渦中日記 2014/10/31 – 언론중재

꼭 십년 전, <한일,연대 21>이라는 한일 지식인 모임을 조직해서 열었던 첫 심포지엄도, 금년에 <동아시아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멤버와 함께 열었던 모임도, 프레스센터에서 했었다. 이런저런 학술모임이 많아 가끔 가는 곳이지만, 이곳에 언론중재위원회가 있는 줄은 몰랐었다. 금년엔 여러가지로 첫 체험이 많다..

오늘 이곳에서 열렸던 1차 정정보도 중재는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첫번째로 의견을 말한 나이드신 분이 “책을 다 읽고 왔다” 해서 시작부터 감격.

대체적으로 합의를 본 건
1.  처음으로 내보내 다른 매체들이 인용하도록 만들었던 문제의 기사에, 나의 의견을 추가
2. 이와 별개로 반론보도 게재
3. 추후 재판보도때 내 쪽 의견도 공정하게 반영

정도의 내용. 반론 기사가 나간 후에 최종합의를 하기로 했다.
함께 참석해 방청했던 정종주대표님이 메모를 작성해 주셨다. 다음주엔 연합뉴스/조선닷컴과의 2차 중재와 다른 언론사와의 1차 중재 예정.

아직, 페북을 어떻게 자아아아아알 쓸 수 있는지 모른다. 오늘은 그냥, 난생(그렇다, 인간은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 같은 존재(이고싶)다)처음 가본 언론중재위에서 오고간 얘기를 남겨두고 싶다. 한때 3류기자였던 자의 최소한의 예의일지도 모른다.
(다만 뱀다리: 이거, 내가 방청석에서 한 메모의 정리다. 법적 효력 없고, 자의적 해석 환영하지 않는다. 그저 내 나름으로, 지금 가능한 선에서 남겨두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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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제국의 위안부> 판매금지등 가처분신청, 민형사소송 제기 관련 언론 기사에 대한 정정(반론)보도 등 조정신청 건

2010. 10. 31. 16:00 프레스센터 15층 언론중재위원회 심리실,
제3조정부 1차 조정기일

-디지털조선일보 불출석
-연합뉴스 전국부장 출석

중재부장: 아침까지는 합의가 됐다니 취하되나 생각했는데요…

신청인 박유하: 월요일에 통화를 하고, 어제도 통화를 했는데, 연합뉴스의 전화한 분은 윗선과 상의해서 연락한다고 한 상태….

중재위원-(1 *숫자는 그냥, 앉은 순서대로 왼쪽부터): 마침 주변에 책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읽어봤는데… 학문적으로 컨퍼런스에서 디베이트할 성질의 것이지, 매도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연합뉴스) 기자가… 시각차가 있는 문제인데…
(*아무래도 신청인 쪽 인간의 메모인지라 소홀한 점, 양해 바람.
솔직히 말해 그리 건질 말씀도 없었지만.)

중재부장(중재위원-3): .. 명확하게 잘못했다는, 그러니까 정정보도에 그렇게
‘사과’를 넣으면 어떻겠어요..

신청인: 원고 쪽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옮긴 거고, 전혀 사실이 아닌 내용이…

중재위원-(2): 언론인은 ‘언론의 자유’를 아주 중요한 문제로 민감하게 생각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에 관해서는 콤플렉스(?.. *정확하지 않음)를 갖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비슷한)
학문적 소견을 낼 수 있는데…
과장된 보도로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를 막아버리는 행태는…

(신문사에 뉴스를 송신하는 통신사인) 연합뉴스는 특히, 객관적으로 팩트를
보도해야 하고,
소송 관련 보도라면 책도 읽고 저자 인터뷰도 하고 해서 써야지..
(항상 부풀려지더라…)

중재위원-(4): 그럴 목적, 의도는 아니었다고 믿지만,
기사라는 것이 어떤 아이템의 선정, 팩트의 선택-나열-순서, 어디에 강조를
두느냐 하는 액센트라는 측면에서…
오보라 나올 수 있다. 객관성과 공정성, …이 결여된…

뭘 근거로 기사를 이렇게 강하게 써서 분란을 일으킨 것이냐,
(소송 취지와 기사를 보면–*정리자 보충) 부분적으로 왜곡된 거고,
일부 팩트는 오류가 있는 것 같고…
(…)
명백하게 잘못한 건, 정정하는 게 맞고,
주장 차이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저자의 의견을 실어주는 게 맞다.

