渦中日記 2016/1/7

한숨 돌린 것도 잠시. 아직 여유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어제는 이번 워싱턴 행이 “일본의 돈”이라는 악의적인 기사를 봤다. 이번 회의는 윌슨센터와 와세다대학의 공동 프로젝트인 “동아시아에서의 과도기 정의 수립”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순수한 학문적 회의다.
갑자기 “한일합의”가 이루어졌으니 당연히 그 문제도 언급되겠지만, 그 얘기를 중심적으로 논의하는 자리도 아니다. 전에도 썼지만, 이 회의는 반년도 더 이전에 계획된 회의다.

한일합의에 대한 의견을 쓰라고 종용받기도 했는데, 내 의견은 분명하다. 갑작스런 합의는 문제가 있다. 국민적납득과 합의가 가능하도록 논점을 공론화하고 국민이 공유하는 절차와 과정이 필요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대립되는 학자들이 접점을 찾는, 당사자도 포함하는 “협의체”를 만들라고 책을 낼 때부터 제안했었다.
그러니 이런 합의에 내가 무조건 찬성하거나 웃을 거라고(나의 힘이 그렇게 클 리도 없다) 생각하는건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어렵게 결정된 것이니 순서는 거꾸로 되었지만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일본지원단체가 이 합의를 “운동의 성과”로 받아들인 식의 긍정마인드를 나는 평가한다.

정부가 내내 지원단체와 논의했다고 하는 걸 보면, 마지막에 배제된 모양이다. 지금의 격렬한 반발은 거기서 온 듯 하다.
정부가 배제한 건 위안부할머니일까. 혹은 지원단체의 주장이었을까. 자세한 내막은 언젠가 밝혀지리라고 믿는다.

분명한 건, “또 다른 백억원 모금”의 발상은 이미 1997년에 정대협이 시도했던 일이라는 것.
일본국민의 “속죄금”과 “의료복지비”를 정대협이 거부했고, 받은 일곱 분 할머니들을 정대협이 비난하며 모금을 시작했고, 초라한 모금실적에 한국정부가 나서서 할머니들에게 같은 금액의 지원금을 지급했었다. 그건 한편으로는 “할머니들은 우리가 돌본다”는 발상이었지만 일본에 대한 요구는 요구대로 이어졌고 그리고 15년이 지났다.

그 사이, 운동은 세계적으로 성공했지만 일본인들의 마음은 더 닫히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니 최소한 말할 수 있는 건, 다시 15년을 똑같은 과정을 반복할 각오,그리고 시작하기전에 “모든”위안부할머니께 그런 선택에 대한 수락을 받아야 할 거라는 점이다.
엄마부대나 어버이연합도 문제지만, 그들이 문제라고 해서 운동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오만일 수 밖에 없다.

