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나의 이해 #2

박일환
2015년 2월 21일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나의 이해 2>

두 번째 글입니다. 다른 사람 담벼락에서 짧게 논쟁을 이어가다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아예 제 담벼락에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러다 보니 애초에 쓰려고 했던 내용과 다른 내용을 먼저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다른 비판들은 대부분 근거가 부족하거나 허위에 의한 비방이라고 보이는데, 이 부분만큼은 충분히 논쟁이 될 만한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법에 대해서는 충분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최소한의 상식만 가지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출발은, 박유하 교수가 일본국가의 책임을 부정한다고 말씀하기에 그건 사실과 다르며 분명히 책임을 묻고 있다고 했더니, 박유하 교수는 일본국가의 ‘강제성’ 부분을 부정한다면서 저에게 법원의 가처분 결정문과 고노담화를 읽어보라고 하더군요. (쟁점은 일본의 책임을 어디까지 묻느냐는 것이겠지요.)

핵심은 조선인 위안부의 강제연행 여부인데요. ‘강제성’과 ‘강제연행’은 분명 다르지요. 박유하 교수는 위안부에 대해 일본 국가가 기획하고 관리(주체적으로 관여) 했으며, 위안소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다만 일본 군인의 직접 강제 연행은 드물며 예외적 일탈 정도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구체적 사례가 드물다는 거지요. 이에 대해 국제사회뿐만 아니라 일본도 고노담화를 통해 ‘강제성’을 인정했는데, 오히려 박유하 교수가 그런 부분을 사상함으로써 법적 배상을 어렵게 한다는게, 제가 이해하는 비판자들의 주된 요지입니다. 우선 일본 정부가 발표한 고노담화에서 해당되는 부분을 살펴볼까요?

“위안부의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맡았으나, 그 경우에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이 있으며,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하였다는 것이 명확하게 되었다. 또한,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태하에서의 참혹한 것이었다.” (한국위키피디아의 번역문)

자세히 읽어보면 표현이 모호합니다.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맡았으나’라는 부분은 직접 연행을 하지는 않았다는 의미가 강한데, 뒤에 나오는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하였다’라는 부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관헌은 아마도 총독부의 말단 관리(관헌이라고 했으니 군인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일 겁니다. ‘가담’이 ‘감언, 강압’인지 강제연행인지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보기에 문맥상으로는 ‘감언, 강압’에 가깝다고 보입니다. 문장의 출발과 중간 내용이 ‘모집’에 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박유하 교수는 모집 과정에서 있었던 ‘감언, 강압’을 부정하지 않으며, 다만 직접 강제연행은 사례가 드물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해석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물론 강제연행이 없었어도 ‘감언, 강압’만으로도 충분히 범죄행위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박유하 교수도 일본국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고요.(지원단체는 보상이 아닌 배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이의 담벼락 논쟁에서 상대방에게 직접 강제연행한 사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쉽게 풀릴 문제라고 했습니다(최소한 의미있는 정도의 수치가 나와야겠지요). 그에 대해 돌아온 답이 고노담화를 보라는 것이었고, 살펴본 것처럼 고노담화의 내용은 모호합니다.

현재 일본 우익은 고노담화를 부정 내지 수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위안부 지원단체는 고노담화로는 부족하며 일본의 진정한 사죄와 국가범죄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죄문제에 있어서는 고노담화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른바 종군위안부로서 허다한 고통을 경험당하고, 심신에 걸쳐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으신 모든 분들께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

제가 보기에 진심은 어떤지 몰라도 문구상으로는 사과의 내용을 충분히 담고 있습니다. 이후에 후속조치로서 보상 혹은 배상의 문제에 있어 ‘아시아여성기금’ 문제가 불거지는데, 여기서 정대협 등 위안부 지원단체는 일본의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이 문제는 복잡해서 따로 다루어야 합니다)

정리를 해야 할 듯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부분을 어떻게 보느냐는 충분히 논쟁이 될 수 있으며, 이 문제에 국한해서 문제가 불거졌으면 전문가도 아니고 특별히 아는 것도 없는 제가 나설 이유도 없었습니다. 학자들끼리 논쟁을 하면 되니까요. 언뜻 보기에 강압이나 강제연행이나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그 차이가 작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줄곧 문제가 되고 있는 거지요. 일본은 고노담화에서 많은 것을 인정하고 사과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우익의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고노담화에서 더 나아가게 하려면 강제연행 부분을 더 명확하게 밝혀내는 수밖에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박유하 교수는 본인이 파악한 자료에서 그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고요. 말로 떠드는 건 상대를 설득시키지 못합니다. 구체적 자료에 근거한 치밀한 논리가 필요한 법입니다.

