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7일 ·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스마트폰을 쓰다보니 이제는 그 기능에 별반 놀라워하는 사람이 없지만, 나는 지금도 내 손에 들린 기계가 늘 신기하다. 내가 사용하는 컴퓨터도 그렇고, 컴퓨터라는 기계는 다 신기해보인다. 이런 걸 어떻게 만들었을까. 그 기능을 사용하다 보면 편리함도 편리함이지만 구현해낸다는 게 참 어려운 일임을 아는 터라, 매번 그렇다.
조금이라도 어떤 분야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아는 편이라면 늘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새삼 놀랄 것이 없는데도 계속 놀라는 그런 것 말이다. 그러지 않는 이들도 있겠지만 대체로 그 경이로움은 익히 안다고 생각한다.
이런 기사들도 마찬가지다. 2014년 6월 15일 오전 8시 30분경 연합뉴스에서 최초로 <제국의 위안부> 소송 기사가 떴을 때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6월 13일에 박유하 선생님과 페친이 되었고, 이틀간 담벼락을 보면서 느낀 바로는 전혀 그런 이야기를 쓸 분이 아니었기에, 먼저 했던 행동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혀로 입술을 핥은 것이었다. 의구심이 들 때 내가 하는 습관이다. 당시 기사내용은 나눔의집 측에서 배포한 자료를 확인없이 배포한 것이었고, 이후 유수 일간지에서도 역시 확인없이 복사-재배포를 거듭했다. 놀란 건 그때부터였다.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제국의 위안부>를 사 읽고, 이어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 <화해를 위해서>를 구해 읽으며 나는 저자인 박 선생님이 도저히 제국주의자는 될 수 없는 분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볼 근거가 전혀 없었다. 이런 생각은 했다 : “어쩌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런 논변은 설 자리가 없을수도 있겠다.” ‘관계’가 와해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항상 의탁할 곳을 찾게 마련이며, 지금 같은 사회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의탁할 곳은 결국 ‘국가’이기 때문이며, 국가 역시 그런 의존성을 높이는 데 적극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국가를 허구라든가 악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국가는 물질적 실재가 아닌 상상적 실재이며, 그러므로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그 이미지는 실재보다 힘이 세다. 원래 이미지가 실재보다 힘이 세기는 하다. 그래서 실재보다는 이미지로부터 규범, 실천, 변화, 이런 것들이 나온다. 게다가 국가를 악이라고 해봐야 이미 영속성마저 띠어가는 국가를 엎어놓고 빠따 때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해서 고민해야 할 것은 국가를 어찌 없애버릴 것인가가 아니라, 국가의 존재양식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있다. 무언가에 의탁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며 한 인간이 살아가는 실존의 영역은 매우 협소하므로, 국가보다는 지역사회와 같은 작은 영역에 가장 크게 의탁하는 편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뭐,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니 넘어가자.
어쨌든 국적이라는 게 많은 것을 보장하는 한 국가를 우습게 보는 건 정신병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래서 국경을 진지하게 염두에 두는 사고방식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렇지만 국경을 진지하게 여긴다 하여 국경을 근거로 누군가에게 서슴없이 ‘사상범’이란 말을 써도 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친일파’라는 말을 이토록이나 거칠게 사용하는 이가 어떻게 말글을 다루는 직업의 하나인 기자씩이나 하고 있을까? 기사를 읽다 기함한 건 그뿐만이 아니다.
“오해이고 오독이고 의도적인 왜곡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러 명의 연구자가 제국의 위안부를 읽은 뒤 박유하가 일본군 위안부를 여러 대목에서 ‘자발적 매춘부’로 규정했다고 판단했고, 재판부는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는 구절을 삭제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는 이미지를 우리가 부정해온 것 역시 그런 욕망,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296쪽, 삭제)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를 무엇이라 읽어야 오독이 아닐까. 대략난감이다.”
누가 난감해야 하는지 참으로 의문이다. 기본적으로 책은 읽고 이 기사를 쓴 것일까? 기본적으로 책은 읽고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라는 책을 기획한 것일까? 위의 문장은 앞부분에서 위안부문제를 부정하는 일본 논자들을 비판하는 대목과 조응한다. 위안부들을 ‘자발적으로 간 매춘부’라 부르는 일본의 논자들의 인식, 그것이 ‘매춘부는 피해를 입어도 상관없다’는 폭력적 인식임을 비판하는 대목이다. 또한 국가이고 남성이고 가난이 주범인 위안부 문제에서 별안간 민족의 문제를 맨앞에 세워 실제로 유곽 여성들이 먼저 갔던 위안부의 모습을 소거한 그간의 인식을 비판하는 글이기도 하다. 유곽 여성들은 위안부로 차출되어도 좋다는 것이냐 묻는 대목이다. 이런 기본적인 이해도 없이 숙연할 정도로 진지하게 비판의 이유를 밝히는 기자의 지성은 도대체 어디쯤에 놓여있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판결문에는 있지도 않은 ‘허위사실’이란 말을 버젓이 기사에 내놓는 이 기자의 양심은 얼마나 우거진 것인지, 가능하다면 확인이라도 해보고 싶다. 이런 글을 볼적마다 새록새록 놀라울 뿐이다. 마치 기계에 늘 경탄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재승, 최종길, 정진성 등 이른바 ‘지식인’이라는 모리배들이 낭창낭창한 목소리로 관심법들 시전하는 걸 흉내내서, 나도 관심법 한 번 시전해봐야겠다.
이 기자는 이거 쓰고 우수리를 얼마나 받을까? 손종업이라는 사람이 이전에 박유하 교수를 가리켜 “일본 우익의 돈을 받았다”는 식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리기도 하였으니 미러링 한 번 해보는 것도 나쁠 것은 없잖은가? 손종업, 이재승, 아, 그리고 지난해 거짓말 담긴 성명서에 무거운 책임을 느껴서 이름 올린 홍성수까지, 그들은 어디서 얼마를 받아먹고 이런 거짓부렁을 일삼을까?
나도 참!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다. 저들처럼 양심적인 사람들이 어디 있다고 우수리를 받아먹는단 말을 하는가 말이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가능할 것 같다.
“저들의 양심은 무엇을 향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