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나의 이해 #3

박일환
2015년 2월 22일

<잠시 쉬어가며>

다른 이의 담벼락에서 논전이 이어지는 걸 보고 있는 중에, 박유하 교수가 일본에게 사죄를 요구한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하는 이가 있었다. 그래서 아래 글을 타이핑해서 댓글로 달았다.(비판자들은 박유하 교수의 책에 있는 이런 구절들은 왜 모르는 척하는 걸까? 차라리 책 전체를 타이핑해서 연재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에 앞서 ‘제국’ 구축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위안부를 필요시했던 나라로서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제국’의 욕망과 지배를 다른 제국 국가에 앞서서 반성하는 의미를 갖는다. 이미 영국과 이탈리아가 그런 사죄를 한 적이 있지만, 서양의 제국주의를 의식하며 제국주의로 향하게 된 일본의 사죄는 아시아의 통합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것이 가능해질 때, ‘전후 일본’은 비로소 ‘제국후 일본’(포스트 제국 일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일본 정부의 ‘기금’ 안이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사죄나 보상의 형태를 정하는 과정에서 ‘당사자’가 배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지원단체와 ‘위안부’를 참여시켜 협의할 필요가 있다. 다만, 지원단체나 위안부들도 이제까지의 대표적인 주장 이외의 의견을 가진 이들 또한 참여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정부와 당사자 간의 협의를 위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양국의 관계자/지식인들도 참여시킬 필요가 있다. ‘위안부 문제’란 당사자와 운동가들만의 판단으로는 합의에 도달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20년 동안의 세월이 그것을 증명한다.

만약 해결안에 대한 합의에 도달해서 새로운 ‘사죄와 보상’을 하게 된다면, 그때는 세계를 향해 일본의 생각을 밝히는 공식적인 형태를 취하는 편이 좋다.

그때 일본은, ‘조선인 위안부’ 문제가 ‘위안부’라는 존재를 통해 드러난 ‘식민지배’ 문제임을 말하고,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에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가 포함되지 않았기에 그런 한일협정을 보완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한일기본조약 자체를 흔드는 어려운 사태를 감수하지 않고도 한국과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그때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지배하는 기간에 희생당했던 수많은 사람들 – 3·1 독립만세운동, 간토 대지진, 병사로 동원되어 참가한 전쟁, 고문 등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 – 에 대한 진심을 그 ‘사죄’ 속에 담아야 한다.” (271~272쪽)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7059513320962

정승원,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읽기 1

정승원
2015년 2월 21일 ·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읽기 1
– 책을 읽는 몇 가지 방법

제가 오늘 페북에서 몇 차례 논쟁과 질문을 주고 받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기본적인 구조만 알면 논쟁을 줄일 수 있습니다.

다음의 프레임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1. 이 책은 오랫동안 풀리지 않고 있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 위안부를 모욕하는 책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어느 용감한 교수가 위안부 부정이 담긴 책을 쓸 수 있겠습니까? 미치지 않고.

2. 위안부를 부정하거나, ‘자발적 매춘’만을 강조하고 책임을 방기하는 일본 우익의 논리가 아닙니. 당시 드러난 위안부의 다양한 모습들을 담아냈지만, 일본의 구조적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 고로, ‘친일파’가 아닙니다. 친일파 교수라고 생각하고, 온갖 추측성 말을 그만 뱉어내시기
바랍니다.

3. 이 책은 제국/국가의 치하에서 억압받은 여성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 입니다. 식민지 치하의 위안부, 기지촌의 양공주 등으로 이어지면서, 지금도 제국의 체제 하 에서 계속되는 여성의 억압을 다루고 있습니다.

→ 피해자인 여성을 모욕하는 책이 아니라, 여성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페미니즘적인 책입니다. “나는 <제국의 위안부> 읽고 너무 좋았다. 일제 해방 이후 어느 누가 이토록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고 위안부에 대해 기록하는 서술을 내놓았었단 말인가.”(어느 페미니스트)

4. 이 책에 나오는 정보는 ‘위안부’나 ‘위안부 운동’에 대해 언론 수준의 정보만 들어온 한국사람에게 굉장히 낳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정보와 다르다고 반발하지 마시고, 차분히 읽어보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몰랐던 사실이 많습니다. 그런 다음에 기존의
정보와 함께 검토해보면 됩니다.

