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1심] ‘다른 목소리’는 처벌받아야 하는가 〈제국의 위안부〉 최후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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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2016년12월20일, 1년 동안 끌어온 형사재판의 결심(結審)이 있었다. 이하는 그날 법정에서 읽은 최후진술 전문이다. 형사 재판에서 나는, 아직 준비공판이 진행 중이던 지난 5월 반박증거자료로 1000여매의 자료를 제출했다. 위안부에 관해 알 수 있는 증언, 수기, 기사 등이다. 위안부문제 전체를 아는데 도움이 되도록 시대순으로, 그리고 당사자/주변인/학자 순으로 배열했다.(나온 시기가 늦다 해도 저자나 발언자가 본 시대. 즉 동시대를 산사람들이 본 정황부터 배열했다. 자료 링크)

그리고 이후에,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이 위안부를 명예훼손하는 책일 수 없음을 증명해 줄 다른 여러 자료들을 ‘참고자료’로 제출했다. 본문에서 ‘증거자료’ ‘참고자료’라고 쓰고 있는 것은 그렇게 구별한 두 종류 자료들을 말한다. 하지만, 참고자료들 중에도 증거자료 이상으로 중요한 자료들이 있다. 예를 들면 할머니와의 대화록이나 영상 등이다.

참고자료는 결심 이전에 160개 이상 제출했고, 이 글을 쓰면서 몇 가지 더 언급한 자료들을 ‘추가자료’라고 썼다. 본문과 함께 재판부에 제출할 예정이다. 아직 미완성인 부분이 있지만 양해해 주시면 좋겠다.

검찰은 이날, 나에게 징역 3년을 구형하면서 “역사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점, 뉘우치지 않고 있는 점, 피해자들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점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으면서 깨달았는데 이들은 나의 ‘반성’을 끌어내려 한 것 같다. 나는 형사의 모든 심문에 반박할 수 있었는데, 반성의 태도를 표하지 않아 불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검찰과 관계자들은, 기소 이전에 조정을 권유하며 ‘사과, 한국어삭제판 절판, 일본어판 삭제’를 요구했고, 나를 비난해 오던 어떤 교수는 최근에 ‘일본어판 절판’을 요구해 왔다. 그리고 내가 끝까지 응하기 어렵다고 한 건 일본어판 삭제/절판뿐이다.

그런데도 비판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요구했는지는 말하지 않은 채, 내가 조정에서 사과를 요구했다면서 마치 할머니에게 요구한 것처럼 비난했다. 내가 요구한 건 나의 책을 왜곡해서 고소해, 전국민의 비난을 받게 만든 주변인들의 사과였다. 나는 한 번도 위안부할머니들을 비난하거나 무얼 요구한 적이 없다.

내가 이 구형에 실망하는 것은, 구형 자체가 아니다. 나의 모든 반박자료들을 봤으면서도 못 본 척하고 중죄를 내려 달라고 말할 수 있는 검사의 몰양심이다. 물론 그 배후에 있는 것은 할머니들이 아니라 주변인이다.

이 구형은 사실, 왜곡과 무지로 점철된 논리를 검사에게 제공해 앵무새처럼 대변하도록 만든 일부 ‘학자’들의 것이다.

<형사재판 최후진술>

존경하는 재판장님,
형사재판이 시작된 지 벌써 일 년이 되어 갑니다. 그동안, 저에게도 가능한 한 발언권을 주시고, 저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 주시면서 공정하게 진행해 주신 데 대해 먼저 깊은 감사말씀 드립니다.

1. 고의성(犯意)이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 | 〈제국의 위안부〉를 쓰기까지

먼저, 제가 〈제국의 위안부 |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을 쓰게 된 경위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저는 25년 전 유학 막바지 무렵에, 도쿄에 증언을 하러 오신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통역을 자원봉사로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울부짖는 할머니의 증언을 들으며 눈물 흘린 경험이 있습니다. 이때부터 위안부 문제는 이 25년 동안 저의 머리 속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귀국 후에는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운동방식에서 모순을 보거나, 운동에 다가갈 특별한 기회도 없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지켜보기만 했지만, 10년 전에 위안부문제에 관한 첫 책을 쓰게 될 때까지, 수요집회에 참여하거나, 나눔의집에 찾아가 할머니들과 대화를 나눈 적도 있습니다.

2) 세월이 지나 2004년에, 민족주의를 넘어 한일문제를 논의하는 한일지식인 모임을 만들게 되었는데, 제가 이 모임을 만들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도 사실 위안부문제에 있었습니다. 일본의 문제적 교과서를 반대하는 모임 대표이기도 했던 고모리 요이치 도쿄대 교수와 의기투합해 모임을 만들면서, 제일 먼저 함께해 주기를 부탁했던 이가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 교수였던 것도 그래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오랜 세월 역시 위안부 해결을 위해 앞장서 활동해 왔던 와다 하루키 교수와 우에노 교수를 같이 초청해 서울에서 심포지엄을 했습니다.이때 저는 이 분들의 발제에 대한 토론을 위안부 지원단체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윤미향씨에게 부탁했습니다. 그 이유는, 정대협이 와다 교수가 중심적으로 활동한 아시아여성기금을 비난해 왔기 때문에, 이들 간의 접점을 찾아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내용은 2008년에 나온 〈한일역사인식의 메타히스토리〉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윤미향씨는 기존의 주장만을 되풀이했고 결국 접점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3) 실은 저는 그 심포지엄을 열기 직전에 〈화해를 위해서 | 교과서 /위안부/야스쿠니/독도〉라는 책을 냈었습니다. (위안부문제 관련은 2장. 재판부 기제출 참고자료 98. 이하 ‘참고자료’로 표기) 정대협의 운동방식과 함께,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또 다른’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책에서 강조한 것은, ‘대립 중인 문제를 풀려면 우선 그 문제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다. 지원단체가 언론과 국민에게 내보내는 정보가 정확하지 않고 일관성이 없으니 우선 정확히 알자. 그리고 나서 다시 논의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사회는 저의 책을 별 거부반응 없이 받아 주었습니다. 몇몇 언론의 리뷰를 얻을 수 있었고, 다음해에는 문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참고자료 86,87)

4) 〈화해를 위해서〉가 일본어로 번역되면서 일본에서의 발언기회도 많아졌는데, 그때마다 저는 위안부문제 해결에 일본이 다시 나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1997년에 만들어진 일본의 아시아여성기금은, 2003년에 여러나라의 전 위안부들에게 일본수상의 편지와 함께 보상금을 지급한 후 2007년에 해산했고, 그 이후로 위안부문제에 대한 일본의 관심이 급격히 식어갔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2010년, 한일합방 100주년이 되던 해, 일본정부는 물론 한국정부조차 위안부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던 때입니다만, 저는 일본 언론을 향해 그 해에 ‘일본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위안부문제’라고 썼습니다(참고자료 59. 교도통신 칼럼. 2010)

5) 그리고, 다음 해인 2011년 겨울, 역시 일본매체에, 위안부문제에 대한 글, 일본의 우익과 정부와 지원단체를 각각 비판하는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web Ronza. 2011/12~2012/6) 2년 후에 한국에서 먼저 책으로 나오게 된 〈제국의 위안부〉에는 이때 연재한 글도 한국어로 번역해 실었습니다.