제대로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판단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작성일: 2015.02.23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7051649988415

박일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나의 이해 #1

박일환
2015년 2월 21일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나의 이해 1>

책을 안 읽은 분들이 많고, 구하기 어려워서 내용을 궁금해 하는 분들이 계시므로 제가 이해한 대로 몇 차례 서술하고자 합니다. 물론 저 역시 오독의 함정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며, 그런 것까지 감안해서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위안부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해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갈까 합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위안부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상은, 어린 소녀들이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서 하루에 수십 명씩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능욕당한 민족의 수난자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박유하 교수는 대체로 이렇게 말합니다.

위안부로 끌려간 사람들은 10대도 있지만 주로 20~25세 정도의 여성들입니다. 일본군이 강제로 끌고간 사람도 있지만 그건 소수이며, 다수는 민간의 업자나 관청의 말단관료들이 감언이설로 속여서 데려간 경우이고, 나아가 위안부의 성격을 알고 간 사람도 있고, 실제로 매춘에 종사하다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간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듯 위안부를 구성하고 있는 여성들은 층위가 매우 다양하며 하나의 이미지로 획일화해서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박유하 교수뿐만 아니라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러한 팩트마저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사실에 대한 해석의 문제입니다. 우선 민간업자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면서 일본이라는 국가의 책임을 면해주려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박유하 교수는 그런 민간업자들을 만들어낸 일본 국가에게 1차적 책임이 있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조선인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가 된 것이 ‘식민지’에 대한 일본 제국 권력의 결과인 이상 일본에 그 고통의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을 직접 ‘동원’한 것이 업자들이었다고 해도, 또 그들이 ‘가라유키상’처럼 유괴되거나 자발적으로 팔려갔다고 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다.”

또한 위안소를 기획하고 관리한 주체가 일본임도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군이 성병 검사를 실시했다는 사실도, 일본군이 상품과 그것이 유통되는 시스템의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관리자로 돌아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식의 일방적 권력의 존재는 군이 시스템을 ‘관리’한 관리자라는 사실, 다시 말해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주체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자신들의 손은 더럽히지 않고(온건통치를 유지하면서) 식민지인들에게 불법행위를 전담시켜 그들을 동족에 대한 가해자로 만들었다.”

다음은 ‘자발성’과 ‘매춘’이라는 말에 대해 살펴볼까요? 혹자는 박유하 교수가 조선인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로 표현했다고 하는, 오도된 이야기를 사실처럼 퍼뜨리기도 합니다. 위안부들은 일본 군인들에게 관계의 대가로 분명히 돈을 받았습니다. 이 역시 팩트이며, 이 점을 가지고 일본 우익들은 위안부를 돈을 벌기위한 자발적인 매춘부일 뿐이라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박유하 교수의 견해는 이렇습니다.

“그런 ‘추업’에 그녀들이 ‘자발적’으로 향했다면 무엇이 그런 표면적인 ‘자발성’을 이끌어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남성이고 군대이고 국가였다. 그리고 ‘일본제국’이었다. 다시 말해 ‘위안부’란 어디까지나 국가와 남성, 그리고 격리된 남성 집단을 만드는 전쟁이 필요로 했기 때문에 생긴 존재다. 위안부의 자발성이란, 본인이 의식하지 않는다 해도, 국가와 남성과 가부장제의 차별(선별)이 만든 자발성일 뿐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폭탄이 터지는 최전방에서도 폭력에 시달리며 병사들의 욕구를 들어주어야 했다.”

박유하 교수가 <제국의 위안부> 를 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이유는 우리가 ‘일본군에게 순결을 짓밟힌 어린 소녀’, ‘일본에게 범죄를 추궁하며 싸우는 투사 할머니’ 정도로 알고 있는 위안부 상에 대한 단일한 이미지를 벗겨내야만(그것이 매우 고통스러운 일일지라도), 역사적 사실과 진실에 다가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하나이고, 다음으로는 지금도 일본의 국가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 우익들에게 근거를 들이대며 당신들 국가의 잘못이라는 것을 일러주기 위함입니다.

