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위안부 ‘전문’ 연구자라고 칭하고 싶은 강성현 성공회대학교 연구교수가 <한국일보> 7월9일자에 실린 내 글 「과거사 보도의 ‘자극 경쟁’과 ‘사실 경쟁’」을 보고, 자신의 담벼락에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또 장정일인가?” 담벼락의 글은 따로 제목을 달지 않으면 첫 줄이 제목이 된다.
일면식도 없는데다가, 이보다 앞서, 서로 간에 설전이 오간 적도 없는데, “또 장정일인가?”라고 조롱하다니? 그것도 “일본군이 만든 위안소”라는 허두로 시작하고, 위안부 문제가 “일본의 국가 범죄”라고 본문에 분명히 명토 박은 동지(?)에게 이런 조롱조의 말은 여러모로 예의에 어긋난다(나는 저 제목을 보는 순간, 학교에 다닐 때 담임선생이 내게 하는 말처럼 뜨끔하기도 했다).
자기 담벼락에 쓴 같은 글에 “논쟁을 원하면 언제든 와라”고 적기도 한, 자칭 위안부 전문 연구자가 담벼락에 쓴 글을 요약,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인용문 의 숫자와 밑줄은 필자).
장정일이 문제 삼은 한겨레 기사는 곽병찬 대기자의 희망나비의 유럽 활동에 대한 보도이다. 그 기사에서 “30여만명으로 추산되는”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이것을 두고 장정일은 자극경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한겨레가 사실경쟁을 하지 않고 선정적으로 수치를 부풀리고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좀 웃겼다. ①한번 한겨레 ‘위안부’ 관계 기사 다 검색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수치를 확인해보시라. 조금은 제각각일 것이다. 왜냐하면 학계에서도 제각각기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연구자들은 각자 자기의 방식대로 추산한다. 여기에서 고려되는 것이 일본군 총병력 수, 그리고 간혹 공문서에서 확인되는 ‘위안부’ 일인당 병사수, 교대율 등이 고려된다. 그 결과 추산 규모가 2만명에서 40만명까지 다양하다. 하타 이쿠히코 같은 일본의 보수적 연구자들이 최소치로 잡고, 중국의 소지량 선생이 가장 최대치로 잡는다.
다시 말해 ②”8만에서 20만으로” 말하던, 30만으로 말하던 간에 그 자체가 사실이 아니다라고 현재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물론 통상 조선인 ‘위안부’ 20만을 말하는 것이 한국에서는 슬로건 처럼 자리잡혀 있다. […]
③“30여만명으로 추산되는”이라는 표현 자체는 학술적으로도 문제가 없다. 연구자들끼리의 통상의 감각에서 말하면, 좀 오버한 것 아닌가 라고 술자리에서 안주거리로 삼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자체가 틀렸다고 어떤 연구자도 단정할 수 없다. 이를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뱀꼬리 1. 장정일은 일본군 병력 300만명이고, ‘위안부’가 20만명이면, ‘위안부’ 1인당 15명이라고 말하는데, 거기에 교대율을 2로 상정하면 ‘위안부’ 1인당 30명이 된다. ④바로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그렇게 추산하기도 했다. 참고로 요시미 선생은 일본군 ‘위안부’ 관계 일본 자료들을 방위청 전사도서관 등 조사 발굴해 세상에 내놓은 전문 연구자다. 일본 자료와 관련해서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그에게 기대고 있는 셈이다.
2. 일본군의 전시 강간과 군 위안소, 단기적 강간센터 등을 통해 사실상 허가된(공인된) 성폭력은 빈번했다. “이 모든게 사실이면… 전쟁을 해야 할 군인들이 불철주야 성폭행만 하느라 패망한거다”는 장정일의 말. 불철주야까진 모르겠고 분명 빈번했다. 근데 그것이 패망의 이유라고 어떤 연구자가 말하나? 이렇게 꼬는 이유… 알겠는데, ⑤그래서 뭘 주장하고 싶은 건가? 위안부 총수 줄이자고 주장하는 건가?
자칭 위안부 전문 연구자가 “솔직히 좀 웃겼다”는 ①은 ⑤와 함께, 나의 글 「과거사 보도의 ‘자극 경쟁’과 ‘사실 경쟁’」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당최 알아먹지 못한 증거다.
위안부 숫자에 대해 <한겨레>가 그동안 얼마만큼 다양한 숫자들을 나열했는지는 전수 조사를 할 필요가 없다. 그 가운데는 소속 신문사의 기자가 쓴 기사도 있고 사외 필자가 쓴 것도 있을 것이지만, 그것들을 일일이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각자 꼴리는 대로 쓰면 된다.
예컨대 나로 하여금 「과거사 보도의 ‘자극 경쟁’과 ‘사실 경쟁’」이라는 글을 쓰도록 빌미를 준 <한겨레> 곽병찬 대기자는 올해 1월13일치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평화로에 핀 할머니의 도라지꽃」에서 이미 ’30만명’ 설을 내세운 바 있다. 하지만 나는 그 글에 대한 짤막한 언급을 내 독서일기에만 저장해 놓았지, 공개적인 글감(공론화)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았다. 곽 기자가 <한겨레>에 연재 중인 ‘곽병찬의 향원익청’은 그야말로 자유분방한 에세이며, 기자는 사시(社是)와 다르거나 거기에 준하는 편집 방침과 상반되지 않는 이상 어떤 의견이든 자유롭게 표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6월22일자 기사「’위안부 할머니 꿈’ 싣고 유럽에 갑니다」는 기자 개인의 의견이 아닌, 사고(社告)나 마찬가지인 글이었다. 즉 그 기사는 조선인 군 위안부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유럽으로 떠나는 ‘희망나비’를 <한겨레> 신문이 현장 취재하겠다는 사고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근거로 <한겨레>는 관행으로 채택하고 있는 ’20만’ 설을 고사하고 ’30만’ 설을 택하게 되었는가라고 묻는 것은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누구나의 합리적인 의문이다. 게다가 나는 <한겨레>를 20년 넘게 구독해온 독자다.
