渦中日記 2015/10/16

예전에 극렬한 말로 나를 비판했던 이가 내 아들과 나이가 같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고발직후였는데 나를 향한 비난의 태도와 말이 너무나 무례해서 페삭했던 친구다. 아직 젊다는 건 프로필사진으로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젊은 줄은 몰랐다. 얼마 전에 돌아다니던, 다른 한 사람을 포함한 “젊은 역사학자”들의 집담회에 대한 반론도 해당잡지에 보낸 참이다. 잡지가 나온 후에 페북에 올릴 생각이다.

이들은 좌담에서 나를 “이사람”이라 호칭하면서 시정잡배(이 단어에 해당하는 여성명사가 있는지 모르겠다)와 같은 취급을 하고 있었다.
이들의 선배학자도 마찬가지였으니 특별히 이들을 겨냥해 비판할 필요도 없지만, 반론을 쓰기 위해 이들의 잡담을 제대로 마주 하면서 나는 깊은 자괴감을 느꼈다.

“학자”(學者)란 배우는 사람들이기도 한데,이들에게선 배우는 자의 겸손이라고는 손톱만치도 찾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을 키운 건 나를 포함한 50대이상의 부모들이기도 하니,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https://www.facebook.com/choi.hyunsook.52/posts/1056598247704611

최현숙

이 글을 여기에 싣는 것이, 보다 논의를 진전하고 싶어하시는 제 페친 한 분에게 기분나쁘지 않기를 바라면서, 저의 글에 관한 그 분의 글에 달았던 저의 댓글을 여기에도 나눕니다.

그 분은 오늘 아침에 올린 남성노인 구술생애사 관련 제 글에, 박유하 교수와 제가 서로 ‘응원하고’ ‘지지하고’의 댓글들을 붙인 것을 읽으시고, 제가 “수요집회에 나가는 ‘위안부’ 생존자 할머니들에게 “권력화한 할머니들”이라고 부른 박유하 선생에게 지지하며 응원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며, “‘보수 할배’는 구진보의 말이고, ‘권력화한 할머니들’은 새진보의 말일까.(사실 이 부분은 어떤 의미의 말씀이신지 제가 이해가 잘 안됩니다..ㅜ.ㅜ) 선생께서 내게 비판하신 말씀을 더욱 살리고자 이렇게 공개적으로 여쭙고자 한다.”라는 글을 자신의 페북에 올리셨어요.

이에 제가 아래의 댓글을 올렸고, 박유하교수를 포함한 페친들과 함께 이 고민을 나누고 싶어 여기에도 올립니다. 그 페친 분과 박유하교수에게 공연한 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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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댓글

아, 이제 봤네요…^^ 글을 쓰면서 제 생각을 정리해 볼게요.

1. ‘보수할배’ 관련 제 글은 000 님의 글을 보면서 쓴 게 아니에요. 저는 지금도 000님의 그 글을 보지 못했어요. 그 이전 ‘천박함’ 관련 제 글에 대한 000 님의 ‘지하철에서의 이야기’ 댓글은 제가 읽어서 알고 있고요. 제가 구술생애사 작업을 하고 있는 남성노인이 월남전을 참여하신 분이고, 일부 진보인들은 ‘월남전참전’ 이야기만 나오면 ‘보수할배’와 직결시키는 경향이 있어, 그 전형화와 규정에 대한 제 문제의식을 글로 쓴 거였어요. 생애사 작업 중에 제가 보게 되는 그 분의 정치적 성향은 비교적 보수적이지만, 나름대로의 기준과 판단으로 김대중과 노무현과 정동영에게 표를 주었고 그 다음에는 박근혜에게 표를 주었고요. ‘진보’라는 단어가 그렇듯 ‘보수’라는 단어 역시 삶과 선택의 세세한 맥락들을 무시한 채 너무 상대를 규정하고 전형화하며 쓰여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2. 박유하 교수와 정대협 간의 논란은 제가 자세하게 추적하지는 않은 상황이고, 심지어 그녀의 책 “제국의 위안부”도 아직 읽지 못했으며, 그녀의 구체적 입장과 판단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몇몇 문구나 어떤 행위들만으로 그녀(의 학문적 추구)가 논란과 매도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더 나아가

1) 정대협이라는 단체의 많은 노력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다양한 욕구와 상황들이 정대협 안에서 충분히 배려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을 저는 하고 있어요. 많은 사회단체 활동들을 통해, ‘단체’라는 것이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 정대협과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2) 박 교수의 글이나 생각이 학문적이고 개인적인 많은 맥락과 고민 속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지나치게 흑백논리로 분류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고 보여져요. 그 흑과 백 사이의 ‘위험하지만 절실하고 요긴한 경계들’에서 박 교수가 학자로서 갖고 있는 다양하고 섬세한 고민들과 차이들은 온통 삭제당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욕보였다’느니 ‘친일적’이라느니 규정당하고 있지요. 사실 박 교수는 ‘경계에 서는 위험’과 논란과 비난과 매도를 아마 충분히 예상하면서도, 많은 위험과 고난을 감수하면서 학자로서의 자신의 학문과 싸움을 성실하고 당당하게 하고 있다고 저는 보아요. 어떤 판결이 나느냐, 어떤 보도자료들이 나오느냐, 위안부 문제 관련 그녀와 나의 생각이 얼마나 같고 다르느냐와 상관없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추구를 진행하고, 나아가 오해와 매도로 인해 발생해서 자신에게 닥쳐온 법적 시비를 “자신의 싸움‘으로 받아들이는 것, 즉 그녀가 감수하는 위험과 자신에게 온 싸움에 대한 그녀의 태도에 대해, 저는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1214859168540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