다시 말해,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문제에 무관심했던 일본을 향해, 위안부문제를 다시 환기시키고,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 쓰이기 시작한 책입니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도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해서, 책으로 먼저 나오게 된 건 한국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원래는 한일 양국에서 동시에 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위안부문제를 위해 오래 애써온 일본의 와다 하루키 교수가 제가 고발당하자 ‘일본에서 위안부문제를 환기시키는 순기능’이 있다고 언급한 것은 저의 노력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기사 링크)

6) 아직 글을 연재 중이던 2012년 봄, 이번에는 일본에서 제가 2005년에 시도한 것과 같은, 똑같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지만 방법에서 의견이 다른 이들을 불러 접점을 찾아 보고자 하는 취지의 심포지엄이 있었습니다. 저도 와다 교수와 나란히 초청받아 와다 교수와 비슷한 입장에서 의견을 말했습니다. (참고자료 162)

이 심포지엄의 타이틀이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해서〉였고, 주최한 사람들이 한국에서 정대협활동을 했거나 일찍부터 위안부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져 한국 정대협 첫 대표인 윤정옥 교수와도 친분이 있던 여성학자였다는 것은, 그들이 저의 입장을 와다 교수와 비슷한, 다시 말해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 온 인물로 이해해 주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7) 2012년 봄, 일본이 시도한 사죄보상 움직임을 청와대 인사가 지원단체에의 반대를 미리 신경 쓰면서 위안부당사자는 물론 지원단체에게 말하는 일조차 없이 거부한 기사를 보고, 저는 이대로 가면 위안부문제 해결은 영원히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을 향한 글을 더 쓰기 시작했고 이미 쓴 일본어 글도 번역해 넣었습니다. 그것이 1년 뒤, 2013년에 발간된 〈제국의 위안부〉입니다.

이 무렵 저는 연구년을 맞아 일본에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오래 교류해 온 여러 학자들과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를 자주 했고, 돌아오기 직전에는 도쿄대학에서 또 다시 접점을 찾기 위한 세미나를 열기도 했습니다.

고발 직후 기고와 다른 글들에 쓴 것처럼(참고 45-50), 〈제국의 위안부〉에서의 저의 관심은 기존 ‘상식’을 재검토하고, 그에 기반해 ‘또 다른 해법’이 있는지 고민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 고민을 함께 나누는 일을 통해, 위안부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은 한국인들의 진정한 관심과 이해가 깊어져서, 더 많은 이들이 납득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고 위안부할머니들을 하루라도 빨리 편안하게 해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책에서의 구체적인 제안은, 그저 ‘위안부할머니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위안부담론과 해결을 위한 논의에서 배제되어 있으니 당사자를 포함한 한일협의체를 만들고 일본과 대화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재판장님.
위안부문제에 대해 알게 된 이후, 이 문제에 관한 저의 관심과 행동과 집필은 전부 위안부할머니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기존 상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학자의 당연한 본분이자, 한국에 거주하면서 일본을 가르치는 일본학 전문가로서, 의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사태를 정확히 알아야만, 생산적인 대화가 시작되고 올바른 비판도 가능하다는 것이, 한일관계 관련 첫 책을 내놓을 때부터 저의 일관된 생각이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그런 생각에서 쓴 책입니다.

2. ‘위안부 할머니를 비난하는 일본의 우익을 대변한다’는 주장에 대해 | 일본의 평가

그런데 원고 측 대리인과 검찰은, 저의 책에 일본의 책임을 무화시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비난합니다. 저의 책이 일본우익을 대변했고 아시아태평양전쟁을 미화했다는 거짓말에 더해, 위안부문제해결에 ‘해악’이 되는 책이라고까지 합니다. 〈제국의 위안부〉 분석을 학생들을 동원해 시켰던 나눔의 집 고문 변호사는, 오래 전 책인 〈화해를 위해서〉가 청소년 유해도서라면서 당시의 〈우수 교양도서〉 지정을 취소시키려는 운동에까지 나섰습니다.

하지만 지원단체가 고발하기 전까지는, 〈제국의 위안부〉역시,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은 바 있습니다. (참고자료 5-12, 신문서평 등)

중요한 건, 제가 일본의 책임을 무화시키려 한다고 원고 측으로부터 비난당한 그 일본에서, 저의 책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일 것입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저의 책을 높이 평가해 준 것은, 원고 측이 말하는 것처럼 책임을 부정하는 일본우익이 아니라, 일본의 책임을 누구보다 깊이 인식해 온, 이른바 양심적지식인과 시민들입니다.

그건 우선, 2014년 가을에 일본어판이 나온 이후 가장 먼저 서평을 써 준 곳이 이 문제에 오랫동안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여 온 아사히신문이고, 아사히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평을 받는 도쿄신문, 그리고 중도적인 마이니치 신문 등이 서평, 칼럼, 사설 등을 통해 긍정적으로 언급해 주었다는 사실이 보여 줍니다.

그런 글들이 저의 책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원고 측의 거짓말을 밝히기 위해 심사평, 학자와 작가 등의 말을 일부 읽어 보겠습니다.

“군으로 대표되는 공권력에 의해 납치되어 성적봉사를 강요당한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자세의 뒤에는 단순한 전시하의 인권침해로 보는 견해보다도 식민지주의, 제국주의로까지 시야를 넓혀 문제를 파악하는 날카로움이 있다. 그것은 전시하의 인권침해적 범죄라는 이해보다도 엄중한 물음을 품고 있다. 박유하는 과거를 미화하고 긍정하려고 하는 역사수정주의자의 시점과는 정반대의 시선을 위안부피해자에게 쏟고 있는 것이다”(나카자와 게이, 작가, 호세이대 교수, 웹론자 2016년 1월 18일)

”여성을 수단화 물건화 도구화하는 구조에 대한 강한 비판과 함께 그 안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을 표한다. 이것이 이 책의 중심축이다.”(다나카 아키히코, 도쿄대 명예교수, 아시아태평양상 특별상 심사평, 2015) (참고자료 71,72)

“이 책의 평가해야 할 점은 제국, 즉 식민지지배의 죄를 전면에 끌어낸 데 있다”(우에노 치즈코, 도쿄대 명예교수, 2016/3/28 도쿄대 연구모임 자료집 “위안부문제와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박유하 교수 저서와 평가를 소재로”에서)

“거시적인 규정성을 주시하면서도 미시적인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을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여기에 존재하는 중간적 차원의 상황을 꼼꼼하게 보아 가는 것이 식민지지배를 생각하는 시각이 아닐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식민지지배 폭력성의 진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현재의 식민지연구의 하나의 흐름을, 박유하는 잇고 있다고 생각한다”(아라라기 신조 조치대학 교수, 2016/3/28 도쿄대 연구모임 자료집 “위안부문제와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박유하 교수 저서와 평가를 소재로”에서)

“일찍이 구미를 추종했고 강자로서 아시아를 지배한 일본은, 타자를 지배하는 서양기원의 사상을 넘어서서 국제사회를 평화공존으로 가져갈 가치관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의 이해를 얻으며 도전하고 싶다”
“이제 물음은 일본을 향하고 있다” (야마다 다카오 마이니치신문 특별편집위원, 마이니치 신문 2015년 7월 27일)

이상이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일본평의 일부입니다.

그런데도 검찰과 원고대리인은, 아니 그들에게 정보를 제공한 이들은, 그동안 한국이 일본사정을 잘 모른다는 것을 이용해 완전히 사태를 반대로 왜곡해 전달해 왔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 일부 우익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위해 저의 책을 이용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극히 미미한 수준입니다. 그 어떤 보수 신문도 이 책의 서평을 게재하지 않았고, 물론 상을 주겠다는 곳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책이 두 개의 상을 수상하자 뒤이어 기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기소반대 성명을 내자, 이미 〈화해를 위해서〉 일본어판이 나왔던 2007년 무렵부터 저를 비난해 온 재일교포연구자와 일본인들을 포함한 연구자와 운동가들이 저의 책을 왜곡해 가며 격하게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를 보다 못한 일본의 지식인들은 다시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민족과 젠더가 착종하는 식민지지배라는 큰 틀에서 국가책임을 묻는 길을 열었다” (가노 미키요 게이와가쿠인대학 교수, 2016/3/28 도쿄대 연구모임 자료집 “위안부문제와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박유하 교수 저서와 평가를 소재로”에서)

“이러한 구조 야말로 식민지지배와 전쟁의 커다란 죄악, 그리고 여성의 비애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박유하씨가 동지적관계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그렇게 해석”(와카미야 요시후미 전 아사히신문 주필, 2016/3/28 도쿄대 연구모임 자료집 “위안부문제와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박유하 교수 저서와 평가를 소재로”에서)

“일본을 면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선입견을 빼고 전체를 읽어 보기만 한다면 생길 리가 없다. 그런데도 일본의 면죄에 이용하는 것이라는 일부사람의 독해는 명백히 오독이며 이 책을 악용하는 것”
“이러한 측면의 강조는 식민지지배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의 길을 열어 줄지언정, 일본의 면죄를 끌어내거나 하는 일은 없다”(니시 마사히코 리츠메이칸대 교수, 2016/3/28 도쿄대 연구모임 자료집 “위안부문제와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박유하 교수 저서와 평가를 소재로”에서)

라고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한결같이 제국의 위안부 안에 있는 일본에 대한 비판을 제대로 읽어 주었고 바로 그 부분이 저의 책이 일본에서 평가받은 이유입니다.

