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혼돈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비판 중에는 “논문으로 쓰지 왜 ‘대중서'( 그들은 굳이 대중서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로 냈느냐는 것이 있었다. 말하자면 학계에서논의하면 되는 문제를 왜 갑자기 일반인들 앞에 내놓았느냐는 것이다.

주석등 형태를 갖추고 논문문체로 썼으면 그럴듯한 학술서로 보였을 이 책을 굳이 일반서 형태로 쓴 것은, 위안부 문제가 한일양국국민들에게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어서, 더 이상 정부나 학자들의 논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국민의 국민적 합의 없이 위안부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대립하는 학자들의 협의체를 만들어 접점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동시에 그 논의가 밀실논의여서는 안되고, 언론과 관계자가 논의자체를 국민들에게 전해 학계에서 어떤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해 왔다. 학자들은 웬만해서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으니 양측 이야기를 잘 듣고 제3자가 접점을 찾아야 한다고.

학계에선 더이상 위안부동원을 강제연행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계자들이 언론과 국민을 향해서 그렇게 말하는 일은 없다. 다시 말해 초기에 강제연행으로 생각했던 것은 잘못이었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전시관 같은 곳엔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결국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대한민국의 일반상식은 일원화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아직도 “군인이 강제연행”했다고 믿고 누군가는 “업자가 끌고 갔다”고 알고 있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어느 쪽이 옳은지 여부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이런 과정이 만드는 거국적소모 쪽이다.그리고 이 모두가, 학자가 대중을 우습게 보고, 지원단체 역시 대중을 동원해 운동을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정보는 독점해 온 결과라는 점이다.

성남시 도서관이 나의 한일관계 관련 책 중 세 권을 “19금 도서”로 만든 것 역시, 정보를 독점하려는 어른들의 오만이 만든 일이다. 그러는 사이, 일본에선 18세가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오늘, 한일 합의에 반대하는 이들이 정부와는 다른 재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어느 쪽이 옳은지 여부를 떠나,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많지 않은 힘과 돈의 분산과정이다.
근대의 차가운 합리주의조차 아직은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 탈근대 커녕, 근대의 혼돈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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