자꾸만 길어지네요. 이만하고, 다른 이야기는 이어서…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067051543321759

渦中日記 2015/1/21

비교문학자 니시마사히코 (西成彦)선생이, 2월에 교토에 있는 리츠메이칸대학에서 내 책을 대상으로 심포지엄을 연다. 마침 어제 일본신문에 다른 책과 함께 책에 대해 다루어준 우에노치즈코 선생도 토론자로 나서 주기로. 나리타류이치선생(成田龍一)이나 이와사키미노루선생(岩崎稔)등, 가까운 지인학자들도 동경에서 일부러 와 준다고 하니 깊은 논의가 가능할 것 같다.
전체 테마는 <한일경계를 넘어서–제국을 대하는 방식>. 최근에 <제국의 어둠>이라는 책을 낸 김항선생의 책도 같은 테마로 묶어 논의한다고 한다.

우에노선생은 9년 전에 쓴 책<화해를 위해서>일본판해설을 써 주었던 분이다. 그 때는 내 책이 <뜨거운 불 속의 밤을 줍는 행위>(일본어로는 이렇게 표현한다. 직역)이라 했는데, 이번엔 <불 속에 직접 뛰어 들었다>고 표현했다. 고발당한 건 그 결과일 수 있겠지만, 나로선 고발이후 비로소 나를 덮쳐오는 <뜨거운 불>을 만났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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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裕河さんの『帝国の慰安婦』日本語版(朝日新聞出版)が刊行されて3か月余りがたち、多くの読者がこの本を手に取り、さまざまな反応を見せ始めている。
戦後70年の年にもあたる今年、私たちは「帝国日本」への向き合いを新たな形で求められており、その点では、東アジアの私たちすべてが、この課題の前で平等だ。
「慰安婦問題」ひとつをとってみても、それは「帝国日本」が招き寄せた問題であった。日韓で平行線をたどっているかに見えるこの問題に対して「共通の視点」をさぐりあてるための意見交換の場としたい。

立命館大学・公開ワークショップ
《日韓の境界を越えて~帝国日本への対し方~》
2015年2月22日(日)14:00-17:30
〈「帝国の慰安婦」という問いの射程〉
場所:朱雀キャンパス2階203教室
司会:西成彦(立命館大学)
パネラー:朴裕河(世宗大学校)、平井和子(一橋大学)、森岡正博(大阪府立大学)、上野千鶴子(立命館大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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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お、同企画は、下記企画と対をなすものであり、合わせて皆様の来場・参加をお待ちしている。
《日韓の境界を越えて~帝国日本への対し方~》第1回「帝国の擬人法」
2015年2月12日(木)15:00-17:30
場所:衣笠キャンパス末川記念会館第3会議室
司会:西成彦(立命館大学)
パネラー:金杭(延世大学校)、 沈煕燦(立命館大学専門研究員)、原佑介(日本学術振興会特別研究員)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46280138732233&set=a.578003518893233.146371.100000507702504&type=3

渦中日記 2014/11・27ー2

아침엔 많이 외로웠다. 가처분심리가 종결되면서 심란했던 여파일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지인들이 아사히신문에 서평이 났다면서 여기저기서 보내 주었다.

서평을 쓴 다카하시 겐이치로씨를 처음 만난 건, 1995년에 시마네에서 했던 한일문학심포지엄에 참석했을 때다. 나는 그 무렵 웅진출판과 <21세기 일문학의 발견>이라는 시리즈를 기획/편집해서 내는 작업을 했었고 그 시리즈에 그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라는 책을 넣었던 참이었다. 그래서 더 반갑게 인사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2013년 여름, 정말 오랫만에 이번에는 그가 재직하는 일본의 대학에서 만났다. 나는 위안부문제를 테마로 강연을 했고 그는 토론자로서 코멘트를 해 주었다.

하지만 그와 따로 만날만큼 교류가 깊지는 않았다. 그런 그가,

나는 이토록 고독한 책을 읽은 적이 없다

고 쓰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과분한 서평. 하지만 아마도 이 한마디때문에, 나는 이 서평을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렇게 쓴 이가 일본인이어서 서글프기도 했던 하루.