그리고 위안부문제 해결 역사에서 저의 책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논문으로 써 주거나 저와 대담을 나눈 학자도 있습니다(참고자료: [위안부 문제가 조명하는 일본의 전후] -이와사키 미노루, 오사 시즈에 <주간 금요일> 편집위원 특별 대담: 박유하). 또 이들 이외에도 비슷한 시각으로 제국의 위안부를 옹호하는 글모임집인 책이 내년 봄에 나온다고 듣고 있습니다.

저의 책이 위안부할머니를 ‘명예훼손하는 책이 아니다’라는 내용의 일본지식인들의 기소반대 성명에, 고노담화를 발표한 고노 전 관방장관, 무라야마담화를 발표한 무라야마 전 수상, 그리고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을 대표하는 노벨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 등이 동참해 준 것(참고자료 73-1,2)은 그들의 저의 책을 올바르게 평가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고발 직후, 아직 책이 일본어로 번역되기 전에도, 자국을 비판해 온 일본의 대표적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 선생이 저에 관한 메시지를 가처분 재판부에 보내 준 것도(참고자료 140), 저의 그간의 작업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고 공감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원고 측 대리인과 검찰은, 제가 일본의 책임을 부정하고 면죄하려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들이, 본 사건 논점과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은, 제가 일본 돈을 받고 위안부 할머니를 회유하는 인물이라는 거짓말을 퍼뜨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저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나쁘게 만들어, 제가 위안부할머니를 명예훼손하는 ‘고의’가 있는 인물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3. 위안부를 폄훼하는 책이라는 주장에 대해 | 한국의 평가

재판장님, 하지만 저의 책이 결코 위안부할머니를 명예훼손하는 책일 수 없다는 것은, 책을 쓰기까지의 경과와, 그리고 2013년 책 발간 직후의 한국사회의 반응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발 이후에도, 일일이 다 찾아보지 못할 만큼 쏟아져 나온 시민/지식인들의 탄원서, 성명, 서평, 페이스북, 유력잡지 특집 등에서의 발언/글과, 진실을 전하고자 한 기자들의 서평과 기사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4-34,36-44,66-2, 73-1,2, 75, 76-1-10, 79-85,91-95, 124-139, 142-155.)

고발을 문제시하는 시민들이 페이스북에서 모여 지지하고 응원하는 모임을 만들었고, 페이스북에 〈제국의 위안부, 법정에서 광장으로〉라는 페이지를 개설하여 저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노력해 주었습니다. 이 페이지에, 현재까지 2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호응해 주었습니다. 또한 어제, 저를 위한 탄원서가 한 젊은 평론가에 의해 새로 작성되어 동참자들의 서명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숫자는 결코 많지 않겠지만, 저는 그런 분들이 있기에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 없이 견뎌왔습니다.

재판장님,
저를 위한 탄원이나 언론에 글을 써 준 분들이 주로 텍스트를 읽고 분석하고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한국문학자, 평론가, 작가 등이라는 사실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많은 이들이 읽어 주기를 바라 일반서로 쓰기는 했지만, 사실 저의 책은 내용도 문체도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건 사실 여부 이전에, 책에서 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파악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독해력이라고 합니다. 그 독해력에서 한국에서도 손꼽힐 만한 뛰어난 분들이, 저의 책을 정확히 읽어 주시고 옹호해 주셨던 것입니다.

원고 측 대리인과 검찰은 저의 ‘의도’까지 의심하며 책을 왜곡했지만, 저의 책이 그들이 말하는 것 같은 책이었다면, 발간 직후에 그냥 무시당하거나, 언론이 이들보다 먼저 앞장서서 비난했을 것입니다.

고발 이후는 물론 고발 이전에 나온 비판들에 대해 저는 이미 대부분 대답했습니다. (이재승, 젊은 학자들, 정영환에 대한 답변. 참고자료 62-1-4,102-105. 106, 110, 링크) 지원단체뿐 아니라 학자들마저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 다독가로도 유명한 한 작가와 제가 반박한 자료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참고자료 110, 132) 아직 완전한 형태가 아닌 글도 있지만, 그들이 어떤 왜곡을 했는지 아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4. 다른 목소리의 억압 | 고발 이유

그런데 원고측 대리인들은 왜, 발간 이후에 10개월 동안이나 침묵하다가 갑자기 고발을 한 걸까요?

그 직접적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 유지들과 함께 연 2014년 봄 심포지엄입니다. 그리고 고발을 앞당긴 것은 책을 낸 이후 제가 나눔의 집에 거주하시는 분을 비롯한 할머니들 중 가장 가까웠던 분이 돌아가셨기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들의 고발장에는, 〈 화해를 위해서〉와 심포지엄에 대해 언급하면서, 박유하의 향후 활동을 막아야 한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참고자료 링크)

이들은 제가 할머니들과 만나는 것을 막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책의 가처분과 함께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접근금지 가처분까지 신청한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할머니와의 만남을 독점했으면서도, 이들은 저의 책에 생존 할머니의 목소리가 없으니 알맹이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제가 책을 쓸 때 할머니를 만나지 않은 것은, 할머니들의 증언이 시간이 지나면서 초기와 달라진 경우가 없지 않았기 때문에, 예전에 나온 증언집 등이 현재의 증언보다 사태파악에 훨씬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일관계가 나날이 험악해져가고 위안부할머니들이 세상을 뜨는 가운데 하루라도 빨리 책을 세상에 내보내 다시 논의해야만, 위안부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이전, 오래 전에 만난 분들의 기억은 제 안에 오롯이 남아있었습니다.

책을 내고 나서 위안부할머니들을 만나기 시작한 것은, 사죄 및 보상에 관해서 할머니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직접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연락처를 쉽게 알 수도 없었고, 정대협의 수요시위에 나오는 분들은 접근이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제한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건 결국 몇 분 되지 않지만, 만난 분들은 저 자신이 놀랄 만큼, 제가 책에 쓴 지원단체 비판이 다름 아닌 할머니들 본인들의 생각이기도 했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한 할머니는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본에서 진짜 하려면, 할머니한테 직접 사죄하고 할머니한테 직접 돈을 손에 쥐어줘야지, 왜 정대협을 끼고’ 진행하느냐면서, ‘입법 하겠소 무슨 법 하겠소…… 그런 거 다 소용없으니까. 할머니들하고 이렇게 직접, 우리 주소 있고 전화번호 있고 계좌번호 있지 않아요, 그거 불러달라’고 하면서 상대를 하면서, 할머니들이 ‘이 방식으로 우리가 준비했으니까 할머니들이 받으시고 싶으신 분이 받아가세요.’ 하면, ‘이제 우리 둘 다한테 안 받는 사람은 이걸로 끝난다. 하면 다 받을 거예요. 그렇게 꼭 해주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고자료 65, 우연재 할머니 영상)

또다른 분은 제가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해서는 아시는지, 일본의 어떤 사죄와 보상을 원하시는지, 법적책임에 대해서는 아시는지 묻자, ‘법적이고 뭐고 그런 건 우리는 모르고, 다 떠나서 우선은 보상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점연 할머니. 2014년 심포지엄 영상, 참고자료 166)

말하자면, 20년 이상 지원단체들이 ‘할머니의 생각’이라면서 주장해 왔던, 또 검찰이 본사건의 쟁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에도 제가 부정한다고 비난해 온, 일본의 ‘법적책임’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계신 분들이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일본에서 20억을 받아주겠다 했다고 위증하신 유희남 할머니조차, 정말은 저에게, 정대협을 비판하면서 보상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목소리를 세상으로 내보내기로 했던 것입니다. 책을 낸 다음 해 봄인 2014년 4월 말에 연 ‘위안부문제 제3의 목소리’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에서입니다.(참고자료 35, 영상자료 추가)

일본에서 와다 하루키 교수, 부산에 계신 지원단체장, 그리고 제가 발제한 이 심포지엄은 실은 제가 비용을 부담한 심포지엄이었습니다.