중재부장: 연혁으로 보면, (헌법에-*정리자 보충) ‘언론의 자유’보다 ‘학문의 자유’가
먼저 규정되었다.(…)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학자의 주장을 매도하는 건(…)

(… *피신청인 쪽의 발언,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정-수정-반론보도를 할 것인지,
그리고 신청인의 요구들을 둘러싼 중재위원들과 신청인/피신청인들의 실무적인 논의…)

중재부장: 원래의 기사 밑에 ‘정정보도문’을 붙이는 게 전형적이지만,
피신청인이 원래 기사(6월 15일자, 소송 제기 보도기사)에서 신청인(저자)이
이의제기를 하는 부분을 삭제해 기사를 대체하고,
신청인의 반론 보도자료를 가지고 반론 기사를 싣는다고 하니,
양자가 문장을 포함해서 전체적으로 합의를 하도록 하라.
일단 다음 기일은 1주일 뒤, 인터넷한국일보 건 논의하는 시각으로 잡겠다.

신청인: 반론 기사가 분량도 취지도 아주 축소되어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중재부장: 양자가 구체적인 문안까지 합의하고
(*중재위에서? 중재위원들이?–명확하게 듣지 못함)
서명을 하면, 그대로 실어야 한다. 1주일 뒤로 기일을 잡아둘 테니,
두 분이 문안을 잘 만들어보라.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88422787851302

渦中日記 2014/10/24

어제는 성균관대학에서 작은 세미나를 하고 왔다. <제국의 위안부>를 테마로 한 모임으로는, 출간 이후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한번 서평회를 열어준 것에 이어 두번째, 고발사태 이후로는 첫번째인, 내게는 역사적(!)인 초청이었다. 같은 성균관대에서 열린 다른 연구회에서는 작년에 내 책을 대상으로 논의했다는데 나를 부르진 않았었다. 그리고 그 차이가 내겐 아주 중요해 보인다.

그저께, 두번째 재판이 있었다. 출석을 심각하게 고려했는데 변호사님을 비롯한 주변친지들의 만류도 있어 결국 나가지 않았다.
꼭 할머니들의 고성을 듣고 멱살을 잡히는 장면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아서는 아니었다(원고측은 그걸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가능한 한 보지 않은 채로 있고 싶은 심경. 그게 강했다. 그리고 참석한 이들의 참관기를 들어보니, 그날의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책을 출판한 탓에 졸지에 “피고”이자 “채무자”라는 호칭을 얻게 된 정종주대표가 이번심리에 맞춰 멋진 답변서를 제출해 주었다.
몇년전 어느날, 나는 그가 내 친구와 논전을 펴는 장면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가 과연 굴지의 법대출신답게 치밀한 논리력의 소유자라는 걸 알았다. (그 때 그와 논전을 펼쳤던 초등학교 동창과, 고발사태이후 페이스북에서 만났다는 아이러니.)

그의 글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인데 그때의 논전이 다시 생각나는, 섹시한 글. 태그되었지만 더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해서 다시 올린다.
정대표와 만난지 어느새 14년. 그리고 그와 나는 지금 함께 “피고”의 신분이 되었다..

<제국의 위안부> ‘사태’와 관련된 이런저런 일 때문에 그동안 알맹이 없음을 핑계로 안 하던 페이스북에 가입했으나 여전히 알맹이 없어 아무것도 없는 맹탕이었던 이곳에, 오늘 열린 ‘도서출판등금지 및 접근금지 가처분신청’ 2차 심리를 앞두고 재판부에 냈던 ‘채무자 정종주’의 진술서를 올린다. 원래는 초안이었으나, 제대로 채울 틈이 없었던.
어쨌든, 소박하나마, (‘단순가담자’^^인)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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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 비 서 면

사 건 2014카합10095 도서출판금지 및 접근금지 가처분

채권자 이옥선 외 8

채무자 박유하 외 1

위 사건에 관하여 채무자 정종주는 다음과 같이 심문을 준비합니다.

다 음

1. 채권자 측의 ‘신청 취지’ 및 ‘신청 이유’에 대하여

(1) 채무자들의 대리인이 2014년 7월 8일자로 제출한 「답변서」 및 답변서와 함께 채무자 박유하가 제출한 참고자료 「도서출판 금지 가처분신청에 대해서」, 그리고 2014년 9월 3일자로 대리인이 제출한 「준비서면」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그 답변을 원용합니다.

