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박유하 교수에 대한 비난은 과연 타당한가

세종대학교 박유하 교수의 2013년작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논란은 오랜 세월 표류 중이다. 논란은 학문의 장을 넘어 법정으로까지 번졌다. 명예훼손죄 혐의에 대해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던 박유하 교수는 2017년 2심에서 벌금 1000만 원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최종판결을 내려야 할 대법원에서는 2022년 현 시점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주장] 박유하 교수에 대한 비난은 과연 타당한가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주간 금요일> 편집위원 특별 대담: 박유하

<주간 금요일> 편집위원 특별 대담, 2016. 6. 17 (1092호) 37쪽~39쪽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세종대 교수) X 나카지마 다케시 (도쿄공업대학 교수, 본지 편집위원)

서발턴의 목소리는 전달되었나?

“이 책은 매우 날카로운 일본 제국주의 비판서입니다.” – 나카지마다케시

“’국가이야기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 박유하

한국의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저술한 <제국의 위안부>가 한일 학자들 사이에서 장기적인 논쟁을 부르고 있다. 전 ‘위안부’ 9명에 의한 명예훼손 형사 고소로 작년 11월에 박교수는 불구속 기소되었는데, 이에 미국과 일본의 학자들 54명이 항의성명을 냈다. 한편, 성명에 대한 반론도 일어났다. 성명에 참여한 나카지마 다케시본지편집위원의 요청으로 올해 2월 일본을 방문한 박교수와 대담을 했다.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싸고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카지마: 저는 <화해를 위해서>의 일본어판이 2006년에 나왔을 때, 선생을 알게 됐습니다. 그 후, <제국의 위안부>가 한국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일본어판이 나왔을 때 곧바로 읽어 봤습니다.

이 책의 중요한 틀의 배경에는 서발턴 연구가 제기한 문제가 존재합니다. 서발턴연구란 1980년대에 인도를 중심으로 나온 문제인데,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주체성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의 다원적인 주체성을 다루면서,  그녀들을 여러 고통스러운 정황 속으로 내몬 제국의 폭력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매우 날카로운 일본 제국주의 비판서입니다.

박: 저도 바로 그 문제를 생각했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라는 표현도 비판을 받는데, ‘제국에 동원되었다’라는 것이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 다음에  ‘협력을 강요당했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국의 일원으로서의 협력도 말했기 때문에) ‘어느 쪽이 중심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그런 질문을 만드는 것은, 기존에 존재해온 개념으로만 이해하려 하는  사고입니다. ‘위안부’라는 다면적인 주체를 한가지 모습으로 규정하는 일을 유보하고 애매한 상태로 놔 두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일로 느끼는 것은 그러한 사고때문이 아닐까요?

‘애국’은 과잉 적응의 결과

나카지마: 박유하선생이  쓰신 중요한 문제중 하나는 ‘위안부’를 알선한 조선인 업자 문제입니다. 그들은 여성을 데려가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생활이 있었습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본의 뜻에 따를 필요가 있었습니다. 한편, 일부 ‘위안부’들은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내몰리면서도 제국 육군을 지탱하고 있다는 긍지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과잉 적응입니다. 일본의 우파 쪽 사람들이 말하는, ‘거 봐라. 잘 지내고 있지 않았는가’라는 식의 주장과는 정반대 이야기지요. 그런데 잘못 이해되어 우파논의와 같은 레벨로 취급 받고 말았습니다.

저는 인류학을 공부한 후 역사를 연구했습니다만, 우파와 좌파의 담론 사이에서 모두가 잘라내버린 사람들이 아주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제가 <나카무라야의 보오스>를 쓰게 된 커다란 계기입니다. 보오스는 일본의 제국주의에 비판적이면서도 일본의 군사력을 사용하여 아시아, 인도를 해방시키는 수단으로 쓰자고 주장했습니다. 우파, 좌파 각개의 역사이야기만으로는 파악해 내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똑같은 문제가 한국에서 친일파로 불리는 사람들의 평가에도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이광수가 그렇습니다. 그는 그저 일본에 아부하지 않았고 일본에 대해 매우 엄중한 비판론자였습니다. 그러다가 30년대에 들어와서 바뀌었습니다.  ‘일군만민’ 등의 일본의 국체론을 전용해서  “황국신민은 천황폐하 아래에서 평등하다. ‘내선일체’라고 할 거면 평등하게 대해 달라”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반격을 하기 위해서 일본의 국체를 (자기 방식으로) 전용해 나갑니다. 이런 식의 주체성을 주의 깊게 읽어내는 작업이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박: 동시에,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라는 책이 한국에서 2013년에 출간되었는데, 이 관리인 남성은 ‘황국신민’이라고 할 만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책 후반에 나오는 1944년 설날일기에는 ‘천황의 위광을 온 천하에 떨쳐야 한다’, ‘황군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원했다’(321쪽)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는 1905년생이니 정확히 일본에 의한 병합시대를 산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내면에 ‘애국’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마음이 생겨난 정황은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특히 총력전 체제 이후에는 위안부도 그런 틀 안에서 동원되었다는 것을 제 책에서는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우파의 사고나 논의가 어떤 점에서 문제인지도 썼습니다.

