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 당신의 양심은 안녕하십니까?

당신의 양심은 안녕하십니까 -서윤

 

당신의 양심은 안녕하십니까?

 

 

서 윤 (대중예술인/자유기고가)

 

진보가 정치적 의제로 자리한 것은 87년 이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부정권의 몰락과 함께 보통선거제가 수십 년 만에 다시 실시되고 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시민들의 힘으로 다시금 세워진 민주적 정치체가 형식을 갖추어 가며 진보는 사회운동에서 정치운동의 영역에 본격적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로부터 30년 남짓한 시간이 지난 2014년 현재 우리사회에선 진보정치의 위기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지난 6.4 지방선거에선 교육감을 제외한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장에서 진보정당의 후보들은 당선사례가 별로 없습니다. 원외정당인 노동당과 녹색당은 2% 미만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쳤습니다. 저널리스트 한윤형은 지방선거 이후 쓴 칼럼(미디어스)에서 “민주노동당이 확보하고 있던 의석수가 가장 많았을 때보다도 현재 진보정당의 원내 의석수는 많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이 민주노동당이 활동하던 시절보다 진보적 가치의 실현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사회의 진보정치가 87년 본격화된 이후 가장 힘겨운 상황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이것은 진보정치의 문제인 것입니까? 혹시 우리는 진보를 잊은 채 진보정치의 실현만을 위해 애써온 것은 아닙니까? ‘진보’에 방점이 찍히지 않은 ‘정치’를 해온 것은 아니었습니까?

이 질문은 정치와 사회의 변화를 엄격하게 분리하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정치를 통한 사회의 변혁을 위해 그 바탕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그것이 잊히거나 간과되었던 것은 아닌지를 묻는 것입니다. 서민 교수는 8월 3일자 경향신문 칼럼에서 “야당의 실패인 것은 분명하지만, 무능과 부패의 극치를 보이는 여당에 대한 지지를 거두지 않는 국민들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는 언급을 하였습니다. 이 글의 논지를 선거와는 조금 거리를 두고 싶지만, 나는 서민 교수의 기본적인 취지에는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전혀 민주적이거나 진보적이지 못한 언행을 너무나 쉽게 보며 삽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그런 현실을 개선하려 노력하기는커녕 체념해 버리기도 합니다. 물론 불합리하고 모순에 가득한 일들 전부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생각건대 우리가 접하게 되는 모든 일들이 정말 체념 외에 답이 없을지는 의문입니다.

90년대 직장인들에게 불문율처럼 각인되어 있던 것들 중 하나는 ‘까라면 까야지’였습니다. 많은 다른 단어와 표현으로 대체되기도 했지만 기본적인 뜻은 매일반이었습니다. 20년 가까이 지난 요즘은 어떻습니까?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당시 ‘까라면 까야만 했던’ 자기 경험을 진로그룹 매상 올려주며 육두문자와 함께 내뱉던 사람들은 지금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그들이 바로 지금도 변치 않는, ‘까라면 까야’ 하는 말단직원들의 관리자들입니다. 반복하여 묻겠습니다. 우리의 진보정치는 무엇을 잊고 있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진보를 정치적 용어가 아닌 태도를 가리키는 속성의 형용사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의 진보적 생각과 행동, 이것은 바로 진보적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보적 태도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형용사이겠습니까?

추상적으로 말하여서 진보란 개선과 동의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선이란 어떠한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을 기초로 할 것입니다. 기존의 생활을 유지시켜 주는 체제나 조건들이 완전히 만족스럽지 않다는 느낌과 그 느낌을 구체적으로 정돈한 것이 바로 문제의식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집단적으로 일어나기보다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게 형성된 문제의식이 공유될 때 진보는 연대를 구성합니다.

