渦中日記 2015/12/26-2

한 여성이 내 책을 두고 “무능한 학자의 부실한 연구가 아니라 대단히 조직적이고 기획된 움직임”인 것 같다고 말하는 걸 봤다. 타인의 고민의 결실에 대해 함부로 이런 단정을 내리는 만용과 근거없는 의구심이야말로, 우리사회를 혼돈에 빠뜨리고 있는 주범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트라우마를 벗어나려면, 트라우마에 대한 자각부터 필요하다.

나를 비난하는 이들의 심리의 저변에는 대개 일본에 대한 불신과 공포가 있다.
하지만 불신과 공포를 이기는 건 적대나 공격이 아니다.
불신은 대개는 무지가 만든다. 따라서 불신을 이기는 건 자신과 상대에 대한 공부 뿐이다. 물론 열린 마음도 필요하다.

수십가지 종류의 비난과 비판과 오해와 오독, 심지어는 내가 위안부할머니를 “공동변소”라고 쓴 것처럼 쓰는 악의적 인용(동아일보/황호택)과 곡해의 바다에서 아직 익사하지 않고 있는 건, 그래도 가끔, 마음이 정화되는 글과 마음들이 헤엄쳐 갈 근력을 주기 때문이다.

“강아지”는, 보려고 해야 보인다. 분명한 건 강아지를 본 사람이 안 본 사람보다 더 행복할 확률이 높다는 점. 물론 그 행복은 강아지가 만든 게 아니라 자신이 만든 것이다.

http://www.docdocdoc.co.kr/news/newsview.php?newscd=2015122400003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54596154567296

渦中日記 2015/12/21 – 왜곡욕망

왜곡욕망

내일 나를 규탄하는 모임이 “학술토론”의 이름으로 열린다고 한다. 이들은 장문의 보도자료를 써서 이 모임을 알렸는데 보도된 곳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들은 얼마전에 일본에서 나온 성명에 대해 반대하는 성명조차 양비론이라며 비난한다. 기소사태를 우려하는 그 성명이 불만이라는 건, 고발과 기소에 찬성한다는 뜻일 것이다.
나아가 이들의 포스터와 메일은 내가 구속 당한 것처럼 쓰고 있다. 구속을 원하는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잘못 기술한 것인지 의도적 왜곡인지 모르겠지만, “구속”당할 만큼 박유하는 악인이라는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심고 싶은 것 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이런 왜곡욕망은 나를 비난하는 모든 이들한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일이다. 고발한 나눔의집은 물론이고, 논문이니 집담회라는 이름의 아카데미즘공간에서조차 그런 일은 수없이 많이 일어났고 지금도 진행중이다.

어제 아침에 나온 뉴욕타임즈 기사를 처음 소개한 뉴시스기자도 마찬가지였다. 원기사에도 약간의 문제가 없지 않았지만 “댓글이 비판 일색”이라는 헤드라인과 오역섞인 번역은 읽는 사람이 나에게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뉴시스는 이전부터 일관되게 나에게 비판적이었던 매체다.
내가 본 세 종류 보도 중에는 뉴스원 기자의 보도가 가장 정확했다.

누가 봐도 나쁜 사람들과 싸우는 일은 우울하지 않다.
그런데 정의를 부르짖는 이들의 도덕적타락을 마주하는 일은 정말이지 우울하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우울하다.

http://m.news1.kr/news/category/?detail&2521252&96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250690284957883&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10/31 – 젊은 역사학자들에게 답한다 1

지난 봄에 <역사문제연구>에 게재되었던 젊은 역사학자들의 비판에 대해 답한 글입니다. 긴 글이라 조금씩 나누어 올려 둘 생각입니다. 이 짧은 연재가 끝나면, 한꺼번에 읽을 수 있도록 노트에 링크를 만들어 두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재승 교수에 대한 반론도 올릴 생각입니다.

지난번에 올린 재일교포 정영환교수에 대한 반론도 그렇지만, 이런 모든 논쟁들이 고발 이전에 이루어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습니다. 시간은 흘러가고, 이제 올해도 두 달 밖에 남지 않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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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비판 방식에 대해

1) 허위 적시

『역사문제연구』33호에 집담회 「젊은 역사학자들, 『제국의 위안부』를 말하다」(
『역사문제연구』33호, 2015.)가 게재되었다. 이들의 비판 역시 재일교포학자 정영환과 마찬가지로 오독과 곡해 그리고 적의로 가득한 내용이었던 것과,( 정영환,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1965년 체제의 재심판」, <역사비평>111, 2015.) 한 학자의 고민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거친 말들이 정제되지 않은 채로 학술지에 게재된 데 대해 먼저 깊은 유감을 표한다.
비판은 전체 문맥을 파악하고 그 안에서 각 기술이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지를 살피며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들은 내가 책에서 비판했던 정대협에 대해서는 “맥락까지”(앞의 집담회, 561쪽. 이하 쪽수만 표시) 살펴야 한다고 말하면서 나의 책에 대해서는 맥락은커녕 쓰여 있는 내용조차 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이들의 비판이 논지에 대한 구체적인 반박이 아니라 인상비평에 치중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위안부 문제 연구자가 아니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겸허해야 했다. 그러한 성급함과 은폐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정영환에 대한 반론도 참조해 주기 바란다.( 박유하,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1965년체제」, <역사비평>112, 2015.)

