ᅟ1992년에 발간된 한국정부보고서에서 발췌한 자료입니다. 당시 한국정부의 인식을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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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조선인포로심문 조서
와세다대학의 Toyomi Asano 교수가 중요한 자료를 발굴했다는 기사가 오늘아침 마이니치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한국언론도 많이 보도한 듯 한데,아사노교수의 허락을 얻어 원자료를 번역한 내용을 올려둔다.
하나하나 다 흥미로운 내용이지만,나로서는 특히 18번 위안부문제 관련발언과 일제시대 종식이후에 대한 동시대인의 인식이 드러나는 25번,26번이 흥미로웠다.
사실,`여성들을 강제로 끌어갔다면 남자들이 앉아서 보고만 있었겠느냐`는 건 오늘날도 가끔 듣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말을 동시대인의 입으로 듣는 건 묘한 긴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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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주: PW는 Prisoner of War (포로), PsW 는 Prisoners of War (포로들), Allied 는 연합국으로 번역하였으며, conscription 은 경우에 따라 징용 (업무의 경우), 징병 (군의 경우), 또는 징발 (위안부의 경우) 으로 번역함. MOO는 Military Operation Officer (군 운영 장교) 로 번역함)
국립 ARC 로부터 재발급
기밀문서
군 정보국
포로 및 물자부
보고일 : 1945년 4월 24일
(포로)심문일: 1945년 4월 11일
(포로)번호 및 계급: 41J-1150, 민간인, 이복도
14J-185, 민간인, 백송근
41J-393, 민간인, 강기남
WME
한인 해군 민간인 3명에 대한 종합 보고서,
리스트 78번. 45년 3월 28일 “한국인에 관한 특별 문의사항” 에 대한 회신
1538
서두
심문자에 의해 질문받은 약 100 명의 한국인 포로들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반일감정을 공유했다. 몇몇 한국인들은 기회주의자일 가능성이 있으나, 이 3명은 자신의 증언에 있어 신뢰할 만한 매우 진실한 증언을 보여준다. 한 포로에 대하여 별도 보고서가 만들어질 것이고 다른 두명은 추가의 심문이 필요하지 않다.
설문지
이 보고서는 45년 3월 28일의 “한국인 심문” 리스트 78번에 기초하였다. 단락 번호는 이 리스트의 질문 번호에 상응한다.
2. 지방정부의 한국인:
마을의 우두머리는 항상 한국인이다. 우두머리는 그의 정직함과 리더쉽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로부터 선출된 연장자이다. 일본인은 이 선거를 조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한국 정부 관청의 관리장:
“면” 대부분의 사무소장은 한국인이다. 10개중 2개 정도가 일본인이다.
“군” 사무소의 장은 보통 한국인이다. “전라북도” 에는 14개의 ‘군’ 이 있고, 1942년 기준 9개소의 장은 일본 정부에 의해 임명된 한국인이다. (상세 정보 없음)
“읍” 사무소의 장은 주요 인구 구성에 따라 일본인과 한국인 양쪽 모두가 있다.
“부” (시) 의 장은 언제나 일본인이지만, 이외 직책은 한국인일 수 있다.
“도” 지사는 대개 일본인이다.
1942년, 전라북도, 충청북도, 강원, 황해도의 도지사는 한국인이었으며, 나머지는 일본인이었다.
1940년 이래 정부 관리 직책을 가진 한국인 숫자 변경은 알려진 바 없다.
3. 한국 남성은 1942 이래 일본에서 일을 하도록 징용되어 왔다. 그들은 면사무소에 의해 통지되었다. 한번에 300 에서 1,000 명이 징용되어 일본에 이송되기도 했다. 이런 이송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93 가옥이 있는 한 마을에서는 30명의 남성이2년의 기간 (1942-44) 동안 징용되었다. 징용 기간은 2년이지만, 많은이들이 3년 또는 그 이상 기간동안 체류했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일본에 거주하던 한 포로는 석탄과 철광 광산 및 비행장 건설에서 일하던 한국인들과 여러 개인적 연결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광산의 가장 깊고 뜨거운 곳에서 일하는 등 가장 열악한 노동이 요구되었다.