나는 신문이나 잡지에 쓰는 글에 제목을 달지 않지만, 「과거사 보도의 ‘자극 경쟁’과 ‘사실 경쟁’」만은 내가 지었다. 이 제목 아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과거사 보도에서 언론이 안고 있는 딜레마를 지적하는 것과 함께, 이 문제에서 좀 더 사실보도와 진실추구에 매진해 달라는 것이었다(나는 그게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자칭 위안부 전문 연구자가 ⑤에서 반문한 것처럼, 내 글은 “위안부 총수 줄이자고 주장”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강성현은 ②에서 “8만에서 20만으로” 말하던 “30만으로” 말하던 간에, “그 자체가 사실이 아니다 라고 현재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사정이 이러므로 관행으로 채택하고 있는 조선인 위안부 “20만” 설을 언론이 아무런 설명 없이 “30만”으로 올려 추산해도 ③”표현 자체는 학술적으로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 분의 실토가 진실이라면, 즉 현재 상황에서는 어느 것이라도 “사실이 아니다”고 말할 수 없는 게 위안부의 숫자이며, 그래서 어떤 숫자도 “학술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것이라면, 왜 그 숫자가 오르는 건 괜찮고 내리는 건 안 되는가?
내 글은 <한겨레> 같은 신문으로 하여금 위안부 숫자를 마음대로 올릴 수 있게 만들고, 마음대로 내릴 수 없게 만드는 거수기(擧手機)가 민족주의라고 의심하고 있다. 이를테면 <한겨레>가 같은 기사에 통상 20만 설이 아닌, 연구자가 최소치로 잡고 있는 ‘8만’이라고 썼다면 절독을 하겠다는 독자로 난리가 났을 것이다. 내 글은 그 딜레마를 말하고 있다.(강성현이 실토한 위안부 연구의 불확실성은 ‘어떤 설도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고, 어떤 설도 학술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말해지는 위안부의 숫자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 말고, 박유하에게는 무슨 잘못이 있다는 건가?)
자칭 위안부 전문 연구자는 ④에서 위안부 ’20만’ 설이나마 지키기 위해 요시미 요시아키를 끌어온다. 위안부 문제의 권위자인 요시아키가 20만 설을 추인했다는 거다. 실제로 요시아키가 1995년에 출간한『일본군 군대위안부』(도서출판 소화,1998)는 여러 가지 추계 방법을 소개하면서, 어느 방법에 따른다면 “약 20만명이 된다”(92쪽)라고 쓰기도 했다. 하지만 같은 책에는 위안부 총 “8만”과 “17만~20만” 설 가운데 “후자는 숫자가 너무 많다”(89~90쪽)는 상반된 말도 나온다. 더욱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2010년에 나온『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역사공간,2013)에 20만명 설은 아예 나오지 않는다는 거다. 새로 나온 책에서 그는 두 번 씩이나 “아무리 적게 잡아도 5만 이상일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93쪽)라고 말했을 뿐이다. 이로써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요시아키가 20만명 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었을 가능성이다.
요시아키의 두 책에는 위안부의 교대율(교체율)에 대한 맛보기 추정이 나와 있다. 하지만 위안부 수를 추정하는 데 있어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 인구에 대한 연구 없는, 교대율 추정에 의한 위안부 수 산출은 넌센스에 가깝다. 교대율을 받쳐줄 인구가 없다면, 아무리 그럴듯해봐야 탁상공론이다.
나는 한국의 위안부 운동 단체가 중국의 위안부 운동 단체와 연대하지 않는 이유가 늘 궁금했다. 두 나라가 운동 단체가 협공하면 일본은 죽사발이 나는데 말이다. 까닭은 한국의 20만 설과 중국의 ’20만 +α’ 설이 합치면, 문자 그대로 무리수(無理數)가 생기기 때문이 아닐까? 두 나라가 각기 위안부 숫자를 늘리거나, 늘린 상태로 숫자를 합산하면 위안부 문제의 사실성이 휘발하고 만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두 나라의 위안부 운동 단체는 만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사정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연유를 알고 싶다.
위안부 연구자와 활동가, 위안부 연구자와 언론, 위안부 연구자와 대중 사이에는 소통되지 않은 차이(gap)가 있다(그걸 여기 모두 적시하고 싶지만, 아껴둔다). 내가 확인한 여러 위안부 문제 연구자의 연구 결과나 초점은 특히 대중에게는 충분히 전달되지 않고 있다. 그 원인을 과거사 보도에서 ‘사실 경쟁’을 하지 않는, 혹은 할 수 없게 된 언론의 딜레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국의 위안부』로 기소된 박유하 교수는 나의 드레퓌스가 아니다. 박 교수의 논리에 모두 동의하지 않음에도 나는 내 입을 막는다. 내가 박유하 비판을 보류해야만 하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 박유하를 비판하는 모든 언사가 박유하를 유죄로 만들고자 하는 법정의 증거로 채택되기 때문이다(이건 나만의 결정일 뿐,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래야 한다는 건 아니다. 박유하 재판이 끝날 때까지 어떤 연구도 중지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아이러니는 박유하 비판자에게도 적용된다. 박유하의 어떤 주장에 타당성이 있다하더라도 그들은 그것이 법정에서 박유하를 변호하는 논리로 전용될까봐서 인정하기를 꺼린다. 하므로 학술 논쟁을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은 위안부 문제의 진실에 다가가는 것을 가로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