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1965년체제 ― 정영환의 『제국의 위안부』 비판에 답한다 #2

역사비평 2015 봄호(통권 제112호) 반론 본문 다운로드

1. 오독과 곡해―정영환의 “방법”

재일교포 학자 정영환이 나의 책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에 대한 비판을 『역사비평』 111호에 실었다. 우선 이 비판의 당위성 여부에 대해 말하기 전에 비판 자체에 유감을 표한다. 왜냐하면, 나는 현재 이 책의 저자로서 고발당한 상태이고, 그런 한 모든 비판은 집필자의 의사 여부 를 떠나 직간접으로 고발에 가담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5년 8월에 제출된 원고 측 문서에는 정영환의 비판논지가 차용되어 있었다. 심지어 이재승의 서평도 통째로 근거자료로 제출되어 있었다. 가처분재판 기간 동안 법원에 제출된 원고 측 문서에는 윤명숙과 한혜인의 논지가 구체적으로 인용되어 있었다. 2014년 6월에 제출된 최초의 고발장에는 내가 10년 전에 낸 책인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 비판논지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나에 대한 비판에 참여한 학자/지식인들이 이러한 정황을 아는지 모르는 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비판을 하고 싶다면 소송을 기각하라는 목소리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법정으로 보내진 학술서’에 대해 취해야 했던, ‘학자’로서의 할 일이 아니었을까.

일찍부터 시작되었고, 심지어 『한겨레신문』에 인용되어 나에 대한 여론 의 비판에 기여했음에도(002) 정영환의 비판에 그동안 대답하지 않았던 것은, 그의 비판이 오독과 곡해로 가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그가 나의 것이라고 말했던 “자의적 인용”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결론이 앞서는 적대를 기반에 깔고 있어, 사실 읽는 일 자체가 우울했다. 따라서, 구체적인 반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나의 입장과 논지를 확인해두도록 하겠다.

1)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국가의 책임에 대한 입장

정영환은 내가 “일본국가의 책임을 부정”(482~483쪽, 이하 ‘쪽’은 생략)한다면서 “식민주의 비판이 없”(492)기에 “식민지배 책임을 묻는 소리를 부정하려고하는 ‘욕망’에 이 책은 잘 호응”한다고 말하고, 심지어 “역사수정주의자들과의 은밀한 관계를 검토해야 한다”(491)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나는 위안부 문제에서 일본국가의 책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내가 부정한 것은 ‘법적’ 책임일 뿐이고, 당연히 일본국가의 책임을 물었다. 일본어판에는 “국회결의”가필요하다고 쓰기도 했다. 그런데도 정영환은 그런 부분에는 침묵할 뿐 아니라 “역사수정주의자”라는, 한국에서 비판받고 있는 존재를 호명해 그들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도록 만드는 식의 ‘왜곡’을 자신의 비판 “방법”으로 사용한 다.(003)

정영환의 말대로라면 이 책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응들―“이 문제제기에 일본 측이 어떻게 대답해 나갈 것인지의 물음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스기타 아츠시, 서평, 『아사히신문』 2014. 12. 7), “어디서나 다 있었던 일이라고 일본이 강변하지 않고 제국주의 팽창을 넘어서는 사상을 새롭게 제기할 수 있다면 세계사적 의의는 크지 않은가? [라는 박유하의 물음에] 나는 반대할 이유를 생각해낼 수 없다”(야마다 다카오, 칼럼, 『마이니치신문』 2014. 12. 21), “나는 이 책을 읽고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아픈 마음이 한층 깊어졌을 뿐이다”(와카미야 요시후미, 칼럼, 『동아일보』 2014. 7. 31)은 다 잘못 읽은 서평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심지어 어떤 우파는 나 의 책이 전쟁책임의 틀에서만 다루어졌던 위안부 문제를 식민지배책임으로 물으려 한다면서 “일본 좌파보다 무서운 책”이라거나 “고루한 지배책임론을 들고 나왔다”며 비난하기까지 했다.

정영환은 같은 방식으로 내가 “한일합방을 긍정”했다고 쓴다. 그러나 나 는 한일합방 무효론에 회의를 표하면서도 “물론 현재의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식민지지배에 대한 책임을 정말로 느낀다면, 그리고 그것을 패전이후국가가정식으로표현한일이없었다는인식이혹일본정부에생 긴다면, ‘법적’으로는 끝난 한일협정이라 할지라도 재고의 여지는 있을 것이 다.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의 국내외적 혼란은 그 재고가 원천적 으로 배제된 결과이기도 하다”(『화해를 위해서』, 235)라고 썼다. 말하자면 나는 한 일합방도 한일협정도 “긍정”하지 않았다.

나는 위안부를 만든 것은 근대국민국가의 남성주의, 가부장주의, 제국주 의의 여성/민족/계급/매춘차별의식이므로 일본은 그런 근대국가의 시스템 문제였음을 인식하고 위안부에 대해 사죄/보상을 하는 것이 옳다고 썼다. 그런데도 정영환은 ‘박유하는 한일합방을 긍정하고 1965년체재를 수호하고 있 으며 위안부 할머니의 개인청구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학자’에 의한 이러한 왜곡을 범죄수준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영환의 비판 “방법”은 서경식이나 김부자 등 다른 재일교포들의 나에 대한 비판방식과 지극히 닮아 있다. 그들 역시 『화해를 위해서』의 반은 일본 비판이라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고, 나를 ‘우익에 친화적인 역사수정주의자’라는 식으로 말해왔다.

2) 한일협정에 대한 입장

정영환은 내가 “1965년체제의 수호를 주장”(492)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재협상은무리라는 생각이 곧 ‘수호’가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나는 일본을 향해서 쓴 부분에서 한일협정은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은 아니었다고 썼다. 정영환이 말하는 것 같은 “수호”는 커녕 그 체제에 문제가 있었다고 분 명히 지적했다. 한국 정부가 청구권을 없애버린 것을 지적한 것은, 1965체제 를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한 ‘책임’의식은 수반되 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방법에 대해

정영환과 달리, 비판하고 싶을수록 자신도 돌이켜보자는 것이 나의 “방 법”이다. 역사학자나 법학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방식일 수 있지만, 문제 자체 이상으로 양국 ‘갈등’의 원인과 해소에 관심이 큰 연구자로서 필연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정영환은 이 책의 일본어판과 한국어판이 다른 것이 무언가 음험한 “의도”가 있어서인 것처럼 말하지만, 이 책이 대립하는 양국 국민들을 향해 가능한 한 사실에 근접한 정보를 제공하면서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지’에 중심을 둔 책인 이상, 일본어판이 일본어 독자를 의식하며 ‘다시’ 쓰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또 시시각각 악화되는 한일관계를 바라보며 가능한 한 빨리 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었던 한국어판에는 당연히 거친 곳이 많았다. 따라서 일본어판을 쓰게 되었을 때 그런 곳들이 수정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문제’, ‘일본의 문제’를 따로 볼 수 있도록 구성을 바꾼 것도 그런 맥락에서의 일일 뿐이다.

2. “방법” 비판에 대해서

1) 빗나간 잣대

정영환은 내 책이 개념을 “정의”하지 않아서 혼란스럽다고 말한다. 하지만 많은 자료를 사용하면서도 이 책을 학술서 형태로 내지 않은 것은 일반독자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고, 일반 독자들은 아무도 그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이 책이 정영환에게 “읽기 쉬운 책이 아니”(474)게 된 것은 개념을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책의 방법과 내용이 정영환에게 낯선 것이 기 때문일 것이다.