필요 있어 다시 읽었더니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쓰인 이 글이 가슴에 더 와 닿아, 일본 학자의 글을 부분적으로 발췌해 올려둔다. 이들은 진보학자들이고 자신들의 운동을 반성하는 차원에서의 글이다.
전에 한번 전문을 올렸었지만 특히 중요한 부분만 몇 번에 나눠 올리려고 한다. 위안부문제에 관심갖는 사람은 꼭 읽어야할 논문이 될 것이다. 나의 의견보다 사태파악에 훨씬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전문은 곧 어떤 잡지에 게재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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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문제를 둘러싸고 몇 가지 논쟁적인 대립점이 표출되었다. 예를 들면 ‘위안부’ 논쟁의 존재방식을 둘러싸고 메타 차원에서 재귀적(再歸的)인 물음을 던진 우에노 치즈코(上野 千鶴子 『내셔널리즘과 젠더』 세이도샤, 1998년)와 박유하(『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사토히사시 번역, 헤이본샤, 2006년)를 둘러싸고 문제의 방법론적 심화와 자기성찰의 계기가 만들어진 측면도 있었으나, 때로는 이에 대해 운동의 분열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하는 주장도 나왔다. 박유하에 대한 비판은 현재의 『제국의 위안부―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아사히신문출판, 2014년)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그동안 이토록 비판이 분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자들 사이에서 박유하의 텍스트는 제대로 읽혀지지 않았다. 야마시타 영애(山下英愛)도 이 시기에 운동의 존재방식에 대한 자성적인 물음과 문제 제기를 한 사람 중의 하나인데, 그것은 박유하와 마찬가지로 정대협 측에도 문제의 단순화와 일면화(一面化)가 있는 게 아니냐는 자문자답이었다(야마시타 영애『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위안부’ 문제에 대한 또 하나의 시각』아카시쇼텐, 2008년). 그러나 분열과 분단 속에서 그러한 문제 제기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문제의 국면이 다양화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위안부’ 논쟁은 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 제기된 것과 같은 보편적인 문제 보다는 민족적 담론으로 회귀하는 듯한 경향이 강해졌으며, 게다가 본래 이 문제와 모순될 수 있는 국제적인 맥락이 덧붙여지게 된다. 예를 들면 정대협은 국제적인 반향을 만들어 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한편으로 문제를 국가 단위로 잘라 놓는 것과 같이 단순화해 버리고 말았다. 미국 하원에서는 정대협의 주장을 지지하는 형태로 의회 결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위안부’에 대한 이미지가 세밀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한국에서의 ―‘소녀상’으로 상징되는― 피해자상을 그대로 수용하는 형태로 결의가 이루어졌고 문제를 심화시키는 데 성공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이‘소녀상’으로 상징되는 ‘위안부’ 이미지에 대한 비판과 공격은 역사수정주의자들로부터도 나오고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취급해야할 문제이다. 그러나 어떤 ‘소녀상’을 사용하여 피해자의 일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버리는 것, 그리고 이것이 지니는 복잡한 정치적 측면(politics)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젠더를 의식하는 사람이라면 간과해서는 안 되는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에노 치즈코가 『내셔널리즘과 젠더』에서 ‘모델 피해자론’이라는 형태로 이미 지적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가 조명한 일본의 전후(戦後)
이와사키 미노루(岩崎稔)・오사 시즈에(長 志珠絵)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62738360419742

渦中日記 2016/1/3

이번 주말에 워싱턴에 가기로 되어 있다. 반 년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이다. 동북아역사화해에 관심이 많은, 한국의 초청으로 한국의 이런저런 회의에도 자주 참석하는 일본인교수와 미국교수들이 기획한 회의다. 다른 한국인 교수도 참여한다. 위안부문제에서 지원단체 입장에 가까운 발언을 해 왔던 미국인 교수도 함께 이야기한다. 내가 메인인 것도 아니다.

이 모임이 기사화 되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런데 정확하게 쓴 건 경향신문 뿐이었다.
연합뉴스는 “일본 정부와 재미일본인 커뮤니티”의 초청인 것처럼 쓰고 있다.미주 중앙일보 역시 마찬가지다. 명확한 “허위사실유포”에 해당한다.

나에 대한 개인의 비방은 너무나 많다. 따라서 그 안의 왜곡이나 허위를 일일이 지적할 수도 없다. 학자들조차 예외가 아니다.
그런 이들을 모욕죄나 허위사실유포죄로 고발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이들도 많다. 트위터에서 반복적으로 “박유하를 파면하라!”면서 자발적인 위안부라 했다”는 고발직후 뉴스를 반복적으로 내보내고 있는 이도 있다고 들었다.

내가 누군가를 고발한다면 첫번째 대상은 나눔의집 관계자들이다. 허위사실유포를 시작한 건 그들이었다. 그 외에도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대상은 한두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이들을, 1년반동안 나는, 그냥 견뎌 왔다.

