를 먼저 독점한 학자의 기만이다. 목적은,
이 자료집을 발간한 아시아 여성 기금 홈페이지에 가면 다 나와 있다.
호사카교수의 “목적”은 고노담화 부정인 듯 한데, 그건 일본의 이른바 “양심적” 학자들도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뒤늦게 위안부 문제를 흔들려면, 제대로 흔들어 주기를 바란다.
사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별로 쓰고 싶지 않은 기분이 강하다. 이 며칠 몸도 안 좋아 포스팅을 쉬고 있었지만, 이런 기만을 방치하는 건 또다른 태만일 수 밖에 없어서 쓴다.
어제도 다른 분이 언급한 다른 문제에 대해 대한 댓글에서 썼지만, 우리 사회는 소모가 너무 많다.

–> 전에도 올린 적이 있지만, 다시 올려 둔다. 이 자료집이 호사카 교수가 언급한 자료집이다.

–> 이렇게 내용을 전면 공개도 하고 있다.
http://www.awf.or.jp/k6/document.html (위안부 역사 관련 자료)

위안부 “강제연행”을 둘러싼 간단한 메모

위안부 “강제연행”을 둘러싼 간단한 메모

어제 저녁에 카이스트이병태 교수가 쓴 위안부 관련 포스팅에서 내가 언급되었다는 걸 누가 알려주기에 읽었다. 나에 대해 호의적이었지만, 읽고 보니 그 포스팅이 “박유하도 위안부를 자발적매춘부라고 했다”는 세간의 오해를 증폭시킬 것 같아 간단히 의견을 써 둔다. 이하는 전부 “조선인 위안부”에 관한 이야기다.
1) 나는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라고 말한 적이 없다.( 내가 그렇게 썼다고 왜곡한 보도자료를 내보내고 할머니들에게 말한 것은 나눔의 집이다)
2)이른바 강제연행 관련 문서가 조선인 위안부에 관한 한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3)국민들의 이해가 “강제연행”과 “인신매매”의 두가지로 갈려 있는 건, 관계자들이(오랜 세월 중심에 있던 연구자와 운동가들이)어린 소녀들을 강제연행했다고 생각했던 초기 이해를 자신들은 바꾸고 나서도 그 부분을 언론에 명확히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나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말하는 강제연행을 부정하지 않았다. 본인들이 말하는 한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부정한 것은 사기/납치를 포함한 “강제연행”을 일본국가(조선총독부 포함) 가 (비)공식적으로 지시했다고 생각하는, 위안부문제 중심에 있었던 연구자와 운동가에 의해 널리 퍼진 생각이다. (“강제연행” 지시 문서가 존재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군인이 데려갔다”고 말하는 소수의(증언집 전체에서 봤을 때 압도적인 소수다) 위안부의 경우, 군인으로 보였던 건 군대에서 군복을 지급받아 입기도 했던 업자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경우는 대개 “낭자군”이나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모집되었고, 1940년대에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인신매매가 중심이었던 1930년대와는 정황이 조금 달랐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징용령도 1944년에야 내려졌던 것처럼.
경찰이나 행정관리가 같이 간 경우는 총독부의 지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업자가 사적으로 접대를 한 결과일 것이라는 도노무라 마사루교수의 의견이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5)인신매매의 경우( 스스로 간다 해도 전차금을 받고 가는 것이니 인신매매로 봐야 한다. 이 경우 대부분 가족을 위해서 였다) 일본군은 부모의 허가서와 본인의 의지를 확인했다. 허가서나 의지가 없는 경우는 되돌려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허가서가 있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허가서 자체가 위조된 경우도 많았고, 특히 업자들은 호적을 속여 어린 소녀를 파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군이 묵인한 경우도 있지만, 댓글에서 언급된 형법 226조 위반 (많은 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속아서 온 것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이야기)했다는 주장을 적용할 수 없는 자료가 오히려 더 많다.
6)조선의 부모/남편들이 자식/부인들을 판 경우도 많았지만, 수양부모 제도를 이용해서 가난한 집 자식들을 데려다가 일만 시키다가 자라면 업자에게 파는 경우도 많았다. 제도가 문제시 되면서 바뀌기도 했다.
따라서 당시 가부장제 비판도 필요하지만, 지나치게 자괴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이하는 링크글 내용에 대한 간단한 감상.
1)필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이용한 자료들 대부분은 위안부문제를 부정하고 싶거나 한국의 강제연행 주장에 대응하려 했던 일본인들이 찾은 것이다.
2)군데군데 한국인에 대한 조롱의 표현들이 들어 있다. 그런 자료를 그냥 가져다가 쓰는 건 바람직하지는
않다.
3)그럼에도 동시대 신문자료들은 거의 사실이다.
자료 설명이나 주장에 엉터리도 좀 있지만,(일본인 여성이 더 많다고 단정하는데, 일본인 보다는 조선인 여성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특히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그랬다. 일본에서 오려면 바다건너 통행이 폭격 때문에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큰 맥락에서는 한번쯤 경청해야 할 지적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지적이 나왔지만 무조건 우익! 역사 수정주의자! 라고 손가락질 하면서 전부정해왔던 것이 이제까지의 연구자와 지원단체태도였다.
위안부문제 중심에 있던 연구자들이나 지원단체는 더이상 “강제연행”을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몇년전부터 “위안소에서의 부자유/억압”을 “강제성”이라고 주장한다. 폐업을 할 수 없었다는 등의 이유를 대면서. 요시미요시아키 교수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폐업할 수 없었던 것은 인신매매상의 구조적인 문제이고, 군대의 명령이나 억압의 결과로 확인 된 경우는 아직 없다.
그럼에도 관계자들은 그런 변화를 국민들이 다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지는 않는다. 그때문에 국민들의 이해는 혼란상태. 그런데도 그것을 방치해 왔다. 내가 가장 비판하고 싶은건 그런 부분들이다.
이병태 교수 포스팅에 달린 댓글중엔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사실을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었고 감할 수 없는 내용도 있었다. 이영훈 교수의 동영상 강의 역시, 공감 가능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중요한 건 정치적입장을 넘어선 활발한 토론이다. 비판/규탄 받을까 봐 말하지 않고 쓰지 않는 사람이 더 많은 상황이기에.
연구자도 운동가도, 대부분 20년 이상 이 문제에 관여하며 “국민의 상식”을 만들어 왔다. 오랜 세월 해 온 일인만큼, 의견수정은 쉽지 않은 일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용기를 그들 안에서 보고 싶다.