2) 폄하

정영환은 내가 위안부의 차이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문제시하면서 “차이가 있었다는 주장 자체는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474)고 “수많은 연구가 일본군이 점한 각 지역의 위안부 징집이나 성폭력 문제에 나타나는 특징을 논한 바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포지션의 유사성(물론 그들 간의 차별에 대해서도 이미 오래 전에 지적했다)을 지적하면서 대일 본제국에 포섭된 여성들과 그 이외의 지역 여성들의 “차이”를 지적한 연구를 알지 못한다. 정영환의 “방법”은, 나의 책이 ‘매춘’에 언급한 점을 들어 실은 우익이 일찍이 한 이야기라고 폄훼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하지만 나의 시도는 그저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이들을 향해 “매춘”의 의미를 재규정하는 데 있었다

3) “방법” 이해의 미숙

정영환은 조선인 위안부의 “정신적 위안자” 역할에 대한 나의 지적이 “비약”이자 “추측”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우선 증언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지적하고자 한 것은, 마음 여부 이전에 조선인 위안부가 그런 틀 안에 있었다는 점이다. ‘국방부인회’의 띠를 두르고 환영/환송회에 참가한 이들이 설사 내심 그 역할을 부정하고 싶어했다 하더라도 그런 표면적 상황에 대한 해석이 부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근거 없는 “추측”은 물론 배제되어야 하지만, 모든 학문은 주어진 자료를 통해 ‘상상’한 ‘가설’을 구축하는 작업일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나는 모든 것을 증언과 자료에 기초했다. 책에 사용하지 않았던 자료들도 곧 따로 정리해 발표할 생각이다. “동지”라는 단어를 쓴 것도 우선은 제국일본에 동원되어 ‘일본’인으로 존재해야 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정영환은 군인에 관한 위안부의 “추억”을 논한 부분을 들어 “추억”에 대한 ‘해석’을 “먼 거리가 있다”(475)며 비판한다. 그러나 학자의 작업은 ‘개별적인 예’들을 분석하고 총체적인 구조를 보는 일이다. 내가 시도한 작업은 “증언의 고유성이 경시”되기는 커녕 그동안 묻혔던 한 사람 한 사람 증언의 “고유성을 중시”하며 결과를 도출해내는 일이었다. ‘대상의 의미’를 묻는 작업에 자신이 익숙하지 않다고 해서 다른 이의 작업을 폄훼해서는 안 될 것이 다.

같은 문맥에서 정영환은 “일본인 남성”의, 그것도 “소설” 사용은 “방법 자체에 큰 문제가 있다”(475)고도 말한다. 이러한 비판은 일본인 남성의 소설은 그 존재 자체가 일본에 유리한 존재일 것처럼 생각하는 편견이 만드는 것이지만, 나는 일본이 위안부를 어떻게 가혹하게 다루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부분에서 소설을 사용했다. 위안부들의 참혹한 생활이, 다름 아닌 위안부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던 군인들, 후에 작가가 된 이들의 작품 속에 많이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본인들을 향해 자신들의 조상이 쓴 이야기 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위안부의 증언은 거짓말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향해 증언에 힘을 실리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사용했을 뿐이다. 정영환은 역사 연구자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소설” 경시 태도를 드러내고 있지만, 소설이, 허구의 형태를 빌려 때로 진실 이상의 진실을 드러내는 장르이기도 하다는 것은 상식이기도 하다.

정영환은 자신의 정황을 “운명”이라 말한 위안부를 내가 평가한 것을 비판하지만, 위안부의 증언에 대한 평가 역시 “고유성을 중시”하는 일이다. “운명”이라는 단어로 자신의 정황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내가 평가한 것은, 세 에 대한 가치관과 태도에서 긍정적인 어떤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가치관이 시키는 그러한 “평가”가 부정되어야 할 이유도 없지만, 그와 반대되는 태도에 대한 비판이 위안부의 “아픔에 귀 기울이는 행위와 정반대”(476) 가 되는 건 아니다. 학자라면 오히려, 증언에 대한 공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수적인 여러 정황을 객관화할 수 있어야 한다.(004) 더구나 거짓증언까지도 묵인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005) 그런 상황에 대한 묵인은 오히려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

무엇보다, 내가 “운명”이라 말하는 선택을 평가한 것은 그저, 그렇게 말하는 위안부도 존재한다는 사실, 그러나 그런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일 뿐이다. 일본을 용서하고 싶다고 말한 이의 목소리를 전한 것도 같은 이유다.(006) 나는 ‘다른’ 목소리를 절대화하지 않았고, 정영환의 말처럼 그저 “귀 기울였을” 뿐이다. 그런 목소리가 그동안 나오지 못했던 이유는, 다른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는 억압이 이들에게도 의식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영환이 말하는 바 “증언의 찬탈”은 오히려, 정영환과 같은 태도와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에게서 일어난다는 것이 내가 이 책에서 지적한 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의 “방법”이 “윤리와 대상과의 긴장관계를 놓친 방법”이며 “역 사를 쓰는 방식으로는 적절하지 않다”(476)는 비판은 나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온 비판일뿐이다.

3. 『화해를 위해서』 비판에 대해서

정영환은 10년전의 나의 책 『화해를 위해서』도 비판하는데, 『제국의 위안부』가 “당시 거론된 문제점을 기본적으로 계승”(477)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런데 여기서도 앞서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1) 도덕성 공격의 문제

정영환은 김부자를 인용하면서 내가 기존 연구자들의 글을 두고 “정반대의 인용”(477)을 했다고 말한다. 이는 정영환이 나에게 논지뿐 아니라 도덕성에도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다.

그런데 정영환이 모르는 것이 있다. 모든 텍스트는 꼭 그 글을 쓴 저자의 의도에 준해 인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모든 글은 저자의 전체 의도와는 다른 부분도 얼마든지 인용될 수 있다. 정영환 자신이 나의 책 을 나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읽고 있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왜곡이 없어야 한다는 점인데 나는 왜곡하지 않았다.

나는 요시미 요시아키와 같은 학자가 “‘강제성’을 부인하고 있다”고 말하기 위해 인용한 것이 아니다. 일본의 책임을 추궁하는 이른바 ‘양심적인’ 학자조차 ‘물리적 강제성은 부정하니 그 부분은 신뢰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기 위해 사용했을 뿐이다. 이후 군인이 끌고 갔다는 식의 강제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받아들여지면서 논의가 ‘인신매매’로 옮겨 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제는 ‘구조적 강제성’이 있다고 말하는 이가 적지 않은데 ‘구조적 강제성’이라는 개념은 바로 내가 『화해를 위해서』에서 처음 사용한 개념이었다. 위안부를 매춘부라고 말하는 이들을 향해 “당시의 일본이 군대를 위한 조직을 발상했다는 점에서는 그 구조적인 강제성은 결코 희석되지 않는다” (개정판, 69)라고 나는 말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책을 결코 인용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이 문제를 식민지지배 문제로 봐야 한다는 나의 제기까지 인용 없이 사용하는 이들까지 생기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조만간 다시 쓸 생각이다.

2015년 5월 미국 역사학자들의 성명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제 ‘군인이 끌고 간 강제연행’은 세계는 물론 지원단체조차 주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강제연행’으로만 믿었던 시점에서 강제연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강제성’ 여부로 부정적인 이들이 이 문제에서의 책임을 희석하는 것을 막고자 10년 전에 ‘구조적 강제성’을 말했다. 또 『제국의 위안부』에서 ‘강제성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썼다.

2) 오독과 왜곡

정영환은 내가 위안부가 “일반여성을 위한 희생양”(『화해를 위해서』, 87)이었다고 쓴 부분을 지목해 마치 내가 “일반여성의 보호를 목적”(김부자)으로 하는 것처럼 비난한다(478). 그러나 ‘일본군을 위한 제도’라는 사실과 ‘위안부가 일반여성을 위한 희생양’이었다는 인식은 대치되지 않는다.

역사 연구자인 정영환이 텍스트 분석에 대해 문학 연구자만큼의 긴장이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비판’의 문맥이라면, 더구나 소송을 당하고 있는 상대에 대한 비판이라면 좀 더 섬세하게 접근해야 했다. 심지어 정영환은 일반여성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다는 나의 반박마저 비난하면서 ‘적국의 여성’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냐는(김부자) 오독에 더해 “일본군의 폭력 을 어쩔 수 없는 당연한 것으로 전제”(478)한, “전쟁터의 일반여성이 자기대신 강간당한 위안부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라고까지 말한다.