이들의 비판이 얼마나 성급한 오독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를 하나만 먼저 제시해 둔다. 나는 『제국의 위안부』 2부 3장, 즉 위안부의 재현의 문제를 다룬 부분에서 애니메이션 『소녀 이야기』의 문제와, 한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변해 간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소녀 이야기』의 경우 할머니의 증언이 애니메이션에서 어떤 식으로 변형되었는지를 지적한 것이니 이 부분이 할머니들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또 후자에 관해서도, 나는 “그런 변화는 의식적인 거짓말이라기보다는 듣는 이들의 기대가 그렇게 만든 측면이 크다”라고 썼다. 이어서 “그런 의미에서는 위안부의 증언에 차이가 난다고 해서 위안부들만을 비난할 일은 아니다. 또 그런 증언을 듣고 싶어 했던 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이라고 해야 한다. (…) 피해자임을 확인하기 위한 민족 담론은 표면적인 피해 인식 외의 모든 기억을 말살시키려 한다”( 박유하,『제국의 위안부』, 뿌리와이파리, 2015, 133-134쪽.)라고 썼다.

그렇게, 이 부분의 비판의 대상이 우리 자신이 피해자임을 확인하기 위한 민족 담론임을 분명히 하면서,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을 영원히 안 볼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라는 우리 안의 욕구에 대한 언급에 이어 이렇게 썼다. “그러나 70세가 되어가도록 그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직시할 수 없다면, 그건 과거의 상처가 깊어서라기보다 상처를 직시하고 넘어서는 용기가 부족해서라고 할 수밖에 없다. 혹은 우리가 아직,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보듬는 자신에 대한 사랑 대신 타자에게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더 큰 미성숙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가.”(제국의 위안부, 뿌리와이파리, 2015, 134)라고.

여기서 문제 삼고 있는 대상이 위안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자 해방 후 한국이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젊은 학자들은 “위안부경험을 했던 사람들한테 이런 반성과 비판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 무리가 있는데도 저자는 이 비판을 그녀들에게 집중하죠. 예를 들어 <70세가 되어가도록 과거의,(중략)미성숙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는 표현처럼요. 용기의 부족, 미성숙 등으로 몰아세우고 있어요.”(550)라면서 비난한다.
사실 이 부분은 『제국의 위안부』를 고발한 이들이 첫 번째 고발장에서 적시한 109곳 중의 하나였다. 지원단체는 이후 내가 반박문을 제출하자 지적 내용을 반으로 줄이고 고발 취지를 바꾸기까지 했는데, 이 부분은 그때 사라진 지적부분이다. 젊은 학자들 중에 소송문서작성에 직접 관여한 이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거기서 문제 삼은 내용 역시 이들의 주장과 같았다.
해방 후 70년이라는 시기에 할머니가 70세라면, 해방 무렵에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당연히 위안부 체험을 했을 리도 없다. 이 집담회는 이런 식의 웃지 못할 오독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들은 『제국의 위안부』 33쪽에 나오는 웃고 있는 이미지의 사용을 문제 삼으며 사진 위치가 의도적(554)인 것이 명백하다면서 비겁하다는 식의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는데, 33쪽은 물론 32쪽에도 34쪽에도, 이들이 지적한, 위안부의 숫자가 20만명보다 적고 상대한 숫자도 적고 연애도 하는 존재였다는 대목은 이 사진이 실린 부분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미지 사용 위치는 출판사가 정한다. 명백히, 나를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인물로 몰아가기 위한 허위이자 근거 없는 비방이다. 이들의 비판은 유감스럽게도 정영환에 못지않게 악의적이고 그 왜곡 수준이 범죄적이다. 또한 『소녀 이야기』에 대한 나의 지적을 두고, 내가 없는 얘기를 한 것처럼 말하면서 비웃지만, 내가 이 애니메이션을 보았을 때는 분명히 있었다. 나는 근거 없는 비판은 하지 않는다. 또 나는 『제국의 위안부』의 비판에 대한 반박에 “표현의 자유”(543) “학문의 자유”(543, 572, 575)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옹호해야 하는 문제적인 기술 자체를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이들은 하지도 않은 행위를 한 것처럼 말하면서 허위에 입각한 비방에 치중한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22584924435086