다시 말해 진보는 태생적으로 분열된 형태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어쩌면 가장 진보적인 행위는 가장 개인적인 행위로 말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발 물러선다 하더라도, 진보의 출발은 언제나 개인의 태도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연대 속에서 공유된 문제의식은, 그것을 이끌어 낸 개인의 모든 맥락을 포함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문제의식에 이르는 각각의 맥락과 문제의식 사이에는 어떠한 위계가 발생합니다. 모든 개인의 맥락을 고려할 수 있는 연대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발생한 위계가 견고해질수록, 역설적으로 진보적 문제의식은 더욱 강화된 권위를 얻고 연대는 내부적 보수화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연대’의 필연성-내부적 보수화의 과도한 진행이 바로 현재 비판받고 있는 진보세력의 내부 민주주의 확립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목소리를 허용하고 최대한으로 그것을 수용하여 의제를 만들어 가야 하는 과정의 결여가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진보적 태도는 언제나 개별적으로 창발한다는 것, 그리고 모종의 문제의식을 공유함으로써 형성되는 연대가 필연적으로 보수화된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숙지하지 않는 한 어떤 조직도 경직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조직의 내부적 보수화가 극단적으로 진행되면 내부적 자기비판의 원천차단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때로는 외부의 자기비판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자기비판에 대한 원천차단의 가장 좋은 예시가 우리나라의 진보정치운동 내에서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일들에 대한 간과 내지는 묵살이겠습니다. 즉 내부적 자기비판의 원천차단은 자기반성을 차단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부에서 가해오는 비판에 대한 반응은 필요 이상으로 격한 것이 대체적인 모양으로 보입니다. 이 격함은 때로 탄압이 되기도 합니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소송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책을 통해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유로 정대협의 정치세력화를 언급했습니다. 정대협을 정면으로 비판한 셈입니다.

물론 비판의 여지가 없을 수 없습니다. 맥락을 살피건대 저자는 정대협과 일본 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가들(이후 ‘위안부 활동가들’)이 정치적 실리주의 노선을 선택한 것에 대한 비판을 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자의 의도가 쉬 파악되지는 않습니다. 저자는 그들의 활동이 정치적으로 흐르며 사회변혁의 움직임으로 이어졌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이런 서술이 ‘권력쟁투로서의 정치’와 ‘사회변혁을 위한 정치’를 구별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 두 가지는 완전히 분리되기 어려울 것이며 거의 언제나 한데 뒤채여 갈마드는 사안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변혁을 위한 권력의 쟁취’와 ‘권력을 위한 권력의 쟁취’는 또한 다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저자가 비판을 하기 위해선 ‘권력을 위한 권력의 쟁취’를 분명하게 분리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저자는 정치적 정당성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뒤섞어 이야기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이 구분되어야 할 이유는, 현재 소송에서 문제시되는 ‘동지적 관계’라는 논리적 장치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장치가 지금까지 국가 대 국가의 프레임으로 나뉘어 진행된 위안부 문제, 나아가선 식민지시대의 문제를 바라보는 역사관에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논지를 따라가며 이점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박유하 교수는 전쟁수행을 위해 동원된 집단이란 점에서 위안부와 군을 ‘같은 목적에 복무하는 집단’으로 상정하고 이를 줄여 ‘동지적 관계’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군위안부라는 기관이 제국 일본의 통치체계 내에서의 한 부분이었음을 뜻하는 말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동지애적 의미가 결여된 건조한 표현입니다. 박유하 교수가 동지적 관계라는 표현으로 드러내려 했던 것은, 일본의 식민통치 하에서 식민지 백성으로서 근본적으로는 노예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 여성들의 애환과 삶의 모순이었습니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아무리 형식적으로 동일한 일본인이었으며 군과 함께 전쟁에 동원된 ‘전쟁수행을 위한’ 같은 처지였다 하더라도, 위안부에 동원된 조선인 여성들은 무력으로 나라를 점령한 일본의 지배를 받는 노예 신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실제적인 사실과 형식적인 사실 사이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의 삶의 첫 번째 외연적 모순이 드러납니다. 즉 식민지 백성으로서 노예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점령국 백성으로서 형식상 일본인이 되어 있다는 사실 사이에 발생하는 형식적 충돌이 그것입니다.

