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역사사법화’를 넘어서 – ‘무기’화된 소송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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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기’화된 소송

징용문제를 두고 일본이 중재위를 설치하자며 강경하게 나오기 전까지, 한국에는 피해자들을 위한 재단을 만들어 새로 보상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심지어 이 부분에서는 그동안 이런 문제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정치/외교전문가들도 징용문제관계자들과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양국정부가 양국기업과 함께 재단을 만들자는 ‘새로운 재단 설치’안의 중심에 있는 최봉태변호사는 일찍부터 위안부문제/징용문제의 중심에 있었던 이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4월, 일본에서 일본기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제안이 옳다는 주장을 하면서 ‘언론의 협조’를 부탁하기도 했다.

 

*하나가 아닌 ‘피해자’

그런데 최봉태변호사의 주장에는 모순이 적지 않다. 신일철원고의 변호인들이 신일철의 주식을 압류하고 매각에 나서겠다고 하자 그는 ‘한일관계의 파국을 원하지는 않으니 한일정부가 협의를 하라’고 했다. 하지만, 소송이라는 수단을 사용해 역사문제를 사법의 장으로 반복적으로 가져와 ‘한일관계의 파국’이 우려되는 상황으로 한일관계를 몰고 온 건 바로 다름 아닌 최변호사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동원에 응해 이주한 노동자들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도 않았다. 신일철 판결이 나오자마자 아베수상이 직접 나서서 해당원고들은 ‘징용령’하에 동원된 이른바‘ 징용공’과는 다르다는 반박을 하도록 만든 것은 피해자들의 정황을 잘 알고 있었을 관계자들이다.

하긴 최변호사의 입장은 앞서의 판결에서 본 것처럼 어떤 경로로 노동을 하게 되었건 ‘한일합방불법론’에 의거한 ‘불법’동원으로 간주하고 모두 똑같은 ‘피해자’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니 구별을 하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회가 노무자들간에 그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모두를 “강제징용”으로 생각하게 된 데 대한 관계자들의 책임은 작지 않다. 더구나 노무당사자들이 그들 간의 차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모든 문제해결은 사태를 정확하게 아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실제로, 일제시대 ‘피해자’관계 단체는 삼십개 가까이 된다고 한다. 최봉태변호사가 대리인을 맡고 있는 건 그중 미쓰비시중공업소송자들 뿐이니 그의 의견이 모든 노무자들을 대변하는 것일리도 없다.

실제로, 최변호사의 방식–‘소송’을 무기로 일본을 압박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한국정부가 보상해야 한다면서 매주 청와대앞에서 시위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전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청와대 역시 이들의 존재를 언급한 적은 없다.

https://headlines.yahoo.co.jp/article?a=20190528-00012078-bunshun-int

이런 움직임들은 최변호사의 해결방식이 모든 피해자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설사 징용자문제가 최변호사 방식대로 진전된다 해도 그것이 곧 갈등해결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누구를 위한 재단인가

최변호사는 자신이 주장하는 양국 정부와 기업이 만드는 재단설립에 필요한 금액을 “한·일 협정 당시 추산한 강제동원 피해자 규모는 국내외 103만명으로, 1인당 1억원 기준으로 할 때 103조원 정도”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정부뿐 아니라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경제협력자금을 사용한 포스코·코레일·도로공사”등이 그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최근에는 일본기자들을 향해 23조라고 말했다. 23만명에게 1억원씩 보상하겠다는 것이다.

103조도 그렇지만 23조라면 엄청난 금액이다. ‘새로운 재단 설립’을 주창/지지하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최변호사와 비슷한 입장을 취한 정치/외교전문가들은 이런 구체적인 예산산정을 인지했을까.