우파에 대한 서포트작업이 아니다.

나카지마: ‘위안부’가 된 여성들과 병사의 이른바 의사(擬似)가족화라는 문제를 우파 사람들은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해석해 버립니다. 하지만 이런상황이 보여주는 슬픔만큼 가혹한 일은 없습니다.

<제국의 위안부>에 쓰여 있는 것은 고향에 가족을 두고 온 일본인 병사가 ‘위안부’에게 의사가족이 되기를 요구해 나가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전선에서 죽음의 공포와 싸우고 있습니다.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유일하게 약한 모습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상대가 ‘위안부’였습니다. ‘위안부’들은 그 슬픔과 고통을 받아주려고 합니다. 일부 병사는 ‘위안부’처럼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징병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병사의 행위는 ‘제국’에 의해 구성된 가해구조 바깥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박: 시기와 공간에 따라 다른 체험을 했으니,  한 사람의 ‘위안부’ 안에 복합적인 감정이 있다는 사실, 같은 시기와 공간 안에 있었어도 연령이나 일본어 능력 등에 따라 경험이나 감정이 달랐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 속에서 제가 쓰고 싶었던 것은 ‘국가 이야기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입니다. 진심에서건 표면적에서건, 인간은 국가 이야기에 자신을 아이덴티파이(동일화)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바람직한) ‘이야기’와 맞지 않는 체험이나 감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이 표면화됐을 때, 국가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은폐하거나 반대로 징벌하거나 합니다. 그런 일에 젠더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지요.

나카지마: 이를 두고 일본의 우파를 서포트하는 논의라고 말하거나, 일본에 대한 면죄론이라고 인식해 버리는 것은 정말로 말이 안 됩니다. 일본의 특공대에서 죽은 젊은이들이 있습니다만, 그들의 ‘이야기’는 우파가 일원화하고 있습니다. 국가를 위해, 천황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런 ‘이야기’와 부합하지 않는 특공대원은 많이 있습니다. 너무 싫어서 도망친 사람 등,,여러 주체성이 있지요. 특공대를 하나의 이야기로 환원하는 것은 주체의 다양성이나 복잡성을 말살시키는 일입니다. 똑같은 방식의 ‘이야기의 폭력’을 좌파가 행해서는 안 됩니다.

박: ‘위안부’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해 온 사람은 소수입니다. 하지만 언론이 위안부’ 문제에 강하게 공감하면서 국민을 개입시켜 논의가 두 쪽으로 갈려 있습니다. 이 분열은 한일 문제처럼 보이지만 저는 좌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어떤 사태를 곧잘 정치적 입장에 입각해서 바라보기 쉬운데, 그런 입장과 상관없이 사태에 대해 생각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설 공간은 좁아졌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들려오지 않았던 목소리를 듣고, 제3의 공간을 넓히는 시도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가 ‘제국’이라는 말에 담은 것은 민족뿐만 아니라 성이나 계급의 지배, 배제/차별의 문제입니다. 즉, ‘위안부’ 문제는 지금까지 일본이라는 국가 주체의 문제로 여겨져 정치 문제로만 이해되어 왔지만, ‘이동’을 유발하는 경제 문제가 주목되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경제적 욕망을 내면화하는 형태로 많은 사람들이 ‘이동’해 갔습니다만, 그런 문제에의 주목이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을 착취하는 일로 경제적 이익을 얻은 것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의식과, 거기에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자기반성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업자 중에는 일본인도 있었고, 그 사실도 썼습니다.