두 번째 외연적 모순은 그들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인 위안부들과 다르게 받았던 차별대우입니다. 전쟁 중 일본이 설치하고 관리했던 위안소의 요금표만 보아도 내지인(일본인)과 반도인(조선인) 위안부 간의 차별은 아예 형식적으로 굳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 속에서도 그런 내용이 적잖이 나옵니다. 그들은 ‘대동아 공영’이라는 기치를 내건 “제국 일본”의 통치를 받는 같은 일본인이면서도 민족적 이유로 인해 차별을 받았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드러나는 것은, 비록 동지였다 하더라도 그들은 군인(남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여성)였다는 점입니다. 군인들이 제국의 세력 확장을 위한 전쟁에서 선봉을 섰다면, 위안부들은 그들의 노곤함을 달래는 역할을 함으로써 군인들의 사기진작에 도움을 주는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이 여성 차별의 역사는 고대시대 승리한 장수가 시침을 받던 것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그 뿌리가 깊습니다만, 위안부와 관련하여 보다 직접적인 연원을 찾으면 “제국 일본”의 시대 이전에 공창이었던 가라유키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입니다.

이러한 삶의 외연적 조건들 때문에 위안부로서 살았던 조선인 여성들의 생활이 피폐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아무리 일본군이 국가적으로 관리, 통제하며 위안부들에 대한 처우를 보장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20세기 최대의 야만으로 불리는 홀로코스트 가운데서조차 감금되어 있던 유태인들이 낭만을 찾으려 몸부림쳤듯, 위안부들도 그처럼 피폐한 삶속에서 인간으로 살고자 몸부림쳤던 사례가 있습니다. 조선 여성이지만 위안부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자신의 역할에 적극적이었거나 혹은 그 안에서 일본 군인과의 로맨스가 있었다는 것 등이 그러한 사례입니다. 박유하 교수가 제시하는 사례들이 이러합니다.

물론 이와 같은 사례들은 조선인 위안부 전체의 모습일 리 없습니다. 저자 역시 이점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부분적이든 대개의 경우였건 나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여기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부분적인 사례라 한들 묻히거나 삭제되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역사란 늘 실재했던 당대의 복잡다단한 양태를 완전하게 기술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조선인 위안부들의 위와 같은 사례들은 분명 삶의 지독한 모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모순점 때문에 그에 관해 “본질적으로는 노예이며 여성에 대한 국가의 폭력이었으므로 그러한 낭만 자체가 평가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섣부른 예단이며 타자의 삶에 대한 이념적 오만입니다. 역사가 과학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대상임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러한 예단보다는 명백히 있었던 모습을 토대로 하여 평가가 출발하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순점들은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따라 삭제될 수도 있고 혹은 보태어질 수도 있습니다. 역사에 대한 서술은 서술자의 시점이 품은 이념적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는 상식 때문입니다. 만일 역사를 되돌아보는 모종의 논리적 장치-시점-가 그 같은 구조 내 개인들의 모순된 모습을 조명할 수 없다면 새로운 논리 모델을 계발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새로운 시점이 될 것입니다. 심지어 서술의 형식에 따라서도 그러한 모순점들이 표현되는 양식이 다른데, 그것을 기본적으로 구성하는 시점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결국 기록이란 이러한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박유하 교수가 ‘동지적 관계’라는 논리적 장치를 마련했던 것은, 그것이 설령 부분적인 기억이었다 하더라도, 조선인 위안부들이 감내해야 했던 삶의 모순과 그 다양한 양태들을 선연히 드러내고자 한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일본이 지금껏 잘못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제국주의 기조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유린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일본의 새로운 국가적 조치를 요구하는 설득의 초석을 마련코자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듯) 1965년의 한일 양국 간의 협정은 일본이 벌였던 전쟁에 관한 것으로서, 일본 측에서도 현재 위안부 문제에 관한 사죄 및 보상에 대해 반복적으로 내세우는 논리는 “이미 당시에 전후처리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가 묻고자 하는 것은 전쟁에 대한 책임이 아닌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입니다. 한반도를 점령하고 통치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삶의 균열과 모순이 존재했는지를 밝힘으로써 타국을 무력으로 장악하고 다스리는 행위 자체가 잘못임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저자의 이러한 의도는 3부의 마지막과 4부에 또렷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종국적으로 이런 논지가 향하는 곳은 제국주의 일반에 대한 반성일 것입니다. 그리고 박유하 교수는 그로 향하는 자신의 주장을 명확히 합니다.

