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개도 물어 가지 않는 ‘표현의 자유’ (한국일보)

소설가 장정일

지난 12월 2일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 2013)로 검찰의 기소를 당한 박유하씨의 기자 회견과 기소에 반대하는 지식인 성명이 함께 발표되었다.

기자 회견에 나선 저자는 정작 “표현의 자유를 침해 당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표현의 자유를 말한 적이 없다. ‘표현 자유’라고 말하면 아무 얘기나 다 써도 되는 거냐? 라는 질문이 돌아오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나 역시 ‘제국의 위안부’와 통합진보당 내란 사건에 대해 여러 번이나 쓴 적이 있지만, 한 번도 표현이나 사상의 자유를 내세워 이들을 옹호하지 않았다. 이런 일에는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결코 내세울 게 아니다. 그보다 윗길은 그들이 옹호되어야만 하는 가치를 적극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다.

똥은 개가 물어가지만, 표현과 사상의 자유는 개도 물어가지 않는다. 원래 저 자유는 도로나 다리 같이 국가를 지탱하는 공적 기반이어야 하지만, 한국에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기반이 있다면 법이 쉽사리 나서는 일도 없겠지만, 걸리더라도 저 권리를 내세우거나 거기에 의지할 수 있다. 그게 없기 때문에 걸렸다 하면, 각자도생(各自圖生)해야 한다. 사회안전망이 없는 나라의 실직자가 스스로를 구제해야 하는 이치다. 이처럼 막상 경험하게 되는 현실은 정반대인데도, ‘한국에서는 언제부터인가 표현의 자유가 절대화 되었다’고 목청을 높이는 머저리들이 있다. 슬프게도 저런 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진보 ‘먹물’이라니, 우습지도 않다.

박유하씨의 기소에 반대하는 지식인 성명 발표 때, 형사 기소에 반대하는 194명의 서명자 명단도 아울러 공개되었다. 저자를 형사 기소로부터 구하려는 저런 노력이 과연 박유하를 검찰의 기소로부터 자유롭게 해 줄까? 지식인의 서명을 진짜 귀중하게 여기는 사회라면 194명이 아니라 19명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검찰은 1만 9,400명의 지식인이 서명을 했다하더라도 꿈쩍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절판된 나의 에세이집 ‘생각’(행복한책읽기, 2005)에 이런 글이 있다.

“가야산에 골프장을 만드는 일을 반대하기 위해 100만인 서명 운동이 필요할까? 혹은 시인 이상화의 생가를 보존하기 위해 그게 필요할까? 박정희 기념관을 반대하기 위해서는 그것도 필요악일까? 열 명 혹은 다섯 명으로는 안 될까? 진정 단 한 명의 의견이라도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고심하는 사회에서라면 100만인 서명 운동 따위는 우스갯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명 운동의 규모와 목표가 걸핏하면 100만인이 넘는 진풍경은 우리 사회의 병폐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100만인 서명 운동은 그것이 어떤 선의에서 행해지든지 간에 우리 사회가 물량과 물리적인 세(勢)가 득세하는 사회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처럼 머릿수가 말하기 시작할수록 소수 의견은 점차 설득력을 잃게 되리란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박유하씨의 형사 기소에 반대하는 지식인 성명과 서명자가 공개된 날, 저자의 검찰 기소에는 반대하지만 그의 책은 엄정한 비판이 필요하다는 반대편 지식인들의 성명과 서명자 명단도 공개 되었다. 비판자들은 저자의 형사 책임을 묻는 것이 적절치 않다면서도, 결과적으로는 형사 기소를 승인하는 모순을 범했다. 비판자들은 박유하씨에게 공개토론을 제안했지만, 토론장에서 피고 신분의 박유하씨가 고르거나 누릴 수 있는 말과 자유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반대자들이 자신들의 성명서를 학술장으로 이 논란을 불러들이기 위한 노력으로 자평한다면, 기만이다. 이들의 의도는 법정의 판결에 앞서 인민재판을 하겠다는 것이다. 죽창을 정의라고 착각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학제 연구가 모색된 지 오래인데도 불구하고, 저자가 역사가가 아니기 때문에 역사학계는 지금까지 박유하씨를 상대하지 않았다. 올해 벌어진 국정교과서 파동 때, 전국 대학교의 역사학과 교수들이 보여준 일치단결은 위안부 문제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박유하씨의 박사학위 논문이자 첫 책인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문학동네, 2011)는 제목 그대로 학제 연구를 수행한 책이자, 같은 문제의식이 ‘제국의 위안부’에까지 이어지고 있으므로 반드시 읽을 필요가 있다.

원문: [장정일 칼럼] 개도 물어 가지 않는 ‘표현의 자유’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