물론 결코 돈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 일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개인적으로는 큰 부담이었지만 묻혔던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세상에 전해지고 그 목소리를 들은 이들이 논의를 새로 시작해 준다면, 그만큼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처음으로 공적인 장에 나타난 ‘다른’목소리들에, 한일 양국언론은 크게 주목해 주었습니다. (링크)

그런데 이때의 영상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여기에 나오는 위안부할머님들은 전부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하고 목소리도 변조되어 있습니다. 그건 물론 이분들 자신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셨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했던 걸까요? 왜 그분들은 자신의 생각을, 시위에 나오시는 다른 분들처럼 당당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말하지 못했던 걸까요?

물론 우리는 그 이유를 압니다. 그런 발언들이, 지원단체에 의해 금기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들의 두려움이, 직접적으로는 금기를 깼을 경우의 불이익에 있다는 것도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재판장님,
6개월간에 걸친 통화기록이어서 길지만, 참고자료로 제출한 배춘희 할머니의 녹취록을 읽어 봐 주시기 바랍니다.(참고자료 77) 저와 통화하면서 할머니가 자주, 직원 등이 몰래 듣고 있는지 여부에 늘 신경을 쓰고 계시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제게 할머니를 비난하려는 고의 같은 것이 있을 이유가 없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지만, 나중에 말씀 드리는 것처럼, 할머니들 역시 이 문제에 관한 담론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야말로 이 사태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원단체 관계자들이 외부유출을 막으려 했던 건 할머니들의 사죄와 보상 관련 생각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언론과 국민을 향해 말해 온 이야기, 이미 하나의 이미지로 굳어진, ‘군인에게 강제로 끌려간 소녀’라는 이미지에 균열을 낼 이야기야 말로, 이들이 저를 고발까지 해 가면서 막으려 했던 내용입니다.(정대협도 고발을 검토했다고 들었습니다)

지난 공판에서 이미 보신 것처럼, 배춘희 할머니는, 동원정황과 위안소에서의 생활과 조선인 위안부에 대해서, ‘강제연행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위안부는 군인을 돌보는 사람이었다. 에프론(국방부인회 제복) 두르고 군인을 위한 천인침(하얀 천에 천명의 여성이 놓은 바늘땀을 받는 일. 군인의 무운장구를 비는 부적 같은 것) 을 받았다. 일본을 용서하고 싶은데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증거자료 4 외)

그리고 당신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와 살다가 스스로 직업소개소에 가셨다고 했습니다.(참고 77). 그러면서 ‘일본정부에서 절대로 그런 짓 안 했다.’, ‘일본사람이 잡아가고 그런 건 없다'(증거자료 77, 90쪽)고까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너무 단정적이셔서, 오히려 제가 다른 여러 케이스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씀드렸을 정도입니다.

위안부 동원에 사기적 수법이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속인 것은 일본군이아니라, 업자뿐 아니라 직업소개소이기도 하다는 것이 기제출 증거자료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경찰도 문제시하고, 여성들이 속아 팔려가는 일이 없도록 단속했던 것입니다. (증거 3-1)

제가 만난 몇몇 분의 목소리를 통해, 저는 오로지 증언집에 의거해서 쓴 저의 책이, 생존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나름대로 대변한 것이었다고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이들이 말하는 생존해 계신 할머니 나눔의 집의 다른 분들 구술록을 보면, 원고 측이 제출한 자료입니다만, 이른바 ‘군인이 강제연행’한 분은 단 한 분도 안 계십니다. 이옥선 할머니는 모르는 조선인에 의한 납치, 김군자 할머니는 수양아버지에 의한 인신매매, 김순옥 할머니는 아버지가 종용한 인신매매, 강일출 할머니는 형부에 의해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가게 된 케이스, 박옥선 할머니는 스스로 갔는데 속은 케이스입니다.(증거 자료 50) 강일출 할머니가 ‘보국대’에 갔다고 말씀하신 건, 이분들이 모집 당시부터 ‘애국’의 틀에서 동원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재판장님, 제가 〈제국의 위안부〉를 통해 시도한 일은 오로지, 그런 분들, 자신의 체험을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고, 말했으나 잊혔던 목소리를 그저 복원하고, 세상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공간으로 내보내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목소리만이 진짜 진실이라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위안부할머니들을 둘러싼 일임에도 위안부문제가 당사자의 일부를 점점 제쳐놓고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침묵하게 된 분들의 목소리도 일단 들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사자들 간의 생각이 다르다면, 주변사람들도 함께 다시 생각해 보자, 오로지 그것뿐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심포지엄에서도 그런 내용을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진심이 어떤 곳에 있었는지, 배춘희 할머니는 정확히 간파해 주셨습니다. 저는 결국 할머니를 세상으로 당당하게 불러내 드리지 못했지만, 그런 제게 “선생님 마음은 내가 알고 있다.”(자료 77, 55쪽) “신세만 지고 있다.”(같은 자료 68쪽)고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지금도 제겐 위안과 함께 죄송한 마음을 불러 일으킵니다. (참고자료 113-118, 링크)

하지만 그 이후, 저는 더이상 그런 활동을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저와 가장 긴밀한 대화를 나누었고 심포지엄에도 영상으로 목소리를 내보내 주셨던 배춘희 할머니가 심포지엄 후 한 달여 만에 돌아가셨고, 저 또한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 후에 고발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5. 검찰/원고 측의 오독

재판장님,
〈제국의 위안부〉가 허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자료는 이미 지나칠 만큼 충분히 제출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을 조금만 더 보충해 보겠습니다. 먼저 검찰이 문제 삼는 ‘긍지’와 ‘동지적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1) ‘긍지’의 대상

우선 이들의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 오독에 관해서입니다.

검찰은 저의 책이 ‘자긍적 애국심’을 말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책에 그렇게 쓴 적이 없습니다. 〈제국의 위안부〉에서 ‘긍지’, ‘자긍’이라는 단어는 전부, ‘애국’ 자체라기보다 그 어떤 역할이건 자신이 필요시되는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자긍심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것은 분명 부조리한 국가의 책략이었지만, 외국에서 서러운 음지생활을 하던 그들에게는 그 역할은 자신에 대한 긍지가 되어 살아가는 힘이 되었을 수 있다. 그런 사회적인 인정은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잊고 삶의 끈을 이어가기 위해서도 필요했을 것이다. “싱가포르 근처에는 거의 6000명의 가라유키상이 있었고 1년에 1000달러를 벌었는데, 그 돈을 일본인들이 빌려 상업을 했”다는 이야기는 해외의 가라유키상들이 일본 국가의 국민으로 당당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라유키의 경우이지만 이 글에서 중요한 건 긍지라는 감정자체일 뿐, 그 내용이 아닙니다. 저는 분명히 긍지가 되는 건 그 ‘역할’이라고 말했고, ‘사회적인 인정’이라고 고쳐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국민’으로서 당당할 수 있었다고 썼습니다. 다시 말해, 가난과, 딸을 파는 가부장제와, 혹은 ‘매춘녀’로 사회의 지탄과 차별을 받던 위치를 떠나 “국민”의 한 사람으로 동등하게 취급받는 일에 따른 감정자체가 제가 말한 ‘긍지’입니다. 하는 일의 내용이 무엇이건 , ‘자기존재를 긍정하는 감정’, 저는 그것을 긍지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긍지의 대상은 애국심이 아니라 자기자신입니다.