탄광에서 일하는 인부는 일당 ¥ 3.50 을 받았고 그중 ¥ 0.10 은 우편 적립으로 공제되었다. 그들에게는 음식과 숙소가 제공되었다. 징용자들의 가족을 위한 보조는 없었다. 그들은 그들이 절약할 수 있는 만큼의 돈을 그들의 집으로 송금할 수 있었다. 친나이 카라푸토 (Chinnai, Karafuto) 탄광에서는 현지인과 일본인 노동자는 일당 ¥ 7.00 에서 ¥ 24.00 을 받았으나, 징용자들은 고정 급여만을 받았다. 통신은 허용되었으나 모든 서신은 검열되었다.
이들 한국인들에 대한 처우는 연합국 포로들보다 열악했다. 일본에 살던 포로는 요시마 후쿠시나켄 (Yoshima, Fukushina Ken, 역자주, Fukushima Ken 일수 있음.) 근처의 탄광으로부터 3명의 한국인이 탈출하는 것을 도와주는데, 거기엔 500 징용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이들 중 한명은 그가 아키라(Akira) 로 데려가 한 탄광에서 일하게 했지만, 그가 가족에게 쓴 편지로 인하여 체포되었다. 그는 요시마 (Yoshima)로 끌려가 15일간 고문을 받고, 타이라 (Taira) 에 수감되었다. 다른 2명은 잡히지 않았다.
4. 한국인은 1942년 이후 중국 북부, 만주 또는 일본으로 이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한 포로는 한국인들이 만주에서 일하도록 징용되었다고 하며, 다른 두명은 만주로 보내어진 징용자는 없었다고 한다.
5. 징용을 거부하는 자는 투옥되었고 그의 가족은 식량을 빼았겼다.
6.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사진과 서명이 부착된 신분증을 반드시 소지해야 한다.
7. 농민들에게는 하루 2 합 5국 (*역자주: 2 合5局,2 go, 5 shaku, 구글 검색 결과 현대의 0.415 리터에 해당) 의 쌀이, 그리고, 사무 직원에게는 하루 2 합 4국 (*역자주: 2 合4局,2 go, 4 shaku = 구글 검색 결과 현대의 0.433 리터에 해당)의 쌀이 할당되었다. 추수 전, 정부 관리는 곡식을 검사하고 추수량을 예상하여 그해 농부와 그 가족 할당량을 공제한다. 나머지는 정부 관리에게 판매해야 한다. 추수량이 예상치보다 많을 경우 농부에게 행운이고 여분의 쌀을 숨길것이지만, 추수량이 예상치보다 적을 경우, 그는 자신에게 할당된 양에서 빼내 요구조건을 맞춰야만 한다.
8. 한국인들은 일본인 농민들은 그런 배급할당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대단히 분개하고 있다. 농민들이 반쯤 굶주리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냥 열심히 일한다. 비가 거의 오지 않아 1942년 전라북도의 쌀 농사는 흉년이었다. 같은 이유로 1945년의 쌀농사 결과도 그것보다 조금 나은 정도일 뿐이었다. 1941년 이후, 상용 비료가 모두 사라져, 모든 농사가 평균 이하의 결과를 가져왔다. 노동력 부족이란 이유로 사용되지 않고 내버려진 농토는 없다. 여성들과 어린이들은 전쟁 전에 비해 더 많은 농사 일을 한다. 마을 사람들은 필요한 곳에 어디든 함께 돕는다.
한국의 남부지방에서는 경작지의 절반은 쌀경작에서 제외되고 면 농사를 하도록 농민들에게 요구된다. 검사원은 수확량을 예상하였다. 농민은 필요할 경우 여유분을 생산한 사람에게 빌려서 이 예상치를 맞추어야 했다.