하다 못해 언론이라도 바로 서 주기를 바란다. 개인이 아닌 집단이니 집단지성의 힘을 발휘해주기를 바라고 싶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대응하려 했다면 나는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 나에 대한 숙청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면 자체적으로 수정해주기를 바란다. (고발직후 보도가 언론중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수정 혹은 삭제된 연합뉴스, 한국일보, 한겨레, 조선일보 기사를 참조해 주기 바란다)

내가 꼿꼿해서 얄밉다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그의 심리가 서글프다.
나는 내가 지쳐 쓰러지거나 퇴출당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할 뿐이다. 또, 비열한 미움은 때로 나를 강하게 만든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3909976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60008537359391

渦中日記 2015/11/18-2

광고하는 김에 하나 더.

일본에서 받은 상에 대해 한국언론은 보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딱 한군데 보도해 준 곳이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분명, 포커스뉴스의 신윤석 국장님께서 마음 써 주셨을 것 같다.

실은 일본에서 주는 상을 받아야 할 지 고민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지난주 시상식에 불참하면서 보냈던 메시지에 쓴 것처럼, 수상하는 일은 이 책을 지지하고 응원해 준 여러 일본인들의 “마음”을 받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출판사와 편집자를 포함한 그 마음을 받아들고 연대하는 일이, 한일관계개선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 생각한 것이 상을 받기로 결정한 가장 큰 이유였다. 그들은 대부분 일본의 문제를 잘 인식하는 이들이었으니까.
한 언론인은 내 책이 “자본과 군대의 이동이 여성의 상품화를 강화시키”는 구조를 지적한 책이라고 정확히 읽어내면서 “일본을 향해서는 어느나라나 다 한 일이라는 식으로 무책임하게 말하지 말고, 제국적팽창을 넘어서는 사상을 만들어내라고 말하”는 책이라고 정확히 칼럼에 쓰기도 했다.

아무튼, 일본쪽도 그렇지만 특히 페북에서 너무 많은 페북친구들의 옹호와 격려와 도움과 위안을 받았다.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두고두고 갚을 수 있을텐데.

http://m.focus.kr/view.php?key=2015102200172511519&share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31824696844442

渦中日記 2015/10/22

그저께저녁, 감기로 골골거리고 있는데 와세다대학에서 연락이 왔었다. 와세다에서 주관하는 “이시바시탄잔 기념 저널리즘 대상”수상자로 결정되었다고.

얼마전에 쓴 것처럼 지난번 마이니치신문사의 수상소식에 대해서는 좀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이번 소식은 순수하게 기쁜 마음이 들었다. 소감을 써 보내라기에 그 이유를 썼다.

실은 마이니치의 경우 수상식에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밝고 화려한 장소에 나가 웃는 얼굴을 할 기분은 아직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지인의 의견에 힘을 얻었고 생각을 바꾸었다. 나는 결코 위안부할머니를 모욕하지 않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한점 부끄럼이 없다. 그래서 수상에 대해서도 당당해지기로 했다. 할머니들도 언젠가는 오해를 풀어 주시리라 믿는다. 수상 덕분에 이 책을 읽는 일본인들이 한사람이라도 더 늘어난다면 위안부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되면 되었지 결코 방해가 되는 일은 아니라는 확신에도 변함이 없다.

감기가 나으면 그동안 따뜻한 응원을 보내주셨던 페친여러분들과의 만남도 가져야겠습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여러분들께 감사 전하면서 보고드립니다.

<소감>

“대학원에서 배웠던 와세다대학이 주관하는, 그것도 이시바시탄잔을 기념하는 상을 수상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시바시탄잔은, 반전, 반군대, 식민지 포기, 소일본 주의를 지향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국가/제국의 욕망에 개인이 어떤식으로 동원되고 착취당하는지를 생각해 본 책이니, 의도하지 않았으나 이시바시의 사상과 접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경계를 넘어, 이시바시와 같은 사상을 계승하고 공유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작금의 동아시아가 불안정한 만큼 간절히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집필에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大学院で学んだ早稲田大学からの、しかも石橋湛山の名を冠する賞を受賞することになってとても嬉しく思います。石橋湛山は、反戦、反軍、植民地放棄、小日本主義を目指しました。「帝国の慰安婦」は、国家/帝国の欲望に個人がどのように動員され、搾取されるのかを考えてみた本ですから、石橋湛山の思想に図らずも接しているのかもしれません。境界を越えて、石橋のような思想を受け継ぎ共有することが本当に必要と、現在の東アジアが不安定なだけに切に思います。そうした賞をいただいたことは、今後の仕事の上でも大きな励みになります。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17801724913406