 

일본은 개인들에 대한 ‘법적 책임’은 졌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 후 처리’였고 ‘식민지지배’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한일조약의 시대적 한계를 생각하고 보완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사죄’를 한 적이 없는 다른 전前‘제국’ 국가들보다 일본이 한 발 앞서 과거의 식민지화에 대한 반성을 표명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전쟁뿐 아니라 강대국에 의한 타국의 지배는 ‘정의’에 반하는 것이라고 앞장서서 표명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 표명은 세계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263쪽)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언뜻 저자가 3장에서 정대협과 일본 내 위안부 활동가들을 비판하는 대목은 의아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자는 그들의 활동이 정치적으로 흐르고 사회변혁을 위한 활동으로 ‘변질’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제국주의 기조 자체가 그릇되었음을 지적한 대로라면, 정대협과 일본 내 위안부 활동가들의 사회변혁을 위한 정치적 활동은 장려되어야 마땅합니다. 국가적 폭력에 대한 사죄와 반성은 국가 체제를 경영하는 입법체계의 재정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형식적으로 온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박유하 교수의 논지는 국가라는 외연 자체에 회의적이지 않은 이들 혹은 국가의 주체성을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인정하는 이른바 “국가주의자”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국가가 주체가 되어 움직이는 국제관계에서 그 외연을 필요 이상으로 간과하는 낭만적 논지를 펼치고 있다는 비판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재승 교수가 서평에서 (평가의 타당성이나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취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을 비판할 수 있다면, 그 활동의 목적이나 진행상황 속에서 정치적 정당성보다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골몰하는 부분을 명확하게 분리하여 짚어줄 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박유하 교수가 이 부분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선을 긋는, 다시 말해 좀 더 닫힌 문장을 사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기실 박유하 교수는 정대협 측에서 형성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 구도”를 강하게 비판함으로써 정대협 측의 정치적 태도를 우회적으로 짚어내고는 있습니다. 즉 정대협 측의 논리는 일본이 형언할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 가해자이고 우리는 오로지 피해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박유하 교수가 이런 이분법 구도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국에 위안부>에도 명확히 적혀있듯, 조선인 위안부들의 삶이 그러한 모순을 품고 있었다는 점을 말한다 하여 일본이 가해자라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비판하는 지점은, 비록 부분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았을지언정 엄연히 존재했던 삶의 모습을 삭제하는 이분법 구도의 효과, 더 정확히는 그러한 이분법 구도를 통해 엄연히 존재했던 삶의 모습을 소거하려는 정대협의 태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정치적 필요에 의한 기억의 소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정대협이 의도적으로 그러한 태도를 취하였는지 아닌지는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확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뉘는 경직된 이분법 구도가, 위안부들의 다양한 삶의 양태를 은폐하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그리고 현재 세계 곳곳에 세우려 하는 소녀상입니다.

식민통치 당시 조선인 위안부들의 평균 연령을 감안할 때(『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전5권)에서의 증언들은 위안부들의 평균 연령이 20세 어름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때로 10대 후반의 여성들이 있기는 하였어도 대개의 증언에서는 그 정도의 연령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소녀상은 사실적 타당성이 결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순진하고 가난한 조선 처녀들을 강제로 끌어갔다’는 의미로 해석되면서 일본의 범죄행위만을 극단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일본의 위안부 제도에 적극적으로 응하고자 조선 여성들을 꾀어 위안부에 밀어 넣은 ‘통치구조 내에서 방기된 범죄자들’은 은폐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따라서 저자가 지적하는 “식민지의 분열증”을 세밀히 살필 수 있는 시각은 쉽게 기각되고 맙니다.