본문: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1006431722717075&set=a.1006431706050410.1073741834.100000507702504&type=3

가라타니 고진, 박유하 씨의 작업

PDF다운로드: 가라타니 고진, 박유하 씨의 작업

<박유하 씨의 작업> 가라타니 고진

최근 들어 한일·중일간 긴장이 높아진 것은 일본정부가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내(일본)내 제반 문제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대외적인 긴장/대립을 이용해서 일본을 언제든 전쟁가능한 체제로 만들려 하고 있다. 따라서 위안부문제든 영토문제든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생각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내가 일본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내가 일본국민이기 때문이다. 외국의 경우는 그 나라 국민들이 (자국을) 비판할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에도 그런 이들이 많이 있다. 나는 그러한 상호간 신뢰를 바탕으로 활동해 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안되는 일이 있다.

그 점에서, 나는 적극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서서 발신하려 해 온 박유하 교수에게 주목하고 있다. 그녀의 작업은 한국에서는 친일적이라고 비난 받고 일본에서는 반일적이라고 비난 받을 것이다. 그것을 처음부터 각오하고 오랫동안 위안부문제에 천착해 온 박유하 교수에게 나는 깊은 경의를 품고 있다.

(2014 년 8 월)

<원문>

パク・ユーハ氏の仕事 柄谷行人

近年、日韓や日中間の緊張が急激に高まって来たのは、日本の政府があえてそれ を作りだそうとしているからだ。それによって、国内における諸問題を打ち消すた めである。そして、対外的な対立・緊張を利用して、日本をいつでも戦争できる体 制に変えようと図っている。したがって、従軍慰安婦問題であれ領土問題であれ、 それらを解決する気などさらさらない。

私がこのように日本の政府を批判するのは、日本の国民だからだ。外国に関し ては、その国の国民が批判するだろうと思う。実際、韓国にもそのような人達が 大勢いる。私はこうした相互的信頼にもとづいて活動してきたのである。とはい え、それだけではすまないことがある。

その点で、私は、積極的に日本と韓国の間に立って発言しようとしてきたパ ク・ユーハ氏に注目している。彼女の仕事は、韓国では親日的と非難され、日本 では反日的と非難されるだろう。そのことを最初から覚悟して、従軍慰安婦問題 に長年取り組んできた氏に、私は深い敬意を抱いている。

(2014年8月)

와카미야 요시부미, 나도 ‘우익의 대변자’라고 부르라 (동아일보)

와카미야 요시부미 (일본국제교류센터 시니어펠로, 전 아사히신문 주필)

역사교과서, 독도, 위안부 다룬 박유하 교수의 ‘화해를’ ‘제국의’
일부 한국인 “日우익 대변” 비난, “위안부 명예 훼손했다” 고소
치밀한 논리, 균형적 시각으로 한일간의 난제 해결 애쓴 朴교수의 용기와 노력 지지

원문: [와카미야의 東京小考] 나도 우익의 대변자라고 부르라 (동아일보)

장정일,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시사IN)

장정일 소설가

한국과 일본은 군 위안부 숫자를 5만명에서 20만명까지 달리 추산한다. 여러 이유로 총체적 연구가 쉽지 않다. <제국의 위안부>는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려는 지은이의 강박 때문에 총체적 관점이 휘발되고 말았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대한해협이 아니라 군 위안부 문제가 놓여 있다. 실체를 발견하는 작업에서부터 해결 방안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는 경험의 소유권을 가진 피해 당사자가 엄연히 생존해 있기에 오히려 총체적 연구가 쉽지 않다. 이미 ‘일본군에 의한 조선 부녀자 강제 연행’이라는 단 한 줄로 군 위안부에 대한 상식이 완성된 터에, 그것과 다른 접근이나 그 어떤 보충도 친일파라는 지탄을 피하기 힘들다. 하지만 군 위안부의 복잡성은 아직 그 숫자마저 명확하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은 ‘20만명’설을 선호하고, 일본 연구자는 5만~7만명으로 추산하며, 만주에 주둔했던 한 일본군 병사는 “사단 군인 2만명에 50명” 정도라고 증언한다.

만주사변 이후 조선·중국·남양 군도에 일본군 300만명이 있었으니, 20만명설이 맞다면 일본군은 병사 15명당 1명의 조선인 군 위안부를 둔 게 된다. 현재도 우리나라에 주둔하는 미군 부대 근처에 반드시 기지촌이 있듯이 동서고금의 모든 군대는 병사의 성 욕망을 해결할 수단을 강구한다. 그 사실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저 수치는 정상이 아니다. 일본군은 새로운 점령지마다 현지인으로 이루어진 군 위안소를 추가한 데다, 그것도 모자라 강간을 일삼았다. 이 모든 게 사실이면, 일본은 원자폭탄이 아니라 불철주야 성폭행만 하느라 전쟁에서 진 거다. 참고로 최근 중국 연구자들은 최소 20만명의 중국인 군 위안부가 있었고, 강간을 당한 중국 부녀자의 수는 그것보다 많다고 주장한다.