渦中日記 2015/9/6

한 달 전에 나온 책을 이제야 읽을 수 있었다. 꽤 오래 전부터 아시아태평양전쟁에 관해 학계의 첨단을 가는 학자들이 출간해 온 시리즈중의 한권. 이 책에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이 4반세기의 연구와 운동의 궤적에 대해 정리한 논문이 실려 있었다.

일본역사학계의 주류는 아직 진보학자들인데, 이 글은 자신들을 향한 내부비판적 글이기도 했다.
시기별로 오단계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이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야 할 문제로 국민기금, 강제연행기사 취소후의 아사히신문에 대한 공격과 함께 나의 문제제기까지 포함한 세가지를 들고 있었다.

작년 11월에 일본어판을 낸 이후 예상밖으로 호평을 받았지만 위안부문제전체 흐름 속에서 나의 문제제기를 분석하고 또 정확히 읽어낸 글은 이 논문이 처음이다. 저자는 현대사상학자와 일본역사학자.
10개월만에,아니 한국어판을 내고 2년만에, 나의 문제제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온전히 받아들여준 학자들의 글을 만나 기쁘다.

일부를 우선 번역해 둔다. 이 책을 편집한 역사학자는 내게 “앞으로 위안부문제를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가 이 논문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겁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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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기금을 둘러싼 시도가 <적>의 공격으로 단순화된 방식으로 이해된 것은 이 시기의 하나의 불행이었다.(234)

비판자들 안에서 박유하의 텍스트는 제대로 읽혀오지 않았다.(중략)

어떤 소녀상을 사용해 피해자의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버리는 일이 갖는 복잡한 정치학에 관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젠더문제를 의식하는 사람이라면 간과해선 안되는 문제일 터였다.(237)

(90년대초에는)피해자의 아픔에 반응하는 자세나 내용도 결코 아사히신문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예를들면 산케이신문의 오사카판이나 요미우리신문에서도…(238)

산케이신문의 1993/8/31 기사는 <인권고찰>특집에서 <인생을 걸고 실명재판>이라는 제목으로 김학순할머니 의 증언을 게재했었다(239)

1991년 이후 언론이 일본군성폭력피해자문제를 얼마나 열심히 사회에 전달하려 했었는지는 TV보도나 다큐멘타리까지 포함하면 한층 더 명확해질 것이다.(239)

위안부문제가 이렇게까지 혼돈에 빠져버린 것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일본국내에 존재하는 역사수정주의적인 조류의 현실부정에 대해, 그것을 극복할 만큼의 여론형성도 정치적 결단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40)

박유하가 문제제기한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위안부 문제는 한일 역사인식의 정체에 대한 책임이 일본 정부와 역사수정주의적인 우파 정치가에게 있다는 점을 전제하면서도, 동시에 사태경직에 대한 책임의 일단이 정대협에게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박유하는 그러한 정대협의 문제가 불문에 붙여지고 오히려 권위가 주어진 것에는 일본에서의 지원운동의 자세에도 책임이 있다고 했다(244).

문제는 박유하의 논의에 그대로 찬동하는지 아닌지가 아니다. 비판의 논점을 변경하거나, 명확히 언어화하지 않고 박유하의 논지를 추측만으로 규정하고 는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방식에 있다.(244)

박유하의 문제제기는 식민지주의 피해자가 안고있는 집합적기억에 관한 어려운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244).

