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할머니들과의 만남

박유하

앞서 쓴 것처럼, 위안부문제론을 한 권의 책으로 제대로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2012년 봄이다. 사실 나는 위안부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은 <화해를 위해서>에 거의 썼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굳이 다시 써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한일양국에 (혹은 좌파와 우파에게) 말걸기를 시도한 <화해를 위해서>는 일본에서는 과분한 반응을 얻었지만 한국(지원단체)에서는 묵살당했다. 그리고 정대협의 소녀상 건립과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이후 양국 언론은 혐오와 증오만이 넘치고 있었다. 무엇보다, 어른들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는 청소년들이, 상처받고 적개심을 다지면서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었다. 지난 4반세기이상으로 심각한 4반세기를 예상해야 할 상황이었다.

귀국 후, 촌음을 아껴 집필에 매진했다.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가급적 줄였다. 책 한 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작은 물동그라미(파문)가 또다른 물동그라미를 만날 수 있도록 하려면, 우선은 나부터 돌을 던져야 했다. 빠르면 빠를 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원한을 안고 이 세상을 떠나는 분이 한분이라도 적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3년 여름에 <제국의 위안부>를 내놓을 수 있었다.

<제국의 위안부>는 역사서가 아니다. 역사와 마주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한 책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최소한의 정보를 담으려 한 책이다. 학술서로 만들 수 있는 자료를 사용하면서도 일반서 형태로 낸 것은, 양국국민이 널리 알게 된 문제인 이상, 아카데미즘 안에서의 논의만으로는 이 사태를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쫓기는 듯한 기분으로 책을 내고 나서, 나는 할머니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집필 중에 할머니를 만나지 않은 것은, 오래된 증언집들에 오히려 더 풍부한 서사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곳에는, 단일화되기 이전의, ‘국민의 상식’이자 ‘국정교과서’가 되기 이전의 “여성의 이야기”가 온전하게 담겨 있었다.

나는 증언집을 통해 그렇게, 훼손되지 않은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또 그에 근거해 조선인위안부가 어떤 존재인지 분석했다. 그리고 새로운 사죄와 보상이 필요하며 그를 위한 협의체에 당사자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썼다. 그러니 책을 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뒤늦게나마 “지금 이곳”의 힐머니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위안부문제 초기부터 할머니들을 위해 애써왔음에도 90년대 후반에 아시아여성기금일을 하면서 정대협과 갈등을 빚고 입국금지를 당한 일본의 저널리스트가 있었다. <화해를 위해서>에서 그 이야기를 쓴 것이 인연이 되어 그 여성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여성은 기금해산 이후에도 이어진 일본정부에 의한 예산으로 할머니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여성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함께 만나고 싶다고 부탁했다. 그리고 시내 한 호텔에서 위안부할머니들 세 분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증언집에서 이미 체험을 읽은 적이 있는 분도 계셨다. 그 만남은 긴장되는 체험이었다. 내가 모르는 세월, 내가 모르는 신산한 체험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고 긴장을 요한다. 그날, 나는 그분들과 주로 일본의 사죄와 보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체험을 듣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위안부문제로 또다른 책을 쓸 생각이 없는 이상, 그분들께 나 하나를 위해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불러내도록 해야 할 권리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분들이 원하는 사죄와 보상이 지원단체가 말해오던 주장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이후에 자택으로 찾아가 만난 또다른 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분은 강제로 끌려간 체험을 스스로 말씀하시는 분이었는데, 그럼에도 ‘법적책임’요구같은 건 필요없고 보상금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놀라지는 않았다. 이미 아시아여성기금을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 그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오랜 세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해 온 주변인들의 생각이 주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그런 목소리가 그동안 ‘들려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것을 새삼 다시 확인하면서, <화해를 위해서>와 <제국의 위안부>에서의 나의 시도가 무력했음을 알았다. 나의 책의 주요목표는, 이 문제에 대한 할머니들의 생각을 전하는 일이었지만, 나의 시도가 여전히 실패중임을 아프게 깨달아야 했던 시간이었다.

또다른 할머니들을 만나려면 한국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나 나눔의집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수요시위에 참석하고 온 나의 제자는,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고 했다. 지원단체가 할머니와 외부인의 만남을 극력 꺼리는 듯 했다고 말했다. 정대협에 내가 직접 연락하지 않은 것은, 정대협이 나를 발간직후에 고발하려 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 발간직후인 9월 경에, 정대협이 변호사를 불러 나에 대한 고발에 관해 의논했다는 것을, 나는 정대협관계자가 올려놓은 일지에서 봤다. 그리고 이 때 의논했던 변호사는 고발에 부정적이었다는 것을 훗날 다른 변호사를 통해 듣기도 했다. 그런데 2016년3월, 나의 책에 대한 논의를 하는 모임이 도쿄에서 열렸을 때 제출된 이나영교수의 자료에는, 전 정대협대표인 정진성 교수 등과 논의했으나 내 책이 대응할 만한 ‘가치가 없어’서 대응하지 않은 것으로 쓰여 있었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고발장에 지적된 100곳 넘는 부분 중에는 정대협에 관한 기술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책에서 정대협을 비판했으니 이들의 당혹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나에 대한 나눔의 집 고발에 정대협이 관여했는지 여부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원고측 서면과 자료에서 운동가와 학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은 적은 없다. 그리고 그런 연구와 자료들을 만든 것이 정대협운동인 건 분명했다.

정대협을 통해 할머니를 만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그래서 나는 또하나의 지원단체인 나눔의집에 연락을 했다. 전화로 연결된 나눔의집 소장에게, 학기 중이어서 광주에 내려갈 수 있는 시간을 만들기가 당분간 쉽지 않으니, 혹 서울에 용무가 있을 경우 연락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 후 서울에서 만날 수는 없었다. 그가 나의 책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대협에 대한 비판서이기도 한 나의 책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나에게 예의를 갖춰 대했고, 11월 말에 내가 나눔의집에 가겠다고 했을 때, 당일 자신은 나눔의집에 없지만 사무국장과 얘기하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그래서 나는 앞서의 일본인 여성과 나눔의 집에 함께 갔다. 호텔에서 만난 할머니 중 한 분이 나눔의 집에 계시기도 했기 때문에 그 분과는 재회의 만남이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