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 作, ‘칼로 몇번 가볍게 찌르기’, 1935, 금속에 유채, 29.5×39.5㎝ ©
2005.11.23 교수신문 기고
그들은 ‘국익’이라는 단어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문제가 되고 있는 황우석 교수연구팀을 대표하는 줄기세포연구허브센터도, 모든 책임을 혼자 지려 작정한 듯한 병원측도, 또 그들의 윤리성을 고발하는 방송사측도, 그러한 그들을 신중치 못한 보도라며 비난하는 시청자들까지, 자신들의 사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내세우는 단어는 약속이라도 한 듯 ’국익’이라는 단어다.
줄기세포연구허브센터에서는 현재의 파문이 과장이면서 매도일 수 있고 그렇다면 그것은 ‘국익’에 반하는 일이고, 난자를 채취한 병원측에서는 ‘세계적 성과’를 거둔 연구를 문제 삼는 것은 ‘국익’에 반하는 일이며, 방송사측은 그럼에도 진실을 밝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국익’이고 시청자들은 황 교수의 연구를 비난하는 일은 ‘국익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방송사에 대해 훈계한다.
그들이 공통으로 꿈꾸고 있는 것이 줄기세포연구의 성공이 가져다 줄 세계로부터의 찬탄과 그에 따를 경제적 이득, 혹은 적어도 ‘도덕적인 한국상’에서 얻어질 긍지인 것만은 분명하다. 아마도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국익’이리라.
그러나 그렇게 ‘국익’ 담론이 무성할 때 그 ‘국익’의 성취가 다름아닌 ‘여성’들의 희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은 은폐된다. 연구의 문제점을 말하기 위해 ‘법’이 이야기되고 윤리가 말해지면서도 그러한 동원에 의해 훼손되는 여성들의 ‘신체’가 겪을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거나 경시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문제는 금품이 난자공여자들에게 제공되었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있지 않다. 문제는, 교통비와 15일간의 ‘생계지장’에 대한 대가로서의 150만원의 수수여부가 아니라, ‘성스러운’(황우석 교수의 발언) 그녀들의 ‘자발적’ ‘희생’을 이끌어낸 것이 실제로는 ‘경제적 이유’임에도 그들이 ‘자발적으로’ ’희생정신’을 발휘해 ’기증’했다고 생각토록 만드는 국익담론의 이데올로기에 있는 것이다. 생명윤리법 시행전인가 아닌가-합법인가 아닌가 하는 논란 역시 ‘국가의 필요’에 의한 규범이 다름아닌 ‘법’인 한, 문제의 핵심을 말한 논의일 수는 없다.
‘성숙하고 싱싱한’ 난자를 찾기 어려웠다는 병원측의 변에 의거해 추정한다면 젊은 여성들이었을 것이 분명한 이 여성들을(난자를) ‘사’서 ‘관리’(연구)한 것이 남성의사/연구자이자 국가라는 가부장제적 시스템이라는 점에 문제의 핵심은 존재한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신체에 고통을 주는 일이 우선은 ‘연구’를 위한 것이며 ‘국가’를 위한 일이라는 사회적 설득과 (경제적)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난자를 팔았으리라. 그들은 어쩌면 원조교제처럼 성차이와 계급차이가 빚어내는 사회구조의 결과로 ‘자발적으로’ (성대신) ‘난자’를 매매한 것일터이니, 그들이 ‘동의’를 했는가 아닌가 역시 문제일 수는 없다.
‘국익’의 훼손을 두려워하는 담론으로 국가를 보호하려는 입장에서는 공범일 수밖에 없는 논란의 주인공들에게는,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구의 도덕성에 대한 외국의 비판은 그저 ’시기’이거나 잘나가는 한국을 폄훼하려는 음모일 뿐이다. 매매되는 ‘난자’에 관한, 혹은 실험대상이 되는 난자에 대한 윤리논란은 있어도 그 난자가 제공되기까지의 여성자신의 신체의 보호에 대해서는 말해지지 않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다.
자신의 신체를 보호할 근거가 되는 섹슈얼 아이덴티티보다 국익을 우선할 내셔널아이덴티티가 우선시되게 된 근대의 패러다임을 아직 살아가는 오늘, 그래서 ‘배아의 생명의 존엄성’은 존중되지만(혹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대전제는 살아 있지만) ‘국가를 위해’서라면 ‘다 자란’ 성인의 신체는 훼손해도 된다는 사고는 변함없이 그 뿌리를 탄탄히 내려 이 사회를 지배한다. 그리고 그렇게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행위를 당연시하는 사고는 여전히 ‘공’을 위한 행위로 착각되어 위안부와 군인을 생산해내리라.
‘난자’라는 단어가 원래 위치했던 사적이고도 은밀한 공간을 벗어나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이라는 공공의 영역을 활보하고 있지만 지금의 상황은 개인의 ‘몸’이 국가를 위한 것이 될 때 어떻게 일상성을 벗어나 왜곡된 ‘공공’의 장을 확보하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텍스트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문제는 거기에 한나 아렌트가 말한 ‘공공성’이 존재할 여지는 없다는 점이다.
박유하 / 세종대·일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