재단이 ‘장기적으로는 변호사수입이라는 면에서 돈이 된다, 일본에 노무자들의 공탁금이 있는데 재단을 운영하면서 그 공탁금을 찾아오는 과정에서 변호사들이 기여하면 금전적으로 보상을 받을 수도 있다’는 그의 말은(https://youtu.be/xlV58lSvf9M), 그가 생각하는 재단설립이 꼭 ‘피해자’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도 보여준다. 그가 말하는 ‘공탁금’찾기 역시, 정말 시작된다면 옳고 그르고를 떠나 1965년 협정을 건드리는 또하나의 사태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그는 소송을 위해 피해자들에게 돈을 거두었다가 반환요구에 따라 돌려주었다는데, 공탁금 소송 역시 비슷한 갈등을 겪을 수 있다. (https://headlines.yahoo.co.jp/article?a=20190529-00012086-bunshun-int).

그는 이른바 “포괄적 화해’를 하면 필요금액이 삭감된다면서 일본을 향해 재단설립의 효용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주장은 바로 한일협정때 일본정부 쪽의 주장이었다. 징용자들의 피해를 일일이 따지려면 확인도 필요하고 확인서류가 구비되지 않으면 보상금액도 적어질 수 밖에 없으니 경제협력금이라는 형식으로 해결하자고 했던. 그는 스스로가 부정한 한일협정과 똑같은 방식을 시도중이다.

 

*‘개인청구권’은 누구의 것인가

그는 ‘정부협의’를 해야 한다고 그동안 주장해 왔는데, 그 이유는 협정을 통해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키는 데에 있는 듯 하다. 정부협의에 맞서 개인적으로 소송을 하려는 이도 당연히 있을 수 있는데, ‘재단을 만들기 위한 법을 만들 때 피해자들이 더 이상 소송을 못하도록 하는 규정을 넣으면 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징용자의 개인청구권이 1965년협정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다’는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소송을 일으키고, 그 주장이 받아들여져 대법원에서의 승소판결을 이끌어낸 그가 목표하는 것이 결국은 ‘정부가 다시한번’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키는 것이라면, 그가 그동안 해 온 소송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개인의 인권’을 강조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택한 해결방법에 따르게 하겠다는 것이라면, 그런 최변호사의 방식이 ‘인권’을 존중한 것으로 간주되기는 힘들다. 자신은 수많은 소송을 해 왔으면서도 당사자들의 소송권리는 빼앗겠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개인청구권이 정부간 협의로 소멸 가능한 것이라면, 1965년에 정부가 소멸시킨 청구권이 살아있다는 주장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이상, 2019년4월15일 일본기자클럽에서의 회견). 자신이 주장해 대법원이 남아 있다고 판결한 개인 청구권을, 다시 한번 정부협의로 ‘소멸’시키는 것이 ‘정부간 협의’의 목적이라면, 그가 이제까지 해 온 소송들은 정부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압박수단일 수 밖에 없다.

 

*크고 작은 기만들

소송을 무기 삼아 ‘개인 청구권’을 주장한 최변호사의 지론의 근거는 ‘한일합방불법론’이다.

그는 ‘한일합방이 불법’이라는 인정을 ‘국제적으로’ 받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런 ‘인정’을 해 준 나라는 없다. 그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면 1919년에 설립된 임시정부역시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사실은 없었다.그의 이런 주장은 ‘일본사법부도 개인청구권을 인정했다’는 이야기와 이어지는 얘기인 듯 한데, 일본에서 과거사 관련해 원고측이 승소한 판결은 정신대/위안부할머니들이 함께 소송한 이른바 관부재판에서의 판결이 유일하다. 하지만 그건 1심에서의 판결이었고 고법에서는 뒤집혔다.

또 최변호사는 중국인노무동원에 대한 판결에 언급하며 일본최고재판소(대법원)가 “자율규제에 나설 것을 권고했다”고 주장한다.(2019/6/6.중앙일보).

하지만 최고재판소의 그 판결은 배상청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청구권 자체가 원천적으로 없는 건 아니지만 ‘조약에 의해 소멸되었으니 소송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 그 재판의 판결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청구권은 법적 유효성을 잃었지만 기업측이 스스로 뭔가를 할 수는 있겠다’는 내용이다.

그런 맥락을 생략하고 그저 일본최고재판소가 ‘개인청구권을 인정했다’‘자율구제를 권고했다’고만 말하면 듣는 이들은 ‘개인청구권 존재‘=’소송권리 인정‘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는 그동안 ‘양국사법부가 개인청구권을 인정했다’고 대사회적으로 말해 왔다. 그 양국정부를 압박하고 자신의 주장에 동의하는 여론을 만들기 위해서일 것이다.