페이스북 원문 바로가기

근과거 망각

노유진카페와 기사들에서 나를 반복해 비판했던 심용환씨가(검찰이 나의 “범죄”를 입증하는 증인으로 세우려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군함도 관련 징용자에 관해 “국가건 국민이건 징용에 관해 노력을 하지 않았다” 고 말한 글을 우연히 봤다.
전체 취지는 나쁘지 않지만,한국인의 자기반성 촉구가 목적이라면 좀 더 정확히 알고 발언했으면 좋겠다.(내 책도 좀 더 정확히 읽어 주길 바란다.)
징용문제 연구자 자체가 우리 안에 별로 없다는 점에선 맞는 말이다. 위안부 문제 발생 이후 남성피해자들에 대한 관심이 압도적으로 적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10년 전에 징병/징용자들에게 보상을 한 적이 있다. 사망자에겐 2천만원, 부상자에겐 그에 준하거나 더 적은금액.
그 금액이 적합한지, 사망자와 부상자를 구별지급하는 게 옳은지, 위안부는 4천만원이 넘는 금액이었는데 그건 맞는 건지 등등 이 보상에 대해서는 나역시 할 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제기를 하려면, “국민과 국가”가 이런 걸 했다는 것부터 알아야 정확한 자기비판도 가능해진다.
한국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된 이들에게 지불한 5600억이 넘는 돈은(다른 통계는 5800억이라고 말한다)대한민국 국민의 세금이었다. 그러니 인식했든 아니든 정부와 국민이 무관심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일본이 아닌 한국 정부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한일협정 관련 문서가 공개되면서 한일협정때 정부가 받은 돈이 피해자개인에게 충분히 지급되지 않았다고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도 국민도 무관심했다!”라는 지극히 “올바른” 문제기가 그저 감상적인 탄식이 되고 마는 이유.
더 큰 문제는 이런 감상이 또다른 감상을 낳으면서 또다른 문제를 만든다는 점이다.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311192308585&code=940202