(2) 그중에서도 특히 채권자들이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의 근거로 들고 있는 대표적인 표현, 즉 ‘매춘으로 매도’하고, ‘일본군/일본제국의 동지이자 협력자로 매도’하고, ‘성적 착취와 학대를 당한 피해자임을 부정’했으며, ‘허위사실’로써 채권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주장은, 채무자 박유하의 진술과 준비서면을 통해 명백히 사실 무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이 320쪽인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에서 108개소를 명예훼손의 근거로 적시하는 채권자들(의 대리인 혹은 지원자)의 주장은 심각한 오독이거나 어떤 특정한 정치적 의도 또는 이해관계가 개입된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3) 백보천보 양보해서, 설사 채권자들이 이 도서의 내용에서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이 책이 법학 원론과 판례를 통해 확립된 ‘위법성 조각 사유’인 ‘진실한 사실’을 담고 있고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책이라는 점 또한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따라서 채권자들의 신청은 기각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출판의 경위에 대하여

본 채무자는 출판인입니다. 따라서 먼저 이 도서를 출판하게 된 경위, 그리고 채무자 박유하 교수의 문제의식에 대한 본 채무자의 이해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본 채무자가 저자인 채무자 박유하 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2000년 5월경의 일입니다. 2년 동안의 일본 도쿄대 사회정보연구소 외국인연수원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출판사 (주)사회평론의 편집주간 직을 맡은 본인에게 처음 주어진 원고가 박유하 교수의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 초고였습니다. 저자는 게이오(慶應) 대학과 와세다(早稻田) 대학에서 일본문학을 전공했고, 귀국 후 ‘20세기 일문학의 발견’ 시리즈(웅진출판)를 기획-번역하고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같은 일본의 지성을 소개하는 작업을 해온 저명한 일본/일본문학 전문가였습니다. 그 책은 본 채무자가 편집을 맡아 2000년 8월 1일자로 출간되었고, 당시의 베스트셀러였던 『일본은 없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비롯한 한국(사회)의 일본에 대한 ‘이미지’들의 허실에 대해 날카롭게 문제를 제기한 책으로서 언론의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사직한 이후인 2004년 4월에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라는 제목으로 역시 같은 (주)사회평론에서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2) 본 채무자는 2001년 말에 출판사 ‘뿌리와이파리’를 창립했고, 2005년 9월 30일자로 박유하 교수의 전작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를 출간했습니다. 이 책의 출간은 본 채무자에게는 뿌리와이파리의 ‘동아시아(한․중․일) 민중의 진정한 상호이해와 공동의 미래를 향한 우호협력’에 대한 관심의 일환이었습니다. 그 관심들은 『공자의 식탁―중화요리 4,000년의 문화사』,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을 향하여』(2002), 『민족은 없다』(2003), 『한시와 일화로 보는 꽃의 중국문화사』,『해삼의 눈』,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옥황상제에서 서왕모까지, 도교의 신과 신선 이야기』, 『미녀란 무엇인가―중․일 미인의 비교문화사』(2004), 『일본불교사』(2005), 『돈가스의 탄생―튀김옷을 입은 일본근대사』, 『자이니치(在日), 당신은 어느 쪽이냐는 물음에 대하여』, 『요시카와 고지로의 공자와 논어』(2006), 『한일 역사인식 논쟁의 메타히스토리』(2008), 『시절을 슬퍼하여 꽃도 눈물 흘리고―요시카와 고지로의 두보 강의』(2009), 『일본국헌법의 탄생』(2010), 『근대 도시공간의 문화경험―도시공간으로 본 일본근대사』(2011) 등등의 책을 관통하며 ‘뿌리와이파리’에서 출간된 도서 130여 종의 중요한 한 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저자 박유하 교수는 『한일 역사인식 논쟁의 메타히스토리』의 지은이인 한일 지식인들의 모임 ‘한일, 연대 21’의 일원이기도 합니다.

(3)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는 한일 간의 ‘화해’를 가로막고 해묵은 갈등을 되풀이하게 만드는 가장 첨예한 현안 네 가지에 대해, 한국과 일본 ‘사이’에 서서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비판적인 제언을 한 책입니다. 이 책의 출간 ‘경위’는 간단합니다. 출판인인 본 채무자가 친분이 있는 저자에게 좋은 책을 한 권 써달라고 부탁했고, 그 부탁이 마침 저자가 관심을 가진 주제, 즉 한일 간의 ‘화해’를 위해 한국/일본의 시민과 지식인이 한국/일본 사회의 일반화된 ‘이미지’와 인식틀을 깨고 함께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보고 싶다는 의지와 만나 원고를 쓰고 편집해서 책으로 펴낸 것입니다. ‘(편협한)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대단히 논쟁적인 주장을 편 까닭인지 이 책은 한국에서는 3,000부밖에 팔리지 않았지만, 다음해인 2006년의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되었고, 일본어판(헤이본샤平凡社 발행)은 아사히(朝日) 신문사에서 수여하는 권위 있는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 논단상’을 한국인으로서, 여성으로서 최초로 수상하는 등 그 문제의식과 ‘용기’를 높이 평가받았습니다.

