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금요일> 편집위원 특별 대담: 박유하

<주간 금요일> 편집위원 특별 대담, 2016. 6. 17 (1092호) 37쪽~39쪽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세종대 교수) X 나카지마 다케시 (도쿄공업대학 교수, 본지 편집위원)

서발턴의 목소리는 전달되었나?

“이 책은 매우 날카로운 일본 제국주의 비판서입니다.” – 나카지마다케시

“’국가이야기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 박유하

한국의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저술한 <제국의 위안부>가 한일 학자들 사이에서 장기적인 논쟁을 부르고 있다. 전 ‘위안부’ 9명에 의한 명예훼손 형사 고소로 작년 11월에 박교수는 불구속 기소되었는데, 이에 미국과 일본의 학자들 54명이 항의성명을 냈다. 한편, 성명에 대한 반론도 일어났다. 성명에 참여한 나카지마 다케시본지편집위원의 요청으로 올해 2월 일본을 방문한 박교수와 대담을 했다.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싸고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카지마: 저는 <화해를 위해서>의 일본어판이 2006년에 나왔을 때, 선생을 알게 됐습니다. 그 후, <제국의 위안부>가 한국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일본어판이 나왔을 때 곧바로 읽어 봤습니다.

이 책의 중요한 틀의 배경에는 서발턴 연구가 제기한 문제가 존재합니다. 서발턴연구란 1980년대에 인도를 중심으로 나온 문제인데,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주체성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의 다원적인 주체성을 다루면서,  그녀들을 여러 고통스러운 정황 속으로 내몬 제국의 폭력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매우 날카로운 일본 제국주의 비판서입니다.

박: 저도 바로 그 문제를 생각했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라는 표현도 비판을 받는데, ‘제국에 동원되었다’라는 것이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  ‘협력을 강요당했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국의 일원으로서의 협력도 말했기 때문에) ‘어느 쪽이 중심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그런 질문을 만드는 것은, 기존에 존재해온 개념으로만 이해하려 하는  사고입니다. ‘위안부’라는 다면적인 주체를 한가지 모습으로 규정하는 일을 유보하고 애매한 상태로 놔 두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일로 느끼는 것은 그러한 사고때문이 아닐까요?

‘애국’은 과잉 적응의 결과

나카지마: 박유하선생이  쓰신 중요한 문제중 하나는 ‘위안부’를 알선한 조선인 업자 문제입니다. 그들은 여성을 데려가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생활이 있었습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본의 뜻에 따를 필요가 있었습니다. 한편, 일부 ‘위안부’들은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내몰리면서도 제국 육군을 지탱하고 있다는 긍지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과잉 적응입니다. 일본의 우파 쪽 사람들이 말하는, ‘거 봐라. 잘 지내고 있지 않았는가’라는 식의 주장과는 정반대 이야기지요. 그런데 잘못 이해되어 우파논의와 같은 레벨로 취급 받고 말았습니다.

저는 인류학을 공부한 후 역사를 연구했습니다만, 우파와 좌파의 담론 사이에서 모두가 잘라내버린 사람들이 아주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제가 <나카무라야의 보오스>를 쓰게 된 커다란 계기입니다. 보오스는 일본의 제국주의에 비판적이면서도 일본의 군사력을 사용하여 아시아, 인도를 해방시키는 수단으로 쓰자고 주장했습니다. 우파, 좌파 각개의 역사이야기만으로는 파악해 내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똑같은 문제가 한국에서 친일파로 불리는 사람들의 평가에도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이광수가 그렇습니다. 그는 그저 일본에 아부하지 않았고 일본에 대해 매우 엄중한 비판론자였습니다. 그러다가 30년대에 들어와서 바뀌었습니다.  ‘일군만민’ 등의 일본의 국체론을 전용해서  “황국신민은 천황폐하 아래에서 평등하다. ‘내선일체’라고 할 거면 평등하게 대해 달라”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반격을 하기 위해서 일본의 국체를 (자기 방식으로) 전용해 나갑니다. 이런 식의 주체성을 주의 깊게 읽어내는 작업이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 동시에,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라는 책이 한국에서 2013년에 출간되었는데, 이 관리인 남성은 ‘황국신민’이라고 할 만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책 후반에 나오는 1944년 설날일기에는 ‘천황의 위광을 온 천하에 떨쳐야 한다’, ‘황군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원했다’(321쪽)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는 1905년생이니 정확히 일본에 의한 병합시대를 산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내면에 ‘애국’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마음이 생겨난 정황은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특히 총력전 체제 이후에는 위안부도 그런 틀 안에서 동원되었다는 것을 제 책에서는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우파의 사고나 논의가 어떤 점에서 문제인지도 썼습니다.

우파에 대한 서포트작업이 아니다.

나카지마: ‘위안부’가 된 여성들과 병사의 이른바 의사(擬似)가족화라는 문제를 우파 사람들은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해석해 버립니다. 하지만 이런상황이 보여주는 슬픔만큼 가혹한 일은 없습니다.

<제국의 위안부>에 쓰여 있는 것은 고향에 가족을 두고 온 일본인 병사가 ‘위안부’에게 의사가족이 되기를 요구해 나가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전선에서 죽음의 공포와 싸우고 있습니다.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유일하게 약한 모습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상대가 ‘위안부’였습니다. ‘위안부’들은 그 슬픔과 고통을 받아주려고 합니다. 일부 병사는 ‘위안부’처럼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징병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병사의 행위는 ‘제국’에 의해 구성된 가해구조 바깥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박: 시기와 공간에 따라 다른 체험을 했으니,  한 사람의 ‘위안부’ 안에 복합적인 감정이 있다는 사실, 같은 시기와 공간 안에 있었어도 연령이나 일본어 능력 등에 따라 경험이나 감정이 달랐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 속에서 제가 쓰고 싶었던 것은 ‘국가 이야기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입니다. 진심에서건 표면적에서건, 인간은 국가 이야기에 자신을 아이덴티파이(동일화)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바람직한) ‘이야기’와 맞지 않는 체험이나 감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이 표면화됐을 때, 국가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은폐하거나 반대로 징벌하거나 합니다. 그런 일에 젠더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지요.