다른 글에서도, “그녀들이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고 무슨 날이면 ‘국방부인회’의 옷을 갈아입고 기모노 위에 띠를 두르고 참여한 것은 어디까지나 ‘국가가 멋대로 부과한 역할'” 이라고 분명히 강조했고, 이어서 그런 행위가 담고 있던 누군가를 위로하는 역할에 대해 ‘자기 존재에 대한 (다소 무리한) 긍지’라고 분명히 기술했으며, ‘그녀들이 처한 가혹한 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쓴 것처럼, ‘긍지는 어디까지나 자기존재에 대한 긍지일 뿐입니다.

자기존재에 대한 의미부여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이라는 것은 굳이 첨언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그 내용이 어떤 일이건 상관 없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고발자와 대리인과 검찰이 이 부분을 위안부가 ‘애국자체에 자긍심을 가졌다’고 읽은 것은 문맥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오독입니다.

설사 애국심자체에 대한 긍지로 판단한다 해도, 그것은 구조적으로 강요된 애국일 뿐, 검찰이 주장하는 자발적/자긍적 애국과는 다른 것이라는 것도 이미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2) ‘동지적 관계’ 개념의 의도

검찰은 저의 책이 일본군과의 차이, 일본인 위안부와의 차이를 소거시켰다면서 ‘동지적관계”라는 단어가 위안부의 명예를 훼손시켰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를 들면,

표면상으로는 ‘동지’적 관계였어도, ‘조선인 주제에 붕대를 잘 감기나 하겠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보이는 것처럼 차별감정은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감추어진 차별감정을 보기 위해서도 ‘조선인 위안부’라는 존재의 다면성은 오히려 직시되어야 했다. 명확하게 보는 일만이 책임을 져야 할 책임 주체와 피해자의 관계성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라고 쓴 데서 저의 의도를 읽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또 ‘무엇보다, ‘동지’적 관계를 기억하고 그 기억만을 고집했던 이들을 무조건 규탄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응답하고 대화하기 위해서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봐야 했다. 위안부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제대로 비판하기 위해서도, 그들의 내면에 존재했던 차별의식을 지적하기 위해서도, ‘동지적 관계’는 우선 인정될 필요가 있었다.’고, ‘동지적관계’라는 말을 굳이 사용한 이유에 대해서도 명시했습니다.

다시 말해 검찰의 말처럼 조선과 일본을 똑같이 취급해 일본의 책임을 면죄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에 띄지 않는 차이를 보기 위해 ‘제국일본의 구성원’이라는 범주 – 동질성을 보고자 했던 것이고, 그런 논지가 일본의 사죄의식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을 기대했던 것 입니다.

바로 그래서, 일본을 향해 쓴 부분에서 ‘그녀들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 때로 운명의 ‘동족'(후루야먀 고마오, 「하얀 논밭」, 14쪽)으로서 일본의 전쟁을 함께 수행한 이들이기도 하다’고 쓰면서 이어서 ‘그런 의미에서는 그런 그녀들에게 돌아가야 할 말은 때로 그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가혹하게 다룬 데에 대한 사죄의 표현이어야 한다. 군인의 폭력은 표면적으로는 ‘내선일체’였어도 차별구조는 온존시켰던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만든 것이기도 했다.(162쪽)’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6. 지원단체/검찰/학자의 기만과 망각

재판장님,
이제 이들이 ‘허위’라고 주장하는 세가지 논점에 대해 조금 더 보충해 보겠습니다.

1) 매춘/강제 | 일본인 위안부의 차이화

저는 위안소의 틀이 ‘관리매춘’이자 ‘강요된 매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검찰도 원고 측 대리인도 더 이상은 반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대표였던 윤정옥 교수도, 한겨레에 연재되어 유명한 글에서 ‘매춘을 강요당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990년, 1월 4일. 일본군위안부 신문기사 자료집, 정대협 연구 보고서, 2004, 45,46쪽. 추가)

그리고 이 자료를 포함한 신문기사들을 정리한 정대협의 보고서는, ‘경성지법 일본군 위안부 관련 판결문’이라는 제목으로 1930년대 후반 재판자료들을 정리해 놓고 있는데, 여기에는 호적등본이나 인감증명등을 위조해서 데려간 ‘사문서위조행사사기’, ‘만주로 시집을 가는 것으로 속이고 작부계약’한 ‘사기’, ‘인사소개업자에게 큰 딸의 창기 주선을 의뢰’한 ‘사기’, ‘내연의 처를 작부로 넘기고 그 이득을 챙기'(41쪽)려 한 ‘영리유괴사기’, ‘자신의 첩을 창기로 만들어 그 이득을 챙기려 시도’한 ‘영리유괴사기’, ‘영리유괴사문서위조사기’ 등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 자료들과, 보고서 머리말에 있는 ‘조선사회의 빈곤화와 그에 따른 여성에 대한 심각한 인신매매를 볼 수 있다.’ ‘상당수의 여성들이 만주로 팔린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는 말은, 지원단체가 일찍부터 위안소형태가 관리매춘이었고 군인에 의한 강제연행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2004년, 무려 12년 전 일입니다.

그럼에도 지원단체와 관련연구자들은 오랫동안 언론이나 국민에게는 이런 사실을 숨기고 ‘강제연행’과 만 ‘총독부 명령을 받은 총칼 찬 순사’만을 강조해 왔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금년 초에 300만 이상이 보았다는 〈귀향〉에서의 강제연행 장면입니다. 그리고 검찰의 기소는 그렇게 만들어진 ‘국민의 상식’에 단 한 번도 의구심을 갖지 않았던 결과라고 해야 합니다.

또한 2009년에발간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행한 〈인도네시아 동원 여성명부에 관한 진상조사〉를 보면 송복섭이라는 조선인 군속의 수첩을 근거로 한, ‘광주에서 종군위안부 61명의 명단이 확인돼 일제가 한국인 위안부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까지 끌고 가 매춘을 강요한 사실이 밝혀졌다’는 신문기사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1992/1/16, 광주매일)이 기사는 위안부 중에 ‘세 유부녀까지 포함됐다고 송옹은 증언’했다고 쓰고 있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현재의 우리의 기억은, 위안부문제 발생 초기의 기억의 망각과 함께 만들어진 것입니다.

얼마만큼 의도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원고측 대리인들과 검찰은 자신들의 무지 혹은 기만을 숨기고, 일본인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이고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군이나 총독부관계자에게 ‘강제로 끌려간 소녀’라고만 강조합니다. 그리고 저의 책이 그런 생각을 부정한다면서 저를 엄벌에 처해 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인여성 중에도, 위안소인 줄 모르고 속아서 간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도 최근 간행된 일본의 연구서에서도 밝혀 진 바 있습니다(『日本人慰安婦ー愛国心と人身売買と』, 22-23쪽).

또 일본의 연구서뿐 아니라, 한국의 보고서 역시, ‘위안부나 유흥업 등으로의 충원과정에서 유괴유인, 취업사기, 인신매매등 합법과 불법을 오가며 각종 수법이 성행하고 있었’다는 지적을 하면서 ‘일본여성들조차 일본 내무성, 외무성이 제시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동원 여성명부에 관한 진상조사〉,71쪽, 추가참고자료)

즉 ‘일본인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라는 검찰의 단정은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원고 대리인 또한, 센다 가코의 〈속 종군위안부〉를 제시하면서, 마찬가지로 조선인 위안부는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였다고 강조했지만, 같은 책에 ’29세의 조선인 창녀'(118쪽)도 등장한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일본군들은 조선인위안부를 비하해서 ‘조센삐’라고 불렀는데, 일본인 위안부에게도 비하의 말인 ‘삐’라고 부르고 있었다는 사실도, 다름 아닌 같은 책에 나옵니다(148쪽).