5. 박유하 교수는 본인 스스로 밝힌 대로 뉴라이트가 아닙니다. 본인이 판단하기에 신빙성 있다고 생각하는 자료를 학자의 이념 성향에 관계없이 인용합니다. 이영훈 교수 인용했다고 해서 뉴라이트가 아닙니다.

6.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사죄’와 ‘보상’문제는 위안부 문제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류 지원단체(과 학자들)를 통한 하나의 목소리만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박유하 교수가 제시하는 해법은 약간 다릅니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지원단체에서 반대해온 ‘국민기금’에 대해 긍정적으로 봅니다. (그것은 일본의 진보파 일부(와다 하루키,
우에노 지즈코) 도 국민기금에 찬성합니다.)

– 지금까지와 다른 해법을 제시했다고, 뉴라이트, 친일로 몰아가서는 안됩니다. 이런 해법은 토론이나 논쟁의 대상입니다.

7. 많은 사람이 화해라는 단어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사죄를 받지 않고, 무조건 용서해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박유하식 화해’를 꼼꼼히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비판하십시오.

8. 위안부 문제의 전체적인 상이나 연구 결과를 담아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위안부 연구는 현재까지도 진행 중입니다. 위안부 숫자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분명, ‘제국의 위안부’가 기존의 위안부 연구보다 더 나아간 것은 확실합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그런 연구의 한 지점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교수 한명이 위안부 문제를 모두 담아낼 수 없습니다. 이 책은 논의의 시작점입니다.

9. 탈민족, 탈국가의 이미지로 ‘제국의 위안부’를 생각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전작 ‘화 해를 위해서’는 탈민족, 탈국가의 관점에서 한일 양국 시민들의 협력을 통한 한일의 화해를 이야기했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그 색채가 약간 다릅니다. 책임을 묻기 위해서 국가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이라는 계급적인 시각이 있습니다. ‘탈민족’의 색채는 엷습니다.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가지고 와서, 이야기하는데, 헛다리 짚은 것입니다.

10. 이 책은 다차원적으로 읽힙니다. ‘탈민족주의적인 젠더’의 관점으로, ‘좌파의 역사관’으로, 탈민족주의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박 교수는 동의하지 않을 실지 몰라도, 위안부 문제 해결 방식이 사민주의적이라고 봅니다. 기존의 좌우파 논리를 벗어나 있습니다. 제3의 길 같습니다. 저의 페친 최병천 샘과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특정한 이념으로 규정짓지 말고, 각자 자유롭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7052076655039

박일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나의 이해 #2

박일환
2015년 2월 21일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나의 이해 2>

두 번째 글입니다. 다른 사람 담벼락에서 짧게 논쟁을 이어가다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아예 제 담벼락에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러다 보니 애초에 쓰려고 했던 내용과 다른 내용을 먼저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다른 비판들은 대부분 근거가 부족하거나 허위에 의한 비방이라고 보이는데, 이 부분만큼은 충분히 논쟁이 될 만한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법에 대해서는 충분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최소한의 상식만 가지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출발은, 박유하 교수가 일본국가의 책임을 부정한다고 말씀하기에 그건 사실과 다르며 분명히 책임을 묻고 있다고 했더니, 박유하 교수는 일본국가의 ‘강제성’ 부분을 부정한다면서 저에게 법원의 가처분 결정문과 고노담화를 읽어보라고 하더군요. (쟁점은 일본의 책임을 어디까지 묻느냐는 것이겠지요.)

핵심은 조선인 위안부의 강제연행 여부인데요. ‘강제성’과 ‘강제연행’은 분명 다르지요. 박유하 교수는 위안부에 대해 일본 국가가 기획하고 관리(주체적으로 관여) 했으며, 위안소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다만 일본 군인의 직접 강제 연행은 드물며 예외적 일탈 정도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구체적 사례가 드물다는 거지요. 이에 대해 국제사회뿐만 아니라 일본도 고노담화를 통해 ‘강제성’을 인정했는데, 오히려 박유하 교수가 그런 부분을 사상함으로써 법적 배상을 어렵게 한다는게, 제가 이해하는 비판자들의 주된 요지입니다. 우선 일본 정부가 발표한 고노담화에서 해당되는 부분을 살펴볼까요?