내가 일반여성의 문제를 말한 것은 ‘계급’의 시점에서다. 즉 “주인댁 배운 여자”(『화해를 위해서』, 88) 대신 위안부로 나갔던 위안부의 존재에 주목했던 것이고, 그녀들을 내보내고 후방에서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한/일 중산층 이상의 여성들, 그리고 그녀들의 후예들에게도 책임의식을 촉구하기 위한 문맥이었다. 물론 그 기반에는 나 자신의 책임의식이 존재한다.

3) 총체적 몰이해

정영환은 서경식의 비판에 의존하면서 아시아여성기금과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을 비판하지만, 서경식의 비판은 어디에도 근거가 없다. 구식민지종 주국들의 “공동방어선”(007)을 일본 리버럴지식인들의 심성으로 등치시키려면 구체적인 준거를 대야 했다.

그리고 나는 한일갈등을 정대협의 책임으로만 돌리지 않았다. 일본 측도 분명히 비판했다. 그럼에도 정영환을 비롯한 비판자들은 내가 ‘가해자를 비판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린다’고 규정했고 이후 그 인식은 확산되었다.

정영환은 내가 사용한 “배상”이라는 단어를 문제시하지만 정대협은 “배상”에 국가의 법적책임의 의미를, “보상”에 의무가 아닌 것이라는 의미를 담아 구별해 사용하고 있다. 정영환이 지적하는 “쓰구나이금”이란 책에도 썼듯이 “속죄금”에 가까운 뉘앙스의 단어다. 물론 일본은 이 단어에 “배상”이라는 의미를 담지 않았고, 나 역시 정대협이 사용하는 의미에 준해 “배상”이라는 의미를 피해 “보상”이라고 말했다. 이는 기금을 그저 “위로금”으로 간주한 이들에 대한 비판의 문맥에서였다. “쓰구나이금이 일본의 법적 책임을 전제로 한 보상이 아니”(479)라는데는 나 역시 이견이 없다. 그런데도 정영환 은 잘못된 전제로 접근하면서 내가 사용한 “보상”이라는 단어가 “쟁점을 해소”(480)한다고 비난한다.

참고로 언급해두자면, 일본 정부는 국고금을 직접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처음엔 간접지원하기로 했던 300만엔마저 결국 현금으로 지급했다. 아시아여성기금을 수령한 60명의 한국인 위안부들은 실상은 ‘일본국가의 국고금’도 받은 것이 된다. 여전히 “배상”은 아니지만 기금이 그저 “민간기금”이라는 이해도 수정되어야 한다.

4. 정영환의 ‘한일협정’ 이해의 오류

1) 위안부문제에 관한 책임에 대해

정영환은 내가 위안부 문제의 “그 책임을 일본국가에 물을 수 없다”(480)고 한 것으로 정리한다. 하지만 나는 “법적 책임을 물으려면 먼저 업자에게 물어야 한다”고 말했을 뿐, 일본국가의 책임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또 알려지지 않았던 여러 정황을 감안해 판단하면 ‘법적’ 책임을 전제로 한 배상 요구는 무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내가 ‘업자’등 중간자들의 존재에 주목하는 이유는 일본국가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들이야말로 가혹한 폭력과 강제노동의 주체이고 그로 인한 이득을 취했기 때문이다. 유괴나 사기 등은 당시에도 처벌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위안부의 ‘미 움’이 이들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공식적인 지휘명령계통을 통해 위안소 설치를 지시’하였다는 요시미의 주장을 대체적으로 지지하지만, 여성의 ‘징집을 명령한 것이었다’는 규정이 물리적 강제연행을 상상케 하고 업자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것인 이상 좀 더 섬세한 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병참 부속시설”이라는 나가이의 지적 역시 지지하지만, 기존 유곽을 사용한 경우도 많았다는 점이 보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을 보는 이유는 일본의 책임을 희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원자들이 말하는 “진실규명”을 위해서다.

정영환의 나에 대한 비판이 순수한 의문을 벗어난 곡해임은, 수요를 만든것자체, 즉 전쟁을한 것 자체를 비판하는 나의 글을 인용하면서 “위의 인용은 어떻게 보면 공급이 따라갈 정도였다면 군위안소제도엔 문제가 없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481)다고 하는 지적에 나타난다. 심지어 “업자의 일탈만 문제 삼는다면 군위안소라는 제도 자체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일 것”(481)이라고 쓰는 정영환의 “비약”에는 그저 놀랄 뿐이다.

나는 “군에 의한 위안소 설치와 여성의 징집, 공권력을 통한 연행”(482)을 같이 놓고 “예외적인 일”로 기술하지 않았다. 내가 예외적인 일로 기술한 것 은 한반도에서의 “공권력을 통한 연행”뿐이다. 그럼에도 정영환은 이런 식으로 요약해 내가 ‘군의 위안소 설치’마저 예외적인 일로 간주한 것처럼 보이도록 시도한다.

2) 헌재판결에 관해

헌재 판결에 대해서, 나는 분명 ‘청구인들의 배상청구권’에 대해 회의적이다. 하지만 이는 그러한 형식―재판에 의거한 청구권 요구라는 방식과 그 효과에 대한 회의였을 뿐 보상 자체를 반대한 적은 없다. 그럼에도 정영환은 “청구권 자체를 부인하는 입장”이라고 오해하도록 만드는 정리를 한다.

또 나는 지원단체가 의거해온 ‘부인 및 아동의 매매금지에 관한 국제조약’을 기반으로 해서는 “위안부제도를 위법으로 할 수 없”고 따라서 손해배상을 물릴 수 없다는 아이타니의 지적에 공감했을 뿐,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 위해 인용한 것이 아니다. 아이타니의 의도가 ‘개인의 배상청구권을 부정’한 것은 아니어도, 그러한 방법의 틀로는 ‘성립되지 않음’을 말한 논문임은 분명하고, 나는 그 부분에 주목했을 뿐이다. “개인의 청구권을 부정한 연구인 것처럼 인용”했다는 지적 역시 단순한 오독이거나 의도적인 왜곡일 뿐 이다. 정영환은 늘 형식부정을 내용부정으로 등치시킨다. 심지어 이제 지원 단체 스스로가 “법적 책임” 주장을 변경했다는 것도 정영환은 참고해야 할 것이다.(008)

3) 한일회담에 대해

정영환은 내가 김창록의 논문도 “반대로 인용”했다고 말하지만, 나는 김창록이 인용한 여러 회담문안을 정영환의 지적과는 다른 문맥에서 사용했다. 그러니 이 역시 근거없는 비난이다.

김창록이 말하는 것처럼 당시에 논의된 것은 ‘피징용자의 미수금’이었고, 정영환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당시의 위안부에 관한 논의는 오로지 ‘미수금’만이 문제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위안부는 “군속”이었다고 말하는 자료도 나왔으니(009) 나의 논지에 의거한다면 일본이 위안부를 “군속”으로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인 일본군조차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법’이 존 재했지만 위안부들에게는 그런 ‘법’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런 인식은 위안부에 관한 ‘보상’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정영환은 내가 한일협정에서 일본이 지급한 금액을 ‘전후보상’이라고 말했다고 하지만 나는 샌프란시스코회담에 의거한 회담이니 연합국과의 틀 안에서 정할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제국후처리’가 아닌 ‘전후처리’에 해당한다고 했을 뿐이다.

정영환은 487쪽에서 488쪽의 부분에서 나의 책을 길게 인용하면서도, 미국이 일본인들의 한반도 재산을 접수해 한국에 불하하고, 그것으로 외지에서 일본인을 귀환시켜준 비용을 상쇄시켰다는 부분을 빼고 인용한다. 그러나 이 부분이야말로 내가 일본에 청구권을 청구하는 것이 어렵겠다고 이해 하게 된 부분이다. 국가가 상쇄시켜버린 ‘개인의 청구권’을 다시 허용한다면 일본인들 역시 한반도에 남긴 자산의 청구가 가능해진다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때의 보상이 ‘전쟁’후처리일 뿐 ‘식민지배’후처리가 아니라고 말해 65년 보상이 불완전하다는 점을 분명히 언급했다. 그럼에도 정영환은 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내가 1965년체제를 “수호”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한일협정금액을 “전쟁에 대한 배상금”이라 하지 않았다. ‘전후처리에 따른 보상’이라 했다. 또한 장박진의 연구를 인용한 것은 냉전체제가 영 향을 끼쳤다는 부분에서다. “맥락과 전혀 다르게 문헌을 인용”하지 않았고, 장박진이 “한국 정부에 추궁할 의사가 없었다고 비판”한 문맥을 무시하지 않았다.