나카지마: 이를 두고 일본의 우파를 서포트하는 논의라고 말하거나, 일본에 대한 면죄론이라고 인식해 버리는 것은 정말로 말이 안 됩니다. 일본의 특공대에서 죽은 젊은이들이 있습니다만, 그들의 ‘이야기’는 우파가 일원화하고 있습니다. 국가를 위해, 천황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런 ‘이야기’와 부합하지 않는 특공대원은 많이 있습니다. 너무 싫어서 도망친 사람 등,,여러 주체성이 있지요. 특공대를 하나의 이야기로 환원하는 것은 주체의 다양성이나 복잡성을 말살시키는 일입니다. 똑같은 방식의 ‘이야기의 폭력’을 좌파가 행해서는 안 됩니다.

박: ‘위안부’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해 온 사람은 소수입니다. 하지만 언론이 위안부’ 문제에 강하게 공감하면서 국민을 개입시켜 논의가 두 쪽으로 갈려 있습니다. 이 분열은 한일 문제처럼 보이지만 저는 좌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어떤 사태를 곧잘 정치적 입장에 입각해서 바라보기 쉬운데, 그런 입장과 상관없이 사태에 대해 생각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설 공간은 좁아졌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들려오지 않았던 목소리를 듣고, 제3의 공간을 넓히는 시도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가 ‘제국’이라는 말에 담은 것은 민족뿐만 아니라 성이나 계급의 지배, 배제/차별의 문제입니다. 즉, ‘위안부’ 문제는 지금까지 일본이라는 국가 주체의 문제로 여겨져 정치 문제로만 이해되어 왔지만, ‘이동’을 유발하는 경제 문제가 주목되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경제적 욕망을 내면화하는 형태로 많은 사람들이 ‘이동’해 갔습니다만, 그런 문제에의 주목이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을 착취하는 일로 경제적 이익을 얻은 것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의식과, 거기에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자기반성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업자 중에는 일본인도 있었고, 그 사실도 썼습니다.

이분법 바깥의 사태를 그려냈다

나카지마: 일본인 병사와 협조한 ‘위안부’라는 것은 지원단체가 그리는 피해자상과는 다릅니다. 한편으로 일본의 우파가 그려내는 ‘매춘부’라는 상과도 다릅니다. 그런 식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존재를 드러내는 일로  ‘제국’의 폭력구조를 밝혀내려고 한 것이 박유하선생의 저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저를 비난한 사람은 한국의 경우 남성학자가 많았습니다. 일본을 면죄하는 일은 하지 말라고요. 하지만 그러한 비판이 무엇을 면죄하고 억압하며 은폐하고 있는지 거꾸로 묻고 싶었습니다.

일본인, 일본 국가에 의해 조선 민족이 지배 당하고, 피해자가 되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만 보는 동안) 민족 레벨 이외의 구조적 문제가 사라져 버렸지요.

나카지마: 80년대 말부터 90년대에 논의되었던 서발턴의 목소리의 대변/ 표상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스피박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비판해 온 것은 특정 서발턴을 만들어 대변/표상하는 일의 권력성과 폭력성입니다.

박: 맞습니다. 저는 ‘전문가도 아니면서’라든지 ‘운동가도 아니면서’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당사자도 아니면서 화해를 말하지 말라’는 말도 들었는데, 오늘날까지도 뿌리 깊은, 당사자를 일원화하는 사고가 또다른 당사자를 배제하는 권력으로서 기능해 왔습니다. 동시에 ‘대변자(후예)의 당사자성’이 빠진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들을 돌아 보지 않아서 생긴 권력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나카지마: 저도 작년에 박유하선생님의 불구속 기소에 항의하는 성명에 이름을 올린 후, ‘전문가가 아니다’라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저는 사상사와 쇼와(昭和)사도 연구하고 있고 넓은 의미에서 역사학자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조선어 문헌을 읽을 수 있을 것, ‘위안부’ 연구자일 것 등이 ‘위안부’ 문제를 논하는  ‘전문가’의 요건이 된다면 대부분의 논자들은 의논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전문가가 아니다’라는 말의 억압 때문에 문제를 다각적으로 논할 수 없게 되지요.

지워져 버린 ‘주체성’

나카지마: ‘나눔의 집’의 방침에 거리감을 느끼던 전 ‘위안부’분의 존재가 책에 쓰여 있습니다. 특정 ‘위안부’상이 확립되어 버리면 그 자신의 생각은 그 공간에서는 지워져 버리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나눔의 집에 거주하면서 일본고발에 참여하는존재도 중요합니다. 어느 쪽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면이 있으면서도 정치에 휩쓸려 온 전 ‘위안부’의 전체상을 보지 않으면 문제는 한 발짝도 진전되지 않을 것입니다.

박: 그 분은  운동의 방식과 ‘위안부’를 둘러싼 이해에 관해 (지원단체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던 분이었습니다. 가족이 없기도 해서 자주 저에게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일본을 비판하지 않으면 주변으로부터 ‘일본을 좋아하는 거지?’라든가, ‘가짜 위안부’라고 비판 받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또, 먼저 이쪽이 ‘용서하겠다’고 하면 일본이 그에 맞는 대응을 하지 않을까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 목소리를 저는 고소 당하기 직전, 14년 4월 한국에서 개최했던심포지엄을 통해 알렸습니다. 지원 단체를 거치지 않고 보상금을 직접 받고 싶다는 또다른 목소리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한달 반 후에 고소를 당했습니다.

