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0일 포스트
어제 어떤 분이 박유하 선생의 <제국의 위안부>를 논리적으로 비판하고 판매금지 가처분 결정을 옹호하는 포스팅을 했길래, 나도 차분하고 진실되게 반론 성격의 댓글을 세 개 정도 달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그분 담벼락에 들어갔더니, 내가 달았던 댓글이 지워지고 온통 그분의 의견에 동조하는 댓글만 도배되어 있는 걸 보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차분하게 내가 달았던 댓글이 지워진 사실을 적시하는 댓글을 달았던 것인데, 그러고서 정확히 1분 후에 그분으로부터 차단당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차단 당한 남자. 내가 바란 건 이성적인 토론이었는데 뭐가 그분을 불편하게 했을까. 그분 이름은 죽어도 밝히지 않겠다.
2월 22일 포스트
작가적 양심 운운할 것도 없이 개인적으로 소시민일 뿐인 내가 반대하는 건, 소시민적인 개인의 일상을 기만하고 억압하는 모든 형태의 파시즘이다. 하나의 정의만이 인정될 때 독점적인 이익을 얻는 세력의 위선과 탐욕이 그 파시즘을 견고하게 추동한다. 기막힌 역설이지만 교조주의와 전체주의는 종종 교조주의와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형식으로 새로운 차원의 파시즘을 구축한다. 그걸 알고 경계하는 것과 모르는 채 자기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욕망과의 싸움, 그게 나는 모든 개인의 전선이 되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믿는 진실을 소신있게 말하되,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의 삶부터 조롱의 대상으로 삼아보는 것은 그래서 사소하지만 중요한 일이다. 여기서 조롱은 성찰의 유희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기 의해 선택된 단어다. 상처와 고통을 실존적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여러 입장이 있을 수 있는데, 북한정권처럼, 혹은 1970년대의 박정희처럼, 혹은 IS처럼 정신무장이나 개조 차원의 국가주의적 강요로 단속하는 게 과연 지금도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인지를 나는 고통스럽게 자문하고 싶은 것이다.
2월 22일 포스트
혹시 나도 그런 오류를 범했을까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박유하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공방에서 저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혹여 상대 쪽 사람들을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에 종속된, 덜 각성된 근대적 우민이라고 간주하면서 비난하고, 자신들은 세련된 무정부주의자나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탈근대 합리적 시민(지식인)으로 자처(포지셔닝)하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논쟁의 본질을 엉뚱한 데로 끌고 갈 소지마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저쪽이 자신들은 약자와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휴머니스트들이고 이쪽을 친일잔존 세력이라고 비난하는 것과 별다를 게 없는 값싼 감정의 포즈밖에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합리적 비판의 목적은 사람을 평가하고 배제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의견이 가진 논리적 모순을 공박하는 데 있다. 학술적 의견이 담긴 책은 해석의 여지에 따라 찬반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외부자로서 나는 이 문제의 출발이 연구자의 학문적 소신이 담긴 책을 법정에 세운 원고측의 야만적인 고소고발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폭력적인 것인지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작물을 법적 판단에 맡겨 처벌을 요구한 것이야말로 이 사태가 보여준 다양한 장면 중, 가장 명백하게 나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국의 위안부>의 내용에 반대하는 쪽 일부도 인정하는 것이다) 책의 내용의 해석과 수용에 따른 다양한 논쟁은 그것의 부당함이 인정받은 다음 공론의 장에서 이어져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