(4) 다만,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가 다루고 있는 주제 자체가 워낙 민감하고 의견 대립이 첨예한 데다가, 저자의 주장 또한 대단히 근본적이고 (한일 양국의 기존의 인식과 주장들에 대해) 비판적인 까닭에, 한국의 이른바 진보와 보수 진영에서도, 일본의 진보와 보수 진영에서도, 다양한 찬성과 반대의 주장들이 나오고 비판-반비판과 논쟁이 지금까지도 벌어지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5) 그런 가운데, 저자 박유하 교수가 연구년 등으로 미국과 일본에서 체류하며 연구하고 있었던 2011~12년 사이에도, 교과서 문제, 위안부 문제, 야스쿠니 문제, 독도 문제(바로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가 다루고 있는 현안들입니다.) 등을 둘러싸고 한일 관계는 더욱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동안에도 일본 아사히 신문사의 웹논단 ‘론자(論座)’에 일본인 독자들을 향해 ‘위안부 문제’ 관련 글(이 내용도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에 약간 수정되어 실려 있습니다.)을 연재하는 등 한일관계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오던 저자는 ‘위안부 문제’를 다시 한번 총체적이고 구조적으로 조명하고 그 해결책을 한일 양국의 독자들과 함께 모색하는 책을 쓰기로 마음먹고 본 채무자에게 연락을 해왔고, 본 채무자는 원고를 보내달라고 응답했습니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5~9쪽의 ‘서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6) 2012년 11월경에 초고를 받은 본인은 민감한 사안을 다룬 책이기에 본 채무자가 직접 편집작업을 맡기로 했고, 저자가 서너 차례에 걸쳐 원고의 구성을 바꾸고 내용을 수정보충하는 과정에서 긴밀하게 의견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리고 2013년 7월 22일자로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을 출간했고, 8월 초순에 경향신문, 동아일보, 한국일보를 비롯한 많은 언론에 큼직하게 소개되었습니다. [이하, 경향-동아-한국일보 서평기사 링크: 여기선 삭제함]

(7) 이 책의 문제의식은 책 뒤표지의 글을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위하여!

위안부 문제는 왜 20년이 되도록 풀리지 않는가
이 책은 그 원인을,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그 ‘복잡한 구조’를 해부한다

● ‘강제로 끌려간 20만 명의 소녀’라는 인식은 정신대와 위안부의 혼동,
업자의 소거, 예외적인 사례의 일반화된 수용에 의해 만들어진 상이다.
● ‘위안부’의 불행을 낳은 것은 식민지배와 가난과 가부장제와 국가주의였고,
그들의 체험은 결코 하나가 아니었다.
● 위안부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면, 의식되지 않았던 ‘죄’와
이미 존재하는 법에 저촉되는 ‘범죄’를 구별해서 물어야 한다.

이 책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단순히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국가의 세력확장)의 문제로 다루었다. 근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 ‘위안부’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생각해본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위안부 문제’는 과거의 문제일 뿐 아니라 오늘의 문제이기도 하며, 구체적으로는 일본과 한국에 존재하는 ‘미군기지’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든 것은 ‘냉전’적 ‘좌우갈등’이기도 하다는 것이 이 책의 또 하나의 결론이다. 나는 그런 상황을 모두가 함께 보는 일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풀고 제국과 냉전이 남긴 문제들을 함께 넘어설 수 있는 ‘동아시아’를 상상하고 기대하면서 이 책을 썼다.”

본 채무자는 저자 박유하 교수의 문제의식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며, 저자의 학자적 양심과 식견, 한일 간의 진정한 상호이해와 ‘우애와 평화의 동아시아’라는 공동의 미래를 향한 열정을 지지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책이 ‘위안부 문제’라는 민감한 사안을 다루고 있으며, 20년 동안 쌓여온 한일 두 나라의 다양한 인식 및 이해관계의 충돌을 피할 수 없는 논쟁적인 글이라는 사실 또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동안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앞장서서 많은 성과를 거둔 한편으로, 현재의 우리 사회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을 주도적으로 만들어왔고 지금의 운동을 잘못 이끌고 있(다고 저자가 주장하)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이 책이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대협을 중심으로 한 반발이 있으리라는 점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사회의 온갖 문제들이 그렇듯이 ‘위안부 문제’ 또한 비판과 반비판, 토론을 통해서, 이 문제를 어떻게 제대로 이해하고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에 관한 공론장의 생산적인 논쟁을 통해서 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은 바로 그 생산적인 토론과 논쟁을 위한 한 학자의 충정과 거기에 대한 본 출판인의 공감의 산물입니다.

