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31일, 한국프레스센터)
바쁘신 가운데 이렇게 모여주신 언론사 관계자 여러분들, 그리고 저를 둘러싼 일에 관심 갖고 참석해주신 분들께 먼저 깊은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저는 오늘로 저의 직장이었던 세종대를 정년퇴직하게 됩니다. 30년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한 사람의 학자로서 연구와 교육에 최선을 다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2014년 6월 16일에 고소·고발당한 이후, 평온했던 저의 일상은 깨졌고 이후 8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이 8년 동안 저의 책 <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의 강제연행을 부정했다거나 위안부 할머니를 폄훼했다는 등, 제 기억에 없는 일로 비난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정년을 맞게 된 오늘까지도 책은 아직 법정에 갇혀 있고 제가 아직 ‘피고인’ 신분을 벗지 못한 건 그런 비난들 때문이기도 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1. 고발은 운동비판의 결과
그런데 저의 책은 발간 당시에는 언론에 오히려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었습니다. 고소·고발당한 건 무려 10개월이나 지난 후입니다. 이 10개월 동안 저를 둘러싼 새로운 변화는 ‘나눔의집’에 거주하시던 한 위안부 할머니와 친해졌다는 사실밖에 없습니다. 그런 저를 나눔의집 소장이 경계했고, 책의 검토를 의뢰받은 한 변호사가 위안부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을 시켜 <제국의 위안부>에 관한 보고서를 만들어, 무려 109곳을 삭제해야 한다면서, 형사, 민사, 그리고 판매금지 등 가처분신청, 이 세 가지 소송을 건 것이 이른바 <제국의 위안부> 고소·고발 사태입니다.
그런데 실은 이보다 앞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현 정의연)도 고발을 검토했었다는 사실을 저는 훗날 알게 되었습니다. 정대협 대표였던 윤미향 씨가 상의했다는 전 민변 회장 정연순 변호사는 <제국의 위안부>가 “정대협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 명확히 말하고 있습니다(정연순 페이스북, 2015년 12월 31일).
이 두 가지 사실은, <제국의 위안부> 소송이 위안부 할머니가 아니라 주변인들이 일으킨 소송이라는 것을 명확히 말해줍니다.
그리고 징용문제에서 정대협만큼 오래 활동해온 최봉태 변호사가 나눔의집 소송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저는 올해 3월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최 변호사는 이용수 할머니의 변호사이기도 한데, 당사자인 이용수 할머니는 저의 책을 읽은 적이 없다고 저에게 두 번이나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2. 때를 놓친 판결
“정대협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가 아닌 지원단체를 비판한 책이라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관계자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삭제를 요구한 109곳 중 3분의 1 이상이 정대협 관련 기술이기도 합니다.
이후의 싸움에서, 저는 형사 1심에선 승소(무죄 판결)했지만 2심에서는 패소(유죄 판결)했습니다. 당시의 판결 요지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박유하가 위안부를 매춘부라 한 건 아니지만, 독자들이 그렇게 읽을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독자의 독해력에 대한 책임이 저자에게 씌워진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당연히 상고했습니다. 2017년 10월의 일입니다. 이후 대법원 계류 세월만도 곧 5년이 됩니다. 만약 무죄(파기환송) 판결이 나온다 해도 2심을 다시 진행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2억 7천만원(원고 1인당 3천만원)의 손해배상이 청구된 민사소송, 그리고 책 일부를 삭제당한 가처분신청 결과에 대한 이의신청 재판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이대로 가면 10년을 넘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오늘 이 회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다못해 정년퇴직 전에는 끝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결국 제 바람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10년이라는 세월이 어떤 의미와 무게를 갖는지는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이 잘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8년의 세월 동안 저는 SNS와 홈페이지, 세 권의 책을 통해, 그리고 인터뷰 등의 기회를 얻을 때마다 <제국의 위안부>는 고소·고발자들이 말하는 그런 책이 아니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리고 국경을 넘어선 지지자들도 두 번의 항의성명, 세미나, 심포지엄, 책 등을 통해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이른바 진보 지식인들입니다. 제 홈페이지(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법정에서 광장으로, https://parkyuha.org/)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기간 동안, 저도 고령화되었지만 지지자들도 고령화되었습니다. 그중엔 돌아가신 분도 몇 분 계십니다. 그만큼이나 긴 세월이었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함께해주신 분들도 지칠 수밖에 없는 긴 시간이었습니다. 결자해지라는 말이 있듯, 저를 이런 상황에 몰아넣은 것은 이른바 ‘진보’진영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는 문재인 정부 때 무죄 판결이 내려지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래야만 정치적 판결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법원에 심심한 유감을 표합니다.