나카지마: 그런 식의 차이나 (어느 한쪽으로 규정할 수 없는) 불규정성이 중요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에서는 그런 부분이 완전히 도외시 되어 버립니다. 박유하선생님은 여기에 메스를 가해 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서발턴 연구의 성과에 바탕한 중요한 문제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2016년 2월 5일, 오사카 시내에서

일본어원문(日本語): 対談原文 – 『週刊金曜日』2016年 6月 17日号より

渦中日記 2015/12/15

기소 이후 한달이 되어가는데 아직 원래의 일상을 못 찾고 있다. 원래의 일상이란, 재판과 그에 관련된 일들이 생활과 감정의 중심이 되지 않는 상태다.
재판이 이어지는 동안은 기본적으로 내게 “비일상”일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시간이 많이 지난 탓에 기소 이전에는 조금은 평정심을 찾았었다. 그런데 기소 이후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일에 대한 의욕을 잃었고, 아직 살아나지 않는다. 그저, 필요 최소한도의 말과 글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한일 양쪽 성명을 비롯해 이런 글들, 그리고 페북에서 여러 글들을 써 주는 분들을 위해서 기운을 차려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장정일 작가의 말은 바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나는 이 1년동안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저 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라고 말해왔을 뿐이다.
얼마 전에 인터뷰를 해 주었던 기자가 이번에는 칼럼을 써 주었다. 욕 먹을 걸 알면서도 이렇게 쓴 기자가 여성이라서 더 기쁘다.

http://www.hankookilbo.com/m/v.aspx…

http://news.donga.com/3/00/20151215/75364063/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46940285332883

渦中日記 2015/12/7-2

기소이후, 한국언론으로는 처음으로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했다. 다른 곳의 의뢰도 받았고 일부는 이미 인터뷰를 했지만 동아일보가 먼저 나오게 되었다.

호의적인 내용이지만 “매듭지어야”한다던가 “한일 양심적 지식인들이”그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 책은 해결을 위해 힌트가 되었으면 해서 쓴 책이지만 해결에만 방점이 찍힌 책은 아니다.

또 위안부문제는 해결을 두고 늘 누군가를 배제해 온 문제이기도 했다. 그런 틀 자체가 수정되어야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http://news.donga.com/3/all/20151207/75216867/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41962239164021

渦中日記 2015/12/5

기자회견이 끝나고 사흘. 기소 이후 이주일 여, 내내 경황이 없어 답하지 못했던 전화, 문자, 메일, 메시지등에 답하기 시작했다.
이 주말엔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원고도 써야 한다.

경향신문 기자가 이번사태에 대해 정리한 기사를 써 주었다. 생각해보면 <제국의 위안부>가 나왔을 때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전면기사로 서평을 써주었던 매체다. 그럼에도 얼마전엔 나를 “친일교수”로 모는 기사를 쓰기도 했던.
당연한 얘기지만, 하나의 매체가 결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걸 나는 이 책을 간행한 이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자발적 매춘부”라는 말이 내 이름과 함께 돌아 다닌다. 어떤 이는 “설사 직접 쓰지 않았어도 그렇다고 알 수 있는 내용을 쓰지 않았느냐”고 한다.
위안부문제 해결은 어쩌면, 뿌리깊은 매춘차별의식에서 벗어날 때에야 가능해질지도 모르겠다. 당사자든 주변인이든.

“논박”이란 때로 필요하지만, 때로 무의미하다. 중요한 건 논지도 아니고, 지식도 아닐 수 있다. 세계를 지배하는 건 그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태도, 그리고 타자와 마주하는 자세일 뿐이다.

http://h2.khan.co.kr/20151203163105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41018259258419

渦中日記 2015/12/2-2

며칠간 경황이 없어 어젯밤 늦게야 오늘 기자회견에서 발표할 글을 썼다. 허핑톤포스트가 게재해 주었는데, 다시 보니 중요한 말을 빠뜨렸다.

나를 비판하는 이들은, 내가 “당사자/피해자를 배려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책에서 의도했던 건, 또다른 “당사자”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일이었다. 문제발생 초기에는 자연스럽게 공존했던,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한국정부보고서에조차 등장할 수 있었던 “당사자”들. 세월이 가면서 지원자와 국가의 목소리에 묻혀 “삭제”당했던 목소리들.
나는 그렇게 해서 우리시야에서 사라졌거나 혹은 여전히 존재함에도 들리지 않는,”언로”를 갖고 있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뿐이다.

하지만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위안부 할머니의 목소리를 나는 아직 세상에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을 시도하자마자, 고발당했다. “당사자”란 하나가 아니다.

http://www.huffingtonpost.kr/yuha-park/story_b_8695314.html…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39404569419788

渦中日記 2015/12/2

기자회견과 지식인 성명이 무사히 끝났습니다.
한국언론 일본언론은 물론 미국 스페인 언론까지 와 주어 장내가 가득 찼을 정도였습니다. 관심 가져주신 기자,언론인 여러분들, 특히 Facebook 친구 언론인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저를 위한 성명에 참여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 어떤 국면이 될지 모르지만 선생님들이 함께 해주셨으니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려주신 분 중 한 분인 김원우 선생님께서 내내 뒤에 앉아 계시다가 가셨는데 저와 함께 찍힌 사진이 있기에 올려 둡니다. 우연히도 옆에는 역시 오래 함께 해준 친구들이 있군요

우선 간단히 보고 드립니다. 먼저, 오래오래 소중하게 기억될 이름들, 191분의 성함을 옮겨 둡니다.