9. 소작농은 신분증을 소지하도록 요구되지는 않는다. (다른 계층에 대한 정보는 없다) 그러나, 개개인의 인적사항은 “면 사무소” 에 보관되었다.
10. 1942년과 1944년에 각각 한국을 떠난, 농민이었던 두명의 포로는 어떤 형태로든 배급표라는 것을 본적이 없다. (다른 한명은 1935년부터 일본에서 살아왔다.) 의류 구매 요청은 직접 “면 사무소” 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음식은 그들 자신의 경작물로부터 할당되었다.
11. 1944년 4월, 한국인의, 경찰의 승인 없이 차량에 승차하여 100 km 이상을 여행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보행자는 통제되지 않는다. 시민들은 정부 관리에 의해 그들의 집에서 아무때나 검문될 수 있었다. 검문은 자주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일어나는 경우, 집 구성원 전원의 모든 증명서가 있어야 했다. 1943년, 한 포로의 집은 위생 상태 점검 목적으로 두번 검사되었다. 2400 (*역자주: 밤 12시) 에는 모두에게 통행금지령이 발령되었다. 이 시간 이후 자신의 집 밖에서 발견된 모든 이들은 체포될 것이다. 가끔씩 등화관제가 실시되었다. 청취 가능 거리내의 모든 마을에 사이렌이 경고의 의미로 이용되었다.
12. 전라북도 전주 근방 출신의 포로는 1938년 처음 시작된 이른바 “자원 입대” 하의 군사 훈련을 받은 여러명을 알고 있었다.
1938년부터, 6개월 반 동안의 기본 훈련이 경성 (Keijo) 또는 나남 (Nanam, Ranam) 에서 실시되었다. 훈련은 일본인들과는 별도로 실시되었으나, 일본군 운영장교에 의해 수행되었다. 기본훈련 후 지원병들은 2-3 개월의 휴가기간을 부여받은 후 전투 병과에 배속되었다. 한국인들은 항상 일본부대 속에 각각 분산 되었다. 훈련과정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일본어 말하기 능력과 최소 2년의 교육이 요구되었다.
13. 징병 전 일본어 훈련 학교가 각 ‘면’ 마다 설치되었다. 학생들은 매일 3-4시간씩 1년간 출석했을 것이다.
14, 15. 포로들은 징병법 (*역자주: 또는 징용법)이 발효되기 전에 한국을 떠났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 그들은 이것과 징용으로부터 도망친 한국인들로 부터 전해 들어왔으나 그들의 이름을 말할수는 없었다. 한국 북부지방 출신들은 그 법에 대해 남부지방 사람들보다 저항하는 경향이 크다.
16. 포로들은 “Tonari Gumi” (*역자주: 일종의 반상회) 를 알고 있었으나, 한국 내의 그런 조직에 대해 들어본 바는 없다.
17. 이 전쟁은 철도에서 일하는 한국인들의 비율 또는 직책에 거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정거장 감독을 제외한 차장, 철도 엔지니어, 또는 다른 어떤 직책도 한국인이 종사할 수 있다.
18. 포로들이 태평양에서 보아온 한국 매춘여성 모두는 자원자였거나 또는 부모에 의해 매춘업에 팔려온 여성들이었다. 일본인에 의한 직접적인 여성 징발이 있었더라면 노인과 젊은이들이 모두 이것을 감내하지 않고 격분했을 것이기에, 이것은 한국적 관점에서 적절한 것이었다. 남자들은 분노로 궐기하여 이후 그들이 당할 고통이 무엇이든 간에 일본인들을 죽였을 것이다.
19. 한국이 독립했던 당시를 살았던 나이든 한국인들은 변함없이 일본인을 미워한다. 몇몇 일본 학교를 다닌 젊은이들이 표면적으로는 친일본성향이더라도, 그들중 여럿은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그들의 기분을 대담하게 말한다.
20. 모든 포로들이 그들이 강제로 징병되었다고 말한다.
21. 한국인들은 그들이 겪어온 이 전쟁의 효과를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여럿은 이것이 결국은 그들의 독립으로 이끌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일본을 향한 그들의 태도는 관용이다.