정영환이 아직 모르는 것은 한국 정부가 이때 식민지배에 관한 ‘정치적 청산’마저 해버렸다는 점이다.(010) 아사노 논문은 『제국의 위안부』 출간 이후 에 나왔다. 나는 책에서 일본을 향해서 ‘식민지배보상’이 아니었으니 보상이 남아 있다고 썼는데, 아사노 논문을 읽고 오히려 충격을 받았다. 한일협정을 둘러싼 논의는 앞으로 이제 아사노 논문을 도외시하고는 이야기될 수 없을 것이다.

5. 생산적인 담론을 위해

정영환은 이제 서경식이나 다카하시 데츠야조차 비판한다. 다카하시는 리버럴 지식인 중에도 드러나게 ‘반성적인’ 시각과 태도를 견지해온 인물이고 서경식과 공동작업을 많이 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이들까지 비판하는 정영환에게 첫 답변에서 물었던 말을 다시 묻고 싶다.

정영환의 비판은 어디를 지향하는가?

분명한 건 정영환의 “방법”은 일본사회를 변화시키기는 커녕 사죄하는 마음을 가졌던 이들마저 등돌리게 만들어 재일교포사회를 더 힘들게 만들 것 이라는 점이다. 물론 일본사회에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정영환의 비판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 문제를, 나에 대한 비판방식이 증명하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의도를 찾아내기 위해 귀중한 시간을 소모 하기보다 생산적인 담론 생산에 힘을 써주기를 바란다.

  1. 001  매수가 충분치 않아 이 글에서는 나의 책 인용을 거의 하지 못했다. 이 글의 논지를 확인하고 싶은 독자들은 『제국의 위안부』 (2015년 6월에 일부삭제판이 간행되었다) 와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2005 초판, 2015 개정판)를 참조 해주기 바란다. (도서 다운로드 페이지로 이동)
    이에 앞서는 서론격 글을 2015년 8월 말경에 박유하의 페이스북 <노트>등에 게재할 예정이다 www.facebook.com/parkyuha
  2. 002  이 반론을 집필 중이던 2015년 8월 13일에 『한겨레신문』이 정영환/박노자의 대담을 싣고 다시 한 번 나를 비판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영환의 나에 대한 비판의 문맥 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판전사(前史)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주1의 글을 참조바란다.
  3. 003  정영환이 블로그에 연재한 나에 대한 비판의 제목은 “『제국의 위안부』의 방법”이다. “방법”을 전면적으로 내세워 내게 내용 이전의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심어 학자로 서의 자격과 도덕성에 흠집을 내려 하는 전략이 뚜렷하다.
  4. 004  朴裕河, 「あいだに立つとはどういうことかー慰安婦問題をめぐる90年代の思想と運動を問い直 す」, 『インパクション』 171호, 2009. 11.
  5. 005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은 이 20여 년간 여러 번 변했다. 최근 과거 증언집에 대한 불 만을 토로했는데 이는 증언의 불일치를 지적당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http://www. 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466
  6. 006  박유하, 「위안부 문제,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 심포지엄 『위안부 문제, 제3의 목 소리』 자료집, 2014. 4. 29. 『제국의 위안부』 삭제판에 수록.
  7. 007  徐京植, 『植民地主義の暴力』, 高文研, 2010, 70쪽.
  8. 008  『한겨레신문』 2015. 4. 23.
  9. 009  波止場清, 「慰安婦は軍属ー辻政信が明言」, 『허핑톤 포스트』 2015. 8. 3. 일본육군참모였던 츠지 마사노부가 『潜行三千里』라는 책에서 위안부는 “신분도 군속”이라고 쓴사실이 지적된 바 있다.
  10. 010  아사노 도요미, 「‘국민감정’과 ‘국민사’의 충돌. 봉인, 해제의 궤적―보편적 정의의모색과 뒷받침되어야 할 공통의 기억을 둘러싸고」, 근간 수록 예정.
출처: 역사비평 2015 봄호(통권 112호)

비판이 지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정영환의 <제국의 위안부>비판에 답한다 #1

정영환이 나에 대한 비판을 시작한 것은 오래전 일이다. 다 읽진 않았어도 그가 일본어블로그에 연재한 비판이  SNS를 통해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 읽기도 했다. 그러나 응답하지 않았던 건 첫째로는 시간적여유가 없었고, 두 번 째로는 그의 비판이 악의적인 예단이 앞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월에 나의 책에 대한 가처분 판결이 났을 때 한겨레신문이 정영환의 글을 나에 대한 비판에 사용했고 이제 <역사비평>이라는 한국의 주요잡지에 게재되기에 이르렀기에 뒤늦게나마 반론을 쓰기로 한다.

그런데 지면을 30매 밖에 받지 못했다. 불과 30매에 그의 비판에 구체적으로 대답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또 다른 젊은 학자들이 비슷한 시기에 <역사문제연구>33호에 <집담회>라는 이름으로 비판을 했는데, 이에 대한 반론은 100매가 허용되었으므로 논지에 관한 구체적인 반론은 그 지면을 활용하기로 하겠다.


민족과 젠더

나는 그를, 내가 가장 관심 두었고 또 발제도 했던 일본의 한 연구모임에서 2000년대 초반에 만났다. 그 모임은 일본의 재일교포문제 오키나와 문제등 제국일본이 낳은 여러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은 곳이었고, 무엇보다 지적수준이 아주 높은 곳이었기 때문에 그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 기회 되면 참석했던 곳이다. 문부식, 정근식, 김동춘등이 그 연구회가 관심을 갖고 초청하기도 했던 인사였다.

서경식도 그 연구모임에서 아주 소중한 존재인 걸 곧 알 수 있었고 나 역시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책을 교환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재일교포사회의 가부장제문제를 발표하면서 이들의 태도는 달라졌다. 서경식은 <젠더보다 민족문제가 우선>이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기까지 했다. 당시 연구회 멤버들 중에는 공식적인 석상에서는 그런 서경식에 대해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사석에서는 서경식을 비판하는 이도 있었다.

말하자면 서경식, 윤건차, 그리고 이제  정영환으로 대표되는 나에 대한 재일교포들의 비판은 기본적으로 <젠더와 민족>문제를  둘러싼 포지션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나에 대해 공식적이고 본격적으로 비판을 행한 건 모두가 남성학자들이다. 여성인 경우는 김부자나 윤명숙 등 위안부문제연구자에 한한다.  이 구도를 어떻게 이해할지가 나와 이들의 대립을 이해하는 첫 번째 힌트가 될 것이다.

한국에서 서경식으로부터 시작된 나에 대한 비판에 가세한 학자들—이재승, 박노자, 윤해동등-도 모두 남성학자였다. (물론, 여성학자,혹은  여성학 전공자들 중에도 소송에 반대하거나 나에게 호의적으로 반응한 이는 극히 드물었다). 후에 다시 쓰겠지만 이들의 비판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의 논지가 <일본을 면죄>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정영환이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도 그 부분이다.


전후/현대일본과 재일교포지식인

정영환도 언급한 것처럼 나에 대한 비판은 10년전에 쓴  <화해를 위해서>발간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비판한 건 정대협에 관여했던 재일교포여성학자 김부자였다. 좀 지나서 윤건차, 서경식이 “자세한 건 김부자에게 맡기고…”라면서 지극히 추상적인 비판을 시작했다. 하지만, 김부자에게도 나는 서경식이 앞에서 언급한  연구모임에서 알게 된 사이라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고,시간이 지나고 내 책을 더 읽으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기대하며 같은 시기에 나온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를 보냈다.

