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8 연구집회가 남긴 것 – 아라라기 신조(蘭 信三, 죠치대 교수)

 

1. 들어가며

2016년 3월28일에 열린 연구집회 “‘위안부’ 문제에 어떻게 마주하는가―박유하 씨의 저술과 그 평가를 소재로”(이하 0328 연구집회로 약칭)는 참가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0328 연구집회의 의미를 어떠한 위치로 정립시키느냐는 내게 있어서 상당히 어려웠으며 지금도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집회 후반의 전개, 집회 종료 후의 전개, 미디어의 보도 등을 통해 ‘위안부’ 문제의 어려움을 통감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상호간에 많은 부분에서 인식을 공유하고 본래 함께 투쟁해야 하는 쌍방이 서로 비판을 하는 모습에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본 연구집회의 발기인인 도노무라 마사루(外村大) 씨의 노력과 의도와는 동떨어진 방향으로 사태는 움직여갔다. 그렇지만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연구집회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이른바 중간파들에게 계속해서 큰 임팩트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2. 0328 연구집회의 경위

우선, 이 연구집회가 개최되게 된 경위에 대해 짚어 보도록 한다.

박유하의‘제국의 위안부’가 2013년에 한국에서, 2014년에 일본에서 간행되자 일본에서는 바로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 간행 1년 후인 2014년 6월에 한국에서 민사소송이 제기되었며 같은 해 11월에 검찰청에 의해 불구속 기소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태, 특히 검찰 기소를 우려하여 2015년 11월26일에 미국과 일본의 54명이 ‘박유하 씨 불구속 기소에 대한 항의성명’을 발표하여 한일 양국 사회에 임팩트를 던져 주었다. 그때 본 연구집회의 발기인인 도노무라 마사루 씨는 성명에 찬동을 하느냐 마느냐 고민을 했었는데, 또 하나의 액션으로서 일본군 ‘위안부’문제에 대한 문제 제기의 연구집회를 발족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제1탄으로‘위안부’문제와 박유하 씨를 둘러싸고 의견을 달리하는 두 그룹이 토론의 장을 공유하고 상호간의 의견을 서로 이야기하는 획기적인 장이 마련되었다. 이것이 0328 연구집회가 실현되게 된 대략적인 경위이다.

도노무라 씨와 오랜 기간 공동연구를 계속해 오면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일찍이 도노무라 씨에게 이 이야기의 제안을 받아 전면적인 협력과 전면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도노무라 씨가 김부자, 나카노 도시오(中野敏男), 양징자, 정영환 씨들과, 그리고 또 한 축의 당사자인 니시 마사히코(西成彦), 모토하시 테츠야(本橋哲也) 씨들과 대화하는 과정을 지켜봐 왔다. 물론 중간에 몇 번이고 무리일지도 모른다고 마음속으로는 포기 직전까지 갔었으나, 도노무라 씨의 끈질긴 협상과 양쪽의 대표(본 연구집회의 실행위원이 됨)의 용기있는 결단으로 0328 연구집회는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당초의 경위도 있고 도노무라 씨가 부탁하기 쉽다는 이유로 연구집회의 사회를 맡게된 나는, 서로 다가갈 수 있는 집회가 될 수도, 결렬로 끝날 수도, 획기적인 집회가 될 수도, 최악의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몇 가지의 시나리오를 떠올리면서0328 연구집회에 임했다. 조선근현대사의 전문가로 이 문제에 대해서도 발언을 계속하고 있는 이타가키 류타(板垣竜太) 씨와 공동 사회였는데, 나는 여하튼 연구집회가 무사히 개최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으며, 그런 기회에 양쪽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서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의견의 상이점을 서로 확인하는 것이 두 번째 목적이었으며, 또한 바라건대 다음 집회에 대한 단계를 시사하고 끝내는 것이 세 번째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도노무라 씨가 여러가지로 꼬여있는 이‘위안부’문제라는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면서도, 이번 한 번 만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논의를 통한‘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지향하고, 박유하 씨를 둘러싼 인식과 행동의 상이점을 풀어내는 실마리를 지향하는 제 1탄이 본 연구집회였다.

13시 오픈, 130명 정원의 회의장은 거의 꽉 차 양 옆쪽으로 의자를 임시로 설치했는데 이 자리도 거의 차서 연구집회에 등록한 참가자와 매스컴 관계자들로 회의장은 만원을 이루었으며 잠시 후 시작되는 연구집회에 대한 주목과 기대감으로 회의장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13시반에 시작되어 도노무라 씨의 개회인사에 이어 양쪽 보고자와 코멘테이터의 보고와 코멘트가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앞에 나와 발언한 전원이 일본군‘위안부’문

제가 식민지 지배와 제국 일본의 근원적인 책임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대전제로 하고 있었으며, 이에 아무런 인식의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박유하 저‘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문제의 이해에 공헌한 의의를 강조하느냐, 그 작품의 결점을 가차없이 비판하느냐로 입장이 확실이 갈렸다. 물론 이러한 점에서 차이가 있었던 양쪽을 같은 테이블에 앉게 한 도노무라 씨의 의도를 생각하면 당연한 흐름이었다.