“위안부의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맡았으나, 그 경우에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이 있으며,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하였다는 것이 명확하게 되었다. 또한,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태하에서의 참혹한 것이었다.” (한국위키피디아의 번역문)

자세히 읽어보면 표현이 모호합니다.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맡았으나’라는 부분은 직접 연행을 하지는 않았다는 의미가 강한데, 뒤에 나오는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하였다’라는 부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관헌은 아마도 총독부의 말단 관리(관헌이라고 했으니 군인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일 겁니다. ‘가담’이 ‘감언, 강압’인지 강제연행인지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보기에 문맥상으로는 ‘감언, 강압’에 가깝다고 보입니다. 문장의 출발과 중간 내용이 ‘모집’에 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박유하 교수는 모집 과정에서 있었던 ‘감언, 강압’을 부정하지 않으며, 다만 직접 강제연행은 사례가 드물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해석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물론 강제연행이 없었어도 ‘감언, 강압’만으로도 충분히 범죄행위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박유하 교수도 일본국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고요.(지원단체는 보상이 아닌 배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이의 담벼락 논쟁에서 상대방에게 직접 강제연행한 사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쉽게 풀릴 문제라고 했습니다(최소한 의미있는 정도의 수치가 나와야겠지요). 그에 대해 돌아온 답이 고노담화를 보라는 것이었고, 살펴본 것처럼 고노담화의 내용은 모호합니다.

현재 일본 우익은 고노담화를 부정 내지 수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위안부 지원단체는 고노담화로는 부족하며 일본의 진정한 사죄와 국가범죄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죄문제에 있어서는 고노담화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른바 종군위안부로서 허다한 고통을 경험당하고, 심신에 걸쳐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으신 모든 분들께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

제가 보기에 진심은 어떤지 몰라도 문구상으로는 사과의 내용을 충분히 담고 있습니다. 이후에 후속조치로서 보상 혹은 배상의 문제에 있어 ‘아시아여성기금’ 문제가 불거지는데, 여기서 정대협 등 위안부 지원단체는 일본의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이 문제는 복잡해서 따로 다루어야 합니다)

정리를 해야 할 듯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부분을 어떻게 보느냐는 충분히 논쟁이 될 수 있으며, 이 문제에 국한해서 문제가 불거졌으면 전문가도 아니고 특별히 아는 것도 없는 제가 나설 이유도 없었습니다. 학자들끼리 논쟁을 하면 되니까요. 언뜻 보기에 강압이나 강제연행이나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그 차이가 작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줄곧 문제가 되고 있는 거지요. 일본은 고노담화에서 많은 것을 인정하고 사과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우익의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고노담화에서 더 나아가게 하려면 강제연행 부분을 더 명확하게 밝혀내는 수밖에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박유하 교수는 본인이 파악한 자료에서 그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고요. 말로 떠드는 건 상대를 설득시키지 못합니다. 구체적 자료에 근거한 치밀한 논리가 필요한 법입니다.

제대로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판단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작성일: 2015.02.23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7051649988415

박일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나의 이해 #1

박일환
2015년 2월 21일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나의 이해 1>

책을 안 읽은 분들이 많고, 구하기 어려워서 내용을 궁금해 하는 분들이 계시므로 제가 이해한 대로 몇 차례 서술하고자 합니다. 물론 저 역시 오독의 함정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며, 그런 것까지 감안해서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위안부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해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갈까 합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위안부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상은, 어린 소녀들이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서 하루에 수십 명씩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능욕당한 민족의 수난자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박유하 교수는 대체로 이렇게 말합니다.