3. 학문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그리고 공론장에서 더욱 심층적이고 폭넓게 이루어져야 할 토론에 대하여

(1)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채무자 박유하 교수와 도서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은 결코 채권자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지 않습니다. 반대로, 할머니들이 이미 아흔 살 안팎의 고령에 이르렀고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분도 많은 터에 20년이 되도록 이 문제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갈등과 반목이 이어지고 심지어 더 악화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위안부 문제의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구조를 규명하고 한일 양국과 두 나라 국민들이 어떻게 미래지향적으로 이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지를 심도 있게 고찰한 대단히 귀중한 연구-출판물입니다.

(2)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되짚고 진정한 해결의 길을 모색하면서, 저자는 한국과 일본의 ‘사이’에 서서 한국과 일본의 다양한 운동과 움직임들을 평가하고 비판해가며 공통의 인식틀을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고착화된 ‘주류의 인식과 이미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또한 피하지 않습니다. 학계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 전체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론장의 토론과 논쟁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문제의 진정한 해결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이 도서의 출간 이후에 나온 여러 신문 및 논객, 독자들의 큼직한 기사와 서평들은, 저자의 주장이 우리 사회/독자들의 일반적인 인식에 비추어볼 때 ‘불편’할 수 있고 ‘자극적’일 수 있지만 공론장에서 토론되어야 할 ‘의미있는 문제제기’로 받아들였다는 증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류’의 비판과 감성적 반발이 쏟아지기는 했지만, 이 ‘가처분신청’ 사태 이후에도 저자의 견해와 주장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의미있는 문제제기’라는 평가는 적지 않았습니다.

(4) 이 ‘가처분신청’이 이루어진 직후인 2014년 6월 20일,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일한 간의 공방의 경위’라는 제목의 ‘고노(河野) 담화 검증 보고서’ 결과를 발표했고, 8월 5일자 아사히 신문은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의 ‘전쟁 때 제주도에 가서 여성을 강제로 끌고 왔다’는 증언이 거짓으로 판명된 사실과 관련하여 그 증언과 관련된 이전의 기사들을 취소했습니다. 식민지지배와 과거사 문제를 비롯한 전반적인 사안에서 진보적인 아사히 신문은 이후 우익 세력과 산케이 신문, 요미우리 신문 같은 우익 신문의 공격을 받아 존폐가 거론될 정도로 ‘전면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열려왔던 정례 한일 국장급 논의 또한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됩니다. 이런 작금의 상황을 단순히 ‘반성과 사죄를 하지 않는’ 일본의 우경화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해방 70년, 한일 국교정상화 50년을 맞는 2015년을 앞두고 있는 지금, 과거를 직시하되 미래지향적인 공동의 우호협력관계를 구축해나가야 할 두 나라의 정부와 국민들이 ‘위안부 문제’를 더욱 폭넓게, 더욱 깊이 있게 고찰하고 두 나라 안에서, 그리고 두 나라가 함께 더욱 활발하게 논의하고 토론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할 것입니다.

(5) 거듭 말씀드리지만, 채무자 박유하 교수와 도서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은 결코 채권자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지 않습니다. 형법 제309조 1항의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신문, 잡지 또는 라디오 기타 출판물에 의하여 제307조 1항의 죄를 범한 자’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비방할 의사도 목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307조 1항과 2항의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에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사 채권자들(의 대리인)이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느꼈다고 하더라도, 제310조에 규정된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 해당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6) 그러므로, 본 도서와 저자인 채무자 박유하 교수는 민주적 기본 질서의 핵심을 이루는 헌법상의 학문의 자유(제22조 1항), 언론-출판의 자유(제21조 1항), 표현의 자유를 보호받아 마땅합니다. 제21조 3항에서 규정하는 바와 같이 ‘타인의 명예나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이 ‘가처분신청’, 그리고 채무자들의 반박 혹은 입장 표명조차도 거의 없이 쏟아진 관련 언론 보도들이야말로 위 헌법상의 자유들을 위축시키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7) 결론적으로 본 도서의 내용과 주장은, 사실과 해석, 주장과 비판 모두 학계와 국민/독자들의 공론장에서 벌어지는 토론에 맡겨져야 할 사안이지, 결코 법정에서 다툴 바가 아닙니다.

2014. 10. 21.
채무자 정종주

서울동부지방법원 제21민사부 귀중

작성일: 2014.10.24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83395771687337

渦中日記 2014/10/19

어제는 오래 미루어 왔던 일을 했다.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를 요청하기 위한 작업.
그런데 언론 중에도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문제가 심각했던 건, 양극단의 “적대적공존”이라는 우리사회의 현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만 것이 아니었을까.