20만명설은, 일제가 전쟁에 필요한 노동력을 징발하려고 만든 정신근로대와 군 위안부를 구별하지 않은 숫자다. 한국은 피해를 강조하고 일본의 야만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군 위안부의 숫자는 늘리고, 그들의 평균연령은 낮춘다. 하지만 20만명이 아닌 5만~7만명이면 일본의 야만성이 경감되고 책임이 없어지는가? 또 조선인 군 위안부의 평균연령이 25세면 10대는 아니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일제를 가리켜 인간적이었다고 할 것인가? 어느 경우든, 실체를 밝히는 것이 일본 옹호의 논리가 될 수는 없다.

일본은 고노 담화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군인들이 ‘관리’는 했지만 직접 모집하거나 영업은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해왔고, 바로 이것이 군 위안부 실체를 규명하는 가장 큰 쟁점이 되고 있다. 그러니 ①모집 ②영업 ③관리로 나누어 이 문제를 살펴보자.

①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일제 35년의 성격을 들여다봐야 한다. 2012년, 중국·인도네시아·베트남 등지에서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 연행 증거가 나오기도 했다지만, 조선은 전쟁터가 아니었다. 한·일합방이 된 1910년 이후, 조선은 일본과 형식상 한 나라가 됐다. 1등 시민인 일본인과 2등 시민인 조선인의 차이는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에게 당하는 차별보다 더 컸으면 컸지 작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조선은 행정제도와 법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군 위안부 대량 조달에는 잘 구비된 행정력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등에 업은 업자와 포주가 활동했다. 이때 취업 사기를 치러 온 업자에게 현지의 정보를 귀띔해주고 그들에게 공신력을 빌려준 장본인이 주민 사정에 밝은 면장이나 이장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강제 연행 사례가 전무하다고 뻗대는 것은 억지일 것이다.

일본군의 군 위안소 운영 여부를 따지는 ②는 상식적으로 풀이할 수 있다. 무기와 식량은 군대에 필수적이지만, 군인이 직접 총을 만들거나 땅을 갈지 않는다. 총은 방위 업체가, 쌀은 농부가 생산한다. 마찬가지로, 지역과 시기에 따라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군 위안소는 민간 업자에게 맡겨졌을 것이다.

③은 일본 정부가 인정한 것이다. 군대가 위안부의 위생을 직접 관리한 이유는 성병이 전력 차질을 낳기 때문이다. 국내 같으면 보건소가 했겠지만 전쟁 지역에서 그 일을 도맡아 할 기관은 군대밖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군대는 군 위안부의 이송에도 관여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① ②와 직접 연관된 정황이 미미하다고 해서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 그리고 천황(일왕)이 면죄되지는 않는다. 우선 일본군이 일본 정부에 위안부 설치를 요청했던 증거가 뻔히 나와 있다. 더욱이 애초에 일제 식민이 없었고,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군 위안소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광수나 윤치호의 친일을 단죄하는 이유

일제강점기의 조선은 저항과 협력이 공존했던 공간이다. 2등 시민이라는 차별에도 불구하고 한·일합방 이후에 태어난 가난한 계층과 여성 가운데 혹여 일본을 조국으로 착각하고 ‘동지의식’을 느낀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20여 년 넘게 일제 통치에 내면화(세뇌)된 때문이지 결코 그들의 허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견문을 넓힐 수 있었던 이광수나 윤치호의 친일을 단죄하는 것이다. 그들은 일제에 세뇌된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일본을 선택했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는 “‘강제 연행’을 하지 않았다 해도 ‘강제로 끌려가는’ 이들을 양산한 구조를 만든 것이 일본군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며, 그런 반성 위에 일본 정부가 “새로운 사죄와 보상”을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이라고는 “우리 안에도 위안부들에게 ‘사죄’해야 할 이들은 있다”라는 것 정도다. 하지만 사태를 하나로 묶고 파악하는 이런 총체적 관점은, 군 위안부를 착취한 일본군의 “하나가 아닌”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려는 지은이의 강박 때문에 휘발되고 말았다. 군 위안부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기억과는 다른 기억을 보충하겠다고 그들과 일본군 사이에 흘렀던 감정적 교류마저 나열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총체성을 흠집 내는 이런 다양성(나열)이 오해를 양산한다.