훗날 반론을 쓰게 된 계기는, 서경식 선생이 어느날 한겨레신문에 실었던 칼럼이다. 나를 높이 평가해 준 일본의 진보지식인들이 나를 이용해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 그는 썼고 (<타협 강요하는 화해의 폭력성>,2008/9/13 한겨레신문), 다음해에 나에 대한 비판을 포함한 윤건차의 책이 한겨레에 크게 소개되었을 때였다.

당시 김부자등의 비판에 동조해 비판한 건 몇 명되지 않는 극소수의 일본인이었고  확산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들이 한국에서 나에 대한 비판을 시작한 일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화해를 위해서>는 그가 발간에서  3년이나 지난 시기에 굳이 비판해야 할 만큼 한국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책을 이들이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갑자기 비판한 이유를 나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한다. 문제는 서경식이 지향한 것이 현대일본의 <리버럴 지식인>(진보지식인)뿐 아니라 이들이 만들어온 전후일본에 대한 비판이었다는 점이다. 일본 리버럴지식인들은 정말은 식민지지배에 대해 법적책임을 지고 싶어하지는 않는다는 그의 근거없는 추측은 ,이후 한국진보의 일본불신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이 때 반론을 일본어로 썼고 일본매체에 발표했다. 김부자의 논문이 실린 건 일본매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2년후인 2009년 여름과 겨울에, 한겨레신문 한승동기자가 윤건차교수의 책소개에 <일본우익의 찬사를 받은 화해를 위해서를 비판한 책>이라고 쓰는 일이 일어났다. 한국에서 <일본우익의 찬사>를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이니 나는 이 왜곡보도를 접하고 경악했다. (이에 관한 경위는 제국의 위안부 후기에도 썼다)


지식인의 사고와 폭력

서경석의 생각(전후일본과 현대일본지식인과에 대한 비판)이 그의 인기에 힘입어 한국에 확고하게 자리잡았다는 증거는, 2014년 6월,나에 대한 고발장에  서경식의 생각(내가 말한 “화해”와 용서를 마치 국가야합주의적 사고인 것처럼 치부하는 사고)이 쓰여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그 때, 언론중재위에 가지 않았던 나의 5년전 선택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말하자면, 나에 대한 고발은, 직접적으로는 나눔의 집이라는 지원단체의 오독과 곡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실은 그들을 그렇게 시킨 건 이면에 있던 나에 대한 경계심이었다. 그런 경계심을 만들고 또 보이지 않게 지원했던 건 지식인들이었다. 나에 대한 첫 고발은 위안부에 대한 기술이 <허위>라는 내용이었지만 내가 반박문을 쓰자 원고측은 중간에 고발취지를 바꾸어 나의 <역사인식>을 문제 삼았다. 일련의 과정에서, 낯설거나 자신들과 다른 생각은 무조건 배척하고 손쉬운 배척수단으로 <일본우익>을 호명했다는 점에서 지식인도, 지원단체도 다를 바가 없었다.

주로 진보계층에서 유통된 서경식과 윤건차등의 책이 나에 대한 인식을 <일본을 면죄하려는 위험한 여성>으로 간주하는 인식을 확산시킨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물론 위안부문제를 부정하고 <일본의 법적책임을 부정>한다는 이유다.

서경식이나 윤건차는 내 책이 일본우익의 사고를 “구체적으로”비판하기도 한 책이라는 점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그저 <친일파의 책>으로 부각시키고 싶어 했다.

그들 외에도, 내가 아는 한 나의 책 이전엔 위안부문제에 대한 부정파들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비판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한국이나 일본의 지원자들은 위안부문제에 부정적인 이들에 대해서는 무조건 “우익!”이라는 단어로 손가락질했고 김부자가 나에 대해 “우파에 친화적”이라는 말로 비난한 것은 그 연장선상의 일이다.

그에 비하면 정영환은 그나마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있고 그 부분은 진일보한 재일교포의 모습이기는 하다. 하지만 정영환은 나의 “방법”이 무언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이도록 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책의 전체 의도와  결론을 완전히 무시하고 문맥을 무시한 인용과 함께 프레임을  씌워 <위험하고 부도덕한 여성>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책이 결론적으로 <일본의 책임>을 묻는 책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들은 일본에 책임을 묻는 방식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만으로 나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아마, 정영환이 소개한 대로, 그들이 20여년 지켜온 사고의 막강한 영향력이 흔들리는 사태를 맞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러한 정황이 마치 일본이 책임을 무화시키는 쪽으로 가고 있는 처럼 말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최근 몇 년동안 위안부문제에 지극히 무관심했던 일본인들이, 그리고 소녀상이 세워진 2011년 이후 반발하기 시작했던 일본인들이, 나의 책을 본 이후 위안부문제를 다시 반성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다.

얼마 전에 나는 우연히, 서승/서경식형제에 대한 구명운동을 20년이상 해 왔다는 일본인 목사의 부인이, 위안부문제 해결운동모임의 전 대표라는 사실을 알았다. 직접적으로는 관계가 없어보였던 서경식도 실상은 위안부문제관계자와 깊은 관계가 있었던 셈이다. 내가 굳이 이 글에서 서경식에 언급하는 이유는 정영환이  <화해를 위해서>를 비판하면서 서경식의 비판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화해를 위해서>에 대한 비판에 나선 이들은 대부분 위안부문제에 관여해 왔던 이들이었는데 서경식 역시 그런 <관계>에서 아주 자유롭지는 않았던 셈이다.  나에 대한 서경식의 비판논지가 고발장에 그대로 원용되어 있었던 것을 지적했던 것은 “지식인의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었는데, 어쩌면 그의 논지자체가, “무모한” 지원단체 이상으로, 현실적 포지션과 인적관계의 영향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

이들의 논지는 적대와 “숙청”을 요구한다. 지원단체가 국가권력을 앞세워 나를 고발했던 건 그 결과이기도 하다. 나에 대한 규탄을 통해 드러난 그런 그들의 방식과 사고의 결함이 어디에 있는지, 이후 나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나갈 생각이다. 이들의 방식이 20년이상 평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불화를 빚어왔던 이유가 바로 그런  사고의 결함에 있을 뿐 아니라 미래의 평화도 만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판과 포지션

이들은 “전후일본”을 전혀 평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인식이 한국에 정착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옳고 그르고를 떠나 2015년현재의 한국의 대일인식은 이들 재일교포가 만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들과 연대하며 20년 이상 “일본은 군국주의 국가!”라고 강조하고  “변하지 않는일본/사죄하지 않는 일본/뻔뻔한 일본”관을 심었고, 2015년 현재 한국인의 70퍼센트가 일본을 군국주의국가라고 믿게 만든, 정대협을 비롯한 운동단체들의 “운동”과 그들의 목소리를 그저 받아쓰기만 해온 언론도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들은 박유하는 “일본(가해자)이 잘못했는데 한국(피해자)이 잘못했다고 말한다”라면서 내가 일본을 비판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었는데, 내가 그들의 일본관을 비판하며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런 식의 부정확하고 비윤리적인 “태도”였다.

나는 이들 재일교포가 일본을 비판하려면 자신들을 차별없이 교수로 채용한 일본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김석범선생같은 작가가 20년이상 <화산도>를 하나의 문예지에 연재하면서 생활이 가능했던 것도 전후/현대일본이었다.

결코 빠르지도 않고 완벽하지도 않지만 일본사회는 변했고 변하고 있다. 그런데도 결코 보지 않으려 했던 짧지 않은 갈등의 시간 끝에, 현재의 일본의 일부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회귀중이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관계란 대체적으로 상대적인 것이다.

내가 <화해를 위해서>에서 말하려 했던 건 그런 부분이었다. 그 책은 2001년 교과서문제가 있고서야 일본에 이른바 <양심적지식인과 시민>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될 만큼 전후일본에 대한 지식이 일천했던 10년전, 한국을 향해 우선은 전후일본이 어떤 출발을 했고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를 알리려 했던 책이다. 우리의 일본인식은 실은 전도된 부분이 적지 않다고.