과거에 쓴 내 책이 “일본우익을 대변”했다고 쓴 한겨레는 벌써 5년 전에 “일본우익의 찬사”를 받았다고 쓴 적이 있다. 그 때도 난 언론중재위에 정정보도를 요청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그 때 하지 않았던 선택이 5년 후에 이런 사태를 불러왔는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나를 일본우익의 대변자로 몰고 싶어하는 한겨레의 인식은 사실 재일교포학자가 퍼뜨린 인식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인식이, 고발장에도 차용되어 고발이라는 폭력을 뒷받침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사상은 때로,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원고측 요청으로 미루어졌던 2차심리가 이번주 수요일로 다가왔다.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도 이제 중반.

본문: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80578661969048

渦中日記 2014/8/18

얼마전에 일본 아사히신문이 내놓은 위안부문제특집에 관한 전화인터뷰를, 일본의 한 월간지와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결방책에 대해 묻기에, 일본의 “국회결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그간의 지원자나 운동가가 말해온 것처럼 그렇게 해야 할 “법적의무”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국가에 의한 여성동원에 대한 “법적보호”를 방기한 근대국가시스템의 문제이니, 일본이 “주체적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1년 전에 한국에서 책을 낼 땐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 (생명의 헌납을 요구당한)남성에게는 보장되었던 “법의 보호”가, (성의 헌납을 요구당한 )여성에게는 보장되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된 금년 봄 이후다. 그리고, 아사히가 강조한 “구조적강제”에 불만이 있는 듯 했던 기자는 내 말에 공감하는 눈치였다.

<제국의 위안부>일본어판에서도 사실 나는 그 점을 강조했었다. 문제는 한국에서 소송사태가 나는 바람에 일본측 출판사가 출간을 미루고 있다는 점.
그러니 이번 소송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해결을 위한 또하나의 노력을, 지원자들과 할머니들자신이 막고 있다는 점이다..

본문: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941628459197402

渦中日記 8/10

비바람이 친다. 보통때 같으면 그 풍경에 그냥 자신을 내맡겼을텐데 오늘은 감상에 빠질 수도 없다. 광화문에서 단식투쟁할 이들의 곤혹스러움도 함께 떠오른다.

재판자료준비를 하면서 우울한 건, 책을 쓰면서 사용하지 않았던 자료들까지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점이다. 내가 쓴 얘기가 부정, 혹은 곡해당하니, 소송에서 지지 않기 위해서는 굳이 사용하고 싶지 않았던 자료까지 사용해야 한다. 그런 아이러니 앞에 놓이게 된 것이 많이 우울하다.

사진은, 위안부에게 의뢰받아 모르핀 외 군용약품을 반출하려다가 “영창20일”의 처분을 받았다는 자료. 1941년, 일본 육군군인/군속들의 <非行표>.
수많은 일탈행위들 속에서, 수많은 드라마를 본다.

본문: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936355716391343&set=a.296221900404731.91201.100000507702504&type=3

가라타니 고진, 박유하 씨의 작업

PDF다운로드: 가라타니 고진, 박유하 씨의 작업

<박유하 씨의 작업> 가라타니 고진

최근 들어 한일·중일간 긴장이 높아진 것은 일본정부가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내(일본)내 제반 문제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대외적인 긴장/대립을 이용해서 일본을 언제든 전쟁가능한 체제로 만들려 하고 있다. 따라서 위안부문제든 영토문제든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생각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내가 일본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내가 일본국민이기 때문이다. 외국의 경우는 그 나라 국민들이 (자국을) 비판할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에도 그런 이들이 많이 있다. 나는 그러한 상호간 신뢰를 바탕으로 활동해 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안되는 일이 있다.

그 점에서, 나는 적극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서서 발신하려 해 온 박유하 교수에게 주목하고 있다. 그녀의 작업은 한국에서는 친일적이라고 비난 받고 일본에서는 반일적이라고 비난 받을 것이다. 그것을 처음부터 각오하고 오랫동안 위안부문제에 천착해 온 박유하 교수에게 나는 깊은 경의를 품고 있다.