무엇을 지킬 것인가

무엇을 지킬 것인가 <허핑턴 포스트> 바로가기

무엇을 지킬 것인가

외교부가 부산 소녀상문제 풀기에 나선 것 같다. 하지만 소녀상 이전요구는 문제의 답이 아니다.
분명, 일시귀국이라고는 하지만 일본대사가 본국귀국후 이렇게 오래 복귀하지 않은 적은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외교부가 적극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것은 이 시점에서는 당연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시민들을 위해 존재하는 지자체가, 시민의 의사를 넘어서 행동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엇보다 `강제이전`은 현재이상으로 사태를 악화시킨다.

사실 나는, 부산소녀상 설치문제를 두고 일본정부가 대사를 복귀시킨 것은 성급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분노를 표명하면 소녀상이 철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일본의 한국이해는 아직 충분치 않다고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일본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지만, 우선 한국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정치가, 언론, 국민들 대부분이 `한일합의는 잘못된 것이고 소녀상은 그것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니 옳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한일합의의 정당성이나 빈조약을 들어 철거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런데 이토록 갈등이 깊은데도, 문제의 소녀상이 어떤 의미인지, 한일합의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 원점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고 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 사람들이 무조건 반대하거나 무조건 찬성한다. 그런 식의 사고정지사태가, 한쪽은 `지키는` 일에 온힘을 다하도록, 다른 한쪽은 이제 물리력을 행사할 지 여부를 재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 문제를 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물론 첫번째로 조선인위안부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그런데 위안부문제의 경우 오랜 세월에 걸쳐 언론이 적극적으로 보도한 결과, 이미 `온국민의 상식`이 된 구체적인 이해가 존재한다. 작년에 개봉한 `귀향`은, 그런 현대한국의 `집단기억`을 담은 영화다.

그런데, 그런 이해는 과연 옳은 것일까. 나는 작년에 개봉 직후에 이 영화를 봤는데 심경이 복잡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 영화에 표현된 `정서`는 옳고, `사실`은 옳지 않다.
그래서 나는 정서에 공감하면서도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한 예로, 불에 태워지는 장면은 한 할머니의 그림을 모티브로 했다고 하는데, 이 할머니의 첫 구술에 의하면, 여성들을 불에 태운 건 학살을 위해서가 아니라 병들어 죽은 여성들을 화장하기 위해서다. 또다른 분의 수기에는, 스스로 다른 위안부여성을 화장해야 했던 이야기도 나온다.
비판을 하려면, 그런 끔찍힌 경험을 하도록 만든 전쟁과 군인/위안부간의 위계질서, 그리고 그런 위계질서를 만들었던 일본의 식민지지배 책임에 대해 먼저 물어야 한다. 비판은, 정확해야 받아들여지는 법이다.

결국 위안부문제는, 조선인위안부란 어떤 존재였는지, 그리고 이 문제발생 이후 4반세기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일본이 무엇을 했거나 못했는지를 정확히 알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는다. 더구나 초기와 달리 국민적인 관심사가 되었고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국민적인 이해와 합의가 필요해졌다.

따라서 이렇게 제안하고 싶다. 한일정부는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협의체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논의를 위해 일본정부는 주한일본대사를 즉각 복귀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협의체는, 위안부문제에 관해 오래 관여해 온, 그러나 대립중인 한일학자들을 주구성원으로 하되, 지원단체와 위안부당사자와 언론이 방청하거나 중계하도록 하고, 의문을 던지고 답하는 일이 가능한 형태가 되어야 한다. 사실 논점은 많지 않다. 그리고 양국민들의 공통의 이해를 이끌어야 한다.
위안부문제는 양국국민이 너무나 잘 아는 문제가 되어 더이상 정부간 합의만으로 이 문제를 풀 수 없게 되었다. 박근혜정부가 간과한 것은 그 지점이다.
갈등이 2000년대 이후 본격화 된 것은, 민주화와 인터넷 보급의 결과로 시민들이 힘을 갖게 된 21세기적 세계를 반영한다.