————

학계

강남순 (교수)
구인모 (교수)
권보드래 (교수)
권순엽 (교수)
권영돈 (교수)
권정희 (연구자)
권창규 (학자)
권희주 (교수)
김경옥 (교수)
김규현 (교수)
김두철 (교수)
김미영 (교수)
김석희 (교수)
김성보 (교수)
김승구 (교수)
김예림 (교수)
김용균 (교수)
김용찬 (교수)
김우재 (교수)
김유수 (학자)
김 철 (교수)
김현석 (교수)
김현주 (교수)
나병철 (교수)
나일경 (교수)
남기정 (교수)
남상욱 (교수)
문정인 (교수)
박경수 (교수)
박노현 (교수)
박삼헌 (교수)
박성현 (연구자)
박세진 (교수)
박슬기 (교수)

박정란 (교수)
박재석 (학자)
박진영 (교수)
박진용 (학자)
박현선 (교수)
박혜란 (교수)
박혜성 (교수)
배승주 (강사)
배아란 (연구자)
백규석 (연구자)
백문임 (교수)
서동진 (학자)
서현석 (교수)
소문수 (교수)
송기문 (교수)
송은영 (학자)
신경숙 (교수)
신인섭 (교수)
신형기 (교수)
심준섭 (교육가)
오경환(교수)
오김숙이 (연구원)
오덕재 (교수)
오석태 (학자)
오정환 (연구자)
유승경 (연구자)
유승진 (학자)
윤성호 (교수)
윤태진 (교수)
이강민(교수)
이경분 (교수)
이경원 (교수)
이경훈 (교수)
이권희 (교수)
이기연 (강사)
이순재 (교수)
이승은 (학자)
이승희 (학자)
이영준 (교수)
이우연 (학자)
이윤석 (교수)
이윤영 (교수)
이종일 (교수)
이진경 (교수)
이창남 (교수)
이한정 (교수)
이혜령 (교수)
이효석 (과학자)
임정화 (연구원)
임진영 (학자)
장세진 (교수)
장영철 (교수)
정규영 (교수)
정병호 (교수)
정승원 (연구원)
정영희 (교수)
정의태 (교수)
정종현 (교수)
정혜선 (교수)
정희모 (교수)
조관자 (교수)
조문영 (교수)
조석주 (연구자)
조세영 (교수)
진영복 (교수)
차승기 (교수)
최건영 (교수)
최길성 (교수)
최순애 (학자)
표세만 (교수)
한승욱 (연구자)
허병식 (학자)
홍윤표 (교수)

*작가・문인

고영범 (극작가)
고종석 (작가)
김경옥 (공연평론가)
김곰치 (소설가)
김도언 (작가)
김병익 (평론가)
김원우 (작가)
김현호 (사진비평가)
류 근 (시인)
문강형준(문화평론가)
문부식 (시인)
박일환 (시인)
배수아 (소설가)
배홍진 (작가)
변정수 (평론가)
서준환 (소설가)
손이상 (문화평론가)
송태욱 (번역가)
신은실 (영화비평가)
양한승 (문인)
양혜진 (번역가)
유시민 (작가)
이광호 (평론가)
이문재 (시인)
이원석 (문화비평가)
이제하 (작가)
장윤선 (번역가)
장정일 (소설가)
정과리 (평론가)
정숙희 (극작가)
정찬용 (작가)
조영일(평론가)
최규승 (시인)
최 범 (평론가)
함성호 (시인)
홍미화 (번역가)
홍세화 (작가)

*문화・예술인

강운구 (사진작가)
경 순 (다큐감독)
고성용 (건축사)
김인범 (예술가)
박진영 (사진작가)
안악희 (독립음악가)
유성준 (예술가)
임옥상 (화가)
장현우 (사진작가)
정경록 (독립영화감독)
조미영 (예술가)
조민숙 (예술가)
조세영 (독립영화감독)
최정우 (작곡가)
태준식 (독립영화감독)

*언론・출판인

김규항 (칼럼니스트)
김다미 (출판인)
김용범 (프로듀서)
김종영 (언론인)
김지현 (언론인)
노재현(출판인)
박성태 (언론인)
안보영 (프로듀서)
오태규 (언론인)
이강택 (프로듀서)
이수경 (언론, 예술인)
임현규 (광고인)
장혜경 (언론인)
정종주 (출판인)
조기조 (출판인)
조동신 (출판인)
조용래 (언론인)
주연선 (출판인)
최성욱 (언론인)
황성기 (언론인)
황영식 (언론인)
*법조인

금태섭 (변호사)
김용찬 (변호사)
김향훈 (변호사)
박도준 (변호사)
정우성 (변리사)
최명규 (변호사)

*의료계

김택수 (의학박사)
박성환 (의사)
윤종완 (의사)
윤준호 (치과의사)
정 부 (의료인)
최명환 (의사)

*종교계

이정우 (목사)

총 서명인 194명

『제국의위안부』의 형사 기소에 대한 지식인 성명

2015년 11월 19일, 서울 동부지방 검찰청은 세종대 박유하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군 종군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로 묘사하고 일본군과 종군위안부를 “동지적 관계”로 표현하였다는 이유로 저자를 형법상의 명예훼손죄로 기소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지난 2월 17일, 서울 동부지방 법원은 “국가의 안전보장, 질서유지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학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취지로 『제국의 위안부』의 내용 가운데 서른네 곳의 삭제를 명하는 “가처분 신청 일부인용” 결정을 내린 바 있습니다.

이 일련의 조치에 대해 우리는 당혹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우선, 검찰 측에서 제시한 기소 사유는 책의 실제 내용에 비추어 타당하지 않습니다. “자발적 매춘부”라는 말은 저자 자신의 것이 아니라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본 우익인사들을 비판하기 위해 저자가 그들의 발언 중에서 인용한 것이며, “동지적 관계”라는 말은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된 식민지 조선인의 사정을 그 전쟁의 객관적 상황에 의거해서 기술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입니다. 검찰이 과연 문제의 책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기소 결정이 과연 공정한 검토와 숙의의 결과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한국과 일본 양국의 공론장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은 책입니다. 특히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집단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마이니치 신문이 주관하는 아시아태평양상, 와세다 대학이 주관하는 이시바시 단잔 기념 저널리즘상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또한 국내 출판사 마흔일곱 곳이 참여하는 모임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이 책의 삭제판 출간이라는 오늘의 출판현실에 주목하여 이 책을 올해의 책 중 한 권으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의 주장에 논란의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학술적으로 보다 철저한 조사와 정교한 분석을 요하는 대목이 있을 수 있고, 국내외의 이런저런 정치사회단체의 비위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군위안부는 당초부터 갈등을 유발할 요소를 가지고 있는,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까다로운 사안입니다. 이 사안을 다루는 합리적인 방법은 어느 특정 정치사회집단이 발언의 권위를 독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다양한 목소리가 자유롭게 표출되고 경합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검찰의 기소 조치는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사법부가 나서서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여론을 국가의 통제 하에 두는 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와 발언의 자유가 당연히 제한을 받을 것이고, 국가 이데올로기에 편승한 주장들이 진리의 자리를 배타적으로 차지할 것입니다. 그리고, 종군위안부 문제의 범위를 넘어 역사 문제 일반과 관련해서도, 국가가 원한다면 시민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해도 무방하다는 반민주적 관례를 낳을 것입니다.