이분법 바깥의 사태를 그려냈다

나카지마: 일본인 병사와 협조한 ‘위안부’라는 것은 지원단체가 그리는 피해자상과는 다릅니다. 한편으로 일본의 우파가 그려내는 ‘매춘부’라는 상과도 다릅니다. 그런 식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존재를 드러내는 일로  ‘제국’의 폭력구조를 밝혀내려고 한 것이 박유하선생의 저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저를 비난한 사람은 한국의 경우 남성학자가 많았습니다. 일본을 면죄하는 일은 하지 말라고요. 하지만 그러한 비판이 무엇을 면죄하고 억압하며 은폐하고 있는지 거꾸로 묻고 싶었습니다.

일본인, 일본 국가에 의해 조선 민족이 지배 당하고, 피해자가 되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만 보는 동안) 민족 레벨 이외의 구조적 문제가 사라져 버렸지요.

나카지마: 80년대 말부터 90년대에 논의되었던 서발턴의 목소리의 대변/ 표상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스피박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비판해 온 것은 특정 서발턴을 만들어 대변/표상하는 일의 권력성과 폭력성입니다.

박: 맞습니다. 저는 ‘전문가도 아니면서’라든지 ‘운동가도 아니면서’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당사자도 아니면서 화해를 말하지 말라’는 말도 들었는데, 오늘날까지도 뿌리 깊은, 당사자를 일원화하는 사고가 또다른 당사자를 배제하는 권력으로서 기능해 왔습니다. 동시에 ‘대변자(후예)의 당사자성’이 빠진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들을 돌아 보지 않아서 생긴 권력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나카지마: 저도 작년에 박유하선생님의 불구속 기소에 항의하는 성명에 이름을 올린 후, ‘전문가가 아니다’라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저는 사상사와 쇼와(昭和)사도 연구하고 있고 넓은 의미에서 역사학자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조선어 문헌을 읽을 수 있을 것, ‘위안부’ 연구자일 것 등이 ‘위안부’ 문제를 논하는  ‘전문가’의 요건이 된다면 대부분의 논자들은 의논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전문가가 아니다’라는 말의 억압 때문에 문제를 다각적으로 논할 수 없게 되지요.

지워져 버린 ‘주체성’

나카지마: ‘나눔의 집’의 방침에 거리감을 느끼던 전 ‘위안부’분의 존재가 책에 쓰여 있습니다. 특정 ‘위안부’상이 확립되어 버리면 그 자신의 생각은 그 공간에서는 지워져 버리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나눔의 집에 거주하면서 일본고발에 참여하는존재도 중요합니다. 어느 쪽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면이 있으면서도 정치에 휩쓸려 온 전 ‘위안부’의 전체상을 보지 않으면 문제는 한 발짝도 진전되지 않을 것입니다.

박: 그 분은  운동의 방식과 ‘위안부’를 둘러싼 이해에 관해 (지원단체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던 분이었습니다. 가족이 없기도 해서 자주 저에게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일본을 비판하지 않으면 주변으로부터 ‘일본을 좋아하는 거지?’라든가, ‘가짜 위안부’라고 비판 받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또, 먼저 이쪽이 ‘용서하겠다’고 하면 일본이 그에 맞는 대응을 하지 않을까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 목소리를 저는 고소 당하기 직전, 14년 4월 한국에서 개최했던심포지엄을 통해 알렸습니다. 지원 단체를 거치지 않고 보상금을 직접 받고 싶다는 또다른 목소리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한달 반 후에 고소를 당했습니다.

나카지마: 그런 식의 차이나 (어느 한쪽으로 규정할 수 없는) 불규정성이 중요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에서는 그런 부분이 완전히 도외시 되어 버립니다. 박유하선생님은 여기에 메스를 가해 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서발턴 연구의 성과에 바탕한 중요한 문제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2016년 2월 5일, 오사카 시내에서

일본어원문(日本語): 対談原文 – 『週刊金曜日』2016年 6月 17日号より

渦中日記 2015/12/15

기소 이후 한달이 되어가는데 아직 원래의 일상을 못 찾고 있다. 원래의 일상이란, 재판과 그에 관련된 일들이 생활과 감정의 중심이 되지 않는 상태다.
재판이 이어지는 동안은 기본적으로 내게 “비일상”일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시간이 많이 지난 탓에 기소 이전에는 조금은 평정심을 찾았었다. 그런데 기소 이후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일에 대한 의욕을 잃었고, 아직 살아나지 않는다. 그저, 필요 최소한도의 말과 글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한일 양쪽 성명을 비롯해 이런 글들, 그리고 페북에서 여러 글들을 써 주는 분들을 위해서 기운을 차려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장정일 작가의 말은 바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나는 이 1년동안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저 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라고 말해왔을 뿐이다.
얼마 전에 인터뷰를 해 주었던 기자가 이번에는 칼럼을 써 주었다. 욕 먹을 걸 알면서도 이렇게 쓴 기자가 여성이라서 더 기쁘다.