양쪽의 보고는 각자의 입장을 반영하면서도 양쪽 다 훌륭했다. 직접 보고를 들으니 재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여기서 특필할만한 것은 박유하 씨가 검찰에 기소된 것에 대하여 “본래 바라는 바가 아니다.”라는 점에서 양쪽 모두 일치했다는 점이다.

나는 박유하 씨를 비판하는 발언자의 보고를 듣고 많은 것을 배웠지만 이 한가지 점이 가장 강하게 와 닿았다. 그렇구나, 바라는 바는 아니었구나 라고. 물론 내가 박유하 씨와 공동연구를 하고 있고 성명에도 서명을 한 사람으로서 이런 부분에 지나칠 정도로 감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후 휴식시간을 갖고 사회를 맡은 이타가키 씨와 내가 문제들을 정리하고 지정 토론자가 각각 5명씩 연단에 올라와 의견을 짤막하게 이야기했다. 여기까지는 양쪽이 얼굴을 마주대고 서로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의견의 상이점을 서로 확인한다는 두 번째 목적은 실현되었다, 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는 마지막 종합토론에서 다음 단계를 향한 나름의 성과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느끼게 했다. 입장이 다른 양쪽이 확 접근을 한 분위기가 있었다, 고 나는 그렇게 느꼈다. 단, 내 안에서 ‘희망’이 ‘욕심’이 되어 양쪽에서 몇 명만 대표로 나와 마지막 논의로 향한다는 시나리오를 순간적으로 생각했던, 시간은 17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양쪽의 의견을 들은 결과 마지막으로 무엇을 논해야 하는가, 과제는 무엇인가를 명확히 하고 싶어서였다. “다음 일정이 있어 시간이 없으니까 연단에 오를 수 없다.”라고 하는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 씨에게 무리한 부탁을 해서 앞에 나와 말씀을 들었다.

니시, 우에노 씨와 양, 정, 오노사와 아카네 씨의 양쪽을 대표하는 논객이 연단에 올라 마지막 논의가 이루어졌다. (검찰청에 의한) “기소를 취하할 수 없는가”라는 우에노 씨의 과감한 발언으로 (이는 본래 박유하 씨를 지원하는 성명파(声明派) 모두가 생각하는 바였지만) 회의장은 어수선해졌고, 마지막으로 모토하시 씨와 나카노 씨의 총괄 시간으로 넘어갔으나 대립점이 표면화되면서 사회자인 도노무라 씨를 비롯한 실행위원 분들에 대한 감사나 등단해 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의 뜻도 표명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다음 집회에 대한 단계를 제시하는 일 따위는 불가능했다.

3. 증언에서 이야기로 -0328 연구집회의 하나의 과제

마지막 장면에서의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과 사회자의 불찰로 인해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 했으며, 무엇보다도 눈 앞에 보였던 큰 성과마저도 우리의 손 안에서 빠져나감으로써 나는 망연자실했으며, 폐회 후에도 자책감에 빠졌다. 마지막 장면의 자초지종이 납득이 안 갔다.

그러나 시간의 경과와 함께, 그리고 양쪽의 의견에 순순히 귀를 기울였던 이른바 중간파 청년으로부터의 열의가 가득한 감사의 메일에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이 연구집회에서 ‘얻은 것’을 더 제대로 바라봐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하튼 양쪽이 같은 테이블에 앉아 논의를 한다고 하는 당초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므로. 그리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논의될 것이므로.

 

이 연구집회를 바탕으로 한 제 2탄이라고까지는 자리매김할 수 없으나, 0328 연구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올 9월4일에 일본 오럴히스토리 학회에서 ‘전시 성폭력과 오럴히스토리’라는 심포지엄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 심포지엄의 등단자의 대부분이 이 연구집회에 참가하고 있으며 강한 임팩트를 받고 있다. 원래 이 심포지엄은 작년 가을부터 준비가 진행되어 오히려 본 집회보다도 먼저 기획된 것인데, 0312의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열린 전시 성폭력에 관한 비교연구적 심포지엄과 본 연구집회를 경험하는 가운데, 이 두 개의 논의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야 한다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 연구집회는 1회성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도노무라 씨의 액션은 이어져 나갈 것이다.