소녀상이 문제시되는 더욱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남성본위주의의 산물이라는 점입니다. 위안부 문제는 우리나라의 문제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여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근대 이후 남성본위의 이데올로기가 두드러진 국가적 정책 속에서 억압받고 희생을 강요당한 여성의 문제인 것입니다. 정대협 역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와중에 2000년대 들어 여성 보편의 인권에 대해 지속적으로 피력해온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소녀’의 이미지를 내세우는 데 대해 저는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결주의적 사고의 결과로써,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을 만들어냈던 빅토리아 시대의 야만적인 남성중심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의 이율배반은 비단 그들의 남성중심주의적 태도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정대협을 중심으로 확대되고 지지를 받아온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의 방식은, 불행하게도, 일본을 비롯한 과거 제국주의적 기조를 천명하고 나섰던 국가들이 채택했던 것과 꼭 닮아 있습니다. 20세기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제국주의적 기조란 무력을 앞세워 영토를 침탈하고 식민지를 건설하는 등, 힘의 논리를 의미하였음은 이미 상식입니다. 현재 정대협의 활동방식은 어떻습니까?

그들이 국제적 연대를 이끌어낸 것은 높이 평가받을 만한 업적입니다. 그걸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국제적 연대로써 그들이 일본에 대해 하는 일은 “설득”이 아닌 “압박”입니다. 다시 말해 “초국적 연대”라는 힘으로 “일본”이라는 국가를 압박하는 형식입니다. 이것은 힘으로 한반도를 병합하고 수탈했던 일본의 방식과 닮은꼴입니다. 일본이 무력으로 점령하여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여성들을 데려다 착취했던 책임을 물으면서 꼭 같은 방식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세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그것이 보복성이라는 측면에서 정당성이 약화될 것이요, 둘째로는 힘을 앞세운 국가주의의 극단인 군국주의적 제국주의의 역사 일반에 상존했던 위안부 문제를 “일본만의 것으로” 특수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입니다. 이 둘째 문제는 결국 “보편적 여성 인권”이라는 정대협 활동의 명분을 약화시킵니다. 마지막 하나는,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힘의 논리를 앞세워 단일 슬로건 아래 동원된 개인들의 피폐함을 제대로 볼 수 없거나 혹은 억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력을 앞세워 타국을 점령하는 행위는 개인의 많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군인으로 징병되어 가족이나 고향과 떨어져 지내는 일도 그러하지만, 전쟁을 위한 물자동원으로 인해 갖은 부역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전리품을 배분하는 데서도 문제는 발생합니다. 아직도 ‘영광의 시대’라며 적잖은 사람들이 야만적인 평가를 서슴지 않는 빅토리아 시대에도 노동자 계급은 미성년인 이들까지 공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식민지 수탈의 전리품을 나눠 갖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타국을 점령하고 수탈하는 행위가 정당하다는 얘기는 전혀 아닙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는 식민지든 본국이든 일부 계급을 제외한 개인들의 삶이, 비록 외적 조건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그와 같은 양상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자 지난 20년간 애써온 정대협에서도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자도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듯 하는 정대협의 활동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인용한 바 있는 심미자 할머니가 그러한 경우에 해당할 것입니다. 심미자 할머니는 유언장에서, 정대협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용하여 출세하였으며, 정대협 출신의 국회의원이 허위 의정보고를 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또한 정대협이 생존해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해외에서 데려와 수요집회에 참석시킴으로써 ‘앵벌이’를 시켰다고도 하였습니다. 