박유하의 지적이 옳다고 일본인인 본고의 저자가 말하는 이 배치자체가, 일찍이 식민지 지배를 받은 사람들한테는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정치적으로 문제를 움직여 나가는 일이 가능한 국면을 스스로 포기하는 정황으로 이어질 것이고, 대립은 점점 더 심화될 것이다.(246)

상대적으로 가까이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 시도나 주장을 운동을 분단하는 <적>으로서만 상정하고 그 주장과의 차별화나 결연한 거부자세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그것으로 안심을 얻는 내적회로가 (운동가와 연구자들에게)생긴다.(249)

….한국의 운동은 그러한 오해와 (문제의)왜소화를 한편으로는 인식하면서도 운동의 역동성속에서 그러한 정황을 바로잡거나 (문제를)심화시켜 나가는 일에는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25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189922024368043

渦中日記 2015/7/28

우연히도, 어제와 오늘, 일본의 마이니치 신문에서 나에 대해 언급한 기사가 났다. 어제 칼럼은 정우성대표님이 태그해 주셨으니 오늘기사만 우선 번역해서 올려 둔다.
마이니치신문은 얼마전부터 90년대에 위안부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실시했던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해 심층취재한 기사를 연재중이다. 그 공과(功罪)를 마주하려는 기사인데, 이렇게 말하는 기금에 대해 사죄의식이 없는 “꼼수”였다고 말한 것이 지원단체들이었다. 나는 책에서 그 부분을 비판했는데, 할머니들을 비판한 것처럼 왜곡유포된 것이 고발이라는 사태였다.

이달말로 닥친 형사고발조정과 다음달에 있는 민사재판에 관해 의논하기 위해 변호사사무실로 향하는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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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한 식민지책임

<전후일본의 반전사상이 국민들에게 뿌리내린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식민지지배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오지 않았던 거 아닐까요>

금년 6월, 동경의 호세이대학에서 열린 일본사회문학회 30주년대회에서 기조강연을 한 한국/세종대 박유하교수는 그렇게 물었다.

부부이야기로 읽히는 경우가 많은 나츠메소세키 <명암>에는 가난 때문에 조선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런 근대소설을 바탕으로 박교수는 제국이 국민의 이동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다는 점, 이주가 전쟁을 염두에 둔 국책이었다는 점,일본에서의 기민(棄民) 들이 식민자가 되어가는 모습을 지적했다.

그리고 위안부에 대해 언급하면서 <중요한 건 누구나가 기피하는 일을 가장 가난한 이들이 떠맡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강제인지 매춘인지 하는 논의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하고 말했다.
그의 전문인 일본근대문학에 그려진 식민지의문제는, 역사문제논의에도 반영되었다.

2006년,아시아여성기금이 연 국제심포지엄에 패널로 참석했던 박교수는, <한국의 민족주의가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더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고 발언했었다.
금년 5월에 서울에서 식민지에 대한 관심에 대해 다시 물었을 때도 <개인적으로 차별당한 경험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국인여성이라는 사실은 관계가 있습니다. 좋아해서 시작한 소세키연구가 진보지식인으로 불리는 것에도 의문을 가졌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문제의식을 저술한 것이 화제작 <제국의 위안부>이다. 교토의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금년 2월에 열린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워크샵에서는 왜 썼느지,무엇을 강조하고 싶었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햇다.
<위안부가 목소리를 낸 1991년, 누구나가 식민지지배문제로 이해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이후 위안부문제논의에서 제국의 문제가 빠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일본남성의 문제로만 축소되었습니다 >

<조선의 여성은 “애국”을 당했고 일본인이 되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 조선인 위안부상을 통해 식민지지배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 겁니다. 일본이외의 다른 제국국가의 문제도 환기시키고 싶었습니다>
서구일본학자들에 의한 금년 5월성명에는 <제국에 관련된 인종차별, 식민지주의와 전쟁,그리고 그것이 (중략)시민들에게 끼친 고통과 충분히 마주해 온 나라는 아직 어디도 없습니다> 라는 말이 이오진다. 그리고 일본정부에 대해 <과거의 식민지배와 전쟁당시 침략문제와 마주하라>고 요구했다.