위안부로 끌려간 사람들은 10대도 있지만 주로 20~25세 정도의 여성들입니다. 일본군이 강제로 끌고간 사람도 있지만 그건 소수이며, 다수는 민간의 업자나 관청의 말단관료들이 감언이설로 속여서 데려간 경우이고, 나아가 위안부의 성격을 알고 간 사람도 있고, 실제로 매춘에 종사하다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간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듯 위안부를 구성하고 있는 여성들은 층위가 매우 다양하며 하나의 이미지로 획일화해서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박유하 교수뿐만 아니라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러한 팩트마저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사실에 대한 해석의 문제입니다. 우선 민간업자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면서 일본이라는 국가의 책임을 면해주려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박유하 교수는 그런 민간업자들을 만들어낸 일본 국가에게 1차적 책임이 있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조선인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가 된 것이 ‘식민지’에 대한 일본 제국 권력의 결과인 이상 일본에 그 고통의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을 직접 ‘동원’한 것이 업자들이었다고 해도, 또 그들이 ‘가라유키상’처럼 유괴되거나 자발적으로 팔려갔다고 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또한 위안소를 기획하고 관리한 주체가 일본임도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군이 성병 검사를 실시했다는 사실도, 일본군이 상품과 그것이 유통되는 시스템의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관리자로 돌아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식의 일방적 권력의 존재는 군이 시스템을 ‘관리’한 관리자라는 사실, 다시 말해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주체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자신들의 손은 더럽히지 않고(온건통치를 유지하면서) 식민지인들에게 불법행위를 전담시켜 그들을 동족에 대한 가해자로 만들었다.”

다음은 ‘자발성’과 ‘매춘’이라는 말에 대해 살펴볼까요? 혹자는 박유하 교수가 조선인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로 표현했다고 하는, 오도된 이야기를 사실처럼 퍼뜨리기도 합니다. 위안부들은 일본 군인들에게 관계의 대가로 분명히 돈을 받았습니다. 이 역시 팩트이며, 이 점을 가지고 일본 우익들은 위안부를 돈을 벌기위한 자발적인 매춘부일 뿐이라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박유하 교수의 견해는 이렇습니다.

“그런 ‘추업’에 그녀들이 ‘자발적’으로 향했다면 무엇이 그런 표면적인 ‘자발성’을 이끌어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남성이고 군대이고 국가였다. 그리고 ‘일본제국’이었다. 다시 말해 ‘위안부’란 어디까지나 국가와 남성, 그리고 격리된 남성 집단을 만드는 전쟁이 필요로 했기 때문에 생긴 존재다. 위안부의 자발성이란, 본인이 의식하지 않는다 해도, 국가와 남성과 가부장제의 차별(선별)이 만든 자발성일 뿐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폭탄이 터지는 최전방에서도 폭력에 시달리며 병사들의 욕구를 들어주어야 했다.”

박유하 교수가 <제국의 위안부> 를 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이유는 우리가 ‘일본군에게 순결을 짓밟힌 어린 소녀’, ‘일본에게 범죄를 추궁하며 싸우는 투사 할머니’ 정도로 알고 있는 위안부 상에 대한 단일한 이미지를 벗겨내야만(그것이 매우 고통스러운 일일지라도), 역사적 사실과 진실에 다가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하나이고, 다음으로는 지금도 일본의 국가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 우익들에게 근거를 들이대며 당신들 국가의 잘못이라는 것을 일러주기 위함입니다.

자꾸만 길어지네요. 이만하고, 다른 이야기는 이어서…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7051543321759

渦中日記 2015/1/21

비교문학자 니시마사히코 (西成彦)선생이, 2월에 교토에 있는 리츠메이칸대학에서 내 책을 대상으로 심포지엄을 연다. 마침 어제 일본신문에 다른 책과 함께 책에 대해 다루어준 우에노치즈코 선생도 토론자로 나서 주기로. 나리타류이치선생(成田龍一)이나 이와사키미노루선생(岩崎稔)등, 가까운 지인학자들도 동경에서 일부러 와 준다고 하니 깊은 논의가 가능할 것 같다.
전체 테마는 <한일경계를 넘어서–제국을 대하는 방식>. 최근에 <제국의 어둠>이라는 책을 낸 김항선생의 책도 같은 테마로 묶어 논의한다고 한다.