2013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 시민공원에 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부끄러웠다. 원래 저 소녀상은 미국에 있기 전, 먼저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조성된 독립공원에 세워져야 했다. 하지만 2008년 광복회를 비롯한 독립운동 유관단체들은 독립공원 내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난을 보여주는 박물관을 세우는 것은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운동을 폄하시키는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면서 박물관 건립을 저지했다. 그래서 서울 마포구 성미산에 따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지었다. 이처럼 민족의 역사는 자신의 가장 영광스럽고 순수한 기억만 보존하고 거기에 맞지 않는 것은 억압한다. 한때는 저런 잘못된 구습의 피해자였던 일본군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가 <제국의 위안부>를 놓고서는 자신과 다른 기억을 발굴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했다.

원문: 장정일의 독서일기,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시사IN)

『제국의 위안부』 – 발간 직후 신문사 서평 및 인터뷰 모음

서평

인터뷰

장정일, 일본 ‘국민 작가’의 숨은 국가주의 (시사IN)

장정일 소설가

박유하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 서평

저자는 나쓰메 소세키가 어떤 세계관과 시대상을 통해 국민 작가로 등극하게 되었는지 분석함으로써, 그것이 한갓 국가 이데올로기의 동조자에게 허여되는 칭호임을 밝힌다.

나쓰메 소세키는 ‘하루에 세 편씩 논문이 나온다’고 할 만큼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다. 나쓰메 소세키가 이처럼 일본인의 주목과 사랑을 받게 된 것은 그가 차지한 ‘국민 작가’라는 부동의 자리 때문이다. <나의 개인주의>(책세상 펴냄, 2004년)라는 제목의 나쓰메 소세키 강연집을 편역했던 한국 역자의 약력에 적힌 “일본의 국민 작가로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를 중심으로 일본 근대문학을 연구하고 있다”라는 문장은 더하거나 뺄 게 없는 그의 위상을 보여준다.

박유하의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문학동네 펴냄, 2011년)는 보유 격의 논문 몇 편을 빼고는 통째 나쓰메 소세키를 분석한다. 지은이는 이 책 전체를 나쓰메 소세키가 창안한 ‘자기 본위(개인주의)’를 해명하는 데 바쳤다. 그 전에 언제부터인가 당연시된 ‘국민 작가’라는 용어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우리는 ‘국민 가수’ ‘국민 배우’ ‘국민 투수’에다 ‘국민 여동생’까지 있으니, 국민 작가도 있는 줄 안다. 하지만 ‘국민 문학’이 문학사나 이론서에 등재된 것인 데 반해, 국민 작가는 문학을 설명하는 보편 용어가 못된다.

국민 작가라는 용어를 여기저기서 접하다보니, 일반 독자는 물론이고 전문적인 연구자들까지 저 용어가 근대문학이 발생한 모든 나라에 으레 있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문제는 국민 작가에 해당하는 영미(英美)·프랑스·독일·러시아·스페인어권의 대응어나 개념이 있느냐, 없느냐 따위가 아니다. 진짜 곤혹스러운 것은 저 용어를 통해 근대문학을 고민해보겠다는 비평가가 곧바로 ‘국민 작가를 가지지 못한 나라는 근대문학에 미달한 나라’라는 성급한 단정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이런 억견에 대해서는 국민 작가가 일본에서만 쓰이는 그들만의 역사적이고 특수한 맥락의 산물이라는 것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

메이지 유신으로 갱신된 일본은 서양으로부터 근대적 헌법·군대·교육·의료 체계 등을 모방하면서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라는 식의 문화적 상징물마저 갈구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무슨 공식처럼 외우고 있는 ‘영국=셰익스피어’ ‘프랑스=위고’ ‘독일=괴테’ ‘러시아=푸시킨’ 따위 믿거나 말거나 한 상식에는 어서 서양을 따라 잡아야겠다는 일본의 문화적 후진성이 상당히 투영되어 있다. 한국 비평가가 일본의 전근대성에서 생겨난 국민 작가를 근대문학의 발달을 가늠하는 기준인 양 받아들이는 것은, 이만저만한 촌극이 아니다. 메이지 시기의 일본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국민 작가를 주조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이고 특수한 맥락이 있었다면, 당연히 우리나라에도 국민 작가가 만들어질 수 없었던 역사적이고 특수한 맥락이 있었다. 그것을 무시하면, 문학 연구라는 이름을 빙자한 또 다른 식민 잔재에 지나지 않는다.