박교수의 화해방안은 책임을 무화시킨다는 비판이 있다. 그리고 <제국의 위안부>한국판을 둘러싼 형사/민사쟁투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식민지책임은 과거의 제국 전체를 향한 난제가 아닐까.(기시도시미츠. 岸俊光)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164918446868401&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5/4/17

사람이나 언론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앞으로는 진보든 보수든, 나의 논지를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이들이면 기꺼이 소통할 생각이다. 나를 상처준 이들은 이른바 진보계열에 속하는 이들이지만 그들은 보수 이상으로 보수적이었다. 오로지 기존주장이나 입장을 “지키려”고만 했다는 점에서.

물론 그들 안에도 지혜롭고 유연한 이들은 당연히 있었고, 그동안 견뎌올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들 덕이다.

나에 대한 비판/지지여부를 나누는 건, 좌우이념이라기보다는, 대상에 대한 정보량과 사고의 유연성인 듯 하다. 그럼에도 가장 극심한 폭력이 좌우 양극단에서 나왔다는 건 지적 보수의 정서적 빈곤을 보여준 것일 터. 결정적인 순간에 폭력을 만드는 건 언제든, 이념도 이상도 아닌, 인간성이다.

그런 생각으로 응했던 첫번째 글이 나왔다. 일본어판도 영어판도 있는데 정작 한국어판은 못 만들었던 <제국의 위안부>요약이다. 나는 기지를 반대하기 때문에 보수적 입장에 있는 이들도 나를 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글이 좌우 상관없이 읽혀졌으면 좋겠다. 최소한의 공유가능한 부분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은 많기 때문에.

(제목은 내가 붙이지 않았다.ㅠ)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738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101385753221671

渦中日記 2015/1/21

비교문학자 니시마사히코 (西成彦)선생이, 2월에 교토에 있는 리츠메이칸대학에서 내 책을 대상으로 심포지엄을 연다. 마침 어제 일본신문에 다른 책과 함께 책에 대해 다루어준 우에노치즈코 선생도 토론자로 나서 주기로. 나리타류이치선생(成田龍一)이나 이와사키미노루선생(岩崎稔)등, 가까운 지인학자들도 동경에서 일부러 와 준다고 하니 깊은 논의가 가능할 것 같다.
전체 테마는 <한일경계를 넘어서–제국을 대하는 방식>. 최근에 <제국의 어둠>이라는 책을 낸 김항선생의 책도 같은 테마로 묶어 논의한다고 한다.

우에노선생은 9년 전에 쓴 책<화해를 위해서>일본판해설을 써 주었던 분이다. 그 때는 내 책이 <뜨거운 불 속의 밤을 줍는 행위>(일본어로는 이렇게 표현한다. 직역)이라 했는데, 이번엔 <불 속에 직접 뛰어 들었다>고 표현했다. 고발당한 건 그 결과일 수 있겠지만, 나로선 고발이후 비로소 나를 덮쳐오는 <뜨거운 불>을 만났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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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裕河さんの『帝国の慰安婦』日本語版(朝日新聞出版)が刊行されて3か月余りがたち、多くの読者がこの本を手に取り、さまざまな反応を見せ始めている。
戦後70年の年にもあたる今年、私たちは「帝国日本」への向き合いを新たな形で求められており、その点では、東アジアの私たちすべてが、この課題の前で平等だ。
「慰安婦問題」ひとつをとってみても、それは「帝国日本」が招き寄せた問題であった。日韓で平行線をたどっているかに見えるこの問題に対して「共通の視点」をさぐりあてるための意見交換の場としたい。