한 학자가 내놓은 주장의 옳고 그름을 사법적 판단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발상은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입니다. 우리 사회는 1987년 권위주의 정권을 퇴출한 이후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민주적 관례와 제도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으며 사법부를 포함한 국가 기구 또한 그러한 사회적 진보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습니다. 검찰이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를 형법상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한 것은 그러한 민주화의 대세에 역행하는 조치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지키고자 하는 모든 시민들과 함께 박유하 교수에 대한 기소 사태를 깊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부디 검찰의 기소가 취하되기를 바라며, 사법부의 현명한 판단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2015년 12월 2일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239315759428669&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theater

渦中日記 2015/11/25 강의가 없었던 날.

강의가 없었던 날.

하루종일, 제 시간에 식사조차 못할 정도로 한국과 일본에서 진행중인 성명작업을 지켜보는 일과, 전화와 메일과 이런 저런 연락에 시달렸다.
일본에서의 성명은 내일 오후에 동경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한다고 한다. 회견에 나서 줄 이들은 와카미야 아사히신문 전 주필, 여성학자 우에노치즈코 교수, 일본근대문학자이자 “헌법9조를 지키는 모임”의 사무국장을 맡아온 고모리요이치 교수가 될 듯 하다.

처음으로, 일본언론 중 아사히신문의 인터뷰에 응했다. 다른 언론들에는 다음주 기자회견(12월 2일 오전 10시.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을 기다려 달라 했지만, 아사히신문은 책을 낸 곳이기도 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발 후 받았던 형사조사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그 때 느꼈던 수모의 기억이 떠올라 잠시 고통스러웠다.

뉴욕타임즈 한국인기자에게서 인터뷰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내 사태가 “인권문제”로 보이고 그래서 관심이 있다 해서 응할 생각이 들었다.
고발 이후 짓밟히고 실제로 명예를 훼손당한 건 위안부할머니가 아니라 나다. 내 책을 읽고 할머니들한테 “매춘부!”라고 손가락질했을 이는 아무도 없었을 거라고 믿는다.
나는 그렇게 말해온 이들과 그런 차별의식에 동조한 이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언급했을 뿐이다. 내가 가진 시간과 에너지를 다 해서.

저녁 무렵에, 비로소 기소장을 받았다. 내용을 읽고 그만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고측 주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위안부문제 연구자가 아닌 그들이 어떻게 내 책이 거짓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일까.
결국 그들은 누군가의 주장을 믿고 대리싸움을 할 수 밖에 없는데, 박유하라는 개인보다는, 지원단체라는 오랜 권력, 힘을 가진 “기존”연구, 여론과 국가라는, “다수의 주장”을 선택한 셈이다.

기소장에 대해 썼던 메일 일부를 옮겨 둔다.
이제 저녁식사를 해야겠다. 다행히 구토증세는 없어졌다..(걱정해 주신 분들,감사합니다..)

“기본적으로는 이 문제에 대한 과거의 이해를 그냥 적고, <박유하의 책은 그런 기존인식을 부정하고 있으니 범죄>,라는 논리입니다.
그런 논리가 성립한다면 학자는 누구나 기존인식만을 말해야 하고 국가를 대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저로서는 물리적강제연행을 부정했으나 구조적 강제성을 강조했고 실제로는 위안부연구자들도 그점에서 일치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그렇다고는 말하지 않고
제가 업자의 책임을 강조한 것을 두고 <국가책임 없다>(이것을 법적책임주장을 비판한 것과 연계시켜 <박유하는 일본의 책임을 부정하고 있다!>고 하는 거지요)
고 말한 것으로 간주하거나 왜곡하고 있으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입니다.

지적된 내용 대부분에 대해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이처럼 이중삼중의 비틀림들에 의한 억압이 제가 처한 상황입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35603783133200

渦中日記 2015/9/23

<머니투데이>의 김사무엘기자와 오래 얘기했는데,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음성입력을 했더니 핸드폰이 뭐니(!)투데이라고 받아적기에 잠깐 웃었다.)
그래서 오늘은 <머니투데이>의 다른관계자와 통화하고 “동지적관계”라는 단어가 사용된 전후맥락을 참고해 달라고 했다.

이하는 책 몇쪽을 사진찍어 보내면서 덧붙인 글.
——–

“동지적 관계”라는 개념이 사용된 부분을 보냅니다.
보시다시피 우선은 다른 나라의 위안부와는 다른 위치에 있었다는 점, 일종의 국민동원이었다는 점, 그리고 중국등, “적”이 아닌 “동일한 일본인”으로서 나가게 된 건 우리가 식민지 지배를 당했기 때문이고 그러나 그 안에 차별과 폭행이 존재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다시 말해 식민지배의 본질은 눈에 띄는 폭력보다 눈에 띄지 않는 통치기술에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입니다. 군인과의 의외의 관계도 그런 구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그것을 말하는 이유도, 일본에 책임을 묻기 위한 것입니다.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202735206420058&set=pcb.1202736589753253&type=3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02736589753253

渦中日記 2015/6/5

정규재TV에 나갔다.
지난 2월 가처분판결 이후, 내 책을 이해해 주는 이들의 부름은 누가 되었건 고맙게 받아들이기로 정했었다.
책이 나온 직후에 했던 조선일보 인터뷰도, 고발이후에 했던 월간조선 인터뷰도 결국 나오지 않았던 것처럼, 내게 대한 적대가 보수/진보구분과 상관없는 이상, 보수/진보매체를 구분해 응하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게 상처를 준 건 진보쪽이다..)