상대를 비판하려면 일단은 총체적인 일본을 알고 나서 하는 것이 맞다. 그래야 정확한 비판을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여러 이유에서 우리에겐  총체적인 일본이 알려지지 않았었다. 나는 정영환이 말하는 것처럼 일본리버럴 지식인들이 말하고 싶어 한 것을 대변한 것이 아니라,총체적인 일본에 대해 우선 알리고자 했을 뿐이다. 부정적인 부분을 포함해서. 그건 그런 일에 태만했던 한국의 일본학연구자의 한사람으로서의 반성을 담은 작업이었다. 서경식의 비판은 나는 물론 일본의 진보지식인에 대한 모욕일 수 밖에 없다.

서경식의 비판은 우리에게 겨우 그 존재가 알려진 일본의 진보지식인을 비판부터 하는 일로 전후/현대일본에 대한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

물론 일본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들의 비판이 결코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더구나  일본이 더 바뀌려면 진보지식인과의 연대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런데 그들을 적으로 돌리고 나서 정영환은 누구와 손잡고 일본을 변화시키려 하는가? 서경식이나  정영환의 비판은,지극히 모놀로그적이다. 모놀로그로는, 상대를 변화시킬 수 없다.

나는 정치와 학문, 일반인과 지식인에 대한 비판에서  <차이>를 의식하면서 쓰고 말한다. 정영환등 나를 비판하는 학자들과의 가장 본질적인 차이는 아마도 이 점에 있다. 다시 말해 나는 나츠메소세키를 비판했고 그를 리버럴 지식인으로 떠받든 일본의 전후지식인과 현대지식인을 비판했지만, 그건 그만큼 지식인의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사고는 때로 정치를 움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저 보통생활을 영위할 뿐인 일반인에 대한 비판은 그 결을 달리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것이 나의 <방법>이다. 모놀르그보다는 다이얼로그가, 논문에서든 실천에서든 생산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일본의 사죄>를 우리는 어디에서 확인할 것인가?

수상이나 천황이 아무리 사죄한 들 국민들이 같은 심정을 가지지 않으면 한일일반인들은 끝내 소통할 수 없을 것이고 불화할 수 밖에 없다.우리는 천황이나 수상과 대화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의 90년대는 분명 애매하긴 해도 일본정부와 국민이 사죄하는 마음이 압도적인 다수였던 시대였다. 내가 아시아여성기금을 평가한 건 그런 정부와 국민의 마음이 담긴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판자들은 그런 일본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애매>하다고 비난했지만, 선명함 자체가 목적인 추궁은, 정의실현이라는 자기만족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대개는 숙청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생산적인 담론도 되지 못한다. 실제로 나에 대한 고발이 그것을 증명했다.

<고발에는 반대하지만..,>이라고 전제하면서 나를 비판했던 이들 중, 아무도 실제로 소송을 기각하라고 행동한  이는 없었다. 그들은 한국정부와 지원단체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말한다는 이유로 그들이 나를 억압하는 걸 당연시했고 비판에 나섬으로써 나에 대한 억압에 가담했다. 학문적 견해를 사법부가 도구로 사용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나서서 제출했다.

그런데, 역사문제에 대한 판단을 국가와 사법부에 의존하는 것이야말로  학자들의 치욕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참담한 심경이다.


1)<역사비평>에 처음 이 글을 먼저 보냈으나 구체적인 반론이 아니라는 이유로 게재되지 못했다. 다른 글로 대체했으나 이 글이 더 중요하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역사비평>112호에 게재한 글과 다소 중복되는 부분이 있다. 그 글에서 내가 언급한 정영환의  문제는, 다른 남성학자들의 글에서도 대체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동아시아 화해와 평화의 목소리>발족 기념  심포지엄 글(<기억의 정치학을 넘어서>에서도 그 일단을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앞으로도 다시 쓸 생각이다.

출전 : 박유하 페이스북 노트

못다한 식민지책임 – 기시도시미츠 岸俊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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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한 식민지책임

<전후일본의 반전사상이 국민들에게 뿌리내린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식민지지배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오지 않았던 거 아닐까요>

금년 6월, 동경의 호세이대학에서 열린 일본사회문학회 30주년대회에서 기조강연을 한 한국/세종대 박유하교수는 그렇게 물었다.

부부이야기로 읽히는 경우가 많은 나츠메소세키 <명암>에는 가난 때문에 조선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런 근대소설을 바탕으로 박교수는 제국이 국민의 이동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다는 점, 이주가 전쟁을 염두에 둔 국책이었다는 점,일본에서의 기민(棄民) 들이 식민자가 되어가는 모습을 지적했다.

그리고 위안부에 대해 언급하면서 <중요한 건 누구나가 기피하는 일을 가장 가난한 이들이 떠맡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강제인지 매춘인지 하는 논의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하고 말했다.
그의 전문인 일본근대문학에 그려진 식민지의문제는, 역사문제논의에도 반영되었다.

2006년,아시아여성기금이 연 국제심포지엄에 패널로 참석했던 박교수는, <한국의 민족주의가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더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 고 발언했었다.
금년 5월에 서울에서 식민지에 대한 관심에 대해 다시 물었을 때도 <개인적으로 차별당한 경험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국인여성이라는 사실은 관계가 있습니다. 좋아해서 시작한 소세키연구가 진보지식인으로 불리는 것에도 의문을 가졌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문제의식을 저술한 것이 화제작 <제국의 위안부>이다. 교토의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금년 2월에 열린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워크샵에서는 왜 썼는지,무엇을 강조하고 싶었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위안부가 목소리를 낸 1991년, 누구나가 식민지지배문제로 이해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이후 위안부문제논의에서 제국의 문제가 빠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일본남성의 문제로만 축소되었습니다 >

<조선의 여성은 “애국”을 당했고 일본인이 되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 조선인 위안부상을 통해 식민지지배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 겁니다. 일본이외의 다른 제국국가의 문제도 환기시키고 싶었습니다>
서구일본학자들에 의한 금년 5월성명에는 <제국에 관련된 인종차별, 식민지주의와 전쟁,그리고 그것이 (중략)시민들에게 끼친 고통과 충분히 마주해 온 나라는 아직 어디도 없습니다> 라는 말이 이오진다. 그리고 일본정부에 대해 <과거의 식민지배와 전쟁당시 침략문제와 마주하라>고 요구했다.

박교수의 화해방안은 책임을 무화시킨다는 비판이 있다. 그리고 <제국의 위안부>한국판을 둘러싼 형사/민사쟁투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식민지책임은 과거의 제국 전체를 향한 난제가 아닐까.(기시도시미츠. 岸俊光)

기억의 정치학을 넘어서 – 『제국의 위안부』 피소 1년

1.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인식의 변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인식을 둘러싸고 이 1년 동안 현저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작년 8월에 나온 <아사히신문>과 <홋카이도신문>의 ‘강제연행’에 관한 과거의 기사를 취소한 사태는 그 첫걸음이었습니다. 그에 이어 지난 5월에는 미국의 저명역사학자들이 이 문제에 관한 의견과 제언을 발표했습니다. 무엇보다 주목 해야 할 것은 한·일 지원 단체들이 기존의 입장을 바꾼 일입니다.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공방은 ‘법적책임’, ‘국가배 상’이라는 두 단어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즉 지원 단체는 일본이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사죄도 보상도 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 20여 년 동안 말해 왔는데, 그 말의 의미는 ‘법적’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보상을 했지만 이른바 ‘도의적 보상’이었고, 그런 것이 아닌‘법적’ 보상을 하라는 것이 그간의 주장이었던 것입니다 (『제국의 위안부』 참조). 따라서 국회에서 ‘입법’ 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지원 단체가, 그런 주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 그런 입법을 하지 않는 방식이라도 좋다고 입장을 바꾼 것입니다 (2015/4/23 <한겨레> 당일 동영상 참조).