http://www.hankookilbo.com/m/v.aspx…

http://news.donga.com/3/00/20151215/75364063/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46940285332883

渦中日記 2015/12/5

기자회견이 끝나고 사흘. 기소 이후 이주일 여, 내내 경황이 없어 답하지 못했던 전화, 문자, 메일, 메시지등에 답하기 시작했다.
이 주말엔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원고도 써야 한다.

경향신문 기자가 이번사태에 대해 정리한 기사를 써 주었다. 생각해보면 <제국의 위안부>가 나왔을 때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전면기사로 서평을 써주었던 매체다. 그럼에도 얼마전엔 나를 “친일교수”로 모는 기사를 쓰기도 했던.
당연한 얘기지만, 하나의 매체가 결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걸 나는 이 책을 간행한 이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자발적 매춘부”라는 말이 내 이름과 함께 돌아 다닌다. 어떤 이는 “설사 직접 쓰지 않았어도 그렇다고 알 수 있는 내용을 쓰지 않았느냐”고 한다.
위안부문제 해결은 어쩌면, 뿌리깊은 매춘차별의식에서 벗어날 때에야 가능해질지도 모르겠다. 당사자든 주변인이든.

“논박”이란 때로 필요하지만, 때로 무의미하다. 중요한 건 논지도 아니고, 지식도 아닐 수 있다. 세계를 지배하는 건 그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태도, 그리고 타자와 마주하는 자세일 뿐이다.

http://h2.khan.co.kr/20151203163105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41018259258419

渦中日記 2015/7/29

정우성대표님이 올려 주신 마이니치 신문 칼럼을 번역해 보았다.
군인과 위안부관계를 강조하는 부분등 한두군데 불편한 곳이 있지만( 그리고 검찰에선 “사정을 들은”것이 아니다. “범죄리스트 53개항목”에 대해 아침부터 저녁늦게까지 “조사”를 받았다.) 책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던 “제국”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에 대해 이만큼이나 제대로 읽어내고 또 기대했던 반응을 보여준 이는 많지 않았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말해 두자면 책의 인세는 변호사비용 착수금도 되지 않는다. 물론 세금을 내고 나면 한참 미치지 못할 것이다. 조정이 성립하거나 이길 경우엔 성공보수를, 질 경우엔 2억7천만원을 또 지불해야 한다. 2심,3심 갈 지도 모른다.
아무튼 착잡한 건, 일부나마, 일본에서 책 판 돈으로 한국의 재판비용을 대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팔리는 책은 앞으로 공적비용으로 쓰기로 한지라 더욱 그렇다.

나는 위안부할머니와 한일갈등해소를 위해 책을 썼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나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한 건 결국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 된다는 얘기가 된다. 나를 비난하는 이들이 곧잘 하는 소리인 “일본이 듣고 싶어하는 소리”가 아니라 별로 듣고 싶지 않았을 소리에 귀기울이는 일로. 그리고 그 상황이야말로 재판을 일으키고 지지하는 이들이 원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 지독한 아이러니를 알까.

아무튼, 기존 운동이나 연구와 별 관계없는 사람들은 이 편집위원처럼 허심탄회하게 읽고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주었다는 걸 이 9개월동안 느껴왔다. 물론 소수지만 관계자들 중에도 감동했다고 말해 준 이들이 있어 고마웠다.

야마다위원은 아베수상의 70년 담화를 위한 지식인모임의 멤버라고 한다. 영향이 있을지 여부는 더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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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위안부> 다시 읽기 야마다 다카오

박유하 세종대 일문과교수가 고군분투를 이어가는 중이다.<일본군의 위안부-성노예>설을 부정한 노작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이 한국에서 판매금지처분을 당했기 때문이다. 나는 본 칼럼에서 전에도 한번 이 책에 대해 언급했는데, 제2차대전종료후 70년, 한일국교정상화 50년이 되는 지금이야말로 <제국의 전쟁>을 분석한 이 저서의 깊은 통찰을 되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의 키워드는 <위안부>지만,그 이상으로 <제국>이다.
제국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나라가 강대해지면서 다른 여라나라들을 합쳐 더 큰 나라가 된 것>( 신명해국어사전)이다. 제국주의란 <다른 소국의 권익/존립을 희생시키더라도, 자국의 영토/권익의 확대나 신장을 꾀하려는 침력적경향>(앞의 사전)이다