우에노선생은 9년 전에 쓴 책<화해를 위해서>일본판해설을 써 주었던 분이다. 그 때는 내 책이 <뜨거운 불 속의 밤을 줍는 행위>(일본어로는 이렇게 표현한다. 직역)이라 했는데, 이번엔 <불 속에 직접 뛰어 들었다>고 표현했다. 고발당한 건 그 결과일 수 있겠지만, 나로선 고발이후 비로소 나를 덮쳐오는 <뜨거운 불>을 만났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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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裕河さんの『帝国の慰安婦』日本語版(朝日新聞出版)が刊行されて3か月余りがたち、多くの読者がこの本を手に取り、さまざまな反応を見せ始めている。
戦後70年の年にもあたる今年、私たちは「帝国日本」への向き合いを新たな形で求められており、その点では、東アジアの私たちすべてが、この課題の前で平等だ。
「慰安婦問題」ひとつをとってみても、それは「帝国日本」が招き寄せた問題であった。日韓で平行線をたどっているかに見えるこの問題に対して「共通の視点」をさぐりあてるための意見交換の場としたい。

立命館大学・公開ワークショップ
《日韓の境界を越えて~帝国日本への対し方~》
2015年2月22日(日)14:00-17:30
〈「帝国の慰安婦」という問いの射程〉
場所:朱雀キャンパス2階203教室
司会:西成彦(立命館大学)
パネラー:朴裕河(世宗大学校)、平井和子(一橋大学)、森岡正博(大阪府立大学)、上野千鶴子(立命館大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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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お、同企画は、下記企画と対をなすものであり、合わせて皆様の来場・参加をお待ちしている。
《日韓の境界を越えて~帝国日本への対し方~》第1回「帝国の擬人法」
2015年2月12日(木)15:00-17:30
場所:衣笠キャンパス末川記念会館第3会議室
司会:西成彦(立命館大学)
パネラー:金杭(延世大学校)、 沈煕燦(立命館大学専門研究員)、原佑介(日本学術振興会特別研究員)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46280138732233&set=a.578003518893233.14637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4/11・27ー2

아침엔 많이 외로웠다. 가처분심리가 종결되면서 심란했던 여파일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지인들이 아사히신문에 서평이 났다면서 여기저기서 보내 주었다.

서평을 쓴 다카하시 겐이치로씨를 처음 만난 건, 1995년에 시마네에서 했던 한일문학심포지엄에 참석했을 때다. 나는 그 무렵 웅진출판과 <21세기 일문학의 발견>이라는 시리즈를 기획/편집해서 내는 작업을 했었고 그 시리즈에 그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라는 책을 넣었던 참이었다. 그래서 더 반갑게 인사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2013년 여름, 정말 오랫만에 이번에는 그가 재직하는 일본의 대학에서 만났다. 나는 위안부문제를 테마로 강연을 했고 그는 토론자로서 코멘트를 해 주었다.

하지만 그와 따로 만날만큼 교류가 깊지는 않았다. 그런 그가,

나는 이토록 고독한 책을 읽은 적이 없다

고 쓰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과분한 서평. 하지만 아마도 이 한마디때문에, 나는 이 서평을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렇게 쓴 이가 일본인이어서 서글프기도 했던 하루.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06431722717075&set=a.1006431706050410.1073741834.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4/9/6-2

연재서평을 써 주셨던 정우성대표님이 일곱번째 글을 올려 주셨다. 휴식시간에 받은 뜻밖의 선물.
https://m.facebook.com/story.php…

http://iamwoo.wordpress.com/2014/09/06/%ec%a0%9c%ea%b5%ad%ec%9d%98%ec%9c%84%ec%95%88%eb%b6%80-%ec%84%9c%ed%8f%89%ec%9d%b4%ed%9b%84-2/

본문: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53233011370280

가라타니 고진, 박유하 씨의 작업

PDF다운로드: 가라타니 고진, 박유하 씨의 작업

<박유하 씨의 작업> 가라타니 고진

최근 들어 한일·중일간 긴장이 높아진 것은 일본정부가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내(일본)내 제반 문제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대외적인 긴장/대립을 이용해서 일본을 언제든 전쟁가능한 체제로 만들려 하고 있다. 따라서 위안부문제든 영토문제든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생각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내가 일본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내가 일본국민이기 때문이다. 외국의 경우는 그 나라 국민들이 (자국을) 비판할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에도 그런 이들이 많이 있다. 나는 그러한 상호간 신뢰를 바탕으로 활동해 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안되는 일이 있다.

그 점에서, 나는 적극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서서 발신하려 해 온 박유하 교수에게 주목하고 있다. 그녀의 작업은 한국에서는 친일적이라고 비난 받고 일본에서는 반일적이라고 비난 받을 것이다. 그것을 처음부터 각오하고 오랫동안 위안부문제에 천착해 온 박유하 교수에게 나는 깊은 경의를 품고 있다.