‘없다’는 이미 ‘있다’는 전제를 수긍한다. 따라서 ‘있다’를 거부하며 ‘없다’를 주장하고 싶은 사람은 항상 ‘있다, 그러나 어떻게 있게 되었다’를 통해, 만들어진 기원을 폭로하고 허물어야 한다. 말하자면 이런 전복은 외국인을 위한 일본의 어느 역사 교과서가 러·일전쟁을 전후로 한 일본의 아시아 지역으로의 무력 진출을 기술하면서 “이와 같은 일본 정부의 방식에 대해 반대한 것은 사회주의자나 나쓰메 소세키, 요사노 아키코 등의 문인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에 의문을 표하는 작업이다. 위의 인용에서 문제가 되는 천황제(일왕제)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했던 사회주의 작가의 막대한 고난과 희생은 익명으로 표시되는 대신, 당대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했던 정도의 천황제와 제국주의에 대한 아리송한 회의를 토로했을 뿐인 나쓰메 소세키가 마치 일본의 양심이었던 양 제시되는 일이다.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해서는 입 닫아

나쓰메 소세키는 어떤 기준에서 국민 작가가 되어 교과서를 오르내리고, 여타의 작가는 문학사에서조차 난외로 처리되어야 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의문 없이 마치 자연인 양 국민 작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국가 만들기’와 ‘국가 비판’을 양축으로 했던 근대문학의 임무 가운데 저항성(국가 비판)을 거세하는 일이다. 박유하의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는 나쓰메 소세키가 어떤 세계관과 시대상을 통해 국민 작가로 등극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함으로써, 그것이 한갓된 국가 이데올로기의 동조자 내지 제조자에게 허여되는 칭호라는 것을 밝힌다.

일본의 근현대 작가와 평론가는 물론이고 이른바 패전 이후 일본의 진보 지식인에게까지 나쓰메 소세키가 추앙받게 된 데에는, 그가 펼쳤던 문명론과 개인주의 언설이 큰 몫을 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서구를 발달한 문명(과학·기술) 세계로 간주하고, 일본을 문명 세계에 위협받지만 그보다 뛰어난 문화(정신)를 가진 나라라고 여겼다. 문명과 문화를 양극단으로 나누는 이런 대립 구도는 프랑스 혁명 전후로 줄곧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독일 지식인이 프랑스에 대항하고자 만든 일종의 정신승리법이면서, 누군가로부터 침략받고 있다는 유사 식민지적 공포를 통해 민족주의를 동원하는 기제였다. 그렇게 저장된 독일과 일본의 민족주의는 머지않아 제국주의로 진화했다.

나쓰메 소세키는 항상 서양에 대항해서는 일본 문화를 내세웠지만, 조선이나 중국보다 앞서 문명화된 일본이 두 나라를 침범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의 문명론은 흔히 자기 본위라고 부르는 개인주의 옹호와 결합되어, 국가주의와 물질문명에 저항했던 것으로 예찬된다. 하지만 그의 모든 대표작을 분석한 이 책에 따르면, 나쓰메 소세키의 개인주의는 항상 국가나 사회 질서의 한 분모로서만 존재했다. 또 한번 그의 동서문명론을 끄집어내자면, 서양이 도전과 투쟁을 통해 불평등을 뒤집는 문명이었던 반면 동양은 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어야 했다.

이 책은 나쓰메 소세키가 등식화한 ‘문명/문화/자연’ 사이의 각축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있다. 잠시 요약했던 것처럼 나쓰메 소세키는 서양을 문명의 총화로 보고, 그 독을 해독할 수 있는 자리에 일본 문화를 올려놓았다. 여기에 책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계몽되어야 할 여성이 자연으로 등장한다. 메이지 시기와 같은 국민국가 탄생기에 자연과 동급으로 취급된 여성은 문명과 문화의 담지자인 남성에 의해 길들여져야 했다. 이런 분석을 통해 지은이는 다시 한번, 나쓰메 소세키의 개인주의가 철저히 근대국가의 기획을 거들었던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것이 지은이가 파헤친 국민 작가의 본모습이다.

원문: [장정일의 독서일기] 일본 ‘국민 작가’의 숨은 국가주의 (시사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