제국의 역사는 길지만, 근대사의 제국은 19세기의 유럽열강이다. 일본은 열강의 아시아 진출에 대항해서 제국이 되었다. 제국은 새로운 영토나 자원을 찾아 먼나라로 군인이나 상인을 보냈다. 그 지점에 위안부의 수요가 있었다. 가난한 집 딸들이 돈으로 팔려갔고 알선업자가 있었다. 인권같은 건 돌아보지 않았던 시대였다.
위안부는 그런 경제사회구조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이해는 과격하기는커녕, 국제사회가 본다 해도 이견은 적을 것이다.

저자는 위안부 증언집이나 일본의 전쟁문학을 꼼꼼하게 읽고 위안부와 일본군사이에는 사랑도 우정도 있었다고 썼다. 그것이 본질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노예적인 지배/복종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논했다.
이 책은 한국어판이 4000부, 일본어판이 15000부 팔렸다.

작년 6월, 전 위안부 9인이 한사람당 3000만원의 손해배상에 더해 출판/광고를 금지하는 가처분을 청구. 금년 2월에 서울동부지방법원에서 34곳을 삭제하지 않으면 출판도 광고도 할 수 없다는 가처분이 나왔다.
박교수는 지난 달말에, 복자를 많이 사용한 삭제판을 1000부 간행하는한편, 본소 준비에 들어갔다.
그 동안, 도합 5회 검찰이 사정을 들었고 명예훼손죄에 의한 기소는 불가피한 정세인 듯 하다.
제소 배경에는 <일본은 천황제와 사무라이전통에 근거한 툭수한 군국주의국가다>라고 하는 위안부지원단체의 생각이 존재한다.

박유하는 일본의 선의를 논증하려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과거를 제국주의 세계사를 기반으로 분석하려 하고 있다.
자본과 군의 이동은 필연적으로 <여성의 상품화>를 초래한다. 지금도 전세계군사기지 주변에 <위안부>가 보인다. 박교수의 문제의식은 그 지점에 있다.

박교수는이렇게 썼다.

< 위안부지원운동은 비판대상을 일본이라는 고유명으로 한정시킨 결과,위안부문제를 “남성과 국가와 제국”의 보편적 문제로 취급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한국이나 미국을 비롯한 일본이외의 나라도 이 문제에서 무죄일 수 없다는 점을 오래도록 못 보게 만든 것도 그 결과일 것이다..>

한일의 불화는 양국에 고유한 의심과 미성숙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제국주의역사가 만든 것이다. 일찌기 서구에 추종하며 강자로서 아시아를 지배한 일본은 타자를 지배하는 서양기원의 사상을 넘어 국제사회를 평화공존으로 이끄는 새로운 가치관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의 이해를 얻어 가며 도전하고 싶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165405096819736

渦中日記 2015/7/28

우연히도, 어제와 오늘, 일본의 마이니치 신문에서 나에 대해 언급한 기사가 났다. 어제 칼럼은 정우성대표님이 태그해 주셨으니 오늘기사만 우선 번역해서 올려 둔다.
마이니치신문은 얼마전부터 90년대에 위안부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실시했던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해 심층취재한 기사를 연재중이다. 그 공과(功罪)를 마주하려는 기사인데, 이렇게 말하는 기금에 대해 사죄의식이 없는 “꼼수”였다고 말한 것이 지원단체들이었다. 나는 책에서 그 부분을 비판했는데, 할머니들을 비판한 것처럼 왜곡유포된 것이 고발이라는 사태였다.

이달말로 닥친 형사고발조정과 다음달에 있는 민사재판에 관해 의논하기 위해 변호사사무실로 향하는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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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한 식민지책임

<전후일본의 반전사상이 국민들에게 뿌리내린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식민지지배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오지 않았던 거 아닐까요>

금년 6월, 동경의 호세이대학에서 열린 일본사회문학회 30주년대회에서 기조강연을 한 한국/세종대 박유하교수는 그렇게 물었다.

부부이야기로 읽히는 경우가 많은 나츠메소세키 <명암>에는 가난 때문에 조선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런 근대소설을 바탕으로 박교수는 제국이 국민의 이동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다는 점, 이주가 전쟁을 염두에 둔 국책이었다는 점,일본에서의 기민(棄民) 들이 식민자가 되어가는 모습을 지적했다.