비판이 지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정영환의 <제국의 위안부>비판에 답한다 #1

정영환이 나에 대한 비판을 시작한 것은 오래전 일이다. 다 읽진 않았어도 그가 일본어블로그에 연재한 비판이  SNS를 통해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 읽기도 했다. 그러나 응답하지 않았던 건 첫째로는 시간적여유가 없었고, 두 번 째로는 그의 비판이 악의적인 예단이 앞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월에 나의 책에 대한 가처분 판결이 났을 때 한겨레신문이 정영환의 글을 나에 대한 비판에 사용했고 이제 <역사비평>이라는 한국의 주요잡지에 게재되기에 이르렀기에 뒤늦게나마 반론을 쓰기로 한다.

그런데 지면을 30매 밖에 받지 못했다. 불과 30매에 그의 비판에 구체적으로 대답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또 다른 젊은 학자들이 비슷한 시기에 <역사문제연구>33호에 <집담회>라는 이름으로 비판을 했는데, 이에 대한 반론은 100매가 허용되었으므로 논지에 관한 구체적인 반론은 그 지면을 활용하기로 하겠다.


민족과 젠더

나는 그를, 내가 가장 관심 두었고 또 발제도 했던 일본의 한 연구모임에서 2000년대 초반에 만났다. 그 모임은 일본의 재일교포문제 오키나와 문제등 제국일본이 낳은 여러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은 곳이었고, 무엇보다 지적수준이 아주 높은 곳이었기 때문에 그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 기회 되면 참석했던 곳이다. 문부식, 정근식, 김동춘등이 그 연구회가 관심을 갖고 초청하기도 했던 인사였다.

서경식도 그 연구모임에서 아주 소중한 존재인 걸 곧 알 수 있었고 나 역시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책을 교환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재일교포사회의 가부장제문제를 발표하면서 이들의 태도는 달라졌다. 서경식은 <젠더보다 민족문제가 우선>이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기까지 했다. 당시 연구회 멤버들 중에는 공식적인 석상에서는 그런 서경식에 대해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사석에서는 서경식을 비판하는 이도 있었다.

말하자면 서경식, 윤건차, 그리고 이제  정영환으로 대표되는 나에 대한 재일교포들의 비판은 기본적으로 <젠더와 민족>문제를  둘러싼 포지션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나에 대해 공식적이고 본격적으로 비판을 행한 건 모두가 남성학자들이다. 여성인 경우는 김부자나 윤명숙 등 위안부문제연구자에 한한다.  이 구도를 어떻게 이해할지가 나와 이들의 대립을 이해하는 첫 번째 힌트가 될 것이다.

한국에서 서경식으로부터 시작된 나에 대한 비판에 가세한 학자들—이재승, 박노자, 윤해동등-도 모두 남성학자였다. (물론, 여성학자,혹은  여성학 전공자들 중에도 소송에 반대하거나 나에게 호의적으로 반응한 이는 극히 드물었다). 후에 다시 쓰겠지만 이들의 비판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의 논지가 <일본을 면죄>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정영환이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도 그 부분이다.


전후/현대일본과 재일교포지식인

정영환도 언급한 것처럼 나에 대한 비판은 10년전에 쓴  <화해를 위해서>발간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비판한 건 정대협에 관여했던 재일교포여성학자 김부자였다. 좀 지나서 윤건차, 서경식이 “자세한 건 김부자에게 맡기고…”라면서 지극히 추상적인 비판을 시작했다. 하지만, 김부자에게도 나는 서경식이 앞에서 언급한  연구모임에서 알게 된 사이라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고,시간이 지나고 내 책을 더 읽으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기대하며 같은 시기에 나온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를 보냈다.

훗날 반론을 쓰게 된 계기는, 서경식 선생이 어느날 한겨레신문에 실었던 칼럼이다. 나를 높이 평가해 준 일본의 진보지식인들이 나를 이용해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 그는 썼고 (<타협 강요하는 화해의 폭력성>,2008/9/13 한겨레신문), 다음해에 나에 대한 비판을 포함한 윤건차의 책이 한겨레에 크게 소개되었을 때였다.