우리사회에 지금 필요한 건, 정치적입장과 상관없이, 필요한 사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접점을 찾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나름의 그런 시도이긴 한데..잘 했는지는 모르겠다.
암튼 과이언맨의 김남훈샘이 응원 와 주시고 두시간내내 지켜봐 주셔서 든든했다는. 고맙습니다.

http://m.hankyung.com/apps/jkjtv.board.view…

http://m.hankyung.com/apps/jkjtv.board.view…

http://m.hankyung.com/apps/jkjtv.board.view…

http://m.hankyung.com/apps/jkjtv.board.view?id=jkjtv_column&no=1831&category=4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128272527199660

渦中日記 2015/5/2

작년 겨울에 일본의 주간지와 인터뷰한 기사가 번역되어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사실 「週刊文春」은 혐한기사에 앞장선 매체였고 이 잡지를 내는 문예춘추사와는 예전에 책을 내기로 했다가(번역자가 선택한 출판사였다), 편집이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걸 알고 마지막교열단계에서 출판을 중지한, 악연도 있는 곳이어서 경계했었다.
하지만 기자는 고발이전부터 여러번 취재를 요청했고 결국 “매체로 판단하지 말아 달라”는 말에 수락한 경위가 있다. (그런데 여기 쓰인 사진은 프레시안의 사진이다. 프레시안 기자가 수십번 셔터를 누르기에 더 나은 사진을 올려주려 그러나 생각했었다. 나중에 기사제목을 보고 그게 내 오해였음을 알게 되었지만.ㅠ)

우려하면서도 보수매체의 의뢰를 굳이 받아들인 건 위안부문제를 해결하려면 굳게 닫혀 있는 보수층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규탄은 상대를 바꾸지 못한다. 국가관계건 개인관계건.

http://aristotelecom.tistory.com/m/post/194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110547522305494

渦中日記 2015/3/27

생일 전후해서, 나에 대해 언급한 칼럼, 인터뷰가 실린 신문과 잡지등이, 마치 선물처럼 도착했다. 5쇄를 찍었다는 연락도 왔다. 일본의 한 지인은 나를 위로하기 위해 아마존의 독자평까지 보내 주었다. 일본어판이 나오고나서 이어졌던, 과분하리만큼의 호의적인 평가에 반발하는 비판들이 최근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해 내가 우울해 했기 때문이다.

내가 우울했던 건,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라기보다, 그들이 정말은 나의 적일 수 없는 이들이기 때문인데, 그들은 이 이십여년의 운동과 연구를 부정당했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선지,우익의 비판보다 훨씬 집요하고 적극적이다. 타자에 대한 중상과 비방이 아니라도 자신을 지키는 일은 가능한데.

하지만, 그런 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내가 의도한대로, 있는 그대로 읽어주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 비판자들은 내 책이 일본의 우익을 기쁘게 한다고 말하지만, 이들은 모두 우익을 비판하는 입장에 있는 이들이다.

우파든 좌파든, 마음을 비우고 읽을 수 있는 이들에게 더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시민의 힘이 정부와 보수를 흔들 수 있도록.
————————————
(전략)

최대 현안은 위안부 문제이지만 이와 관련해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다.

일본에서도 발행된 ‘제국의 위안부’ 저자인 박유하 씨가 한국에서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해 당국의 조사를 받은 것이다. 이미 저자에게 불리한 출판금지 가처분 결정이 나온 데 놀랐지만 이에 더해 오해와 곡해로 인한 심각한 비방 중상이 난무하고 있어 유감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이 책은 한일 양국에 존재하는 극단적인 주장이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해왔다고 지적하며 과감한 문제 타개를 요구한 의욕적인 작품이다. 일본에서 평가가 높은 것은 결코 우익이 기뻐해서가 아니라 해결을 바라는 양식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잡았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내용이어서 이론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는 언론의 장에서 논의하면 좋지 않은가. 만에 하나 공권력이 그녀를 기소하면 문제 해결에 결코 도움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선진 제국은 마침내 한국이 ‘언론을 억압하는 나라’라고 낙인을 찍을 것이다. 그래서 기뻐할 사람은 누구일까. 한국도 스스로 공통의 가치관을 버리지 않도록 절실히 바라고 있다.

(와카미야 요시부미 일본국제교류센터 시니어펠로 전 아사히신문 ,2015/3/19,동아일보)

읽는쪽도 시험당한다. <제국의 위안부>에는 그런 평이 있다.

위안부를 데리고 다닌 업자에 조선인이 있었다는 지적을, 일본의 책임을 부정하고 싶은 논객은 환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논지의 한 부분만을 멋대로 가져다 쓴 결과다.박교수는 위안부를 낳은 구조를 명확히 밝히려 한 것이고 누군가를 면죄하고 있지는 않다.
또한 아시아여성기금을 높이 평가했다고 해서 이제까지의 일본의 대응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속단이다. 기금의 존재는 위안부의 고통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지려던 생각이 국회(국민)의 다수생각이 아니었음을 말한다.

(마세타츠야 홋카이도 신문 해설 위원, 2015/3/24, 홋카이도 신문)

아사히신문의 오보정정으로 인해 마치 2차대전때 위안부문제는 없었다는 식으로 외치면서 역사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하려는 이들이 있다.

남경사건에 관해서도 그렇다.(중략)
한국의 저자인만큼,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탓에 다른나라 위안부와는 또다른 가혹함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TKo, 아akwhs 아마존 독자평)

박유하님의 사진.
박유하님의 사진.
박유하님의 사진.
박유하님의 사진.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87635244596722

渦中日記 2015/2/25

한 언론의 기자가 기사를 쓰겠다면서 질문을 했다. 일본특파원이라 일본사정에 대해서도 위안부문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정치가나 일반인들과는 질문의 차원이 달라 성의껏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내가 위안부문제해결과 한일화해를 위해 쓴 건지 혹은 일본에 “법적책임이 없다”는 걸 주장하고 싶었던건지 알고 싶어했다. 나로서는 서글퍼지는 대답이었지만 말했다.
“결론부터 정하고 덤비지는 않습니다. 그럴 이유도 없고요. ”
한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뭔가 다른 의도를 담아 글을 쓰는 식으로 머리굴리는 부류의 사람을 싫어하고, 누군가의 지시에 쉽게 따를만큼 순종적이지도 않다.