소녀상 비판 중에 `당사자를 도외시했다`는 비판이 있다. 나는 그 말에 공감한다. 내가 만났던 몇몇 위안부 할머니들은 `왜 해결이 안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계셨다.
그런데, 지원단체는 외교부와 무려 십수회의 의견조정을 거쳤다고 들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당사자를 도외시`한 건 누구일까.

이 모든 물음이 다시 필요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돈을 받았으니 끝났다`는 생각은 아직 하지 못한 일에 대한 물음이 없고, `돈따위로 해결하려 하지 말라`는 생각에는 어렵게 합의를 이루어낸 `외교`에 대한 존중이 없다. 무엇보다, `책임이란 무엇으로 지울 수 있는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 없다.
소녀상을 지키려는 이들은 소녀상이 `아픔`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분명 소녀상 자체는 그렇게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곳 아닌 영사관이나 대사관 앞에 서 있는 소녀상은 분명 `저항과 항의`를 표상한다. 실제로 소녀상 뒷면에는 `숭고한 정신`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쓰여 있다. 소녀상은 정말은 `그` 위안부 소녀가 아니라, 90년대 이후의 `운동`과, 운동에 담겼던 `끈기있는 항의정신`의 표상이다. 이런 식으로, 4반세기 이어지면서, 위안부문제에는 적지 않은 의식 혹은 무의식의 트릭이 존재하게 되었다.

아무튼 그 항의가 옳다면, 얼마나 옳은지,왜 옳은지에 대한 국민적인 물음과 확인이 다시 필요하다.

소녀든 항의정신이든 `지키는`일은 숭고하다. 하지만 사고정지상태로 `지키`거나 반대하는 일은, 결국 누구의 자존심도 지키지 못한다.
더 늦기 전에, 사려깊은 행동이 필요하다. 불화는, 상대뿐 아니라 자신도 지키지 못한다.

박유하에게 허락된 3분

내가 갑자기 참석하는 바람에 이 며칠 페북에서도 시끄러웠던 정영환출판기념회의 영상이 어제 주최측에 의해 공개되었다.
그런데 정영환씨의 나에 대한 비난이 편집되어 사라진 건 그렇다 치고, 나를 향한 야유와 비난등 장내 목소리가 전부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이 영상은 전부가 아닌 요약버전이지만, 그럼에도 “현장”을 기록하고 있는 건 이 쪽이라 하고 싶다.
모든 장내목소리가 사라진, 기이한 느낌의 주최측 영상에서 나는 “역사왜곡”의 현장을 본 듯 했다. 보여 주고 싶은 것만 기록해 온 “역사주체의 욕망”을.