당시 김부자등의 비판에 동조해 비판한 건 몇 명되지 않는 극소수의 일본인이었고  확산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들이 한국에서 나에 대한 비판을 시작한 일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화해를 위해서>는 그가 발간에서  3년이나 지난 시기에 굳이 비판해야 할 만큼 한국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책을 이들이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갑자기 비판한 이유를 나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한다. 문제는 서경식이 지향한 것이 현대일본의 <리버럴 지식인>(진보지식인)뿐 아니라 이들이 만들어온 전후일본에 대한 비판이었다는 점이다. 일본 리버럴지식인들은 정말은 식민지지배에 대해 법적책임을 지고 싶어하지는 않는다는 그의 근거없는 추측은 ,이후 한국진보의 일본불신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이 때 반론을 일본어로 썼고 일본매체에 발표했다. 김부자의 논문이 실린 건 일본매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2년후인 2009년 여름과 겨울에, 한겨레신문 한승동기자가 윤건차교수의 책소개에 <일본우익의 찬사를 받은 화해를 위해서를 비판한 책>이라고 쓰는 일이 일어났다. 한국에서 <일본우익의 찬사>를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이니 나는 이 왜곡보도를 접하고 경악했다. (이에 관한 경위는 제국의 위안부 후기에도 썼다)


지식인의 사고와 폭력

서경석의 생각(전후일본과 현대일본지식인과에 대한 비판)이 그의 인기에 힘입어 한국에 확고하게 자리잡았다는 증거는, 2014년 6월,나에 대한 고발장에  서경식의 생각(내가 말한 “화해”와 용서를 마치 국가야합주의적 사고인 것처럼 치부하는 사고)이 쓰여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그 때, 언론중재위에 가지 않았던 나의 5년전 선택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말하자면, 나에 대한 고발은, 직접적으로는 나눔의 집이라는 지원단체의 오독과 곡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실은 그들을 그렇게 시킨 건 이면에 있던 나에 대한 경계심이었다. 그런 경계심을 만들고 또 보이지 않게 지원했던 건 지식인들이었다. 나에 대한 첫 고발은 위안부에 대한 기술이 <허위>라는 내용이었지만 내가 반박문을 쓰자 원고측은 중간에 고발취지를 바꾸어 나의 <역사인식>을 문제 삼았다. 일련의 과정에서, 낯설거나 자신들과 다른 생각은 무조건 배척하고 손쉬운 배척수단으로 <일본우익>을 호명했다는 점에서 지식인도, 지원단체도 다를 바가 없었다.

주로 진보계층에서 유통된 서경식과 윤건차등의 책이 나에 대한 인식을 <일본을 면죄하려는 위험한 여성>으로 간주하는 인식을 확산시킨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물론 위안부문제를 부정하고 <일본의 법적책임을 부정>한다는 이유다.

서경식이나 윤건차는 내 책이 일본우익의 사고를 “구체적으로”비판하기도 한 책이라는 점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그저 <친일파의 책>으로 부각시키고 싶어 했다.

그들 외에도, 내가 아는 한 나의 책 이전엔 위안부문제에 대한 부정파들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비판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한국이나 일본의 지원자들은 위안부문제에 부정적인 이들에 대해서는 무조건 “우익!”이라는 단어로 손가락질했고 김부자가 나에 대해 “우파에 친화적”이라는 말로 비난한 것은 그 연장선상의 일이다.

그에 비하면 정영환은 그나마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있고 그 부분은 진일보한 재일교포의 모습이기는 하다. 하지만 정영환은 나의 “방법”이 무언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이도록 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책의 전체 의도와  결론을 완전히 무시하고 문맥을 무시한 인용과 함께 프레임을  씌워 <위험하고 부도덕한 여성>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책이 결론적으로 <일본의 책임>을 묻는 책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들은 일본에 책임을 묻는 방식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만으로 나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아마, 정영환이 소개한 대로, 그들이 20여년 지켜온 사고의 막강한 영향력이 흔들리는 사태를 맞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러한 정황이 마치 일본이 책임을 무화시키는 쪽으로 가고 있는 처럼 말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최근 몇 년동안 위안부문제에 지극히 무관심했던 일본인들이, 그리고 소녀상이 세워진 2011년 이후 반발하기 시작했던 일본인들이, 나의 책을 본 이후 위안부문제를 다시 반성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다.

얼마 전에 나는 우연히, 서승/서경식형제에 대한 구명운동을 20년이상 해 왔다는 일본인 목사의 부인이, 위안부문제 해결운동모임의 전 대표라는 사실을 알았다. 직접적으로는 관계가 없어보였던 서경식도 실상은 위안부문제관계자와 깊은 관계가 있었던 셈이다. 내가 굳이 이 글에서 서경식에 언급하는 이유는 정영환이  <화해를 위해서>를 비판하면서 서경식의 비판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화해를 위해서>에 대한 비판에 나선 이들은 대부분 위안부문제에 관여해 왔던 이들이었는데 서경식 역시 그런 <관계>에서 아주 자유롭지는 않았던 셈이다.  나에 대한 서경식의 비판논지가 고발장에 그대로 원용되어 있었던 것을 지적했던 것은 “지식인의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었는데, 어쩌면 그의 논지자체가, “무모한” 지원단체 이상으로, 현실적 포지션과 인적관계의 영향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