이 모두가, 이 20여년의 동향, 그리고2007년에 미국하원이 국회결의를 통해 일본에 사죄를 요구한 이후 세계가 그에 동조했던 이 8년간의 동향에 비추어 괄목할 만한 변화입니다. 그동안 지원 단체와 관련연구자들이 ‘법적 책임’을 주장해 온 근거는 위안부 문제 발생 초기에 여러 가지 이유로 ‘군인이 강제로 끌어간 것’으로 이해되면서, ‘국가배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고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조금씩 처음의 이해와는 다른 연구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의 변화는 ‘공적으로’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인 위안부 의 존재, 업자의 존재, 인신매매 등이 공식적으로 공표되고 논의된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그 단어가 의미하던 ‘강제연행’과는 다른 상황이라는 것이 알려진 이후에는 그런 인식의 변화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고 이번에는 일본군이 인신매매를 알고도 받아들였다거나, 알고도 인신매매업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는 뜻으로 ‘강제연행’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관한 일본의 ‘국가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현재의 상황입니다.

위안부 관련 지원 단체들은 더 이상 한반도에서의 강제연행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식민지통치’하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식의 강제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고발장)

실은 이점이 바로 제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말한 내용입니다. 아무리 식민지 라도 ‘법’에 위반하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법적으로 용인된 사상범 단속 외에는 식민지이기에 오히려 조심스럽게 통치해야 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공적으로’ 공표되는 일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역사학자등 관계자들은 ‘군대가 알고도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이하의 자료는 그런 인식이 꼭 옳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9월 들어, 업자들이 위안부의 숫자감소를 이유로 충원을 신청했기 때문에, 지부는 허가했다. 10월, 경한선을 경유해 두 조선인의 인솔 하에 30여명의 여자들이 조선에서 도착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수단으로 모집했는지 지부가 알 수는 없었으나 그 중 한 여자가 육군 장교의 집회소인 가이코샤에 취직한다는 약속을 하고 왔는데 위안부일 줄은 몰랐다고 울면서 취업을 거부했다. 지부장은 업자가 그 여자한테 일을 시키지 못하도록 하고, 적절한 다른 곳에 취직시키라고 명령했다. 아마도 소개업자 같은 사람들이 속임수를 써서 모집한 것일 터였다. (『漢口慰安所』, 221쪽)

무엇보다 이들 중에 일본인도 있다고 생각하면 군인들이 폭력적일 수 있어도 불법적인 행위를 쉽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예외가 있었을 수 있지만 그것이 ‘국가방침’이었는지 여부가 ‘불법’여부를 판단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수많은 오해는, ‘일본군과 조선 등 타국여성’의 관계구도 로 이해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물론 지원자들은 일본인 위안부존재에 대해서 도 알고 있었지만, 오래도록 일본인위안부를 조선인여성과는 다른 존재로 취급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일본인은 매춘부, 조선인은 소녀’라는 이해가 존재했습니다.

최근에야 일본에서 일본인위안부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서가 나왔는데, 이들은 이제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공창업자뿐 아니라 민간인도 다수 여성의 매매와 사기적 알선에 관계했다는 걸 알았다”, “전쟁이 나기 이전부터 여성을 인신매매 나 사기로 매춘으로 몰아넣는 업자가 실로 많이 존재했”다(西野瑠美子, 『日本 人慰安婦ー愛国心と人身売買と』, 260쪽, 2015)고 말합니다. 또 이 책의 띠지 에는“매춘부면 피해자가 아닌가?”, “간과되어온 일본인위안부의 피해를 묻는 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말하자면, 위안부조달의 기본구조가 ‘강제연행’이 아니라 ‘인신매매’를 통한 것이었고 이른바 ‘매춘부’도 위안부 시스템 속에 있었다는 것을 이제 지원 단체도 말하는 단계에 온 것입니다.

실은 일제 강점기의 한반도에는 일본인이 수십만 명 살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들 중에 위안부로 나간 이도 있었습니다. 가와다 후미코가 쓴 ‘빨간 기와집’에는 부산으로 모집된 여성들 중에 ‘일본 여자도 두 명 섞여 있었다’고 하는 기술이 보입니다. 더구나 조선의 서울이나 북한위안소 앞에 군인들이 늘어서 있는 풍경을 묘사한 글은 적지 않습니다.(가지야마 도시유키, 고토 메이세이 등). 따라서 더 이상, 위안소에 관한 기존인식만으로는 더 이상 위안소를 말한 것이 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위안부 제도를 지탱하는 시스템이 ‘인신매매’였다는 사실은, 기존의 인식-‘강 제로 끌려간 어린 소녀’라는 인식에 담긴 연행주체와 정황에 대한 재이해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직 1990년대 초기에 정착된 ‘강제로 끌려간 위안부’의 이미지가 지배적입니다. 그리고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은 ‘강제연행’인식이 아직 (공적으로는)지배적이던 시기의 상입니다. 2011년 겨울 처음으로 소녀상이 세워진 이후로 서울 이외의 여러 곳, 그리고 미국에까지 세워지게 되었고 해방 70년을 맞아 금년에는 전국적인 추세로 소녀상 건립이 추진되고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는 이 소녀상의 의미도 재고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소녀상이 여전히 기존의 인식인 ‘강제연행’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시마저 광화문이나 시청에 소녀상을 세우겠다고 발표한 바 있는데, 정말 세운다면 위안부의 보다 근원적인 본질—가부장제치하에서 국가의 세력 확장에, 개인의 성을 동원당한 여성들이라는 보편적 의미를 담아야 할 것입니다.

2.‘세계의 생각’과 이해의 편향

그런데 지난 5월초에 미국의 역자학자들이 일본정부에 보낸 공개서한은 이들의 인식이 한국이나 지원 단체의 표면화된 인식과는 다소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자세히는 오늘 자료집에 수록된 내용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만, 이들의 서한은 일본정부와 국민이 대체적으로 납득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비판/비난이 아니라, 설득/권고 논조입니다. 충분히 논의되고 고심한 흔적이 뚜렷한, 결과적으로 섬세하고 합리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성명에서 ‘인신매매’, ‘성매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미국학자들도 더 이상 한국이나 지원 단체가 주장하는‘강제연행’을 말하지 않습니다. 아베수상이 인신매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면서 한국은 비난했지만, 그 인식은 이미 아베 수상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역사학자들 의 성명이나 일본 지원 단체의 책이 그렇듯, 이들의 ‘인신매매’라는 이해는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들은 이 성명이 한국/중국을 비판했다는 사실을 전하지 않았고, 마치 그간의 한국의 주장을 지지한 서한인 것처럼 보도했습니다. 이는 오랫동안 이어져온 한국 언론의 편견과 태만에—직접 취재하지 않거나 번역하지 않는—기인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런 식의 편향적 태도는 위안부 문제가 오래 이어지면서 지원 단체를 중심으로 한 인식만이 너무나 깊이 확산되고 정착된 결과입니다.

반대로, 일본 언론에는 커다랗게 보도된 베트남 한국군위안소 보도는 한국에 는 거의 보도되지 않거나 뒤늦게야 알려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런 식의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정보의 차단과 왜곡이, 한국에서는 이 20년 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미국학자에 이어 5월말에는 일본역사학자들의 성명도 발표되었습니다, 하지 만 여기엔 미국학자들의 성의를 다한 성명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들의 성명 내용은 일본 정부와 이 문제에 회의적인 일본 국민들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인 내용이었습니다. 내용이 틀려서라기보다 는, 해야 할 이야기의 반 밖에 없는 성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본 신문 중에 이 성명을 보도한 곳이 <아사히신문>과 <도쿄신문>뿐이라는 사실이 그런 정황을 설명해 줍니다.

이 성명에 대해 침묵한 일본 언론들 중에는 위안부 문제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 하는 언론도 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대신 이들의 주장 성명 발표 직후에 일본인터넷에서는 이들에 대한 비판과 야유가 들끓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갖게 된 인식을 이 성명이 담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그런 언론과 국민들에 대한 이해가 없는 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언론들은 이 성명이 일본을 대표하는 것처럼 대서특필했고 참여인원이 얼마나 많은지만 강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도 회원인데 학회 가 자신에게는 의견을 묻지 않았고, 앞으로도 참여할 생각이 없다고 페이스북에 쓴 일본인학자의 존재는, 그러한 접근의 문제점을 보여줍니다.