 

9월로 예정되어 있는 ‘전시 성폭력과 오럴 히스토리’라는 심포지엄이 이어받을 논점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즉, 본 연구집회에서도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가 ‘당사자의 이야기’로서 ‘특권화’되어 보고되었는데, 그 증언으로서의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도 나약한 것이었다. 현재의 오럴 히스토리 연구의 수준으로 말하자면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다양해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면적인 ‘이야기의 장’이나 사회적 문맥으로서의 ‘이야기의 자기장’에 의해 규정될 수 밖에 없다고 이해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오랜 운동과 법정 투쟁을 겪으면 당사자의 이야기는 그 운동과 운동체 안에서 규정되어지며(이것은 소위 ‘재판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국 사회의 모델 스토리(일종의 동형적(同型的)이고 표준화된 이야기)에 의해 규정되어진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그때, 그곳’에서의 과거의 사건에 관한 이른바 ‘증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곳에서’의 사회적인 문맥으로 규정된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과거의 체험은 복잡하며 다양한 문맥들이 폭주하고 있다. 다양한 장면들이 있으며 이에 대한 체험자의 해석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때, 그곳’에서의 과거의 사건은 같은 장소에 함께 있었으면서도 서로 다른 시각이 생겨날 수 있으며(이른바 ‘라쇼몽(羅生門)적인 현실’), 그 이후의 전후에 놓여진 상황(이를 전후 체험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속에서 그 해석이 바뀔 수 있으며, 특히 재판의 이야기가 주류가 되면 아무래도 이에 규정을 받게 된다. 지금은 이러한 시각은 오럴 히스토리 연구에서 구축주의 뿐 만 아니라 실증주의도 공유하고 있는 시각이다. 즉, 확고한 부동(不動)의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 이야기, 이야기 속의 다성성(多声性), 이야기의 변화를 어떻게 들어내고 읽어내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아라라기 신조(2015)「오럴 히스토리의 전개와 과제」『이와나미강좌 일본의 역사 제21권 사료론』이와나미쇼텐)

 

박유하 씨의 작업의 획기적인 점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건져내어 한국사회에서의 ‘위안부’ 문제에 관한 모델적 스토리를 상대화시켰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평가하는 부분은 이것이다. 오키나와전투에 관한 논쟁에 있어서도 ‘당사자의 증언’의 진위가 실증성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문제화되었던 경위가 있다. 이 논쟁에 바탕을 둔 도베 히데아키(戸邊秀明) 씨의 최근의 작업(도베 히데아키(2105)「오키나와

전투의 기억이 오늘날에 있어서 촉구하는 것」나리타 류이치(成田龍一) ・요시다 유타카(吉田裕) 편저『기억과 인식 속의 아시아・태평양 전쟁』이와나미쇼텐, 2015)에서 이러한 점이 훌륭하게 해부되고 논해졌다. 오키나와전투와 ‘위안부’ 문제의 문맥은 물론 크게 차이가 있지만 도베 씨가 제시하는 시점은 “당사자의 증언 또는 이야기”에 의거한 논의에 있어서 크게 참고가 될 것이다.

 

박유하 씨의 작업은 물론 완벽하지는 않다. 큰 장점과 큰 결점을 함께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박유하 씨의 논의는 운동체를 비판하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서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고 싶은 사람들(수정주의자)에게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박유하 씨를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의 비판 내용의 하나는 바로 이러한 점에 있다. 그러나 요시미(吉見)・우에노(上野) 논쟁 때에도 방법론적으로 실증주의가 구축주의가 의견이 맞지 않았으며, ‘역사의 재심(再審)’과 ‘역사의 수정’은 표리의 관계에 있어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다. 식민지 지배는 범죄였다고 규탄하면 끝날 정도로 ‘역사의 진실’은 단순하지 않다. 사실 이러한 점에 수정주의자가 현 사회에서 이렇게까지 영향력을 가지게 된 배경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시점을 바꾸면 궁극적으로 “식민지 지배 속에서의 주체성은 단어의 본래의 의미에 있어서 주체적인가”라는 어려운 문제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거시적인 의미에서 식민지 지배의 죄는 명확하다. 물론 이 연구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이 점에 있어서 수정주의자들과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 하에 있어서도 사람들은 보다 더 좋은 삶의 방식, 보다 더 좋은 생활을 지향하며 노력을 한다. 식민지 지배 하에서 아이들은 천지난만하게 노력을 하며, 세상살이에 익숙한 어른들은 수단으로서 노력도 한다. 그러면, 이러한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일종의 ‘주체성’을 식민지 지배라는 큰 틀에서의 ‘몸부림’ 밖에는 안 된다고 치부해 버릴 수 있는가? 거시적인 규정성(規定性)을 주시하면서도 미시적인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을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여기에 존재하는 중간적 차원(mesolevel)의 상황들을 꼼꼼하게 봐 가는 것이 식민지 지배를 생각하는 시점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식민지 지배의 폭력성의 진정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현재의 식민지 연구의 하나의 흐름을 박유하 씨는 수용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0328 연구집회에 결여되어 있었던 것은 이러한 식민지 지배라는 시스템이 지니는 복잡함과 교활함에 입각한 치밀한 논의의 장이었다. 그러나 0328 연구집회는 강한 임팩트를 남겼으며 적어도 다음 심포지엄에 강렬한 자극과 숨결을 남겨주었다. 도노무라 마사루 씨의 ‘만용’은 계속 살아 있으며, 나는 적어도 계속 살아 있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