이들의 논지는 적대와 “숙청”을 요구한다. 지원단체가 국가권력을 앞세워 나를 고발했던 건 그 결과이기도 하다. 나에 대한 규탄을 통해 드러난 그런 그들의 방식과 사고의 결함이 어디에 있는지, 이후 나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나갈 생각이다. 이들의 방식이 20년이상 평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불화를 빚어왔던 이유가 바로 그런  사고의 결함에 있을 뿐 아니라 미래의 평화도 만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판과 포지션

이들은 “전후일본”을 전혀 평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인식이 한국에 정착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옳고 그르고를 떠나 2015년현재의 한국의 대일인식은 이들 재일교포가 만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들과 연대하며 20년 이상 “일본은 군국주의 국가!”라고 강조하고  “변하지 않는일본/사죄하지 않는 일본/뻔뻔한 일본”관을 심었고, 2015년 현재 한국인의 70퍼센트가 일본을 군국주의국가라고 믿게 만든, 정대협을 비롯한 운동단체들의 “운동”과 그들의 목소리를 그저 받아쓰기만 해온 언론도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들은 박유하는 “일본(가해자)이 잘못했는데 한국(피해자)이 잘못했다고 말한다”라면서 내가 일본을 비판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었는데, 내가 그들의 일본관을 비판하며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런 식의 부정확하고 비윤리적인 “태도”였다.

나는 이들 재일교포가 일본을 비판하려면 자신들을 차별없이 교수로 채용한 일본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김석범선생같은 작가가 20년이상 <화산도>를 하나의 문예지에 연재하면서 생활이 가능했던 것도 전후/현대일본이었다.

결코 빠르지도 않고 완벽하지도 않지만 일본사회는 변했고 변하고 있다. 그런데도 결코 보지 않으려 했던 짧지 않은 갈등의 시간 끝에, 현재의 일본의 일부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회귀중이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관계란 대체적으로 상대적인 것이다.

내가 <화해를 위해서>에서 말하려 했던 건 그런 부분이었다. 그 책은 2001년 교과서문제가 있고서야 일본에 이른바 <양심적지식인과 시민>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될 만큼 전후일본에 대한 지식이 일천했던 10년전, 한국을 향해 우선은 전후일본이 어떤 출발을 했고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를 알리려 했던 책이다. 우리의 일본인식은 실은 전도된 부분이 적지 않다고.

상대를 비판하려면 일단은 총체적인 일본을 알고 나서 하는 것이 맞다. 그래야 정확한 비판을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여러 이유에서 우리에겐  총체적인 일본이 알려지지 않았었다. 나는 정영환이 말하는 것처럼 일본리버럴 지식인들이 말하고 싶어 한 것을 대변한 것이 아니라,총체적인 일본에 대해 우선 알리고자 했을 뿐이다. 부정적인 부분을 포함해서. 그건 그런 일에 태만했던 한국의 일본학연구자의 한사람으로서의 반성을 담은 작업이었다. 서경식의 비판은 나는 물론 일본의 진보지식인에 대한 모욕일 수 밖에 없다.

서경식의 비판은 우리에게 겨우 그 존재가 알려진 일본의 진보지식인을 비판부터 하는 일로 전후/현대일본에 대한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

물론 일본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들의 비판이 결코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더구나  일본이 더 바뀌려면 진보지식인과의 연대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런데 그들을 적으로 돌리고 나서 정영환은 누구와 손잡고 일본을 변화시키려 하는가? 서경식이나  정영환의 비판은,지극히 모놀로그적이다. 모놀로그로는, 상대를 변화시킬 수 없다.

나는 정치와 학문, 일반인과 지식인에 대한 비판에서  <차이>를 의식하면서 쓰고 말한다. 정영환등 나를 비판하는 학자들과의 가장 본질적인 차이는 아마도 이 점에 있다. 다시 말해 나는 나츠메소세키를 비판했고 그를 리버럴 지식인으로 떠받든 일본의 전후지식인과 현대지식인을 비판했지만, 그건 그만큼 지식인의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사고는 때로 정치를 움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저 보통생활을 영위할 뿐인 일반인에 대한 비판은 그 결을 달리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것이 나의 <방법>이다. 모놀르그보다는 다이얼로그가, 논문에서든 실천에서든 생산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일본의 사죄>를 우리는 어디에서 확인할 것인가?