실제로 한국언론은 대부분 최변호사의 말을 그대로 전해 왔다. 최변호사는 일본언론을 향해서도 자신의 주장을 전파해 달라고 했지만, 일본언론은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는 전하지 않았다.

또 최변호사는 중국인의 노무자소송이 ‘화해’로 이끌어진 예를 들면서 일본이 한국을 증국과 다르게 취급한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중국인들의 소송도 많은 경우 1972년에 중국정부가 일본과 수교하면서 전쟁배상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화해로 이끌어진 케이스도, 정부와 노무자간의 화해가 아니라 기업과 노무자간의 화해였다. 따라서 ‘중국인과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태도가 달라야 할 이유가 없다’는 최변호사의 주장도, 이런 배경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또하나의 기만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는 또, 독일정부가 강제동원피해자들에게 보상한 사실을 들어 자신의 제안대로 재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유태인노동동원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말 그대로의 노예적 동원이자 노동이었다. 아무리 조선의 노동자가 가혹한 취급을 받았다 해도 인종말살정책과는 구조도 맥락도 다르다. 구조와 맥락이 다르면 다른 판단/해결으로 대응하는 것이 상식이다. 오랫동안 ‘피해자’문제에 관여해 온 법률가가, 그런 ‘차이’를 몰랐을 리는 없다. 피해의 존재가, 더 큰 타국민의 피해를 자국민피해와 동일시해도 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위안부문제에서도 지원단체는 위안부들의 정황과 홀로코스트를 동일시해 왔다.

 

*한일협정 무화론

법학자 김창록도 최변호사의 거친 논지를 조목조목 비판한다. 그런데 김창록 교수 역시 ‘한일협정에는 위자료가 없었으니 위자료청구를 해야 하고 한국정부는 “외교보호권‘을 가동시켜 피해자들을 위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면에서는(<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역할강화를 희망하며>2019513,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주최,국내학술대회) 최변호사와 다르지 않은 한일협정무화론자다. 그는 1965년협정이 “파탄상황”(동)이니 “그 틀을 뛰어넘어 한일 과거청산을 규율할 새로운 법적틀을”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파탄상황”을 만든 건 바로 이런 주장들 자체다. 한일협정에 시대적인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거기서 얻은 교훈과 지혜를 현재와 미래에 살리려는 시도가, 과거 인물들이 한 일을 전부정하고 ‘새로운 과거’를 만드는 일로 그대로 이어져야 하는 건 아니다. 더구나 관계국간의 자발적인 협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적’인 압박에 의해 그런 틀을 만들자는 것은 현실성도 없거니와 그 시도 자체가 이미 협정이라는 ‘법’의 부인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모순을 안고 있다.

“새로운 틀”을 마련하려면 당연히 ‘오래된 틀‘로서의 한일협정은 파기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파기수순의 시작점이야말로 한일관계 “파탄”의 순간일 것이다. 우선 한국은 일제시대는 물론 한일협정에 따라 해방이후에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모든 것을 먼저 돌려주어야 한다. 해방직후 조사된 일본인의 자산은 당시금액으로 무려 52억달러였다.(이대근<귀속재산 연구>,2015). 물론 한일협정때 받은 돈과 인력은 물론 그 이후에 전두환대통령이 받은 40억달러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일협정은 물론 시대적 한계를 여러 가지로 안고 있다. 그건 연합국 대부분이 ‘제국’으로서 식민지를 갖고 있던 필연적인 한계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계를 갖지 않는 역사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자면 역사란 언제나 그 시대를 고스란히 남긴 유산일 뿐이다. 과거역사를 만든 동시대 사고와 한계에 대해 고찰하는 작업은 언제까지고 유효하고 중요하지만, 그 고찰이 꼭 과거를 뒤집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지배’에 대한 공식적인 사죄는 세계의 앞으로의 과제라고 나 역시 생각하지만, 그런 커다란 과제가 자발적인 반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압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일본이 한일협정에도 불구하고 실시해 왔던 조치들–원폭피해자문제, 사할린교포문제, 그리고 위안부문제에 관해 실시해 온 일들은 당연히 ‘식민지지배’에 대한 속죄의 마음을 담은 조치였다. 중요한 것은 형식보다 마음이다.

