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echt Rufen, 허구적 프레임

 

Brecht Rufen

7월 3일 ·

어쩌다 보니 한 문예지 가을호에 <제국의 위안부> 논란(논쟁 + 소송)과 관련한 글을 쓰게 됐다. 텍스트 자체에 대한 해석도 해야겠지만, 주되게는 텍스트 자체보다 국내 지식인들의 반응을 ‘징후적 현상’으로 보고 논쟁적으로 다루어 보려 한다.

나는 구조적 책임이 상징적 책임이 아니라 실질적 책임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위안부 문제가 일차적으로는 성별 권력 관계 속에서 해석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성별 권력 관계를 식민의 역사적 지배구조가 직접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은 중요한 부분이며, 법적 책임 추궁은 이러한 ‘실질적’ 활용의 책임을 묻는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물론 이는 원칙적인 부분이고 협상에서는 피해자의 입장을 존중하는 수준에서 공적 타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나는 박유하 교수의 해석에 이견을 갖고 있지만, 오히려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나름 믿어 왔던 국내 지식인들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처참한 반응 수준이다. 비판자들이 쉽게 사용하는 ‘성노예제’라는 자극적 개념이 어떤 문제를 갖는 개념인지(이 개념은 성폭력/성매매를 예외화한다), 소송에서 핵심 주제로 삼는 자발성-강제성 프레임 자체가 얼마나 위선적인 프레임인지 반성하지 않은 채, 한 명을 마녀로 몰기 위해 내 편 아니면 모두가 적이 되는 게 현실이다.

나는 표현의 자유냐 피해자 인권이냐의 프레임이 허구적이라 생각한다. 1) 애초에 텍스트가 자발성 여부를 화두로 삼지 않고 있으며(일본군이 아니라 업자가 가해주체라는 것이 책의 주된 논점이다), 2) 설령 군위안부들을 일반 공창제의 성매매 여성과 유사한 존재조건의 지평에서 해석하더라도 피해자의 인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 그간 페미니즘 연구의 핵심적 성과 중 하나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애초에 성매매 자체에 자발적이냐 강제적이냐의 프레임이 허구적이다).

성매매와 성폭력 문제에서 자발성 여부는 가해주체를 명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피해자의 인권이나 명예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은 정대협과 연관된 활동을 해온 몇몇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이나영 교수가 군위안부와 기지촌 성매매 여성의 상동성에 대해 다루는 2013년도 논문에서도 이 부분이 잘 지적되고 있다). <제국의 위안부> 논쟁의 핵심은 피해자 인권 침해가 아니라 가해주체를 누구로 삼을 것이냐의 해석 문제이며, 이것이야말로 공적으로 열린 토론 주제가 되어야 한다.

내 눈에 ‘소녀상’이야말로 전 위안부 여성들의 자아를 분열시키고, 다른 성매매 여성들과 위안부 여성들 간의 폭력적인 위계를 설정하는 인권침해적 상징물이다.

이 마녀사냥급 논란 속에서 군위안부 문제의 해석지평은 내가 보기에는 고 윤금이 사건에 분노하고 위안부 문제가 막 폭로되던 90년대 초로 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