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언 출신들이 소설이나 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건 분명 일본의 특성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고전문학에서도 일본엔 “노(能)라는 심각한 무대문학이 있는가 하면 교겐(狂言)이라는 코미디 무대문학이 늘 나란히 존재했고, 와카(和歌)라는 “정통시”가 있으면 俳諧(하이쿠로 변천)라는 유희성을 담뿍 넣은 문학이 생기곤 했다. 말하자면 일본인들은 무겁고 진지한 대상을 마주하게 되면 꼭 그걸 한번쯤 비틀어 보는 걸 좋아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사실 웃음이나 유모어야 말로 고도의 지적작업 이다. 세상은 물론 자기자신마저 상대화하는 시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까.
거장의 반열에 올랐으면서도 새로운 영역에 기타노가 도전하는 건 그저 인생이 지루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런 감각이야 말로 실은 독창적인 창의성으로 이어지는 거 아닐까 한다.욕망에서 자유로운 자에게만 가능한.
여기서 언급된 다자이오사무의 “심사위원 청탁”이란, 자신을 높이 평가해 주었던 사토 하루오라는 시인 겸 작가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작품에 꼭 아쿠타가와상을 주십사고 간절한 편지를 보냈던 사건이다. 다자이 26세때 일이었다. 그 얘길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죽은 다자이로선 얼굴 뜨뜻해지는일이겠지만, 기타노의 유머감각이 시킨 일일 것이다.
다자이가 상 하나 못 받았어도 “문학의 원점”처럼 여겨지는 작가가 된 것도, 인간실격에서처럼 주인공을 어릿광대 수준으로까지 격하시키는 유모어와 세상에 대한 비애의 시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욕망과도 자기연민과도 관계가 없는. 역사/사회소설이라는 거대담론에 관심이 많았던 한국작가와의 차이도 거기에 있는 듯.
우리에겐 어깨에서 힘뺀 유머감각이 더 필요해 보인다. 진지함이 관념성을 만들고 관념성이 텅빈 “정의”를
만들고, 정의관철에 대한 욕망이 때로 폭력까지 행사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