(2014 년 8 월)

<원문>

パク・ユーハ氏の仕事 柄谷行人

近年、日韓や日中間の緊張が急激に高まって来たのは、日本の政府があえてそれ を作りだそうとしているからだ。それによって、国内における諸問題を打ち消すた めである。そして、対外的な対立・緊張を利用して、日本をいつでも戦争できる体 制に変えようと図っている。したがって、従軍慰安婦問題であれ領土問題であれ、 それらを解決する気などさらさらない。

私がこのように日本の政府を批判するのは、日本の国民だからだ。外国に関し ては、その国の国民が批判するだろうと思う。実際、韓国にもそのような人達が 大勢いる。私はこうした相互的信頼にもとづいて活動してきたのである。とはい え、それだけではすまないことがある。

その点で、私は、積極的に日本と韓国の間に立って発言しようとしてきたパ ク・ユーハ氏に注目している。彼女の仕事は、韓国では親日的と非難され、日本 では反日的と非難されるだろう。そのことを最初から覚悟して、従軍慰安婦問題 に長年取り組んできた氏に、私は深い敬意を抱いている。

(2014年8月)

장정일,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시사IN)

장정일 소설가

한국과 일본은 군 위안부 숫자를 5만명에서 20만명까지 달리 추산한다. 여러 이유로 총체적 연구가 쉽지 않다. <제국의 위안부>는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려는 지은이의 강박 때문에 총체적 관점이 휘발되고 말았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대한해협이 아니라 군 위안부 문제가 놓여 있다. 실체를 발견하는 작업에서부터 해결 방안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는 경험의 소유권을 가진 피해 당사자가 엄연히 생존해 있기에 오히려 총체적 연구가 쉽지 않다. 이미 ‘일본군에 의한 조선 부녀자 강제 연행’이라는 단 한 줄로 군 위안부에 대한 상식이 완성된 터에, 그것과 다른 접근이나 그 어떤 보충도 친일파라는 지탄을 피하기 힘들다. 하지만 군 위안부의 복잡성은 아직 그 숫자마저 명확하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은 ‘20만명’설을 선호하고, 일본 연구자는 5만~7만명으로 추산하며, 만주에 주둔했던 한 일본군 병사는 “사단 군인 2만명에 50명” 정도라고 증언한다.

만주사변 이후 조선·중국·남양 군도에 일본군 300만명이 있었으니, 20만명설이 맞다면 일본군은 병사 15명당 1명의 조선인 군 위안부를 둔 게 된다. 현재도 우리나라에 주둔하는 미군 부대 근처에 반드시 기지촌이 있듯이 동서고금의 모든 군대는 병사의 성 욕망을 해결할 수단을 강구한다. 그 사실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저 수치는 정상이 아니다. 일본군은 새로운 점령지마다 현지인으로 이루어진 군 위안소를 추가한 데다, 그것도 모자라 강간을 일삼았다. 이 모든 게 사실이면, 일본은 원자폭탄이 아니라 불철주야 성폭행만 하느라 전쟁에서 진 거다. 참고로 최근 중국 연구자들은 최소 20만명의 중국인 군 위안부가 있었고, 강간을 당한 중국 부녀자의 수는 그것보다 많다고 주장한다.

20만명설은, 일제가 전쟁에 필요한 노동력을 징발하려고 만든 정신근로대와 군 위안부를 구별하지 않은 숫자다. 한국은 피해를 강조하고 일본의 야만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군 위안부의 숫자는 늘리고, 그들의 평균연령은 낮춘다. 하지만 20만명이 아닌 5만~7만명이면 일본의 야만성이 경감되고 책임이 없어지는가? 또 조선인 군 위안부의 평균연령이 25세면 10대는 아니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일제를 가리켜 인간적이었다고 할 것인가? 어느 경우든, 실체를 밝히는 것이 일본 옹호의 논리가 될 수는 없다.

일본은 고노 담화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군인들이 ‘관리’는 했지만 직접 모집하거나 영업은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해왔고, 바로 이것이 군 위안부 실체를 규명하는 가장 큰 쟁점이 되고 있다. 그러니 ①모집 ②영업 ③관리로 나누어 이 문제를 살펴보자.

①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일제 35년의 성격을 들여다봐야 한다. 2012년, 중국·인도네시아·베트남 등지에서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 연행 증거가 나오기도 했다지만, 조선은 전쟁터가 아니었다. 한·일합방이 된 1910년 이후, 조선은 일본과 형식상 한 나라가 됐다. 1등 시민인 일본인과 2등 시민인 조선인의 차이는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에게 당하는 차별보다 더 컸으면 컸지 작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조선은 행정제도와 법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군 위안부 대량 조달에는 잘 구비된 행정력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등에 업은 업자와 포주가 활동했다. 이때 취업 사기를 치러 온 업자에게 현지의 정보를 귀띔해주고 그들에게 공신력을 빌려준 장본인이 주민 사정에 밝은 면장이나 이장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강제 연행 사례가 전무하다고 뻗대는 것은 억지일 것이다.