러시아가 일본을 상대로 전쟁에 참전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다. 한 포로는 명백히 친 러시아이며, 한국에 공산주의 형태의 정부가 들어서기를 바라고 있다.
중국은 자신의 문제도 해결할 능력이 없고, 한국보다도 훨씬 무능한 나약한 국가로 간주되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미국을 그들의 해방자로 기대하고 있다.
22. 태평양 섬들의 한국인들은 일본인들로부터 매우 잔혹한 대우를 받았다. 모든 포로들이, 자신들을 연합군에 넘길까봐 두려워한 일본군에 의해 죽은 민간인 노동자들을 알고 있었다. 티니안 (Tinian) 에서 잡힌 포로는 미군 전선으로 향하는 3명의 여성들을 (그들중 둘은 등에 아기를 업고 있던) 보았다. 포로와 함께 같은 동굴에 숨어있던 한 중위가 그들 모두를 보안의 이유로 죽였다. 그 포로는 자신이 한국인이란것이 알려졌다면 자신도 분명히 죽었을거라고 확신했다.
23. 포로들은 그들이 하와이에 있는 동안, UN 서약에 따른 적정 절차에 의해 “독립 한국” 이 될 것이라는 것을 모두 들었다. 그들이 이 정보를 한국으로부터 들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24. 모든 포로들은 모든 한국인들이 일본과 싸우는데 뛰어들 것이라는 것을 단호하게 믿고 있었다. 일본이 전쟁에서 질것이라는 사실이 전에 알려졌다면 이 명백한 일본에의 충성은 빨리 톤을 바꾸었을 것이다. 한국의 남부 지방 출신의 포로는 남부지방 사람들은 더 수동적이고 일본인들과 싸우는데 활동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적다고 말한다. 독립 운동은 보통 북부지방의 더 활동적이며 자유로운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기원한다. 이 3인의 포로들은 군사 훈련을 받고 일본인들을 상대로 싸울 기회를 환영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게릴라전에 적합하게 특화되있다고 느낀다.
25. 한국인이 관직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분개는 없다. 개개인은 미움을 받을 수 있으나, 미래 한국의 정부를 위해 전체적으로 그들이 관직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6. 한 포로는 모든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제거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말한다. “일본인은 언제나 심장부터 일본인이다.” 라고 말하고, 일본과의 미래의 문제 때문에 일본인의 잔류는 한국에 손해라고 말한다.
다른 포로는 단지 고위 공직자들만 제거되어야 한다고 느낀다. 일본에 있는 한국인이 한국에 있는 일본인들과 역발란스를 맞출수 있을수 있다고 본다.
27. 포로들은 한국이 UN 대표들로부터 임시적으로 통치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모든 한국인들로부터 받아들여질 수 있을것이다. 미국의 직접 통치는 많은 이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으나, 다른 나라의 경우 반대에 직면할 수 있다.
28. 마을 정부 (주: 면, 읍 등) 는 나라가 UN 통치하에 놓이면 별도의 도움 없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각 군에 평균 60 명의 경찰이 있으며, 50% 가 한국인이다. 이 비율은 더 많은 경찰 병력이 훈련될 때까지 성공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으로 느껴진다.
29. 여운형은 한국 독립 운동의 활동적인 멤버로 알려져있다. 그는 1942년 경성 (Jeijo) 에 살았다. 다른 상세사항은 알려지지 않았다.
30. 한 포로는 1943년에 일본에서 일했던 한국 공산당의 리더 한명에 대해 들었다. 알려진 유일한 이름은 ‘김’ (가네모토, Kanemoto) 이다.
원본 : 「参考資料5」
https://www.facebook.com/media/set/?set=a.1088796251178782.1073741825.100001452518600&type=3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387576867935890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1965 (Sunset on The Sarbin River)
1965년 정창화 감독 영화로서, 27분 경부터 위안부가 등장합니다. 1965년 당시 위안부가 어떤 이미지로 보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