———–
1.논리적으로 정합적이지 않다. “보상”의 의미는?

이 책은 여러 “다른”오디엔스(독자/청중)를 대상으로 한 책이에요. 책에도 썼지만 원래는 일본을 향한 글만 쓰여질 예정이었구요. 일본이라 해도 지원자/정부/부정자,이렇게 세 부류입니다.
앞에서 하던 얘기와 뒤에서 한 얘기가 다르다,고 느껴지는 건 그 결과입니다. 예를 들면 한일협정에 관해서도 한국을 향해선 “한국정부가 개인의 청구권을 없애 버렸으니 그걸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했으면서 일본을 향해선 “당신들은 보상 끝났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쟁관련 보상이었고 식민지배에 따른 억압과 고통에 대해선 보상한 적이 없다”고 말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모순으로 느껴질 수 있고 어느쪽이 진짜냐! 라고 묻고 싶어지겠지만 이런 식의 논리전개가 된 건 결국 대립하는 문제의 해결방법은 각자 자신의 문제를 보는, 자기비판적인 시각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커다란 틀에서 누가 잘못했는지에 대해선 명확히 썼습니다. 일본의 지배가 문제이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정대협등 지원단체는 보상과 배상의 의미를 구별해서 쓰고 있어요. 위안부문제는 “법을 어긴 국가범죄이니 입법을 해서 배상하라”라는 의미에서 “배상”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학자들이 말하는 건
더이상 “강제연행”이 아닙니다. 오히려 식민지에선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저에 대한 고발장에서조차 쓰고 있더군요.
“약취,사기”로 업자들이 데려 왔다 해도 알고도 받아들였으면 범죄이고 일본군이 알고도 받아들였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데 실은 알게 된 경우 업자에게 다른 곳에 취직하게 하도록 시키거나 돌려보낸 경우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이전에 계약서를 확인해 업자의 사기나 납치를 방지하려 했구요. 그러니 전부가 그렇게 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일본의 공식방침은 위의 주장과는 다르다고 해야 하구요. 알면서 묵인한 경우도 없지 않았겠지만 그 경우 업자가 이미 돈을 주고 사 왔다던가 하는, 일본군으로서도 관리영역 바깥의 경우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전 그래서 수요를 만든 자체–전쟁을 일으키고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식민지로 만든 지역의 사람들까지 전쟁터에 동원한 책임, (의도여부를 떠나) 묵인한 책임을 물은 겁니다. 위안소를 공식적으로 만든건 근대일본이 시스템화에 능숙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그리고 모두 획일적인 위안소가 아니었다는 것도 인식해야 하고요. 일본에서 강연할 때 유곽에 있었던 사람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에, 유곽을 군대용 위안소로 지정한 곳도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동시에, 지정업소가 아닌 곳에 있었던 사람(여기에도 비지정이지만 인가업소-유곽의 위생시설등 체크했던 업소와 인가조차 못받았던 이른바 사창도 있었다는 걸 “우리는”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화의 접점을 찾기 위해서는 가장 강력한 피해에 주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다른 부분을 소거시키고 싶은 욕망에 이기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전 그걸 지적했던 거구요.
“보상”이라는 단어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한국어판을 쓸 땐 기금과는 달리 “정부국고금”으로, 기금을 받지 못한 분들께 추가 보상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었고 그런 의미입니다. 국회를 거치지 않는 정부보상금이지요. 다만, 이후 국회결의를 하는 게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고, 일본어판에선 그렇게 썼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다시 기회되면 말씀드리지요.

2. 와다교수의 의견(국고금으로 보상금지급)과 같나?

한국어판 내고 나서 다른 자료들을 보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와다선생님과 달리 국회결의를 주장하는 겁니다. 오히려 보상금을 어떻게 할 건지는 더 첨예하게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주장(국민동원의 한 형태다)이 받아들여진다면 입법이나 국고금 지급도 가능할지 모르지만 “강제동원을 했으니 배상하라”는 현재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또 일본한테 보상금을 대신 받은 한국정부가, 할머니들에게 4천만원 이상 지급했고 매달 이런저런 형태로 지원하고 있다는 것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겠지요. 할머니의 체험은 다 다른데 해결은 “하나의 방안”으로 정해야 하는 정치/국가 문제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할머니들의 다른 목소리에 각각 귀를 기울이면서도 합리적으로 판단할 것인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3. 현실적 타협론인가?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기본적으로는 아닙니다. 합리적이고 옳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명분에 무게가 실려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백년이 걸리더라도” 라는 말로 주장을 관철하는 건 첫째 당사자를 무시(얼마전에 만난 할머니는 사죄조차 요구하지 않고 보상만 해 주면 된다고 해서 오히려 제가 당혹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하는 일이고, 할머니의 의견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도 인식될 필요가 있습니다. 들리지 않을 뿐이지요. 부산정대협회장님을 만나 보세요. 지방에 계셔서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 문제 해결에 사비털어가며 20년이상 애써 오신 분인데 그분 말씀이 “나도 내 돈 내가며 신문광고를 통해 기금을 반대했다. 하지만 할머니들 돌아가시는 거 보면서 받게 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우리 여성지도자들(이 분은 이화전문여고출신의 할머님)이 못 받게 했다”고 하시더군요.