수상이나 천황이 아무리 사죄한 들 국민들이 같은 심정을 가지지 않으면 한일일반인들은 끝내 소통할 수 없을 것이고 불화할 수 밖에 없다.우리는 천황이나 수상과 대화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의 90년대는 분명 애매하긴 해도 일본정부와 국민이 사죄하는 마음이 압도적인 다수였던 시대였다. 내가 아시아여성기금을 평가한 건 그런 정부와 국민의 마음이 담긴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판자들은 그런 일본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애매>하다고 비난했지만, 선명함 자체가 목적인 추궁은, 정의실현이라는 자기만족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대개는 숙청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생산적인 담론도 되지 못한다. 실제로 나에 대한 고발이 그것을 증명했다.

<고발에는 반대하지만..,>이라고 전제하면서 나를 비판했던 이들 중, 아무도 실제로 소송을 기각하라고 행동한  이는 없었다. 그들은 한국정부와 지원단체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말한다는 이유로 그들이 나를 억압하는 걸 당연시했고 비판에 나섬으로써 나에 대한 억압에 가담했다. 학문적 견해를 사법부가 도구로 사용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나서서 제출했다.

그런데, 역사문제에 대한 판단을 국가와 사법부에 의존하는 것이야말로  학자들의 치욕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참담한 심경이다.


1)<역사비평>에 처음 이 글을 먼저 보냈으나 구체적인 반론이 아니라는 이유로 게재되지 못했다. 다른 글로 대체했으나 이 글이 더 중요하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역사비평>112호에 게재한 글과 다소 중복되는 부분이 있다. 그 글에서 내가 언급한 정영환의  문제는, 다른 남성학자들의 글에서도 대체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동아시아 화해와 평화의 목소리>발족 기념  심포지엄 글(<기억의 정치학을 넘어서>에서도 그 일단을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앞으로도 다시 쓸 생각이다.

출전 : 박유하 페이스북 노트

渦中日記 2015/6/10

1년전에, 가깝게 지내던 위안부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이 무렵에 올렸던 글과 할머니의 영상들이 나눔의집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을 다시 보니 명확히 알겠다. 이 아침, 배춘희 할머니의 명복을 다시 빈다..

어제 젊은 연구자들의(대부분 남성으로 보이는데 이 점이 내겐 흥미롭다. 위안부문제 연구자 빼면 내게 비판적인 학자들은 대부분 남성인데, 그 이유를 조만간 쓸 생각이다)내게 대한 비판이 포스팅된 걸 보았다.
지금 좀 바쁘고, 아직 더 올린다니 필요하면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한가지만 우선 말해 둔다.

내가 한 것으로 전하는 이들의 요약에는 내가 하지 않은 말(글)들이 있다. 내가 실망하는 건 이 부분이다. 얼마전에 윤명숙 선생도 일본신문에서 내가 “일본 국가책임보다 업자 책임을 더 강조”했다고 썼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렇게 쓰지 않았다. “조선인 업자가 더 많다”고 쓰지 않았고 일본인업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물론 “강제연행은 없었다”고도 쓰지 않았다.
내나름으로 신중하게 접근한 기술을 거칠게 정리하면서 무언가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려 하는 이들의 눈과 심리가, 나는 진심으로 걱정된다. 패기는 때로 세상을 바꾸지만, 만용은 해악일 뿐이다.

정영환교수의 비판에 대답할 시간을 여전히 갖지 못했지만(일본어 비판의 경우, 지원자들은 다수고 나는 혼자 대답해야 한다는 것과, 내가 하지 않은 말로 나를 비판하는 내용이 너무 많은 것이 나를 위축시킨다)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듯 하니 반론을 조만간 간단하게라도 써야 할 지도 모르겠다.

이런 식의 왜곡을 단순한 오독으로 치부하거나 웃고 넘길 수 없는 건, 다들 알다시피 나는 지금 고소당한 몸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다르다는 것 만으로 나를 “형무소에 넣고 막대한 돈을 지불케 하라!”는 요구와 싸워야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유하의 책은 나쁜 책”이라는 이들의 말들은 우선은

1.재판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나에 대한 고발에 참여하는 일이 된다. “그럼 하고 싶은 비판도 못하느냐”고 말하겠지만 그런 구조를 만든 건 지원단체와 일부할머니들이다. 비판을 하고 싶다면 먼저 고발을 취하하라고 말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2. 내가 책에 쓰지 않은 말, 내가 하지 않은 일을 내가 하고 쓴 것처럼 말하는 건 “허위배포”다. “학자의 말”이면 그에 해당되지 않는 건지 여부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오늘이후에도 올리겠다고 한 내용, 지금이라도 재확인하고 내보내 주기 바란다. 내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훗날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삭제판도 일본어판도 판매하지 말라”고 나를 옥죄는 이들의 선두에 명색이 학자인 이들이 서 있다는 것이, 내겐 작금의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또하나의 풍경으로 보인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131391193554460

渦中日記 2015/4/17

사람이나 언론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앞으로는 진보든 보수든, 나의 논지를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이들이면 기꺼이 소통할 생각이다. 나를 상처준 이들은 이른바 진보계열에 속하는 이들이지만 그들은 보수 이상으로 보수적이었다. 오로지 기존주장이나 입장을 “지키려”고만 했다는 점에서.