일본군의 군 위안소 운영 여부를 따지는 ②는 상식적으로 풀이할 수 있다. 무기와 식량은 군대에 필수적이지만, 군인이 직접 총을 만들거나 땅을 갈지 않는다. 총은 방위 업체가, 쌀은 농부가 생산한다. 마찬가지로, 지역과 시기에 따라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군 위안소는 민간 업자에게 맡겨졌을 것이다.

③은 일본 정부가 인정한 것이다. 군대가 위안부의 위생을 직접 관리한 이유는 성병이 전력 차질을 낳기 때문이다. 국내 같으면 보건소가 했겠지만 전쟁 지역에서 그 일을 도맡아 할 기관은 군대밖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군대는 군 위안부의 이송에도 관여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① ②와 직접 연관된 정황이 미미하다고 해서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 그리고 천황(일왕)이 면죄되지는 않는다. 우선 일본군이 일본 정부에 위안부 설치를 요청했던 증거가 뻔히 나와 있다. 더욱이 애초에 일제 식민이 없었고,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군 위안소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광수나 윤치호의 친일을 단죄하는 이유

일제강점기의 조선은 저항과 협력이 공존했던 공간이다. 2등 시민이라는 차별에도 불구하고 한·일합방 이후에 태어난 가난한 계층과 여성 가운데 혹여 일본을 조국으로 착각하고 ‘동지의식’을 느낀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20여 년 넘게 일제 통치에 내면화(세뇌)된 때문이지 결코 그들의 허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견문을 넓힐 수 있었던 이광수나 윤치호의 친일을 단죄하는 것이다. 그들은 일제에 세뇌된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일본을 선택했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는 “‘강제 연행’을 하지 않았다 해도 ‘강제로 끌려가는’ 이들을 양산한 구조를 만든 것이 일본군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며, 그런 반성 위에 일본 정부가 “새로운 사죄와 보상”을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이라고는 “우리 안에도 위안부들에게 ‘사죄’해야 할 이들은 있다”라는 것 정도다. 하지만 사태를 하나로 묶고 파악하는 이런 총체적 관점은, 군 위안부를 착취한 일본군의 “하나가 아닌”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려는 지은이의 강박 때문에 휘발되고 말았다. 군 위안부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기억과는 다른 기억을 보충하겠다고 그들과 일본군 사이에 흘렀던 감정적 교류마저 나열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총체성을 흠집 내는 이런 다양성(나열)이 오해를 양산한다.

2013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 시민공원에 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부끄러웠다. 원래 저 소녀상은 미국에 있기 전, 먼저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조성된 독립공원에 세워져야 했다. 하지만 2008년 광복회를 비롯한 독립운동 유관단체들은 독립공원 내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난을 보여주는 박물관을 세우는 것은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운동을 폄하시키는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면서 박물관 건립을 저지했다. 그래서 서울 마포구 성미산에 따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지었다. 이처럼 민족의 역사는 자신의 가장 영광스럽고 순수한 기억만 보존하고 거기에 맞지 않는 것은 억압한다. 한때는 저런 잘못된 구습의 피해자였던 일본군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가 <제국의 위안부>를 놓고서는 자신과 다른 기억을 발굴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했다.

원문: 장정일의 독서일기,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시사IN)

『제국의 위안부』 – 발간 직후 신문사 서평 및 인터뷰 모음

서평

인터뷰

박유하-주진오 대담 :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

[박유하-주진오 대담]

국산은 후지다는 편견은 없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확실히 국산은 후지다. ‘학자'(혹은 ‘교수’)는 그 중 대표적인 품목이다. 학자 행세를 하려면 대학을 나오고 대학원에다 박사 공부까지 짧게 잡아도 10년은 공부해야 한다. 사람이 무슨 일이든 10년을 했다면 ‘귀신처럼’은 아니더라도 세모를 세모로 네모를 네모로는 보는 눈은 가지는 법인데 이상하게 한국의 학자들은 그런 사람이 참 드물다. 괜찮은가 싶다가도 월드컵이나 독도 같은 광풍이 한번 몰아치면 그저 ‘축구 응원단의 일원’으로 ‘우익 시위대의 일원’으로 그 초라한 몰골을 드러내고 만다. 해서, 이따금씩 괜찮은 학자를 만나면 그것처럼 반가울 수가 없다. 관점이나 의견에 차이가 나더라도 세모를 세모로 네모를 네모로는 보는 눈만 있다면 충분히 기쁘다. 박유하 씨는 그런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책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요즘 같은 분위기에선 보석과 같다. 어제 신문에 난 그의 대담 기사를 읽다보니 ‘남성 학자는 단지 냉철할 뿐이지만 여성 학자는 냉철한 데다 부드럽기까지 할 수 있구나’ 싶다.

(김규항 블로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