앞서의 나눔의집 할머니의 경우를 본 것처럼 이른바 강제연행과는 다른 정황이 보이는데도 원고측은 이 분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옥선 할머니는 납치, 김군자 할머니는 군복을 입은 사람에게 끌려갔다, 김순옥 할머니는 속아서, 강일출 할머니는 집에서 군인과 순사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고만 쓴 바 있습니다. (추가자료) 다시 말해 형부가 보냈다는 사실은 은폐하고, 박옥선 할머니에 대해서도 그저 ‘돈을 버는 줄 알고 갔다’고만 기술할 뿐, 어떻게 갔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원고대리인은, 국민을 향해 행해 온 오랜 기만을, 재판부를 향해서도 행했던 것입니다. 물론 〈제국의 위안부〉 가처분 및 손해배상 1심재판부는 이러한 자료들을 면밀히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2) 제복을 입은 업자/조선의 ‘낭자군’

재판장님,
앞서의 공판에서 군복을 입은 업자에 관련한 자료를 제출했습니다. 그 자료에 대해 보충설명하겠습니다.

위안부 모집은 시기에 따라 형태가 조금씩 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30년대에는 주로 업자의 자율적인 모집이었던 데 반해, 중일전쟁 이후에는 전쟁으로의 국민총동원시대를 맞아 ‘애국’의 틀이 강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제출한 증거자료 45호 중에 있는 조선거주 일본인의 회상에는 ‘金原始彦’이라는 군속이 만주에서 ‘황군위안부로서 인솔 활약, 요원을 모집하기 위해 후창읍으로 귀국`해 와 있다면서 ‘한사람이라도 낭자군을 모아 전력증강에 기여해야 한다면서 패기만만'(증거 45)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낭자군’ 이란, 여성들의 전력화를 칭송하며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단어가 업자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은, 이른바 한국인들 대다수가 상상하는 ‘강제연행’과는 다른 모습으로 위안부모집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또한 당시 군속에게는 군복을 닮은 제복이 지급되었으니, 평상시에도 군속제복을 입고 다니던 업자들을 소녀들이 ‘군인’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태도에 따라서는 ‘군인이 강제로 끌고 갔다’는 증언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앞서의 공판에서 말씀 드렸던 것처럼, 실제 군인의 강제연행 가능성도 저는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

강제연행이 아니라도 소녀와 여성들의 위안소 생활은 충분히 참혹합니다.

그럼에도 오랜 세월 지원단체는 모집정황의 국민과 여론, 그리고 국제사회를 향해 강제연행이라고만 주장해 왔고, 초기의 잘못된 인식을 수정하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책은 오로지, 그것을 전하고 ‘다시 논의’하기를 바랬던 책일 뿐입니다.

3) 군속으로서의 위안부

4회 공판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지정 위안소에 있던 위안부들은 ‘군속’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런 정황을 보여 주는 자료는 이 밖에도 존재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위안부들이 애국의 틀 안에 있었다고 한 저의 책이 허위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런데, 저 말고도, 이런 정황에 대해 간파하고 있던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저는 최근에 알았습니다.

예를 들면, ‘위안부를 간호노동에 종사시키는 일은 빈번히 일어난 일’이었다면서,이들이 ‘문서에 등재’된 이유를 ‘간호부일을 하면 정식으로 유수(부재)명부에 기록하여 군속대우를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제7방면 군 수뇌부 판단의 결과’라면서, ‘유수명부에 등재하였다는 것은’ ‘원호와 관련된 각종조치도 함께 받을 수 있어서’이고, ‘일본제국의 국민으로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있다’고, 앞서의 정부연구용역보고서는(〈인도네시아 동원 여성명부에 관한 조사〉, 2009) 말합니다. ‘식민지여성들을 여전히 일본제국의 한 단위로 인식하고 현지에 있던 일본인 여성들을 편입한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인 여성을 편입하였다라고 보여지는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의 공판에서 제출한 것처럼, 실제로 일본 국회에서 위안부를 원호(지원)대상으로 하기 위한 논의가 있었던 것은, 이들의 추정이 옳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증거자료 44)

또, 한 일본군인이 쓴 책은, 중국에 위안부가 8만명 있었다고 들었다면서 ‘현지사인 오석경씨가 앉아 있고 그 오른 쪽에 내가 있고 10명의 위안부에 둘러싸여 있는데 여성들은 기모노를 입고 있지만 전부 조선인'(長嶺秀雄〈戦場〉, 私家版, 昭和62年, 94쪽)인 사진에 대해 설명하고 나서, 필리핀 세부도에서 ‘위안부 약 100명이 특수간호부의 이름으로 군의 야전병원과 행동을 같이 했으며 우리 제1사단에 배속되어 있었’다면서, 미군에게 포위되었을 때도 ‘부대가 진지 안을 우왕좌왕할때 이 간호부 부대는 의연한 태도로 동요되지 않았다(98쪽)’고 말합니다.

제4회공판에서 제출한, 자신이 군속이라고 말한 문옥주할머니의 수기에는 위안부들이 좋아하는 사람을 ‘스짱’이라고 했다면서, 문할머니가 ‘우리들은 대체로 스짱이 한 사람씩 있었다'(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87쪽)고 했다는 기술이 나옵니다. 이 역시, 바로 이러한 관계속에서 가능했던 것입니다.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이용수 할머니 역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저에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추가자료)

그럼에도 이러한 정황을 알지 못한 채, 원고측과 검찰과 일부학자들은, 저의 책을 두고 그저 ‘예외의 일반화’라면서 비난해 왔던 것입니다.

4) 소설 사용에 대해

서울대 김윤식 교수가 위안부 관련 한국소설에 언급하며 소설을 증언이라 했다는 말씀을 앞서의 공판에서 이미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에 의한 교과서 검정은 위헌이라고 제소했던 이른바 교과서 재판사건으로 유명한 이에나가 사부로 교수도, 그의 저서 <태평양전쟁>에서 제가 사용한 다무라 타이치로의 작품 <메뚜기> 등에 언급하면서 소설도 역사적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추가참고자료) 그럼에도 소설을 일부 사용했다는 이유로, 저의 책이 ‘허위’라고 말했던 검찰의 발언은, 문학에 대한 무지와 함께 경박성이 시킨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돌아오지 못한 위안부를 위해서

재판장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 역시 오래전부터 위안부문제에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위안부〉에 구체적으로 이름을 들어 기술한 것은 딱 한 분입니다. 피를 토하듯 한 유서를 써서 인터넷에 올려 두었던 심미자 할머니입니다. 그것도 그 분의 위안부체험이 아니라 지원단체 비판이었고, 아무도 이분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문맥에서 언급했습니다.

따라서, 설사 저의 책이 위안부할머니를 비난한 책이었다 해도, 저의 책을 읽으면서 구체적으로 누군가를 떠올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안부 체험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 저의 책의 주요논지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많은 분들이 가명을 쓰고 계시니, 설사 어떤 분을 특정하고 싶었다 해도 가능한 구조가 아닙니다.

재판장님.
위안부의 전쟁터 생활과 귀환 혹은 미귀환에 대해서 쓴 제 1 장 마지막에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아마도 지금 우리가 귀기울여야 하는것은 누구보다도 이들이 아닐까. 전쟁터의 최전선에서 일본군과 마지막까지 함께 하다 생명을 잃은 이들-말없는 그녀들의 목소리에.