(2014 년 8 월)

<원문>

パク・ユーハ氏の仕事 柄谷行人

近年、日韓や日中間の緊張が急激に高まって来たのは、日本の政府があえてそれ を作りだそうとしているからだ。それによって、国内における諸問題を打ち消すた めである。そして、対外的な対立・緊張を利用して、日本をいつでも戦争できる体 制に変えようと図っている。したがって、従軍慰安婦問題であれ領土問題であれ、 それらを解決する気などさらさらない。

私がこのように日本の政府を批判するのは、日本の国民だからだ。外国に関し ては、その国の国民が批判するだろうと思う。実際、韓国にもそのような人達が 大勢いる。私はこうした相互的信頼にもとづいて活動してきたのである。とはい え、それだけではすまないことがある。

その点で、私は、積極的に日本と韓国の間に立って発言しようとしてきたパ ク・ユーハ氏に注目している。彼女の仕事は、韓国では親日的と非難され、日本 では反日的と非難されるだろう。そのことを最初から覚悟して、従軍慰安婦問題 に長年取り組んできた氏に、私は深い敬意を抱いている。

(2014年8月)

장정일,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시사IN)

장정일 소설가

한국과 일본은 군 위안부 숫자를 5만명에서 20만명까지 달리 추산한다. 여러 이유로 총체적 연구가 쉽지 않다. <제국의 위안부>는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려는 지은이의 강박 때문에 총체적 관점이 휘발되고 말았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대한해협이 아니라 군 위안부 문제가 놓여 있다. 실체를 발견하는 작업에서부터 해결 방안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는 경험의 소유권을 가진 피해 당사자가 엄연히 생존해 있기에 오히려 총체적 연구가 쉽지 않다. 이미 ‘일본군에 의한 조선 부녀자 강제 연행’이라는 단 한 줄로 군 위안부에 대한 상식이 완성된 터에, 그것과 다른 접근이나 그 어떤 보충도 친일파라는 지탄을 피하기 힘들다. 하지만 군 위안부의 복잡성은 아직 그 숫자마저 명확하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은 ‘20만명’설을 선호하고, 일본 연구자는 5만~7만명으로 추산하며, 만주에 주둔했던 한 일본군 병사는 “사단 군인 2만명에 50명” 정도라고 증언한다.

만주사변 이후 조선·중국·남양 군도에 일본군 300만명이 있었으니, 20만명설이 맞다면 일본군은 병사 15명당 1명의 조선인 군 위안부를 둔 게 된다. 현재도 우리나라에 주둔하는 미군 부대 근처에 반드시 기지촌이 있듯이 동서고금의 모든 군대는 병사의 성 욕망을 해결할 수단을 강구한다. 그 사실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저 수치는 정상이 아니다. 일본군은 새로운 점령지마다 현지인으로 이루어진 군 위안소를 추가한 데다, 그것도 모자라 강간을 일삼았다. 이 모든 게 사실이면, 일본은 원자폭탄이 아니라 불철주야 성폭행만 하느라 전쟁에서 진 거다. 참고로 최근 중국 연구자들은 최소 20만명의 중국인 군 위안부가 있었고, 강간을 당한 중국 부녀자의 수는 그것보다 많다고 주장한다.

20만명설은, 일제가 전쟁에 필요한 노동력을 징발하려고 만든 정신근로대와 군 위안부를 구별하지 않은 숫자다. 한국은 피해를 강조하고 일본의 야만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군 위안부의 숫자는 늘리고, 그들의 평균연령은 낮춘다. 하지만 20만명이 아닌 5만~7만명이면 일본의 야만성이 경감되고 책임이 없어지는가? 또 조선인 군 위안부의 평균연령이 25세면 10대는 아니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일제를 가리켜 인간적이었다고 할 것인가? 어느 경우든, 실체를 밝히는 것이 일본 옹호의 논리가 될 수는 없다.

일본은 고노 담화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군인들이 ‘관리’는 했지만 직접 모집하거나 영업은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해왔고, 바로 이것이 군 위안부 실체를 규명하는 가장 큰 쟁점이 되고 있다. 그러니 ①모집 ②영업 ③관리로 나누어 이 문제를 살펴보자.

