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에 나온 책을 이제야 읽을 수 있었다. 꽤 오래 전부터 아시아태평양전쟁에 관해 학계의 첨단을 가는 학자들이 출간해 온 시리즈중의 한권. 이 책에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이 4반세기의 연구와 운동의 궤적에 대해 정리한 논문이 실려 있었다.
일본역사학계의 주류는 아직 진보학자들인데, 이 글은 자신들을 향한 내부비판적 글이기도 했다.
시기별로 오단계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이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야 할 문제로 국민기금, 강제연행기사 취소후의 아사히신문에 대한 공격과 함께 나의 문제제기까지 포함한 세가지를 들고 있었다.
작년 11월에 일본어판을 낸 이후 예상밖으로 호평을 받았지만 위안부문제전체 흐름 속에서 나의 문제제기를 분석하고 또 정확히 읽어낸 글은 이 논문이 처음이다. 저자는 현대사상학자와 일본역사학자.
10개월만에,아니 한국어판을 내고 2년만에, 나의 문제제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온전히 받아들여준 학자들의 글을 만나 기쁘다.
일부를 우선 번역해 둔다. 이 책을 편집한 역사학자는 내게 “앞으로 위안부문제를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가 이 논문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겁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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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기금을 둘러싼 시도가 <적>의 공격으로 단순화된 방식으로 이해된 것은 이 시기의 하나의 불행이었다.(234)
비판자들 안에서 박유하의 텍스트는 제대로 읽혀오지 않았다.(중략)
어떤 소녀상을 사용해 피해자의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버리는 일이 갖는 복잡한 정치학에 관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젠더문제를 의식하는 사람이라면 간과해선 안되는 문제일 터였다.(237)
(90년대초에는)피해자의 아픔에 반응하는 자세나 내용도 결코 아사히신문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예를들면 산케이신문의 오사카판이나 요미우리신문에서도…(238)
산케이신문의 1993/8/31 기사는 <인권고찰>특집에서 <인생을 걸고 실명재판>이라는 제목으로 김학순할머니 의 증언을 게재했었다(239)
1991년 이후 언론이 일본군성폭력피해자문제를 얼마나 열심히 사회에 전달하려 했었는지는 TV보도나 다큐멘타리까지 포함하면 한층 더 명확해질 것이다.(239)
위안부문제가 이렇게까지 혼돈에 빠져버린 것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일본국내에 존재하는 역사수정주의적인 조류의 현실부정에 대해, 그것을 극복할 만큼의 여론형성도 정치적 결단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40)
박유하가 문제제기한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위안부 문제는 한일 역사인식의 정체에 대한 책임이 일본 정부와 역사수정주의적인 우파 정치가에게 있다는 점을 전제하면서도, 동시에 사태경직에 대한 책임의 일단이 정대협에게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박유하는 그러한 정대협의 문제가 불문에 붙여지고 오히려 권위가 주어진 것에는 일본에서의 지원운동의 자세에도 책임이 있다고 했다(244).
문제는 박유하의 논의에 그대로 찬동하는지 아닌지가 아니다. 비판의 논점을 변경하거나, 명확히 언어화하지 않고 박유하의 논지를 추측만으로 규정하고 는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방식에 있다.(244)
박유하의 문제제기는 식민지주의 피해자가 안고있는 집합적기억에 관한 어려운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244).
박유하의 지적이 옳다고 일본인인 본고의 저자가 말하는 이 배치자체가, 일찍이 식민지 지배를 받은 사람들한테는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정치적으로 문제를 움직여 나가는 일이 가능한 국면을 스스로 포기하는 정황으로 이어질 것이고, 대립은 점점 더 심화될 것이다.(246)
상대적으로 가까이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 시도나 주장을 운동을 분단하는 <적>으로서만 상정하고 그 주장과의 차별화나 결연한 거부자세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그것으로 안심을 얻는 내적회로가 (운동가와 연구자들에게)생긴다.(249)
….한국의 운동은 그러한 오해와 (문제의)왜소화를 한편으로는 인식하면서도 운동의 역동성속에서 그러한 정황을 바로잡거나 (문제를)심화시켜 나가는 일에는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251)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189922024368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