3.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근본적 오해
(1) 학계에서 부정되고 있는 ‘강제연행’
저는 강제연행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공적으로는’ 강제연행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실은 학계에서도 더이상 ‘강제연행’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가 ‘(위안부)운동부터 시작하다 보니 정확하지 않은 사실이 많았다는 것을 연구를 하면서 알게 됐다’고 말하기도 하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다 금년 5월에 나온 한 일본인 진보학자의 위안부 논문도 일본 군부에 의한 “직접, 그리고 계획적인” 강제연행은 없었다고 말합니다(도노무라 마사루[外村大] 도쿄대 교수). 이제야 이른바 진보진영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본격 논문이 나온 것입니다. 또한 위안부문제의 1인자로 일컬어져온 일본인 학자의 주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이었는지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한국인 학자의 논문도 역시 금년 3월에 나왔습니다. 두 논문 다 실력 있는 중견학자에 의한 중후한 학술논문입니다.
하지만 위안부문제 주류학자들이 이 논문들을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입니다. 이런 목소리는 소수이니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안으로는 논의하면서도 바깥으로는 함구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사회의 위안부 인식이 30년 전 인식과 거의 변함이 없는 것은, 관계자들이 그 이야기를 단 한 번도 언론이나 대중 앞에서 공식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학자들과 운동가들은 강제연행에서 강제성, ‘동원’ 아닌 ‘위안소에서의 부자유’로 ‘강제’의 내용을 바꿔가며 ‘강제’라는 단어를 유지시켜왔습니다. 심지어 위안부문제에서 제1인자로 거론되는 학자조차 그런 기만의 선두에 서 있었습니다. 왜 이들은 이토록 ‘강제’라는 단어에 연연했을까요? 강제든 아니든 위안부 피해가 달라지는 일은 없는데도 말입니다.
(2) 위안부문제와 북한
주지하다시피, 위안부문제는 1990년대 초에 ‘문제’로서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북한은 일본과 국교정상화 교섭 중이었습니다. 북한은 위안부문제를 일본에 대한 ‘배상’을 받아낼 수 있는 문제로 간주했습니다. 냉전 시기에는 교류하지 못했던 남북은 이 시기에 일본, 중국, 유럽 등지에서 만나면서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했고, 북한의 대일배상문제는 어느새 한국의 위안부운동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실제로 1992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윤미향 전 정대협 대표는 북한이 배상을 받아낼 수 있도록 위안부문제를 잘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배상’을 받으려면 대상 행위가 불법이어야 합니다. 유엔의 위안부 인식을 담은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는 위안부의 목을 잘라 국을 끓이라 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증언은 북한 출신 위안부의 증언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한국사회에 퍼져 있는 가장 끔찍한 위안부 이야기들은 북한 출신 위안부의 이야기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언론에서 자주 거론되는 이른바 ‘국제사회의 인식’이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불법행위’ 가 되어 ‘배상’을 받으려면 위안부 동원이 군인=국가기관에 의한 ‘강제연행’이 되어야만 합니다. 함의를 바꾸어가면서까지 ‘강제’라는 단어가 유지되어야 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3) 이민족간 강간과 동일시
위안부문제는 유엔 등 국제사회를 향해 동시대의 유럽이며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부족/민족간 강간’인 것처럼 어필되었습니다. 원래 과거문제는 다루지 않았던 유엔이 위안부문제에 관심을 표명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족간 강간이 ‘불법’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두 집단간 관계가 ‘교전국’이어야 합니다. 동등한 위치에서 ‘전쟁’을 수행 중인 관계여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북한은 독립투쟁을 바탕으로 국가를 만들었다는 자기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자신들을 ‘교전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을 당시 활발히 교류했던 한국도 이어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윤미향 전 정대협 대표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위안부문제에 관여해왔던 법학자 등 다른 관계자들도 ‘북한의 대일배상’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2002년 ‘평양선언’에서 북한은 일본의 경제지원을 받기로 합의합니다. 그때의 평양선언이 이후 현실화되었다면 위안부문제가 그 이후로도 20년 동안이나 갈등을 이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하지만 북한의 핵문제와 납치문제가 불거지면서 평양선언은 유명무실화되었고, 이후 20년이 지나도록 일본과 북한의 국교정상화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한일갈등도 이어졌습니다.
(4) ‘식민지’ 아닌 ‘교전국’이 된 한국
작년 봄에 나온 위안부 재판 판결문에는 “교전국”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재판부는 한국을 교전국으로 간주하고,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를 적대시하는 민족 간의 집단강간으로 규정지었습니다. 물론 이런 판결은 원고의 주장에 따른 판결일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위안부문제는 식민지범죄 아닌 ‘전쟁범죄’로 인식되게 되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상당히 회자되게 된 “법적 해결”, “법적 책임”이라는 단어는 사실 위안부문제를 전쟁범죄로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과 일본의 관계는 전쟁범죄가 성립될 수 있는 교전국이 아니라 엄연히 종주국-식민지 관계입니다. 설령 국지적 전투가 있었다고 해도 그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싫든 좋든 현대 한국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제도가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지고 시행된 법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 위안부는 식민지지배가 만든 존재입니다. 저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그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그 사실이 직시되어야 한국이 시작한 위안부문제 운동의 의미가 온전히 살아날 것이고 올바른 해결도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목에 굳이 ‘제국’을 넣은 이유입니다. <제국의 위안부>란, 제국에 동원당한 위안부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관계자들은 이 사실을 오랫동안 말해오지 않았습니다, ‘전쟁범죄’로서의 강조가 훨씬 자극적이고, 무엇보다 ‘강제연행=불법’이라야 이른바 ‘배상’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90년대에 이어 두번째로 사죄와 보상을 시도한 ‘한일합의’에 관계자들이 반대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사죄와 반성과 기억은 ‘법’에 의존하지 않고도 가능합니다. 설사 ‘배상’을 받는다 해도 상대가 납득하지 않는 배상이 기억의 계승으로 이어질 리도 없습니다.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지만, 지금이라도 사태를 바로잡지 않으면 결국 가장 고통을 받는 건 위안부 할머니들일 것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선 이유입니다.