 

*무기로서의 소송

그럼에도 최변호사는, 역사문제를 둘러싼 소송에서 적지않은 승소결과를 거두었다.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도 승소했고 이어서 압류수속에도 나섰다(20190325, 뉴시스.“법원, 일제전법기업 상표권등 국내자산 압류결정..강제집행절차 개시) 그 사태를 최변호사는 “한일양국 사법부 판단을 무시한 전범기업의 말로”라고 표현하면서 “지금이라도 법치주의 국가에서 영업을 하기 위해서는 법을 준수하겠다는 약속을 하길 바랍니다”(20190325 페이스북)라고 썼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전범’이라는, 국가나 기업에 붙일 수 없는 형용사를 사용하는데서 나타나는 일본에 대한 우위욕망과, 현재의 정황을 “사법부판단을 무시한 전법기업의 말로”로 간주하는 승자–‘법률가’로서의 오만이 가득하다. 실제로 그는 “한일정부협의를 통해 위안부문제와 징용공문제를 동시에 해결”(20190424. 최봉태 페이스북)해야 한다면서 양국 정부가“양국 사법부가 하라는대로만 하면 해결이 됩니다”라는 말이 보여 주는 것처럼 ‘사법 지상주의’적이다. 그에게는 어떤 문제에서든 사법의 판단이 최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사고가 팽배해 있다. 그가 정부를 상대로 한 여러 소송들(외교부를 상대로 한 한일협정문서공개소송, 위안부위헌소송등)이, 사법부를 통해 행정부를 움직이려는 의도가 노골적인 것이었음을 보더라도 그의 사고는 명백하다. 그는 소송을 역사문제에서의 최고의 해결책으로 삼고 행동해 왔고, 자신의 생각대로 사태가 진전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저 대상자가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탄핵사유”(2018.11.1.ㅡ오마이뉴스)라면서 대통령마저 겁박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연장선상의 일이다.

하지만 최변호사가 주도한 위헌판결에 패소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던 건 다름아닌 그 정부다. 패소상대가 외교부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박근혜정부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고 그 결과, 꽤 오랫동안 일본과 불편한 관계 속에 있었다. 한일합의는 그 결과로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니 한일합의에 찬성하든 아니든,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주도한 한일협정문서공개소송에서 승소해 한일협정 때 한국정부가 일본에게 보상금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도록 했고 이후 한국정부의 피해자보상사업에서 중심에 있었는데도, 피해자들에게 ‘다시 소송을 해서 더 많은 돈을 받자’고 제의했다(https://headlines.yahoo.co.jp/article?a=20190529-00012086-bunshun-int)

링크)고 한다. 현재 한일관계를 흔들고 있는 2018년대법원 판결은 말하자면 그 결과다. 이 과정 역시,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전제로 소송을 일으키고 승소했음에도 다시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키겠다는 앞서의 패턴과 비슷하다. ‘피해자’를 위한다는 그의 수많은 소송들은, 언제나 마지막이 아니었다. 이어서 또 다른 협상/소송을 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한국정부를 향해 탄핵을 거론했던 최변호사는 일본기자들 앞에서는 일본정부가 따르지 않으면 국제적 여론을 일으키겠다고 말했다. 사법부를 움직여 한나라의 정부를 움직이는데 성공해 온 그간의 이력이 만든 자신감 가득한 협박이라 해야 할 것이다. 심지어는 한발 더 나아가 미국을 상대로 피폭자 관련제소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도 했다.

일본도 하지 않았던(하지 않는 것이 꼭 옳다는 이야기는 아니다)대미원폭소송을 일으키겠다는 이유를 그는 ‘핵무기 없는 세상을 위해서’ 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운 캐치프레이즈는, 굳이 ‘소송’을 통해 다시 강조하지 않아도 이미 세계가 공유중이다. 말하자면 더이상 새롭지도 참신하지도 않은 캐치프레이즈, 너무나 정당한 주장이어서 아무도 이의 제기할 수 없는 ‘정의’다. 그는 누구나 아는 정의를 소송이유로 사용해 자신의 소송을 정당화하고 여론을 움직여 왔다.

