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안재, ‘친일파’ 와 민족주의에 관해

 

4월 6일 포스트

‘친일파’라는 말은 사실 굉장히 모호하고, 포괄적이며 때론 오해의 여지가 있으며, 한편 식민지 상황에서 자기배반의 매국적 변절의 길을 걸었던 일부 지식인들을 지칭하는 한정된 것이라면 적절한 것도 같고. (병원에 입원하신 어머니 하루밤 간호 당번서느라 왔는데, 별로 할일도 없고 잠도 안올 것 같아 생각나는 대로 쓰는 것이며, 혹시 사실과 다른, 또는 논리적인 문제가 있어 지적하시면 받아들일 거임) 親曰이라면 나도 한때 친일파였는데, 이유는 IMF이후 계열사 분리로 남쪽 섬의 어느 대형조선소로 발령이 났고, 한 10여 년 근무하며 ‘일본인 Inspector(감독관)’들과 친하게 지냈다. 저녁에는 BAR에 가서 맥주도 같이 마시고.

친일은 원래 1880년대부터 일본 공사관을 들락거리며 일자리라도 하나 얻을까 하던 조선인을 지칭하던 말로써 당시에는 그리 부정적이진 않았다. 그러다가 을사조약, 한일합병을 거치며 반민족 매국 행위자를 이르는 표현이 되지 않았나 싶다. (좀 더 본격적으로는 독립협회 소속이었던 인사들이 만든 일진회, 동학에서 떨어져 나온 진보회가 합쳐 만든 ‘일진회’와 보수 유학자-대개 과거 위정척사파-중심의 ‘의병’들의 대립과정에서 민족/친일이 본격화 됨)

최근 <민족/식민>과 관련된 책들을 저녁마다 집중적으로 읽으면서, 20세기 초반의 10년이란 기간이 꽤 중요하고 이 시기의 실상을 제대로 알고 싶은 욕구가 커졌다. 이 시기의 역사만 잘 알아도, 지금의 한국사회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란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과거의 어느 한 시기를 ‘소실점’ 삼아 원근법적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편이다. 그 소실점이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인데, 이것을 기준으로 민족의 역사와 동질성을 말하지만, 너무도 먼 시간대의 성서 창세기를 바라보듯 하는 시각에는 문제가 있다.

일연스님도 분명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에서 신화를 괴력난신怪力亂神(이상하고 괴이한 신들의 이야기)이라고 하며, 역사를 꽤 합리적/이성적 시각에서 바라보았다. 대몽 항쟁이 끝날 무렵에 쓰여졌고 민족의 뿌리를 밝힌 저술이지만, 그 해석에는 신중해야 한다. 삼국의 역사를 마치 첨부터 민족공동체로서 출발했고, 분열/통일의 과정으로만 본다면 고대사를 너무 쉽게 바라보는 것이다.

몽고의 침입에 맞선 대몽항쟁 시기에 민족 공동체 의식이 시작되었다는 얘기가 많지만 이건 사실이면서도 역사적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시각이다. 당시 고려인들이 과연 민족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의식이 존재해서 대몽투쟁에 나섰을까,하는 것인데 당시의 역사적 정황은 농민들이 향촌사회의 자위적 측면에서 반외세 항쟁을 했고, 민족의식에 기초한 항쟁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농촌 사회를 지키기 위한 항쟁이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고려인들이 몽고에 투항(투몽, 전쟁에 의한 항복과는 다름)하는 사례도 많았다. (여기엔 계급 모순/대립의 문제도 있었는데, 유럽은 혁명을 통하여 민족주의가 형성되었으며 부르조아가 등장하여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상하계급의 완충역할을 하면서 계급모순을 해결했다) 이런저런 책들을 읽다보니까 고려 대몽항쟁시기와 20세기초 한일병합까지의 시기가 겹쳐보이며, 한국의 민족주의에 관해서는 너무나 할말이 많이 쌓여가는 것 같다.

대중사학자 이덕일 선생이 아무런 배경 설명없이 손병희에게 쫓겨난 이용구가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설립했고 매국경쟁에 뛰어들었다, 라는 얘기를 자신의 책에 썼는데, 맞는 얘기이지만 당시의 정확한 상황도 함께 반드시 알아야 한다. (난 지금 일진회나 이용구를 변호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이덕일의 ‘우리안의 식민사관’이 극단과 배제의 논리로 오해받지 않으려면, 마찬가지로 ‘우리안의 민족사관’도 긍정적 측면과 더불어 부정적 측면도 함께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역사는 긍정적 역사에서 자부심도 느낄 수 있지만, 부정적인 역사에서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함께 엮여져야 하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으로부터 시작된 민족주의 사관은 급박한 시대상황에서 당연한 것이었지만, 세계 민족주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한계도 있었다 )

이인직, 이광수의 민족배반은 자신의 내면의 가치를 유지하기에는 인격적 결함과 함께 식민상황에서 강요된 저항과 비굴의 양립할 수 없는 선택의 길목에서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는 것인데, 이런 모습은 한국 정치사에 그대로 유전되어 내려오는 전통이며 지금도 살아남아 있다. 진보든 보수든 자기 자신이 어떤 영웅적 환상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배반하는 기만적 오류를 저지르며 자가당착에 빠진 정치인은 얼마든지 있다.

민족주의적 진보정치 세력과 그 지지자들이 현대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모두 과거 친일파들에게 원인을 돌린다는 것은 곧 우리가 ‘역사’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인데, 같은 논리구조에서는 친일파뿐만 아니라 당시 ‘망국’에 내몰리게 된 역사적 상황과 관련 세력들 전체에 대한 비판도 함께 할 수 있어야 역사로부터 진지한 성찰과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독립운동사’의 경우 대개 지식인들 위주였으며 과거 위정척사파의 유학자 집단도 많다는 것과 동학을 탄압하고 수십만 명의 농민을 죽이며 계급대립을 해소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 우당 이회영 선생께서 압록강을 건너며 지으신 詩에서 자신의 恨은 이 강물이 다 마르도록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난 이분의 말씀을 ‘참회’ 즉, 나라를 지키지 못한 지식인이자 전통적 지배층으로서의 죄책감과 더불어 참회의 눈물로 이해하고 해석한다. 독립운동사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그 ‘정당한/위대한’ 가치를 알 수 있지 않을까.

민족 문제에 좀더 깊이 알고 싶어지는 이유가 있는데, 일본 군국주의에 의해, 그리고 이 땅의 남성 지배계층의 책임까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일본군 위안부의 문제에서 ‘왜’ 피해 당사자인 할머님들과 이 문제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풀어보려는 ‘여성’학자가 소송의 당사자로 법정에 서야하는지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심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정대협에서 발간한 증언집1을 보았는데, 증언집이야말로 박유하 교수의 논지를 뒷받침하는 자료이다. 내가 변호사라면 공동 변호인단을 구성해서 할머님들의 의사와는 사실상 무관한 이 소송의 부당함을 강변하고 싶을 정도다!) 이 소송이 누구의 승리로 끝나든, 결국 ‘민족공동체’ 구성원의 공동패배의식과 분열만 깊어질 것이란 개인적 자각에서 앞으로 ‘민족’과 관련된 얘기를 좀 지속적으로 페북에 쓸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