물론 그들 안에도 지혜롭고 유연한 이들은 당연히 있었고, 그동안 견뎌올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들 덕이다.

나에 대한 비판/지지여부를 나누는 건, 좌우이념이라기보다는, 대상에 대한 정보량과 사고의 유연성인 듯 하다. 그럼에도 가장 극심한 폭력이 좌우 양극단에서 나왔다는 건 지적 보수의 정서적 빈곤을 보여준 것일 터. 결정적인 순간에 폭력을 만드는 건 언제든, 이념도 이상도 아닌, 인간성이다.

그런 생각으로 응했던 첫번째 글이 나왔다. 일본어판도 영어판도 있는데 정작 한국어판은 못 만들었던 <제국의 위안부>요약이다. 나는 기지를 반대하기 때문에 보수적 입장에 있는 이들도 나를 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글이 좌우 상관없이 읽혀졌으면 좋겠다. 최소한의 공유가능한 부분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은 많기 때문에.

(제목은 내가 붙이지 않았다.ㅠ)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738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101385753221671

渦中日記 2015/4/3

어젯밤 귀갓길. 생일파티를 해 준다는 동료들과 개강모임겸 만나 식사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폭우를 만났다. 앞차가 사고난 것도 모르고, 밀리는 건 줄 알고 한참을 얌전히 기다렸을만큼, 비가 퍼부었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건지도 모른다. 누구나 앞을 보고 있지만 아무도, 정말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올해는 꽃을 봐도 여느 때처럼 설레지 않는다. 아무래도 감각기관의 어딘가가 상처입었나 싶기도 하다. 나를 향해 겨누어지는 적의와 다가오는 위로의 반복 속에서, 내 마음도 부침을 반복한다. 꼭 병행되는 건 아니지만. 가라앉는 나는 어린아이의 자아이고, 담담하고 당당한 나는 어른의 자아이다. 어린아이의 자아와 어른의 자아는 아직 내 안에서 행복하게 조우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때로 과잉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지나치게 경박하거나 지나치게 냉철하게.
어린아이의 자아가 부끄러워질 때,문득 노인의 자아를 생각한다. 여러가지로, 아이와 노인에겐 공통점이 많다.

하나의 사태에 대해 “말”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아마도 윤동주는 “쉽게 쓰여진 시”를 부끄러워 했을 것인데, 윤동주를 사랑하는 우리는 “쉽게 말하고 쉽게 단정하고 쉽게 규탄하는” 일에 대한 주저와 부끄러움이 없다. 온나라에 분노와 규탄과 고발이 넘치는 건 아마도 그래서일 터. 분노와 규탄, 그에 대한 무시와 조롱과 경멸이 넘치는 지금의 대한민국상황은, 뒤늦게 온 세기말적 상황처럼도 보인다.

본안재판을 향해,이제 수임료를 지급하고 진행하기로 했다. 최소 수천만원의 소송비용에, 패소할 경우 지급해야 할 수억원의 돈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나에 대해 비판적인 학자들도, 함께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납득가능한 답이 있다면, 내게 보내 주기를.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92172664142980

渦中日記 2015/3/27

생일 전후해서, 나에 대해 언급한 칼럼, 인터뷰가 실린 신문과 잡지등이, 마치 선물처럼 도착했다. 5쇄를 찍었다는 연락도 왔다. 일본의 한 지인은 나를 위로하기 위해 아마존의 독자평까지 보내 주었다. 일본어판이 나오고나서 이어졌던, 과분하리만큼의 호의적인 평가에 반발하는 비판들이 최근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해 내가 우울해 했기 때문이다.

내가 우울했던 건,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라기보다, 그들이 정말은 나의 적일 수 없는 이들이기 때문인데, 그들은 이 이십여년의 운동과 연구를 부정당했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선지,우익의 비판보다 훨씬 집요하고 적극적이다. 타자에 대한 중상과 비방이 아니라도 자신을 지키는 일은 가능한데.

하지만, 그런 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내가 의도한대로, 있는 그대로 읽어주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 비판자들은 내 책이 일본의 우익을 기쁘게 한다고 말하지만, 이들은 모두 우익을 비판하는 입장에 있는 이들이다.

우파든 좌파든, 마음을 비우고 읽을 수 있는 이들에게 더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시민의 힘이 정부와 보수를 흔들 수 있도록.
————————————
(전략)

최대 현안은 위안부 문제이지만 이와 관련해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다.