또 그는 자신이 소송을 하는 이유를 ‘인권침해를 받았는데도 현재까지 구제받지 못했다, 인권구제를 해야 할 상황이어서 소송을 일으켰다’‘피해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앞으로의 한일관계를 올바르게 만드는 토대다. 해결해야 할 과제를 해결하려는 것일 뿐이다’라고 설명한다 .(일본기자회견) 여기서도 “인권”이라는, 그 누구도 반론할 이유가 없는 상식적인 정의를 내걸지만, 그가 지향하는, 국가가 주도하는 ‘청구권의 최종적 소멸’ 이 피해자들의 인권을 소중히 한 것인지는 피해자들이 판단할 것이다.

더구나 그는 재단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로 ‘피해자들이 재판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재판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그동안 왜 들려오지 않았을까. 이는 언론의 관심이 소송이나 최변호사에게만 몰렸기 때문일 것이다.

(재단설립말고는 다른 해결안이 없다면서) ‘더이상 피해자가 생기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자신의 바람’이라는 그의 말은 당연히 아름다운 명제지만, 소송위주의 그의 시도는 한일관계를 치명적으로 훼손했다. 그가 피해자전부를 대표하고 있지 않음에도, 지금 징용문제는 오로지 ‘소송‘을 주도하고 참여한 이들 위주로만 전개중이다. 더구나, 한일협정으로 해결된 것으로 간주되었던 이들은 징용자만이 아니다. 최변호사 방식을모두가 취한다면, 징병자들을 비롯한 또다른 피해자들이 끊임없이 소송을 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한일양국은 미래를 소송에 저당잡히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협의와 화해를 할 수 있으니 중재위도 필요없고 국제사법재판소에 갈 필요도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일본으로 하여금 중제위설치를 요구하도록 만든 것이 다름아닌 그가 일으킨 소송이었음을 은폐한다. ‘인권문제인데 정치외교문제로 접해서 문제가 어려워졌다’는 그의 주장은, 국가가 다시 나서서 ‘개인청구권을 없애’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이 다름아닌 정치/외교의 장을 필요로 하는 주장이라는 사실도 은폐한다. ‘인권’문제를 오로지 소송에 의존해 심각한 정치/외교문제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최변호사를 중심으로 하는 법률가들이었다. 그의 주장들은, 역사문제를 너무나 간단히 법정으로 보내고 그렇게 나온 ‘판결’을 모두가 지켜야 하는 최고의 ‘법’으로 내세워, 국민을 대표하는 정부조차 그의 생각대로 움직여 왔던 과거를 은폐한다. 작금의 징용관련 갈등은, 그가 선도했던 ‘역사의 사법화’의 결과다.

 

*법지상주의

그럼에도 그의 소송과 승소는 “우리헌법사상 빛나는 승리한 혁명”으로 칭해지면서 현재 대한민국의 담론을 장악중이다. 승소판결을 ‘법치주의 승리’이자 ‘양국법률가의 승리’로 간주하면서 양측 정부가 판결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한국 외교부도 법 알기를 우습게 알고 있기 때문”(최봉태<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역할강화를 희망하며>, 2019년5월13일,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주최 국내학술대회 자료집)이라고 말하는 그의 주장은, 그에게 ‘법치주의’,즉 ‘사법’의 권력이 학계나 정부보다 위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는 ‘법치주의’라는 깃발을 들고 소송을 무기삼아 역사를 사법공간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역사를 전유해 왔다. 하지만, 그의 ‘법지상주의’적 담론은, 그가 해 온 소송들 자체가 전부 1965년 협정의 부정에서,즉 국가간 법치주의부정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고 있다.