저자가 말하듯, 이 주장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유언장에 이런 비난을 적을 정도라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꼭 부당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 정대협은 진정으로 위안부 할머니들 개인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혹시 그들은 일본과 한국을 나눈 이분법 구도를 강화함으로써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국인의 민족적 피해정서를 부추기는 것은 아닌가? 어떻습니까? 터무니없는 의구심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골몰하는 탓인지 아니면 투쟁의 기술이 부족한 탓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건 추측일 뿐이니까요. 다만 그들이 20년이 되도록 해왔어도 요지부동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면 이제는 투쟁의 방식에 대해 되돌아볼 필요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박유하 교수의 이 책은 그런 인식의 산물이라고 함직합니다. 다시 말해 정대협에 대한 비판을 담고는 있지만, 박유하 교수 역시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되찾아주고 그들의 아픔을 진정으로 어루만져주려는 의도로 쓴 책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지금까지의 정대협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돕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위안부 할머니들을 보살피고 있는 나눔의집과도 그 뜻을 함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같은 길에서 다른 방안을 제기하는 것이 아무리 의미가 있더라도, 어떤 식의 접근법이든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박유하 교수의 논지는 그 의도와 관계없이 일본의 부정파들에게 모종의 프레임을 제공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위안부 문제를 “식민지 통치술의 일환 속에서 이루어진, 여성에 대한 다중적 억압과 수탈”로 파악하는 박유하 교수의 시점은 당시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통치했던 “제국 일본”의 통치구조를 면밀히 살피는 일이 됩니다. 문제는 이를 통해 박유하 교수가 “제국 일본”의 모순을 드러내려 했던 반면, 부정파들에게는 그것이 “제국 일본의 점령지로서의 조선”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이 바로 박노자 교수가 그토록 우려하고 경계하는 포스트주의 담론의 한계와 약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포스트주의 담론이 일궈왔던 성과 또한 간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포스트주의 담론을 간단히 말해 “역지사지” 담론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타자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 취해야 하는 관점이라면 나보다는 타자의 관점에 가장 근접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함은 당연지사입니다. 물론 인식론적 장애가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지 모릅니다만, 현상학적 진공-후설이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불렀던, 이성의 바로 그러한 움직임을 신뢰할 수 있다면, 타자의 관점에로 육박하는 시점의 전환은 그 자체로 거리두기를 통한 관조적 이성의 열림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나 국가가 주체적으로 이념을 생산하고 재구성하며 스스로 섭생하는 유기체라고 볼 수 있다면, 거기에도 무심한 관조 속에서 피어나는 열림과 공감이라는 자율적 이성의 정묘한 이치를 대입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비록 이러한 대입에서의 세밀한 논변의 필요성 때문에 (혹은 개별적 이성과 국가이성의 본질적 차이 때문에) 국가이성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국가나 사회와 같은 거대한 주체의 윤리적 입장을 관조할 수 있는 이성의 힘이 개인의 자율성 속에 있음은 분명합니다. 공동체의 이념성이 아무리 개인의 몸을 통해 발현된다 하더라도 개인이 고스란히 그에 따라 실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문단에서 이야기한 내용으로 박유하 교수의 시점과 논변을 말하자면 그것은 “피해자의 이념성을 지닌 공동체 속에서 가해자와의 교착상태를 돌파하려는 개인의 자율적 사유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동체의 이념성에서 어떤 갈등양상이 야기되거나 혹은 그것을 해결하지 못할 경우 자율적 개인의 움직임은 돌파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엔 개인의 부질없는 무력함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기도 합니다. 사실은 많은 경우 그렇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율적 개인의 움직임이 평가할 만 한 점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이 쉬 기각되거나 억압받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이념을 가리켜 우리는 전체주의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소송이 그 모습을 닮았다고 보입니다.

