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 돌린 것도 잠시. 아직 여유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어제는 이번 워싱턴 행이 “일본의 돈”이라는 악의적인 기사를 봤다. 이번 회의는 윌슨센터와 와세다대학의 공동 프로젝트인 “동아시아에서의 과도기 정의 수립”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순수한 학문적 회의다.
갑자기 “한일합의”가 이루어졌으니 당연히 그 문제도 언급되겠지만, 그 얘기를 중심적으로 논의하는 자리도 아니다. 전에도 썼지만, 이 회의는 반년도 더 이전에 계획된 회의다.
한일합의에 대한 의견을 쓰라고 종용받기도 했는데, 내 의견은 분명하다. 갑작스런 합의는 문제가 있다. 국민적납득과 합의가 가능하도록 논점을 공론화하고 국민이 공유하는 절차와 과정이 필요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대립되는 학자들이 접점을 찾는, 당사자도 포함하는 “협의체”를 만들라고 책을 낼 때부터 제안했었다.
그러니 이런 합의에 내가 무조건 찬성하거나 웃을 거라고(나의 힘이 그렇게 클 리도 없다) 생각하는건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어렵게 결정된 것이니 순서는 거꾸로 되었지만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일본지원단체가 이 합의를 “운동의 성과”로 받아들인 식의 긍정마인드를 나는 평가한다.
정부가 내내 지원단체와 논의했다고 하는 걸 보면, 마지막에 배제된 모양이다. 지금의 격렬한 반발은 거기서 온 듯 하다.
정부가 배제한 건 위안부할머니일까. 혹은 지원단체의 주장이었을까. 자세한 내막은 언젠가 밝혀지리라고 믿는다.
분명한 건, “또 다른 백억원 모금”의 발상은 이미 1997년에 정대협이 시도했던 일이라는 것.
일본국민의 “속죄금”과 “의료복지비”를 정대협이 거부했고, 받은 일곱 분 할머니들을 정대협이 비난하며 모금을 시작했고, 초라한 모금실적에 한국정부가 나서서 할머니들에게 같은 금액의 지원금을 지급했었다. 그건 한편으로는 “할머니들은 우리가 돌본다”는 발상이었지만 일본에 대한 요구는 요구대로 이어졌고 그리고 15년이 지났다.
그 사이, 운동은 세계적으로 성공했지만 일본인들의 마음은 더 닫히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니 최소한 말할 수 있는 건, 다시 15년을 똑같은 과정을 반복할 각오,그리고 시작하기전에 “모든”위안부할머니께 그런 선택에 대한 수락을 받아야 할 거라는 점이다.
엄마부대나 어버이연합도 문제지만, 그들이 문제라고 해서 운동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오만일 수 밖에 없다.
필요 있어 다시 읽었더니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쓰인 이 글이 가슴에 더 와 닿아, 일본 학자의 글을 부분적으로 발췌해 올려둔다. 이들은 진보학자들이고 자신들의 운동을 반성하는 차원에서의 글이다.
전에 한번 전문을 올렸었지만 특히 중요한 부분만 몇 번에 나눠 올리려고 한다. 위안부문제에 관심갖는 사람은 꼭 읽어야할 논문이 될 것이다. 나의 의견보다 사태파악에 훨씬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전문은 곧 어떤 잡지에 게재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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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문제를 둘러싸고 몇 가지 논쟁적인 대립점이 표출되었다. 예를 들면 ‘위안부’ 논쟁의 존재방식을 둘러싸고 메타 차원에서 재귀적(再歸的)인 물음을 던진 우에노 치즈코(上野 千鶴子 『내셔널리즘과 젠더』 세이도샤, 1998년)와 박유하(『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사토히사시 번역, 헤이본샤, 2006년)를 둘러싸고 문제의 방법론적 심화와 자기성찰의 계기가 만들어진 측면도 있었으나, 때로는 이에 대해 운동의 분열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하는 주장도 나왔다. 박유하에 대한 비판은 현재의 『제국의 위안부―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아사히신문출판, 2014년)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그동안 이토록 비판이 분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자들 사이에서 박유하의 텍스트는 제대로 읽혀지지 않았다. 야마시타 영애(山下英愛)도 이 시기에 운동의 존재방식에 대한 자성적인 물음과 문제 제기를 한 사람 중의 하나인데, 그것은 박유하와 마찬가지로 정대협 측에도 문제의 단순화와 일면화(一面化)가 있는 게 아니냐는 자문자답이었다(야마시타 영애『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위안부’ 문제에 대한 또 하나의 시각』아카시쇼텐, 2008년). 그러나 분열과 분단 속에서 그러한 문제 제기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문제의 국면이 다양화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위안부’ 논쟁은 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 제기된 것과 같은 보편적인 문제 보다는 민족적 담론으로 회귀하는 듯한 경향이 강해졌으며, 게다가 본래 이 문제와 모순될 수 있는 국제적인 맥락이 덧붙여지게 된다. 예를 들면 정대협은 국제적인 반향을 만들어 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한편으로 문제를 국가 단위로 잘라 놓는 것과 같이 단순화해 버리고 말았다. 미국 하원에서는 정대협의 주장을 지지하는 형태로 의회 결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위안부’에 대한 이미지가 세밀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한국에서의 ―‘소녀상’으로 상징되는― 피해자상을 그대로 수용하는 형태로 결의가 이루어졌고 문제를 심화시키는 데 성공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이‘소녀상’으로 상징되는 ‘위안부’ 이미지에 대한 비판과 공격은 역사수정주의자들로부터도 나오고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취급해야할 문제이다. 그러나 어떤 ‘소녀상’을 사용하여 피해자의 일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버리는 것, 그리고 이것이 지니는 복잡한 정치적 측면(politics)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젠더를 의식하는 사람이라면 간과해서는 안 되는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에노 치즈코가 『내셔널리즘과 젠더』에서 ‘모델 피해자론’이라는 형태로 이미 지적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가 조명한 일본의 전후(戦後)
이와사키 미노루(岩崎稔)・오사 시즈에(長 志珠絵)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62738360419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