일본에서도 발행된 ‘제국의 위안부’ 저자인 박유하 씨가 한국에서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해 당국의 조사를 받은 것이다. 이미 저자에게 불리한 출판금지 가처분 결정이 나온 데 놀랐지만 이에 더해 오해와 곡해로 인한 심각한 비방 중상이 난무하고 있어 유감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이 책은 한일 양국에 존재하는 극단적인 주장이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해왔다고 지적하며 과감한 문제 타개를 요구한 의욕적인 작품이다. 일본에서 평가가 높은 것은 결코 우익이 기뻐해서가 아니라 해결을 바라는 양식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잡았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내용이어서 이론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는 언론의 장에서 논의하면 좋지 않은가. 만에 하나 공권력이 그녀를 기소하면 문제 해결에 결코 도움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선진 제국은 마침내 한국이 ‘언론을 억압하는 나라’라고 낙인을 찍을 것이다. 그래서 기뻐할 사람은 누구일까. 한국도 스스로 공통의 가치관을 버리지 않도록 절실히 바라고 있다.

(와카미야 요시부미 일본국제교류센터 시니어펠로 전 아사히신문 ,2015/3/19,동아일보)

읽는쪽도 시험당한다. <제국의 위안부>에는 그런 평이 있다.

위안부를 데리고 다닌 업자에 조선인이 있었다는 지적을, 일본의 책임을 부정하고 싶은 논객은 환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논지의 한 부분만을 멋대로 가져다 쓴 결과다.박교수는 위안부를 낳은 구조를 명확히 밝히려 한 것이고 누군가를 면죄하고 있지는 않다.
또한 아시아여성기금을 높이 평가했다고 해서 이제까지의 일본의 대응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속단이다. 기금의 존재는 위안부의 고통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지려던 생각이 국회(국민)의 다수생각이 아니었음을 말한다.

(마세타츠야 홋카이도 신문 해설 위원, 2015/3/24, 홋카이도 신문)

아사히신문의 오보정정으로 인해 마치 2차대전때 위안부문제는 없었다는 식으로 외치면서 역사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하려는 이들이 있다.

남경사건에 관해서도 그렇다.(중략)
한국의 저자인만큼,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탓에 다른나라 위안부와는 또다른 가혹함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TKo, 아akwhs 아마존 독자평)

박유하님의 사진.
박유하님의 사진.
박유하님의 사진.
박유하님의 사진.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87635244596722

渦中日記 2015/2/27

압도적인 폭력아래 놓이면, 말을 잃게 된다. 마녀사냥식 비난과 추측성 의혹과 그럴듯해 보이는 비판들 속에서, 어느 쪽에 먼저 대답해야 할지부터 생각해야 했다. 웃고 있으면 짓밟아 울리고 싶다는 이들이 있었고 슬퍼하면 순교자 코스프레를 한다는 이들이 있었다. 씩씩하려 하면 뻔뻔하다 했고, 침묵하고 있으면 반박을 못하는 거라고 했다.

검찰조사가 끝나자마자 지방국립대교수와 성남시장이 공격을 시작했고, 그리고 가처분 판결을 받았었다. 덕분에 주변지인들까지 설연휴를 반납하다시피 했고 나 역시도 견뎌내기만도 버거운 며칠이었다. 진작부터 약속한 두개의 일정을 위한 준비도 해야 했다.
귀국하고 보니 이번엔 그 행사마저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었고, 나는 “그 와중에 책을 팔러” 일본까지 다녀온 사람이 되어 있었다. 더구나 비난에 대해 “자신은 뒤로 숨고 지지자들을 내보낸” 비겁자가 되어 있었다.

작년 6월에는 했던 해명과 설명을 이번에는 일일이 하지 않았던 건 우선은 경황이 없어서기도 했지만, 두번째 겪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게 “나를 설명하는 “일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다 나에 대해 말하는 날은 그런 나자신을 넘어서야 할 만한 어떤 계기가 주어진 날이다.

나를 일으켜 세워, 몇가지에 대해선 해명을 해야겠다고 비로소 생각했던 어제, 와다 하루키 교수의 인터뷰가 나왔다. 이 역시도 비판적인 부분에만 주목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먼저 걸어둔다. 이 주말엔 페북을 하루종일 열어두어야 할 것 같다.

2월이 가고 있다.

http://www.hankookilbo.com/m/v/86fc1dfb784a4255a92a290849f7d32b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9593019734278

渦中日記 2015/2/26

비판/비난을 넘어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이들이 있다.
그동안 나는 그들을 가능한 한 이해하려 해 왔지만 이제 그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9260639767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