원글 링크

박유하에게 허락된 3분 영상

퇴락한 한국의 저널리즘

이미 한겨레 한승동 기자의 글에 대한 비판이 이미 태그되었기에 기사 본문은 생략하고 방송을 보신 분의 글을 복사해 둔다.
“일본인의 시각” 이라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국적도 이념도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이 당연한 일이, 우리에겐 일본/진보(좌파)를 향해서는 늘 망각된다.
Facebook 글을 줄이겠다고 했던 직후에 정영환교수 책이 출간되어 또다시 어지러운 며칠을 보냈다. 두통이 실제로 일어나 몸이 아프다는 건 내가 탁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부족하고 부족하다.
소송은 오로지 이기고 지는 것이 초점이 되는 싸움이다. 그래서 세속적일 수 밖에 없다.
근거없는 곡해와 오독으로 학문을 세속화한 것은 누구인가.
———-
한국의 저널리즘이 이렇게까지 퇴락했구나 하는 것이 기사를 읽었을 때 첫 느낌이었다.
특정한 사람이나 책에 대한 평가는 물론 자유이나 가급적 편향성을 기피하려는 의식 정도는 갖추는 게 신문가자의 기본일 것이다.
무엇보다 사실 확인을 제대로 하는 자세 또한 저널리즘에는 요구된다.
질의응답 부분. 이 날 기자회견을 동영상으로 보고 있었던 나(후반 뿐이지만)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기사는 사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유하 교수의 폐이스북을 보면 박교수가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초청]되었음이 확인되는 메일 사진을 볼 수 있고, 나중에 박교수에게 실행위원회에서 온 [착오가 있어서 그렇게 됐다]는 메일도 확인이 가능하다. 비록 기사를 쓸 때 그러한 정보가 없었다 하더라도 박교수에게 그 자리에서 직접 물어보면 되는 일이었다. 동영상을 보는 외국인인 나조차 무슨 착오가 있었구나 하는 정도는 추측이 가는 부분이었는데 기사를 쓴 분에게는 그 가능성조차 생각을 못하셨던 모양이다.
인터뷰는 또한 이게 무엇인가 싶었다. <제국의 위안부>의 학술적 검토도 마땅히 있어야 하고 정영환 교수 책 또한 마찬가지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청구권의 문제 하나 가지고도 의논은 그렇게 쉽지는 않다. 고노담화의 대한 평가도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정 교수가 쓰는 [화해론]이라는 용어에 대한 규정도 재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신현철 선생님이 대략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비판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러나 조소는 언제나 불가능하다. 남을 조소하면서 느끼는 쾌감은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가장 저급한 쾌감이며 그 유혹에 굴복한다는 것은 내 안의 있는 가장 저열한 존재와의 싸움에 지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어 메모에 의한 것이므로 표현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음.)
그날 행사장에도 비아냥 어린 웃음이 나에게는 보였다(내 착각이길 바랄 뿐이다).나는 결코 조소하는 입장에 서지 않으련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민주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편향과 왜곡 보도 때문에 고통을 겪은 적이 있는 줄 안다.
그러나 이 기사를 보니 한겨레 신문은 이미 권력자가 된 모양이다. 적어도 박유하 교수의 인권을 존중하는 자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한국에 있어서 불행한 일인 것이다.
https://www.facebook.com/kumakichi39jp/posts/131680210593808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405803206113256

한승동 기자의 왜곡

정영환 교수 책에 대해 잇달아 호의적인 기사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다른 뉴앙스의 기사를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다. 한승동 기자의 한겨레 기사의 왜곡에 (<제국의 위안부>를 극우 산케이가 극찬?) 절망적인 기분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뒤늦게 검색해보니 두개 기사가 있었다.
진영 논리로 부정할 분들도 계실 지 모르니 다른 언론의 기사도 기대하고 싶다.
http://m.chosun.com/svc/article.html…
http://m.segye.com/conte…/html/2016/…/01/20160701003525.html

페이스북 원글 링크

기시감

정영환의 말을 출판사와 출판기념위원회가 그대로 옮겨 언론에 퍼뜨리고, 언론 또한 나를 비판하는 책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묻지 않고 기사화하고 있다. 2년전에 나눔의 집이 나를 고발하며 “자발적 매춘부라 했다””위안부할머니를 피해자가 아니라고 인정하라 했다”고 했던 말을 수많은 언론들이 앞다투어 보도했던 때와 똑같아 현기증을 느낀다.
이번 사태가 내게 더 충격적인 건, 그의 책이 번듯한 출판사에서 번역출판되고, 성실한 학자들이 아직 젊은 그의 책의 논지를 아무런 검증없이 수긍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일이라서가 아니라, 경박한, 너무나도 경박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한 댓글이 내게 “통일되면 보자”는 식의 협박을 날렸던 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사태를 나는 크게는 “냉전 후유증”으로 본다. 하지만 동시에 대한민국의 총체적 “지적 퇴락”(정영환)이 일으키는 일인 것도 분명하다.
나를 “실성한 여자”라고 쓴 글이 출판사대표의 담벼락에 공유되어 있는 것도 그런 현상 중 하나일 것이다. 설사 참고용이라 해도. 화가 나기보다 부끄럽다.
출판기념기자회견에서 재판에 연대를 표명하는 발언이 있었던 것처럼, 이 출판은 나에 대한 소송에 본격적으로 가담하는 일이다. 출판은 자유이나 관계자들이
그점을 인식 해주면 좋겠다. 정영환 역시 노골적으로 고소취하에 합의할 수 없다고 언명했었다.
“잘못 나가는” 현대일본을 비판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겠지만, 정영환식 사고야말로 일본을 잘못 나가게 만들 수 있다. 그 책임은, 20여년 운동 끝의 국민간적대와는 다른 차원이 될 것이다.
정영환이 나를 비판한 자리에서 제출한 자료와 발언을 읽었다. 최소한 거기에서의 그의 지적들은, 전부 악의적 왜곡이거나 견강부회이거나 초보적 오독에 의한 것들이다. 곧 구체적으로 지적할 생각이다.
이 글을 보실 기자여러분께 부탁드린다.
“이 책에 대해 기사를 쓰실 분들은, 저의 홈피(parkyuha.org)에 올려 놓은 반론을 읽거나 제게 의견을 물어봐 주신 후에, 기사를 쓰거나 수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405028859524024

