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하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오해하는 백 가지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어느 선생님의 말씀이다. ‘우리 농업 지키기 운동본부’에서 아이들 그림책을 낸게 꽤 있나 본데, 우리 집에도 몇 권 있다. 아래의 첫번째 사진은 그 중 한 권인데, 우리 나라산 곡식이 왜 몸에 좋은가를 재밌는 그림동화들로 이야기해놓은 것으로 일곱 살 딸래미가 좋아하는 책이다. 나는 사실 이 책 내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첫째로, 어떤 곡식은 무엇에 좋고 어떤 곡식은 다른 무엇에 좋다는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그중 과학적 근거가 별로 없는게 꽤나 보인다. 둘째, 외국산 농산물과 우리산 농산물을 대비하면서 전자는 건강에 나쁘고 후자는 건강에 좋다는 주장을 지나치게 과장한다. 예컨대, 어떤 공주는 외국산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몸에 가스가 차서 완전 뚱뚱하게 되었는데 도대체 방구가 안 나와서 해결할 수가 없다가 우리 나라 곡식들을 먹고 방구를 많이 뀌니 다시 날씬해졌다. 뭐 이런 스토리들이다.
근데, 아직 한글을 잘 못 읽는 우리 딸이 이 책을 읽어달라고 하면 나는 그냥 재미있게 읽어준다. 공주가 방구뀌는 소리도 리얼하게 내주고 딸래미 배도 누르면서 가스빠지는 묘사도 하면서. 어떤 때는 책 내용에 대해 커멘트도 하지만 많은 경우 아이가 재미있어 하면 그냥 그대로 놔둔다. 내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어차피 이 책은 우리 딸이 앞으로 읽을 수많은 책 중의 하나이고, 이 책의 관점은 앞으로 우리 딸이 살면서 접할 수많은 관점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신이 책을 쓰지 않는 이상 세상에 ‘틀리지’ 않는 책은 없다. 한 권의 책을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올바르게’ 만든다 하여 그게 얼마나 깊이 얼마나 넓게 얼마나 시간을 초월하여 오랫동안 ‘올바를’ 수 있겠는가? 쌀을 수출했다고 쓴 책도 있고, 쌀을 수탈했다고 쓴 책도 있으면 사람들이 그 둘을 다 읽고 토론해가면서 수출의 의미와 수탈의 의미 그 각 주장의 맥락을 짚으며 일제하에 있었던 일들을 판단해 간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수출이라고 쓰는 책이 더 많이 읽히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혹은 수출도 아니고 수탈도 아닌 새로운 단어를 사용한 책도 나오게 된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사람들이 ‘수출’과 ‘수탈’ 중 꼭 어느 것이 올바른가를 토론하여 오직 ‘수출’만을 쓰고 ‘수탈’이라고 쓴 책은 없애 버린다면, 이후 세대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99프로 올바른 한 권의 책을 읽기 보다는, 다양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틀린 책 백 권을 읽는 사람이 훨씬 세상을 넓고 깊게 지속적으로 볼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교과서는 한 권일 필요가 없다. 나는 내 딸이, 내 아들이 진보교과서를 가르치는 학교를 가든, 보수 교과서를 가르치는 학교를 가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딸에게 아들에게 특정한 관점의 책은 아예 읽지 못하게 한다면 나는 반드시 상관할 것이다.
오늘 아침은 우울한 소식으로 시작하였다. 검찰이 기어이 박유하 선생님을 기소하였다 한다. 그리고, 기소를 보도한 기사의 여파인지 박유하 선생님은 또 항의전화에 시달리셨다 한다. 아마도 국정교과서를 반대하기 위해 교육부에 항의전화한 누군가가 박선생님에게 항의 전화를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더욱 우울해진다.
더 많은 분들이 ‘제국의 위안부’를 읽어 보셨으면 좋겠다. 아마도 여러 분은 그 책의 주장에 백프로 동의하지 않으실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근데, 돌이켜 보면 내 평생 읽어본 책 중에 내가 백프로 동의하는 책은 미적분학과 선형대수 딱 두 권밖에 없다. 사람이 살아있는 경험세계를 다루는 어떤 책도 백프로 동의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제국의 위안부로부터 많이 배웠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중첩된 모순으로서의 위안부 문제와 그것이 드러난 많은 사실들에 대해 배웠다. 그래서, 여러분께 권한다. 이 책의 관점에 동의하는가란 질문을 던지시기 보다 이 책으로부터 배울 것이 없는가란 질문을 던져주시기 바란다. 아니, 본인이 배울 것이 설사 없더라도 다른 독자들도 배울 것이 없을까란 질문을 던져 주시기 바란다. 학술적 연구의 목적은 관점의 주입이 아니라 지식의 확대다. 따라서 학술적 연구의 공익이란 그 관점의 보편성에 의해서 판단되는게 아니라, 의미있는 지식의 발견내지 재편성이라는 영역에서 판단된다.
또 하나, 아마도 이 책의 내용은 여러분을 꽤나 불편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정확히 이 책의 저자와 출판사가 형사처벌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다. 불편하지 않은 관점과 책에만 저술과 출판의 자유를 줄 것 같으면, 그런 자유가 헌법에 보장되지 않아도 된다. 그때그때 다수결로 혹은 다수의 위임받은 법관이건 누구건 판단해서 하면 된다.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 출판의 자유가 필요한 ‘공익적 이유’는 그러한 자유가 우리를 끊임없이 불편하게 만드는 새로운 관점과 사상과 학술을 시도하게 하고, 그것이 곧 우리 사회가 시대와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게 만들 다양성을 확보해 주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씀드려서, 두 가지 공익이다. 이 책의 구체적 학술적 내용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식을 자극하는 공익. 둘째, 이러한 시도들을 물리적으로 억제하지 않음으로써 사회의 장기적 발전에 기여할 공익. 그리고, 다시한번 물어봐 주셨으면 좋겠다. 이 책의 관점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물어봐 주셨으면 좋겠다. 이 책은 정말 재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이런 책을 쓰는 연구자는 이런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는 형사처벌을 받아야만 하는 것인가? 그냥 불편하다고 틀렸다고 혹자들은 다른 책을 쓰면서, 그렇게 논쟁해가면 안 되는 것인가? 그것만으로는 정녕 부족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