소송을 건 나눔의집 고문변호사 박선아 교수는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다시 한 번 할머니들 앞에서 책에 썼던 단어의 뜻을 해명한다면 오해는 풀릴 것”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그 말이 진심이라면 비록 소송을 건 후라 해도(이 인터뷰는 소송을 건 뒤에 이루어졌습니다) 박유하 교수에게 먼저 연락을 취하여 나눔의집에 기거 중인 위안부 할머니들과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나눔의집 안신권 소장은 박유하 교수를 위안부 할머니들로부터 계속해서 차단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과 뜻을 함께 하며 도움이 되고자 쓴 책에 대해 판매금지가처분신청을 내고, 동지적 관계라는 말이 ‘맥락과 관계없이’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가 있다며(이 문구는 박선아 교수가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처벌 및 보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일반서이든 학술서이든, 연구의 결과물에서 ‘맥락’을 제외한 부분적인 것만을 떼어 그것을 재해석한 것은 정당한 행위입니까? 소송대리인이 “다시 한 번 해명해준다면 오해는 풀릴 것”이라 말하는데도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는커녕 어떤 접촉도 금지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입니까?

박선아 교수는 박유하 교수가 9년 전에 쓴 『화해를 위해서』를 공격하고도 있습니다. 우수교양도서로 지정되었던 것을 취소할 방안을 검토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보기엔 『화해를 위해서』에서 다루는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영토분쟁에 관한 것은 더욱 그러합니다. 비록 박유하 교수가 코즈모폴리터니즘 내지는 아나키즘적인 인상을 풍긴다 하더라도 문제가 있다고 보는 이들의 생각을 희석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박유하 교수의 생각은 이런 취급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 문학연구를 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너무 낭만적으로만 본다. 국제정세는 낭만이 아니다. 논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국제적인 학술모임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며 양국의 분쟁에 대해 연구해온 학자의 논지에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일종의 폄훼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폄훼가 아니라면, 박유하 교수와 함께 해당 학술모임에 참여해 온 학자들은 지속적으로 공염불만 해온 셈이 됩니다. 진정으로 그들이 어처구니없는 말만을 되풀이하여 왔다고 만인이 공인하지 않은 한 누구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권리는 없습니다. 설령 허튼 활동으로 공인된다 하더라도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도태될 테니까요.

학술적인 부분에서 살펴보아도 이러할진대, 『제국의 위안부』에서 몇 부분만을 떼어 윤리적 판단과 처벌(형사고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을 요구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요? 게다가 나눔의집 안신권 소장은 박유하 교수가 근무하는 세종대학교로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찾아가 교수직 파면을 요구하였습니다. 전체적인 논지의 맥락과 관계없는 ‘자신의 재해석’이 누군가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그 논지를 편 사람이 직업을 잃어도 좋은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만일 나눔의집 측에서 취하는 행동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사회가 한 걸음씩이라도 나아지길 원한다면, 이러한 문제에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까요? 앞선 부분에서, 진보란 그 태생이 개인적인 차원으로부터라고 한 바 있습니다. 이것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진보란 명백히 그릇된 일을 개선하는 것임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보입니다. 그러하다면 나눔의집 측에서 취하는 행동이 정당하지 못하다 여길 경우 어떻게 하는 것이 과연 진보적인 행동이겠는지요?

여기에 일률적인 답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눔의집 측에서 취하는 행동이 정당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겐 박유하 교수가 직업을 잃고, 연구결과물이 시중에 나오지 못하며, 나눔의집 할머니들에게 아시아여성기금으로부터 해외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받았던 보상금의 총액보다도 많은 거액을 배상하는 것이 오히려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진보일 것입니다. 조선인 위안부들의 삶을 온전히 되돌아보고 그들을 진정으로 위로할 길을 찾는 시도가 하등 쓸모없는 반민족적, 반국가적 행위일 것입니다. 그 논리적 결함이 있든 없든 전체 맥락과 관계가 있든 없든 표현 자체가 참혹한 삶을 살아온 할머니들을 언짢게 했으므로, 그것을 윤리적으로 판단하여 처벌하는 것이 진보적인 길일 것입니다. 그들에겐 위안부 문제의 교착상태를 풀 다른 논리의 계발이 필요 없으며, 이대로 밀어붙이는 것이 진보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반면 그와 다르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진보적인 태도는 어떤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온당하겠는지요?

이 글의 앞부분에서는 우리사회 진보정치의 위기를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작금의 위기를 초래한 진보정치운동이 간과한 것은 무엇이었을지 질문하였습니다. 넌지시 논급하였지만 여기서 잠정적인 답을 내리자면 진보적 태도의 보급에 실패한 까닭은 아니었을까 합니다. 즉, 서민 교수의 취지처럼 정치 차원에서의 진보적 의제 수립과 추진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진보적 가치가 무엇인지, 그것이 왜 필요한지를 설득하는 일이 부족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저 빼어난 지성과 글솜씨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행동하지 않는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원칙과 신념을 외치면서도 당내 민주적 절차를 확립하지 못한 진보정당의 모습에 실망하여 등 돌린 시민들이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듯이 말입니다. 자신의 원칙과 양심에 비추어 그릇된 일이라고 판단될 때에는 어떤 식으로든, 어느 정도로든 행동을 취하는 사람을 볼 때 사람들은 비로소 조금씩 변화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