정영환 교수 저서 출판 기념회 참석 후기

어제 참석을 결정한 건 “초청공문”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간담회 두시간 중 최소 15분, 많으면 30분은 발언시간이 주어지리라 생각했었다.
세 사람이 20분씩 나의 책을 극렬히 비판했으니 그렇게 예상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원래 없었다는 지정토론자가 세사람이나 갑자기 정해졌고 그들에 대한 저자의 피드백이 끝나고 “청중”에게 마이크를 돌리겠다며 사회자가 말한 남은 시간은 고작 20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절망적인 기분으로 물었다. 내가 얼마나 시간을 쓸 수 있는지. 일반적인 질문은 보통은 3분정도가 예의니까.
하지만 내 예상/기대와는 달리 나는 특별취급을 받지 못했고(즉 주최측은 반론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고),오히려 일부사람들에게 야유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잔치판을 깬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고, 그나마 주어진 시간도 유효하게 쓰지 못했다. 학문적 논쟁이 기대되지 않은 “잔치”에, 존중받는 논의를 기대하고 나간 건 불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만에 만나는, 한 때 함께 했던 이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건 나쁘지 않았다. 우연이었지만, 그 자리에서 “소중한” 대접을 받은 지정 토론자 세 사람 모두가, 과거에 민족주의를 넘어 대화하는 어떤 한일지식인모임에서 함께 했던 이들이었다. 말하자면 현재의 대립은 그런 대립이다. “만남”은 어떤 의미에서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책이 나오고 3년동안, 어떤 비판모임도 나를 한번도 부르지 않은 데 대해 유감을 표하고 앞으로라도 불러 달라고 말했다.
사실 고발이후, 모든 비판은 재판 이후로 미뤄달라고 부탁해 왔다. 하지만 그런 나의 부탁을 비웃듯 이미 여러 글과 책이 나왔으니, 이제 그 말을 철회한다.
비판자들이,내 책에 대한 규탄을, 모놀로그가 아니라 다이얼로그적, “학문적 잔치”로 만들어 주기 바란다.
그런데 왠일인지, 모임 종료 직후에 동영상이 비공개처리 되었다고 한다. 나 역시 굳이 보이고 싶은 영상은 아니지만, 반론권에 대한 질문을 포함, 그리고 정영환씨가 나를 비난했다는 말까지, (정말이라면 유감이다. 나는 참석한 덕분에 그에 대해 약간의 호감이 생겼었는데) 편집 되지 않은 상태로 다시 공개 되기를 바란다.
“축하”자리였다면 더더욱, 논의를 풍성하게 해야 하고, 그럴수록 반론에 시간을 할애해야 했던 거 아닐까. 모든 공간은 타자가 있어야 풍요로워진다. 어제 모임이 유감으로 남는 이유다.
(어제 와 주었던 강의석감독이 영상을 올려 주었다는 걸 방금 알았다. 아래 태그포스팅. 어제 분위기를 아실 수 있다.)

초청장 포함 링크

강의석 감독 촬영 영상 링크

정영환 출판기념 강연회 초청장

안내 드립니다.
오늘 저녁에 갑자기 이하의 모임에 출석하기로 했습니다.
조용히, 읽고 쓰기에 집중하려 했더니 세상이 저를 가만히 두지 않는 군요.
본인이 있는 앞에서 비판하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고 실행위원 중 한 분인 김창록 교수에게 말했더니 조금 전에 초청장이 왔습니다. 원래 일정에 없던 일이라 저에게 얼마나 시간이 할애될 지 모르겠지만, 참석해서 반론하려 합니다.
너무 갑자기고 불금이기도 해서 얼마나 오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시간 되시는 분들은 함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6년 7월 1일
박유하 드림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403565813003662&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theater

정영환 입국불허 항의 서명서 유감

이 성명서는 정영환의 방한목적이 나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목적을 노골적으로 쓴 것은 나에 대한 비판자들을 모으기 위한 것이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 나에 대한 비난을 캠페인화한 것에 유감을 표한다.
이들은 내가 소송당해 법정에 갇혀 있고, 그 결과에 따라서는 형무소행과 해직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는 듯 하다. 서명운동을 하려면 나에 대한 얘기는 빼는 것이 좋을 뻔 했다.