북한 이야기를 했지만, 저는 이른바 ‘종북’ 운운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북한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하기를 바라고 있고, 이제라도 그것이 추진되기를 바랍니다. 달리 말하자면 1990년대 초, 혹은 2000년대 초에 북일수교가 가능했다면, 위안부문제가 이토록 오래 지속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4. 징용은 ‘국가’가 주도
징용문제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립니다. 기업자산의 현금화가 우려되고 있지만, 징용은 국가가 주도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징용은 준(準)징병 같은 것이었고, 조선인도 기업의 노동자를 넘어 ‘신민’으로서 동원되어 ‘국가를 위해’ 일할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임금의 일부를 국가가 지급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기업을 대상으로 소송을 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운 사태입니다. 원래 일본과 미국에서 제기된 소송은 국가가 대상이었습니다. 패소로 끝났기 때문에 대상을 기업으로 바꾼 것이지만, 그런 식의 대응은 징용이라는 사태의 본질을 도외시한 대응에 지나지 않습니다.
설사 기업자산을 현금화해서 얼마간의 보상금이 지급된다 해도, 정작 중요한 일본인들이 징용 피해에 대해 기억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중요한 건 일본인들이 위안부문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징용에 대해서도 그 본질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일일 터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오늘 날짜로 발간된 이 책 <역사와 마주하기>에 자세히 썼으니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일본인들이 이 점을 생각하고 제대로 마주해주기를 바라면서 이 책을 일본어로 먼저 냈습니다.
이 30년 동안 역사문제에 법정이 관여하게 된 것은 위안부를 둘러싼 일본군의 행위를 강제연행, 학살로 이해한 법률가들이 이 문제를 전쟁범죄로 간주하고, 전쟁범죄를 처벌한 뉘른베르크 재판과 도쿄 재판을 참고하며 대응책을 강구해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사태를 ‘역사의 사법화’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법정은 학자들의 논의를 참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학자들조차 역사전쟁에서 진영에 따라 사안을 판단하는 ‘학문의 정치화’ 현상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위안부문제 등의 역사문제가 30년이나 이어지고 있는 건 그 결과이기도 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그 흐름을 바꾸려는 이들이 나타났지만, 이번엔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가져가려는 움직임이 농후합니다. 하지만 그런 정황은 과거 30년을 다른 방식으로 반복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입니다.
고발을 주도한 최봉태 변호사나 박선아 변호사는 현재 위안부를 둘러싼 담론장에서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나눔의집 소장은 횡령 혐의로 해임당했고, 기소 중입니다. 원고로서 이름이 올라간 위안부 할머니 열한 분 중 현재 생존해 계신 분은 이미 몇 분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 고발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저에게 청구한 1인당 3천만원은 제가 패소할 경우 누구에게 가는 걸까요? 작년에 있었던 위안부 재판에서 당사자 대신 원고로 이름이 올라와 있던 건 전 정대협 대표 윤미향 씨였는데, 저의 재판도 그런 식이 되는 걸까요?
한일관계가 경색된 것이나 제가 여전히 재판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간의 ‘주류’의 목소리가 아직 크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언론이 그동안 그들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여왔기 때문입니다. <제국의 위안부> 소송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런 목소리가 한국사회에서 아직 힘이 더 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여론입니다. 우리 사회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한일관계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저의 책도, 법원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소리 큰 양극단의 목소리가 아니라 작더라도 중요한 목소리들에 여러분들이 귀를 기울여주시면 우리 사회도 변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제국의 위안부>를 쓴 건 한국에 대한 실망과 혐한 감정이 일본사회에 확산되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발당했고, 한일관계는 이후 해방 후 최악이라고 얘기되는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행동은 정치가가 하지만, 사회를 바꾸는 건 여론입니다. 한일관계 개선은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식전환이 있어야만 가능해질 것입니다. 제가 일본을 향해 위안부문제에 관해 “사죄와 보상이 필요하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써왔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국의 위안부> 역시 그런 책입니다
지난 8년 동안, 숫자는 많지 않았어도 저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주는 분들이 계셨기에 그래도 인식은 조금은 변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더 많은 분들이 귀기울여주시면 우리 사회도 한일관계도, 그리고 저를 둘러싼 상황도 변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라면서 오늘 회견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세종대 국제학부 교수, 박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