일본이 사죄해야 하는 대상도 어쩌면 누구보다도 먼저 이들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언어와 이름을 잃은 채로, 성과 생명을 ‘국가를 위해’바쳐야 했던 조선의 여성들, ‘제국의 위안부’들에게. (〈제국의 위안부〉 104쪽)

제가 책을 쓰면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누구보다도 전쟁터에서 죽어간 위안부들입니다. 당시에도 기록되지 않았고, 죽어서도 다른 군속처럼 유족들이 지원금을 받는 일도 없었던, 그런 위안부들입니다. 또, 차별받을까 무서워 돌아오지 못했던 위안부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의 책이, 살아 돌아온 생존 할머니들을 특정한 책이 된다는 것일까요. 제가 이 책에서 생각해 본 것은, 일본인여성을 포함해, 국가의 무모한 지배욕과 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모든 개인이었습니다.

8.’할머니의 아픔’은 누가 만들었는가

1) 당사자가 배제된 대리고발

재판장님,
그런데 고발과 기소는 부당하다는 이들에게 원고 측 대리인과 검찰은 말합니다. 할머니가 아파하셨다, ‘할머니가 ‘아픔’을 느끼는 한 고발과 기소는 당연하다고. 학자들조차 일부는 그렇게 말합니다. 최근에도 원고 측 대리인은 제가 ‘그럴싸한 언변’으로 ‘할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들께 ‘대못’을 박은 건 도대체 누구일까요?

저의 책을 왜곡해 전달해서 할머니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이어서 분노하게 만든 건 과연 누구일까요.

저는 고발 직후에 두 분의 할머니와 통화한 적이 있습니다. 그중 한 분은 나눔의 집에 계셨던 분이고 원고로 이름이 올라가 있던 분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나눔의 집 할머니 중 일부 분들과 가깝게 교류했고, 그중 한 분인 배춘희 할머니와는 반년에 걸쳐 전화통화도 자주 했습니다. 만난 횟수보다 전화횟수가 많았던 이유는 나눔의 집에서 저를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 역시 그래서 만남을 조심스러워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웠던 배 할머니는 고발 일주일 전에 돌아가시고 말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폭풍우와도 같았던 고발의 충격이 좀 가신 후에, 나눔의 집에 거주하시는 유희남 할머니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분 역시, 저와 대화를 나누어 왔고 제가 주최하는 심포지엄에도 나올 예정이었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여쭈었더니 할머니는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눈이) 안 보이잖아, 그래서 (직원이)와서 읽어 주었는데 강제동원이 아니고 뭐야.. 그냥 갔다던가.. 하여간, 그렇게 읽어 줬는데도, 들었는데도 잊어 버렸네.’ ‘책에다가 뭐하러 그런 말을 썼어’라고요. (참고자료 156)

이 분은 눈이 불편하셔서 저의 얼굴조차 또렷이 안 보인다고 말씀하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할머니 자신이 읽은 것이 아니라, 할머니들을 모아 놓고 직원이 읽어 주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또한 나눔의집 안신권 소장은 올해 1월 일본에서의 강연에서, 할머니들은 고령으로 책을 읽을 수 없기에 일부분을 발췌해서 반복해서 들려드렸다고 했습니다. 즉 할머니는 전체를 읽으신 것이 아니라 지원단체에 의해 앞뒤 문맥이 잘린, 편집된 문장만을 ‘들었’던 것입니다.

듣는 행위가 책에 있어 간접적인 행위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자세히 읽어도 독자의 숫자만큼 독해가 가능한 것이 한 권의 책입니다. 저 때문에 아파하셨다는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아픔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니라, 나눔의 집 고문변호사 주도로 이루어진 한양대 로스쿨 학생들의 거친 독해와 그것을 그대로 전달한 나눔의 집 관계자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유할머니께 그런 의도로 쓴 책이 아니라고 하자, ‘의도는 그렇지만은……’이라고 말끝을 흐리셨습니다. 그건, 유할머니가 제가 나쁜 의도로 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흘 뒤, 이번에는 혼자 사시는 어떤 분께서 저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이분은 유희남 할머니께 들었다면서 노여워하셨고, 그런 책이 아니라는 설명을 드리려 하자, ‘서울대 교수 다섯 명이 당신책을 나쁘다고 했다’는 말을 반복하시면서 들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참고자료 157)

재판장님,
저에 대한 고발에서 할머니들은 당사자가 아닙니다.
이미 보신 것처럼, 책 읽기는 물론, 고발서류작성, 논리구성, 저를 고발한 모든 주체는 주변인들입니다. 고발장에 찍혀 있는 할머니들의 도장, 똑같은 모양의 도장들을 살펴 봐 주시기 바랍니다.(링크) 저는, 할머니들 중에 2014년 6월, 고발 이전에 저의 책에 대해 알고 있던 분은 안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배춘희 할머니조차, 돌아가실 때까지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저와의 친밀한 교류를 몰랐기 때문일 텐데, 나눔의 집 소장은 배할머니도 생존해 계셨다면 고발에 참여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와의 대화록을 보시면, 그런 징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할머니들은 검찰이 진행한 조정과정도 모르고 계셨습니다. 저에게 일본어판을 절판하라는 요구를 포함한 조정안이 왔을 때,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제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 형사고발에서 원고로 이름이 올라 있던 두 분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고발 후 1년이나 지난 가을 시점이었는데, 그중 한 분인 유희남 할머니는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제 얘기를 들으시고, 조정문제는 안신권 소장에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한 분, 이용수 할머니는 자신이 원고로 이름이 올라 있는 것조차 모르고 계셨습니다.

나눔의 집 안신권소장은 최근에 제출한 탄원서에서도 변함없는 거짓말과 엉터리 기사로 저를 비난했지만, 할머니들과의 통화내용과 영상을 확인하시면 왜 그가 거짓말까지 해 가며 저를 비난하는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늦었지만, 고발전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야 쓰기 시작한 저의 글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역사와 마주하는 방식〉) 지금도 돌아다니는 ’20억 회유설’이 유희남 할머니의 위증이라는 것도 배할머니와의 통화기록을 보시면 아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신권 소장이 반복적으로 비난해 온, 사전 허락 없이 할머니들을 찾아오고 찍으려 했다는 NHK문제 역시, 그의 거짓말임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안소장과 나누었던 문자를 제출할 수 있습니다. 배할머니는 일본인들과의 대화를 기다리셨던 분이고, 그 기자들은 해결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입니다.

2) 피를 토하는 목소리

재판장님, 본 재판과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길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법’이란 정의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저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할머니들을 위해서입니다. 여전히 할머니들 일부는 세상이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를 갖고 있고, 그럼에도 세상에 내보내지 못하는 정황이기 때문입니다.

배춘희 할머니와의 대화에서 저는 그것을 여실히 알았습니다.

배할머니는, 자신의 경험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고, 저와 대화할 때도 누가 엿들을까 조심하곤 했습니다.

동시에, 지원단체의 운동방식과 돌봄방식에 비판적이면서도 그런 생각을 마음대로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반은 거짓말'(참고자료 77, 16쪽)이라고 했고, 할머니들의 강연료가 지원단체의 건물에 사용되는 일에 불만이면서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저를 만나지 못하게 하느라 상태가 안 좋으신데도 병원에서 나눔의 집으로 강제로 이송당하신 후,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는 피를 토하듯 그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셨습니다.

‘사람은 살려놓고 봐야 되잖아’, ‘ 어떤 사람이든 살려놓고 봐야되잖아..’라고.

그 배경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대화록을 확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언론과 검찰이 해야 할 일은 바로 그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배할머니는, ‘적은 100만 나는 혼자’라고 생각하며 고독한 생활 끝에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사실 이미 이와 비슷하게 지원단체를 비난한 분이 일찍이 계셨습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우연히 듣게 된 것이 제가 〈화해를 위헤서〉에서 위안부론을 쓰게 된 계기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2004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2년이 지나도록 정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위안부할머니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마음으로부터의 목소리를 우리는 과연 들었을까요.