기본 문제는 박세진 선생님이 이미 지적하셨으니
(https://www.facebook.com/sejin.pak8/posts/10154269712042296)
몇가지 오류만 지적해 둔다. 나의 페친들께선 지겨우리만큼 들은 얘기겠지만 정영환의 비판에 곧바로 반론하지 않았던 것처럼 태만하다 보면, 어느샌가 또다시 진실로 회자될 것이기 때문에.

1.
나는 “일본의 국가책임을 최소화”하지 않았다. 이들이 주장해 온 “법적책임”(국회에서 입법해 배상하는 방식)을 지우는 일이 이런 저런 이유로 어렵다고 말했을 뿐이다. 또, 법적책임만이 “책임의 최대화”라 생각하는 건 내가 보기엔 법지상주의적 생각이다. 때로 도덕은, 법이 못하는 것을 한다.
이런 식의 왜곡은 이제 그만, 지양해 주기 바린다.

2.
나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고 악용”하지 않았다. 그동안 지원단체가 외면했거나 강조하지 않았던 목소리를 듣고자 했을 뿐이다.
나의 글을 “자의적으로 왜곡하고 악용”한 건 정영환 쪽이다. 이미 일부 썼지만, 앞으로도 밝히도록 하겠다.

3.
“일본의 ‘전후보상’의 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과대평가하는 등 치명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은 비판자들의 생각일 뿐이다.

4.
“그와 같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일본 언론계나 일부 학계가 『제국의 위안부』를 과도하게 평가한 배경을 예리하게 비판함으로써 일본 사상계의 지적・도덕적 퇴락에 경종을 울렸다”는 인식은, 정영환과 그의 “오독 혹은 거짓말”(장정일)을 외면중인 이들의 생각일 뿐이다.

5.
정영환의 “제국의 위안부』 사태 이후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2015년 말부터 현재까지 홋카이도에서부터 히로시마까지 일본열도 전역을 돌면서, 도쿄 대학 등에서 시민센터에 이르기까지 학계와 시민사회를 오가며 열성적인 강연활동”내용은, 오로지 박유하 비판이었다.

6.
“저서 출간 이후에는 『도쿄 신문』 『마이니치 신문』 등의 일간지에서 소개 기사가 실리기도 했으며, 이것을 계기로 관련 연구자들이 도쿄 대학에서 『제국의 위안부』 사태에 대한 격론을 벌이기도” 한 것이 아니다. 마이니치신문 소개는 격론 이후 최근 일이다.
책이 나온 지 몇달 후에 새삼스럽게 실린 마이니치신문 소개는, 3/28 “격론”의 현장에 내가 없었음에도 행해진 정영환등 비판자들의 비난을, 기자가 그대로 믿은 결과일 것이다.

7.
비판자들은, “할머니의 아픔”을 내세워 나에 대한 억압을 당연시한다. 하지만 할머니를 아프게 만든 건 내가 아니다.
할머니를 아프게 만든 건,추출해 낸 곳을 “반복해 읽어 들려 “(안신권 나눔의집 소장”)드리면서 “박유하가 할머니를 자발적매춘부라고 했어요” 라고 말했을 나눔의집 사람들이고, 그 말을 확산시킨 사람들이다. 2차가해자는 누구인가.

8.
정영환의 “본국에서의 학술 활동을 비롯한 각종 활동 자유의 권리를 즉각 보장할 것을 요구” 하는 행동이 보편인권을 위한 것이라면, 할머니의 오해를 풀고
나에 대한 국민과 법정의 억압을 푸는 행동에도, 나서 주기 바란다.

검증되지 않은 비난을 언론과 학자들이 받아쓰기하는 사태 역시, 오늘의 한국을 상징하는 한 단면일 것이다.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402696496423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