정부는 스스로 ‘법치주의’의 피해자가 되었으면서도 이런 ‘역사의 사법화’에 적극 가담해 왔다. 문재인대통령이 후쿠시마 수산물수입을 둘러싼 대립에서 한국이 승소하자 “앞으로 생길 다른 분쟁 소송에 참고로 삼기 위해서라도 1심 패소 원인과 상소심에서 달라진 대응 전략등 1,2심을 비교분석한 자료를 남길 필요가 있다”(20190416, 조선일보)고 했다는 사실은, 문대통령 스스로가 (최변호사와 함께 징용재판을 맡은 적이 있는 만큼) 일본과의 갈등을 소송으로 해결하는 방식에 의문을 갖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대화’라는 외교채널을 갖고 있는 대통령이, 그 외교부가 만들어낸 화해치유재단을 ‘법적사죄’가 아니라는 이유로 스스로 해산시키고, 그 해산을 두고 최변호사가 “피해자들의 의사가 존중되게 된 것”(대구 MBC라디오,여론광장)이니 (일본이 보낸 100억원에 대한)“반환협상을 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하지만 대화가 아니라 법정에 역사문제에 대한 최종판단을 맡기는 방식, 실상은 학문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학문이 선택적으로 이용되어 개인간/국가간 갈등수위를 높이는 ‘역사의 사법화’ 방식은 좀 더 신중히 고려되어야 한다. 더구나 피해자를 위해 역사문제를 돌아보는 과정이 고작 “승세를 몰아 일본군위안부와 강제징용문제의 해결주도권을 잡아야 합니다”(20190416, 최봉태 페이스북)라는 식으로 “승세”와 “주도권”을 찾아 상대를 제압하려는 방식인 한, 복잡다단한 역사문제가 생산적으로 풀릴 가능성은 지극히 적다.

소송이 만든 판결과 ,반년 이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해 온 한국정부에 대한 일본의 불 신은 극에 달했다(한국일보/요미우리신문 여론조사).물론 최변호사등이 제공하는 정보에만 귀를 기울이며 결과적으로 그와 똑같이 생각하게 된 한국사회 역시 일본에 대한 불신을 한층 더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정부가 어떤 선택을 하든, 위안부문제 이후 쌓인 상호 불신을 해소하기는 쉽지 않아졌다.

소송이란 구조상 ‘이기고 제압’해서 자신의 방식을 수용하도록 만드는 전투적 방식이다. 그런 방식이 결코 역사문제 해결방식으로 효과적이지 않았음은 이미 위안부문제가 증명했다. 일본유학목표가 “친일파가 저지른 역사왜곡을 바로잡”는 것이었다는 최변호사는 자신의 싸움을 ‘독립군’의 싸움에 비견한다.

하지만, ‘해방되지 못한 피해자’의 “해방”은, 꼭 물리적으로 ‘이기는’ 데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런 식의 힘겨루기란 부국강병의 기치를 내걸고 제국주의에 나섰던 일본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방식일 뿐이다. 지극히 ‘근대적’인.

그는 그간의 활동이 보람이 있었음을 확인하고 싶다고 한다. 오랫동안 그를 믿고 의지했을 피해자들의 불만을 억제하기 위해서도, 그는 자신이 주장중인 해결방안이 성공하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방식 자체의 모순을 들여다보지 않는 해결책이 성공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2019년 6월19일, 한국정부는 반년 이상의 침묵을 깨고 양국 기업이 재원을 마련해 해결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그리고 이 제안은 최변호사의 제안인 양쪽 국가도 참여하는 안은 아니어도 최변호사의 제안과 가까운 안이었지만 곧바로 거부당했다.

오랫동안 실제로 피해자들과 함께 하며 강제동원피해를 연구해 온 연구자들 역시, 재단설립안에는 호의적이 아니다. 그 중 한사람은 재단설립안에 대해 “피해 문제 해결과 거리가 있는 미봉책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며 “현재 재단 설립 주장은 징용소송원고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생존자와 적극 ‘저항하는 피해자’만 해당”하고, “사망자 문제나 미수금 등 피해자 사회가 원하는 다양한 기대치나 요구하는 해결 방안과 무관”하다고 지적한다.(정혜경. 비공개세미나자료)

정부와 언론은, 좀 더 다양하게 연구자와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일관계, 무엇이 문제인가-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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