①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일제 35년의 성격을 들여다봐야 한다. 2012년, 중국·인도네시아·베트남 등지에서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 연행 증거가 나오기도 했다지만, 조선은 전쟁터가 아니었다. 한·일합방이 된 1910년 이후, 조선은 일본과 형식상 한 나라가 됐다. 1등 시민인 일본인과 2등 시민인 조선인의 차이는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에게 당하는 차별보다 더 컸으면 컸지 작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조선은 행정제도와 법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군 위안부 대량 조달에는 잘 구비된 행정력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등에 업은 업자와 포주가 활동했다. 이때 취업 사기를 치러 온 업자에게 현지의 정보를 귀띔해주고 그들에게 공신력을 빌려준 장본인이 주민 사정에 밝은 면장이나 이장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강제 연행 사례가 전무하다고 뻗대는 것은 억지일 것이다.

일본군의 군 위안소 운영 여부를 따지는 ②는 상식적으로 풀이할 수 있다. 무기와 식량은 군대에 필수적이지만, 군인이 직접 총을 만들거나 땅을 갈지 않는다. 총은 방위 업체가, 쌀은 농부가 생산한다. 마찬가지로, 지역과 시기에 따라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군 위안소는 민간 업자에게 맡겨졌을 것이다.

③은 일본 정부가 인정한 것이다. 군대가 위안부의 위생을 직접 관리한 이유는 성병이 전력 차질을 낳기 때문이다. 국내 같으면 보건소가 했겠지만 전쟁 지역에서 그 일을 도맡아 할 기관은 군대밖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군대는 군 위안부의 이송에도 관여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① ②와 직접 연관된 정황이 미미하다고 해서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 그리고 천황(일왕)이 면죄되지는 않는다. 우선 일본군이 일본 정부에 위안부 설치를 요청했던 증거가 뻔히 나와 있다. 더욱이 애초에 일제 식민이 없었고,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군 위안소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광수나 윤치호의 친일을 단죄하는 이유

일제강점기의 조선은 저항과 협력이 공존했던 공간이다. 2등 시민이라는 차별에도 불구하고 한·일합방 이후에 태어난 가난한 계층과 여성 가운데 혹여 일본을 조국으로 착각하고 ‘동지의식’을 느낀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20여 년 넘게 일제 통치에 내면화(세뇌)된 때문이지 결코 그들의 허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견문을 넓힐 수 있었던 이광수나 윤치호의 친일을 단죄하는 것이다. 그들은 일제에 세뇌된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일본을 선택했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는 “‘강제 연행’을 하지 않았다 해도 ‘강제로 끌려가는’ 이들을 양산한 구조를 만든 것이 일본군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며, 그런 반성 위에 일본 정부가 “새로운 사죄와 보상”을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이라고는 “우리 안에도 위안부들에게 ‘사죄’해야 할 이들은 있다”라는 것 정도다. 하지만 사태를 하나로 묶고 파악하는 이런 총체적 관점은, 군 위안부를 착취한 일본군의 “하나가 아닌”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려는 지은이의 강박 때문에 휘발되고 말았다. 군 위안부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기억과는 다른 기억을 보충하겠다고 그들과 일본군 사이에 흘렀던 감정적 교류마저 나열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총체성을 흠집 내는 이런 다양성(나열)이 오해를 양산한다.

2013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 시민공원에 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부끄러웠다. 원래 저 소녀상은 미국에 있기 전, 먼저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조성된 독립공원에 세워져야 했다. 하지만 2008년 광복회를 비롯한 독립운동 유관단체들은 독립공원 내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난을 보여주는 박물관을 세우는 것은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운동을 폄하시키는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면서 박물관 건립을 저지했다. 그래서 서울 마포구 성미산에 따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지었다. 이처럼 민족의 역사는 자신의 가장 영광스럽고 순수한 기억만 보존하고 거기에 맞지 않는 것은 억압한다. 한때는 저런 잘못된 구습의 피해자였던 일본군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가 <제국의 위안부>를 놓고서는 자신과 다른 기억을 발굴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했다.

원문: 장정일의 독서일기,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시사IN)

『제국의 위안부』 – 발간 직후 신문사 서평 및 인터뷰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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