그리고 위안부에 대해 언급하면서 <중요한 건 누구나가 기피하는 일을 가장 가난한 이들이 떠맡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강제인지 매춘인지 하는 논의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하고 말했다.
그의 전문인 일본근대문학에 그려진 식민지의문제는, 역사문제논의에도 반영되었다.

2006년,아시아여성기금이 연 국제심포지엄에 패널로 참석했던 박교수는, <한국의 민족주의가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더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고 발언했었다.
금년 5월에 서울에서 식민지에 대한 관심에 대해 다시 물었을 때도 <개인적으로 차별당한 경험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국인여성이라는 사실은 관계가 있습니다. 좋아해서 시작한 소세키연구가 진보지식인으로 불리는 것에도 의문을 가졌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문제의식을 저술한 것이 화제작 <제국의 위안부>이다. 교토의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금년 2월에 열린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워크샵에서는 왜 썼느지,무엇을 강조하고 싶었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햇다.
<위안부가 목소리를 낸 1991년, 누구나가 식민지지배문제로 이해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이후 위안부문제논의에서 제국의 문제가 빠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일본남성의 문제로만 축소되었습니다 >

<조선의 여성은 “애국”을 당했고 일본인이 되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 조선인 위안부상을 통해 식민지지배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 겁니다. 일본이외의 다른 제국국가의 문제도 환기시키고 싶었습니다>
서구일본학자들에 의한 금년 5월성명에는 <제국에 관련된 인종차별, 식민지주의와 전쟁,그리고 그것이 (중략)시민들에게 끼친 고통과 충분히 마주해 온 나라는 아직 어디도 없습니다> 라는 말이 이오진다. 그리고 일본정부에 대해 <과거의 식민지배와 전쟁당시 침략문제와 마주하라>고 요구했다.

박교수의 화해방안은 책임을 무화시킨다는 비판이 있다. 그리고 <제국의 위안부>한국판을 둘러싼 형사/민사쟁투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식민지책임은 과거의 제국 전체를 향한 난제가 아닐까.(기시도시미츠. 岸俊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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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박유하 씨의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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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 씨의 작업> 가라타니 고진

최근 들어 한일·중일간 긴장이 높아진 것은 일본정부가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내(일본)내 제반 문제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대외적인 긴장/대립을 이용해서 일본을 언제든 전쟁가능한 체제로 만들려 하고 있다. 따라서 위안부문제든 영토문제든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생각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내가 일본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내가 일본국민이기 때문이다. 외국의 경우는 그 나라 국민들이 (자국을) 비판할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에도 그런 이들이 많이 있다. 나는 그러한 상호간 신뢰를 바탕으로 활동해 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안되는 일이 있다.

그 점에서, 나는 적극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서서 발신하려 해 온 박유하 교수에게 주목하고 있다. 그녀의 작업은 한국에서는 친일적이라고 비난 받고 일본에서는 반일적이라고 비난 받을 것이다. 그것을 처음부터 각오하고 오랫동안 위안부문제에 천착해 온 박유하 교수에게 나는 깊은 경의를 품고 있다.

(2014 년 8 월)

<원문>

パク・ユーハ氏の仕事 柄谷行人

近年、日韓や日中間の緊張が急激に高まって来たのは、日本の政府があえてそれ を作りだそうとしているからだ。それによって、国内における諸問題を打ち消すた めである。そして、対外的な対立・緊張を利用して、日本をいつでも戦争できる体 制に変えようと図っている。したがって、従軍慰安婦問題であれ領土問題であれ、 それらを解決する気などさらさらない。

私がこのように日本の政府を批判するのは、日本の国民だからだ。外国に関し ては、その国の国民が批判するだろうと思う。実際、韓国にもそのような人達が 大勢いる。私はこうした相互的信頼にもとづいて活動してきたのである。とはい え、それだけではすまないことがある。

その点で、私は、積極的に日本と韓国の間に立って発言しようとしてきたパ ク・ユーハ氏に注目している。彼女の仕事は、韓国では親日的と非難され、日本 では反日的と非難されるだろう。そのことを最初から覚悟して、従軍慰安婦問題 に長年取り組んできた氏に、私は深い敬意を抱いている。

(2014年8月)

『제국의 위안부』 – 발간 직후 신문사 서평 및 인터뷰 모음

서평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