더 늦기 전에, 생존해 계신 분만이라도, 진짜 목소리를 들어 드릴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재판장님,
원고측 대리인은 최근 제출한 서류에서 ‘박유하의 해결책이 어떤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말에, 이 고발과 기소의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원고 측은, 이미 고발장에 뚜렷이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저 ‘다른 목소리’의 확산을 막고자 했던 것이고, 이후의 공방을 통해서도 그들이 구애하는 것은 오로지 이 부분입니다. 일본의 ‘법적책임’을 반복적으로 주장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제가 만난 할머니들 대부분은, 왜 해결이 지연되고 있는지 모르셨습니다. 그저 일본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라고만 알고 계십니다.

물론 그건 관계자들이 할머니들께 정보를 전하지 않고, 당사자를 배제한 채 자신들이 모든 것을 주관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방식을 비판했을 뿐, 그들의 활동 전부를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저를, 그들은 국가의 힘을 빌려 억압하고, 20년 이상 정보를 공유해 그들과 똑같이 생각하게 된 언론과 국민을 동원해 저에게 돌을 던지도록 만들었습니다.

3)공격을 만드는 의식

재판장님,
이들의 태도는, 여러가지가 복잡하게 얽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중 하나만 말씀 드리자면, 검사와 대리인의 공격, 위안부는 자긍심을 느끼면 안된다고 억압하는 생각은, 여성차별, 매춘차별적인 생각이 만든 것입니다.

그건, 원고대리인이 ‘피해자 목소리’라면서 그의 서면에서 반복해 기술하는 표현들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그는 끊임없이 일본인 위안부에 대해 ‘창녀’, ‘몸을 팔았다.’, ‘갈봇집’ 등등의 단어를 인용·사용합니다. 그러면서 제가 자발적인 매춘부인 일본인 위안부를, 강제로, 혹은 속아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와 동일시했다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그의 이런 말이야 말로 일본인 위안부들이 명예훼손을 걸 수 있는 발언은 아닐까요? 그의 단어 사용에는 명백히 매춘부에 대한 차별이 있고, 명예훼손의 조건이라는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는’ 인식이 존재합니다.

이른바 ‘여공’이나 ‘매춘녀’들이, 죽지 못해 사는 고통 속에서 한 푼, 두 푼 모아 고향에 보낸 돈으로 상급학교에 가고 사업할 수 있었던 오빠가, 여동생의 연애에 간섭하고 윽박지르고 때로 폭력과 살인을 마다 하지 않았던 심성들이, 바로 오랫동안 우리사회에서 위안부의 ‘다른’ 목소리를 죽여 왔습니다. 그런 생각을 내면화한 여성들 또한, 우리사회에는 적지 않습니다.

그동안 저를 죄인취급하며 윽박질러온 원고대리인과 검사, 그리고 그들에게 그런 생각을 불어 넣은 운동가와 일부학자들 역시, 그러한 인식의 주인공들입니다. 위안부를 억압하고, 때로 자기존재에 아무런 의미를 느낄 수 없도록 차별하고 소외시켜, 자살에 몰아넣기도 했던 생각의 주범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저를 억압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런 존재들이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재판장님,
자신들의 고발과 기소로 인해, 또 아무런 확인 없이 보도된 기사들로 인해, 제가 지금도 일본에서 돈을 받아 위안부를 회유하려 한 매국노이고, 그래서 머플러로 목을 졸라 죽이고 싶어지는 인물로서 손가락질 당하고 있는데도, 저에 대한 비난을 멈추라고 말하는 이들이 이들 중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는 것은 바로 그래서입니다.

고발에 이르는 또 하나의 배경은,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일본지식인들의 생각의 차이가 있습니다.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겠지만, 참고자료와 홈페이지에 올린 고발까지의 경과를 봐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자료 46)

그런데 지식인 간의 생각 차이의 싸움이 법정에서 이루어져야 합니까? 심지어 그들 자신은 나타나지 않는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대리해서 이루어져야 합니까?

4) 공격의 목적

그런데 그들이 이토록 일관되게 ‘지원자와 강제연행’의 차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어떻게 갔든 모두 비참한 정황이었다는 것을 그들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 터임에도 차이를 주장하며 저를 비난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건, ‘강제연행’이라고 해야만 그들이 초기에 잘못 알고 요구해 왔던 ‘법적책임’을 계속해서 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인식에 오류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을 덮기 위해서입니다.

재판장님,
이들은, 국민과 언론이 부여한 시민권력, 학계와 언론권력, 그리고 유엔과 세계여성과 시민연대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지원단체 대표 중 한사람은, 유수학회 전 회장이자 유수 언론사 전 주필의 사모님이자, 우연재 할머니가 언급했던 ‘서울대 교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뒤에는 오랜 세월 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끈끈한 유대관계뿐 아니라, 장관과 국회의원을 배출한 인맥이 있습니다. 나아가 정부, 기업과, 국민이 모아준 자금이 있으며, 무엇보다 일할 인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로지 혼자, 이들이 집단으로 내놓는 모든 공격 글들을 분석하고 반론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그 작업 이상으로 힘들었던 것은, 그 안에 담긴 왜곡과 적대와 조롱이었습니다.

이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생각을 지키기 위해서, 그동안 국민들을 향해 저지른 수많은 모순들을 그저 덮기 위해서, 운동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그동안 지켜온 권력과 명예를 흠결 없이 유지하기 위해서, 저를 매국노, 친일파로 몰아 배척해 왔습니다. 대중들의 오해와 지나친 비난을 변함 없이 모른 척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로지 이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 아무런 근거 없이 저의 책이 위안부를 ‘왜곡’하기 위해 자료들을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철저하게’, ‘반복사용하였다’면서 저에게 ‘악랄’ ‘잔인’ ‘이기적’ ‘악의적’이라는 단어마저 서슴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와 표현이 전형적인 마녀사냥의 수법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아실 것입니다.

재판장님,
그동안 수많은 자료와 설명으로 저의 책이 허위가 아니라고 변론해 왔지만, 정말은 이 문제는 책문제조차 아닙니다.

제가 고발당하게 된 것은, 위안부 할머니들과 제가 가까워지는 것, 그에 따라 나눔의 집의 문제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눔의집 안신권 소장과 그에 동조한 나눔의 집고문 변호사, 그리고 위안부문제에 대해 잘 모르면서 교수가 지시하는 대로 엉터리 독해를 바탕으로 책을 100군데 넘게 난도질한 리포트를 작성한 한양대 로스쿨생들의, 비지성적인 행위이자, 모함이고 음해입니다.

재판장님,
‘다른’ 목소리에 대한 폭력적인 억압과 그에 따른 끔찍한 고통은 저 하나로 족합니다.

대리인은 저를 비난하면서 저를 방치하면 ‘제2, 제3의 박유하’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똑같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박유하를, 제2 제3의 고통받는 박유하를, 더 이상은 만들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엄하게 처벌받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면’ 안 된다고 재판부를 협박마저 합니다. 이들이 저를 처벌해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잘 이해해 주셨을 줄 믿습니다.

재판장님,
이들의 공격과 고발로 인해 저의 학자 생활 25년의 명예가 한순간에 깨졌고 이 2년 반 동안 고통받아 왔습니다.

저는 이들의 거짓말과 왜곡을 범죄적 수준이라 생각했지만, 가처분과 손해배상재판부는 그러한 이들의 선동을 검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한국 법정을 세계의 웃음거리로 만들었습니다.

아주 극소수만이 저의 책을 올바로 받아들여 주었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견뎌 왔습니다. 고발 사태로 입은 명예훼손과 상처는 설사 이 재판에서 제가 승소한다고 해도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회적가치가 저하’되는 것이 명예훼손의 정의라고 들었습니다.

부디 명철한 판단을 내리시어 저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고, 대한민국에 정의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2016년 12월20일

박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