4. 제가 받는 인신공격적 비난이 안타깝다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한 심층취재와 인터뷰가 필요합니다. 외부의 비난과 우려 속에 있는 현재 한국사회의 문제를 외부가 아니라 우리스스로 들여다보고 아프더라도 직시하는 일로 치유해나가기 위해서도요. 저는 제 사태를, 2009년의 서경식교수의 한겨레 칼럼이후에 저에 대한 오해가 확산되면서 5년후에 지원단체에 의한,아마도 쌍방이 의식못할 “대리고발”을 당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오해의 종류도 다양하고 지식의 폭도 달라서 더 어려운데, 정치나 개인적인 이익에 이용하는 사람들, 단순오해로 비난하는 이들에게 동조하는 지식인들의 행태가 가장 한탄스럽군요. 저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을 위해서.
언론에 대해서도 깊이 실망해 왔지만 그래도 제대로 보려하는 분들이 계신 걸 잘 압니다. 기대를 놓지 않겠습니다. 건필하시길 빕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8639513162962

渦中日記 2014/11/7-2

언론중재위원회 심리에 참석하러 다시 왔다. 그 전에 연합뉴스와 인터뷰.

이번에 신청한 곳은 네 군데다. 연합뉴스는 왜곡된 원고측 자료를 내게 확인 없이 처음으로 내보내 온갖 매체들이 받아쓰기 하도록 만든 곳이긴 하지만, 악의는 없어 보여 많이 양보했다. 원래의 6월 15일 기사에 내 의견을 추가하고 따로 반론보도성격의 인터뷰를 하는 것으로 합의.

기자와의 인터뷰가 끝나면 다시 연합뉴스, 조선닷컴, 한국일보,한겨레와 함께 심리를 받게 된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92766940750220

渦中日記 2014/8/18

얼마전에 일본 아사히신문이 내놓은 위안부문제특집에 관한 전화인터뷰를, 일본의 한 월간지와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결방책에 대해 묻기에, 일본의 “국회결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그간의 지원자나 운동가가 말해온 것처럼 그렇게 해야 할 “법적의무”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국가에 의한 여성동원에 대한 “법적보호”를 방기한 근대국가시스템의 문제이니, 일본이 “주체적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1년 전에 한국에서 책을 낼 땐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 (생명의 헌납을 요구당한)남성에게는 보장되었던 “법의 보호”가, (성의 헌납을 요구당한 )여성에게는 보장되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된 금년 봄 이후다. 그리고, 아사히가 강조한 “구조적강제”에 불만이 있는 듯 했던 기자는 내 말에 공감하는 눈치였다.

<제국의 위안부>일본어판에서도 사실 나는 그 점을 강조했었다. 문제는 한국에서 소송사태가 나는 바람에 일본측 출판사가 출간을 미루고 있다는 점.
그러니 이번 소송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해결을 위한 또하나의 노력을, 지원자들과 할머니들자신이 막고 있다는 점이다..

본문: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41628459197402

渦中日記 2014/8/12-2

며칠전에 했던 모월간지 인터뷰가 결국 게재되지 않게 되었다고 기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번에 그런 결정을 내린 건 데스크가 아니었다고. 기자는 죄송하다 말했지만 그의 선의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섭섭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언론왜곡”을 문제시한 그의 노력을 짓밟은 해당언론이 안타까울 뿐.

나에 대한 고발사태가 안타까운 건, 혐한주의자들이 “한국엔 언론의 자유조차 없다”면서 한국때리기의 또하나의 근거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일이 개인적인 일을 넘어서 한국의 위상을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관계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본문: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38207342872847

渦中日記 2014/8/13

낮에 잠깐 올렸던 <실리지 못한 인터뷰>를 몇시간 후에 내렸다. 한번 수락했던 기자가 그래 주기를 다시 요청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진지함과 선의로 기사를 만든 그가 불이익을 당하는 건 원치 않았기에 그렇게 했다.
그리고 오늘 다시 다른 곳과 인터뷰. 마지막에 말했다.
“내가 한일관계에 대해 말하는 건 냉전을 넘어서고 싶어서입니다. 우리는 제국과 냉전을 경험했고 유일한 분단국이기도 합니다. 강대국의 세력다툼에 말려들어 제국과 냉전을 경험한 우리에겐, 그런 역사성을 극복하고 동아시아 평화를 만드는 주체가 될 필연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말하고 싶었던 것도 이 책을 써야 했던 이유입니다.”

며칠전에 70세 넘으신 지인이 후원하고 싶으니 계좌번호 알려달라 해서 당혹스러웠던 적이 있는데, 오늘은 새로 페친이 된 16세 중학생이 느닷없이 후원하고 싶다고 했다. 우선은 마음만 받겠다 했지만, 살아오면서 한번도 해보지 않은 경험을 또하나 했던 날.

본문: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938404049519843&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제국의 위안부』 – 발간 직후 신문사 서평 및 인터뷰 모음

서평

인터뷰

박유하-주진오 대담 :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

[박유하-주진오 대담]

국산은 후지다는 편견은 없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확실히 국산은 후지다. ‘학자'(혹은 ‘교수’)는 그 중 대표적인 품목이다. 학자 행세를 하려면 대학을 나오고 대학원에다 박사 공부까지 짧게 잡아도 10년은 공부해야 한다. 사람이 무슨 일이든 10년을 했다면 ‘귀신처럼’은 아니더라도 세모를 세모로 네모를 네모로는 보는 눈은 가지는 법인데 이상하게 한국의 학자들은 그런 사람이 참 드물다. 괜찮은가 싶다가도 월드컵이나 독도 같은 광풍이 한번 몰아치면 그저 ‘축구 응원단의 일원’으로 ‘우익 시위대의 일원’으로 그 초라한 몰골을 드러내고 만다. 해서, 이따금씩 괜찮은 학자를 만나면 그것처럼 반가울 수가 없다. 관점이나 의견에 차이가 나더라도 세모를 세모로 네모를 네모로는 보는 눈만 있다면 충분히 기쁘다. 박유하 씨는 그런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책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요즘 같은 분위기에선 보석과 같다. 어제 신문에 난 그의 대담 기사를 읽다보니 ‘남성 학자는 단지 냉철할 뿐이지만 여성 학자는 냉철한 데다 부드럽기까지 할 수 있구나’ 싶다.

(김규항 블로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