立命館大学・公開ワークショップ
《日韓の境界を越えて~帝国日本への対し方~》
2015年2月22日(日)14:00-17:30
〈「帝国の慰安婦」という問いの射程〉
場所:朱雀キャンパス2階203教室
司会:西成彦(立命館大学)
パネラー:朴裕河(世宗大学校)、平井和子(一橋大学)、森岡正博(大阪府立大学)、上野千鶴子(立命館大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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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お、同企画は、下記企画と対をなすものであり、合わせて皆様の来場・参加をお待ちしている。
《日韓の境界を越えて~帝国日本への対し方~》第1回「帝国の擬人法」
2015年2月12日(木)15:00-17:30
場所:衣笠キャンパス末川記念会館第3会議室
司会:西成彦(立命館大学)
パネラー:金杭(延世大学校)、 沈煕燦(立命館大学専門研究員)、原佑介(日本学術振興会特別研究員)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46280138732233&set=a.578003518893233.14637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4/11/3

<제국의 위안부>일본어판이 도착했다. 장정이 마음에 든다. 아마도 단순한 번역이었으면 재판이 끝날 때까지 나오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고발사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번역이 아니라 일본어로 다시 쓴 건 잘한 일이었다.

원래 이 책은 일본정부와 부정파들(한국에선 정부도 부정파와 똑같이 취급되지만)의 사고방식을 비판하기 위해 일본어로 쓰이기 시작한 책이었다. 그러다가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의 두번째 제안이, 지원단체를 의식한 청와대에 의해 거부되는 사태를 보면서, 한국어책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해 한국어로 이어 쓰기 시작했고 결국 한국어 책이 먼저 나오게 된 거였다.

돌고 돌아,이 책의 첫부분을 쓰기 시작할 무렵에서 3년이 흘렀다.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을 일본인들이 보게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다. 띠지에 쓰여 있는 것처럼, 이 책에 나는, 매춘부니 성노예니 하는 논란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이 문제는 식민지지배가 만든 문제이니 그에 대한 사죄를 담은 국회결의가 필요하다고 썼다.
지원단체와는 주장의 내용도 논리도 방법도 다르지만,더 많은 일본인들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였다. 이 책은 어떤 여행을 하게 될까.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990207631006151&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4/8/18

얼마전에 일본 아사히신문이 내놓은 위안부문제특집에 관한 전화인터뷰를, 일본의 한 월간지와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결방책에 대해 묻기에, 일본의 “국회결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그간의 지원자나 운동가가 말해온 것처럼 그렇게 해야 할 “법적의무”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국가에 의한 여성동원에 대한 “법적보호”를 방기한 근대국가시스템의 문제이니, 일본이 “주체적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1년 전에 한국에서 책을 낼 땐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 (생명의 헌납을 요구당한)남성에게는 보장되었던 “법의 보호”가, (성의 헌납을 요구당한 )여성에게는 보장되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된 금년 봄 이후다. 그리고, 아사히가 강조한 “구조적강제”에 불만이 있는 듯 했던 기자는 내 말에 공감하는 눈치였다.

<제국의 위안부>일본어판에서도 사실 나는 그 점을 강조했었다. 문제는 한국에서 소송사태가 나는 바람에 일본측 출판사가 출간을 미루고 있다는 점.
그러니 이번 소송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해결을 위한 또하나의 노력을, 지원자들과 할머니들자신이 막고 있다는 점이다..

본문: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41628459197402

渦中日記 8/10

비바람이 친다. 보통때 같으면 그 풍경에 그냥 자신을 내맡겼을텐데 오늘은 감상에 빠질 수도 없다. 광화문에서 단식투쟁할 이들의 곤혹스러움도 함께 떠오른다.

재판자료준비를 하면서 우울한 건, 책을 쓰면서 사용하지 않았던 자료들까지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점이다. 내가 쓴 얘기가 부정, 혹은 곡해당하니, 소송에서 지지 않기 위해서는 굳이 사용하고 싶지 않았던 자료까지 사용해야 한다. 그런 아이러니 앞에 놓이게 된 것이 많이 우울하다.

사진은, 위안부에게 의뢰받아 모르핀 외 군용약품을 반출하려다가 “영창20일”의 처분을 받았다는 자료. 1941년, 일본 육군군인/군속들의 <非行표>.
수많은 일탈행위들 속에서, 수많은 드라마를 본다.

본문: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936355716391343&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