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가 최저임금을 올리겠다고 해서 일자리 81만개 공약과 맞물려 의견이 분분하다. 페친들 의견만 해도 양쪽으로 양분되어 있는 것 같고, 양쪽 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일”과 일에 따른 보수인 “임금”에 대해 논하면서 필연적인 질문이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자리를 마련하고 임금을 올리는 건, 당장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을 구제하고 수입을 올려 조금이라도 편안한 삶을 찾도록 하자는 것일 터. 크게는 사회 양극화 해소도 겨냥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런 취지자체에는 나역시 당연히 공감하고 지지한다. (이런 담론이 일하는 사람들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을 지적하면서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라는 주장에도.)
그런데, “자영업자들의 반론”에 대해 “임금을 올렸다는 이유로 망할 곳은 망하라”고 말하는 극단론에는 중요한 논의가 빠져 있다. 임금이란 그 일의 “가치(혹은 효과)”에 대해 주어지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고용자가 “일의 질”이 그 임금에 상응하는 것인지를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물음을 고용자가 아니라 피고용자가 묻는 상황이 아닐까. 말하자면, 그 일이 창출하는 효과에 대한 피고용자의 주체성이야 말로 우리가 의식하고 신장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일자리자체보다 “자신에게 맞고 잘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물음과 확인이, 지금의 논의에서는 완벽하게 빠져 있다.
그건 다른 말로 하자면 창의력일 것이고, 창의력이야 말로 일과 자신에 대한 최대의 주체성 표현이다.창의력이란 과학자나 예술가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일-노동자체와 제대로 마주하고 깊이 들여다보고, 가능하다면 철학을 넣어 그 일을 완수할 때 일에는 아름다움과 깊이가 생긴다. 그리고 그때 바로 “일”에 자연적으로 경제성이 따라 붙는다. 무형의 작업이 되었든(청소, 가게 직원),유형으로 표현된 것이든(수공예품, 상품, 건물..), 요구된 것 이상의 “가치”를 띠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우 자영업자든(편의점 직원 경험을 써서 작가가 된 일본여성 케이스라면 편의점 주인)그가 생산하는 “가치”(손님을 주의깊게 관찰해서 필요한 물건을 잊지 않고 주문해 든다던가 키작은 사람을 위해 알맞은 배열을 해 둔다던가 할 것이므로)가 만드는 생산성과 수익에 따라 임금도 올릴 수 있게 될 것이므로. 편의점의 직접적 경제가치와 상관이 없다 하더라도, 그 여성은 “편의점 직원”이라는, 결코 훌륭한 직장으로 인식되지 않는 공간 역시 집중(사고)하는 일로 또 다른 가치를 창출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것이 사실 문명화다.)
그런데 일률적으로 올리거나 일자리를 마련하는 “이상주의”에는 이러한 “가치” 창출에 대한 인식은 전혀 없어 보인다.
동시에, 이른바 효율 중심의 근대적능력사회가 만들어온 “일”이나 “일자리”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그가 가진 능력이 어떤 자리에서 빛날 것인지를 가늠하고 기회를 주고 기다리는 시스템이야 말로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른바 정상적인 사회, 능력추구중심의 사회에서 드롭아웃되거나 당한 이들의 폭발(폭력, 살해..)은 타인을 가해하거나 스스로를 가해(자살) 한다. 우리 사회는 그런 이들의 개인적 삶뿐 아니라 사회적 가능성마저 사장시켰다고 해야 한다.
말하자면, “시급 얼마”라는 기치는, 그 자체로는 이상적일 수 있지만, 실제로 이 사회의 구성원 모두를 행복하게하기에는 역부족인 정책이자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모던타임즈 “(1936)가 나온지 벌써 80년인데
우리 사회 자체는 여전히 정형화되고 빠른 일에 더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일자체에 대한 집중(때로 스피드 다운)과 창의력 발휘가 아니라.
바꿔 말하면 일을 통해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창의력 발휘(주체성 발휘.개인으로서의 나를 온전히 표현하기)가 일이 되어야만 그 사회의 문화적/경제적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 아닐까.
그동안 “느리게 살기”등 근대 사회에 대한 반성이 생기긴 했어도, 그건 그저 일을 줄이고 휴식을 많이 가져야 한다는 식으로 일과 휴식의 이분법을 오히려 강화하고(나는 “노후”에 대한 우리사회의 지향성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일에서의 시간적효율성(질적 효율성이 아니라) 추구를 오히려 강화시켜 온 것 아닌가 싶다.그만큼 뒤처지는 사람은 많게 된다.
개인주의란, 자신의 성향대로 있어도 되는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저 국가와 대치되는 개인이 아니라. 그리고 이 일에서는 맞지 않아도 저 일에는 맞다는 것을 스스로 찾게 하고 또 함께 찾아주는 시스템이야 말로 개성을 존중하는 것이고 “시급얼마”의 논의 이상으로 중요한 거 아닌가 한다. 그래야만, 획일적인 고용(고임금),혹은 획일적인 해고(저임금)라는 딜레마에서 양측이 모두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을테니까.
한 사회는 능력자나 천재만으로 구성되지도 않고 운영되지도 않는다. 근대적 효율사회에는 맞지 않아도 또다른 일에서 자기를 표현 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긴급한 과제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실은 고교생의 초등학생 살인과, 중학교에서의 집단자위 문제와 아이를 개목걸이로 묶어 두었다가 죽게 한 엊그제 사건에
있었다. 교권문제인지 단순한 통과의례문제인지 페북에서도 논의가 갈렸지만, 중요한 건 그 사태가 교육/학급의 붕괴현장이라는 사실 아니었을까.
아이들을 분노하거나 옹호하는 시각만 눈에 띄었지만, 더 필요한 건 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어른 탓이고 사회탓이라는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민주화와 88올림픽 이후 30년을 숨가쁘게 달려 왔지만,그동안 자란 아이들이 폭발하는 모습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다. 이런 현상이, 그동안 함께 진행된 획일적이고 억압적이고 이제 “학대”라는 인식마저 생기게 된 과잉교육, 동시에 정말 필요한 교육(방식)의 결핍(느리게 공부하기)에 그 이유가 있지 않은가 나는 생각한다. 기존학교를 없애 버리거나 대안학교를 따로 만들 것이 아니라, 교육내용과 형식의 변화가 오히려 필요하다.
임금을 올리는 건 급료차별을 개선해 안정성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다. 그리고 그렇게 지향하는 이유는 쾌적하고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쾌적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개인이 “생긴대로” 있어도 살아갈 수 있는 자유, 혹은 자신의 개성을 최대한 추구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나름대로 쾌적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일은 잊고 지내 온 것 같다.
사람은 여유로울때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 있고, 여유롭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똑같은 생각과 행동을 지향하는 사회에선 오히려 개인을 파편화시켜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이기적인 개인주의가 횡행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자신답게 존재할 수 있는 일의 스피드와 집중(철학)이 담보될 때 우리는 오히려 서로 손내밀며 연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연계하기 위해서, 보다 많은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오히려, 획일적인 정책이 아니라 자유롭고 유연한 정책이 필요하다. “개혁”이란 그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저 앞에 있는 것을 치우거나 뒤집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맞는 공부(일)의 내용과 스피드가 보장되는 사회. 그로 인한 주체성과 만족이 한 사회의 삶의방식이 되는 사회. 그런 사회를 지향했으면 한다. 추상적논리나 감정이 견인하는 사회가 놓치는 것들에 주의하지 않는 한, 진보정권이 이끈다 해서 곧 행복한 사회가 되지는 않는다. 진보의 이상을 실현하려면 더더욱 필요한 자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