일본인 학자들의 성명은, ‘본인의 의사에 반한’ ‘연행’도 ‘강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군인에 의한 직접 연행’을 ‘강제연행’이라고 말해왔던 기존인식 과의 차이에 대한 설명은 여전히 없었습니다. 공식적인 설명을 하지 않기 때문에, 주요논점의 내용을 설명 없이 바꾼다는 식의 야유를 샀던 것입니다.

또 ‘본인의 의사에 반한 연행’의 주체를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설사 군인이었다 해도 그런 케이스가 오히려 소수이고 그렇게 간 경우도 군이 돌려보내거나 다른 곳에 취직시킨 경우도 있다는 사실, 즉 ‘본인의 의사에 반해’ 가게 된 것까지 국가나 군의 공식정책이나 방침이 아니었다는 것, 즉 어느 쪽이 예외적인 일이었는지도 말해야 공정할 것입니다. 업자가 인신매매했을 경우 군이 어디까 지 관여할 수 있었는지도, 비판이든 옹호든 명확하게 그 구조를 언급해야 오해를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신매매의 주체가 일본인 것처럼 오해하게 되고 결국 언제까지고 정확치 않은 비판과 일본정부가 경직되는 일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성명은 위안부를 ‘성노예’라고 규정했습니다. 물론 위안부에 ‘성노예’적 인 측면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성매매적인 측면이 있다 해도 불공정한 차별구조가 있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노예적’인 구조를 지적하는 일과 ‘성노예’라고 말하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듣는 이들이 떠올리는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에, 결국 일반인들의 이해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습니다. 성노예였다고 한다면 그들의 직접 ‘주인’이 업자였고 강제노동을 시킨 것도 이윤을 얻은 것도 업자였다는 사실도 말했어야 총체적인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청업자보다 일감을 준 이를 비판하는 일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이름만으로 비판할 경우에는 뒤에서 언급할 여러 가지 모순이 생깁니다. 그런 모순을 무시한 것이 그간의 지원 단체 혹은 지원자들이 반발을 산 이유입니다.

성명은 위안부 문제가 “당시의 국내법 및 국제법에 반하는 중대한 인권 침해였 다”고 했지만 이는 ‘강제연행’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인신매매와 이송에 관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부분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인신매매’임을 공적으로 말하는 경우 지원 단체와 연구자들이 그간 주장해온 내용은,

1. “인신매매임을 알고도 받아들였으면 불법”

2. “일본에서는 매춘업에 종사하는 여성이라도21세 이하는 도항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조선에서는 21세 이하도 가능하도록 해서 어린 소녀들을 위안부로 동원 가능하도록 했다”

3. “일본에서는 취업사기나 인신매매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법적규제 가 존재했는데 식민지에서는 그렇지 않아 사기나 인신매매가 쉽게 이루어지 도록 했다”

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본 것처럼 이 주장들엔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또한 ‘조선반도의 일본인여성’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탓에 일본-내지와 조선에 서의 모집방법에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전제한 결론으로 판단됩니다.

중요한 건 일본이건 한국이건 지원 단체나 역사학자들은 조선인 위안부에 관해서는 더 이상 “강제연행”이 아니라 ‘인신매매’를 바탕으로 이런저런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지원 단체는 그렇다는 사실을 오래도록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아, 국민의 다수가 여전히 군인이 강제연행 한 것으로 생각하거나 소수만 속임수나 인신매매였다고 생각하는 식의 인식편차와 그에 따른 혼란을 낳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외국에서는 그 의미하는 바를 달리 하는 ‘강제연행’설을 주장했고 그에 따라 한일국민간의 갈등은 커졌습니다. 그리고 설사 위안부 문제가 해결된다 해도 한일 간 앙금은 쉽게 풀어지지 않을 상황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된 원인을 한일이 함께 생각해야 하고 그런 상황을 전제로 해서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일본 지원 단체의 용어사용 변화에도 주목해야 하고, 왜 일본에서 호응을 얻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도 종합적으로 생각하고 다른 틀로 접근하지 않으면 위안부 문제 해결은 요원합니다.

3.역사와 마주하는 방식

1) 지적 태만으로부터의 탈피

그러나 그런 문제의식을 담은 저의 책은 고발을 당했고 결국 일부를 삭제 출간하는 사태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국의 위안부』 및 저의 다른 책들은 ‘친일’의 의구심 속에 이 일 년을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친일’이라는 딱지는 익숙하지 않은 생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는 지적 태만을 드러내는 사고의 표현입니다. 복잡하고 섬세한 문제들을 단순하고 거칠게 풀어 결과적으로 폭력을 만드는 사고로 이어집니다. 무엇보다 그런 딱지를 두려워해 침묵하거나 딱지를 붙이는 쪽으로 돌아서고 마는, 전체주 의에 가담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에 저항하지 않는 한 모두가 대세와 다른 말을 하지 못하는 자폐적 공간은 확장되고 사고가 자유로워야 할 젊은 학생들조차 자기검열에 급급한 상황은 이미 익숙한 풍경입니다.

그런 지적태만은, 지원 단체 등이 중심주체가 된 일본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을 허용했고, 결과적으로 한국사회에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만드는 데에 일조했습니다. 특히 정대협을 비롯한 피해자관련 혹은 영토문제 관련단체 들은 위안부 문제에 관해 언급할 때마다 일본을 군국주의국가로서 비난해왔고 그 결과, 2015년 현재, 한국인의 70퍼센트 이상이 일본을 군국주의 국가로 생각합니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지나도록 사죄와 반성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전히 타국의 영토를 호시탐탐 노리는 국가라는 이미지를 갖도록 만든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인식이 불식되지 않는 한 한일 간의 화해는 어려울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과정의 결과로, 2015년 현재의 언론과 외교와 지원운동이 지극히 자폐적인 상황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현재의 일본에서는 위안부를 위한 ‘아시아여성기금’ 의 모금에 참여하는 이들의 존재를 더 이상 상상하기 힘들만큼 일본의 국민감정이 악화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 도 아직 우리의 언론과 외교와 운동은 여전히 일본의 혐한파를 늘릴 수밖에 없는 사고와 주장만을 반복 중입니다. 위안부 문제를 생각하는 일은, 늦었지만 이러한 현 상황을 파악하고 일본을 총체적으로 아는 일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2) ‘폭력의 사고’를 지양하기

중요한 것은 그런 지적태만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보는 일입니다. 사실, 현재의 한국의 일본관은 순수한 일본관이라기보다 위안부 문제가 그런 것처럼 일본의 진보/이른바 양심적 시민/지식인/운동가들의 전후/현대 일본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전후일본의 반성과 협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했던 불신의 태도가 이들의 .자국에 대한 반성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의 자국비판은 정권 획득—즉 정치와 이어져 있고 옳고 그르고를 떠나 일본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국가’를 상대해야 하는 한일 간 문제에서, 90년대 이후, 진보나 보수의 반쪽 자국관에 근거해 일본을 이해해 왔다는 것은 그 인식의 옳고 그르고를 떠나 한국의 대일인식이 절름발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요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80년대 후반까지 한국은 반공국가였고 그 기간 동안철저하게 탄압받아온 진보좌파가 한일시민교류의 주역이 되었다는 것이 이러한 대일인식의 배경에 있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현대일본의 정치에 비판적이었던 이들이 여야합 작의 사죄 보상방식이었던 ‘아시아여성기금’을 불신하고 배척했고, 한국 지원 단체가 이에 동조함에 따라 결국 90년대의 일본의 사죄와 보상은 완수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15년 후, 우리는 지금 일본 언론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보도조차 하지 않는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철저한 ‘정의’를 말하고 일본규탄의 선두에 섰던, 일부 재일교포를 포함한 일본 진보의 사고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한번쯤은 볼 필요가 있습니 다.

재일교포 일부와 일부 진보세력의 일본에 대한 시선은 대단히 부정적입니다. 그들은 전후 일본이 실은 계속된 식민지주의를 이어받은 공간이었다고 말합니 다. 그렇게 부정하는 근거는 천황제 유지, 재일교포 차별, 일본인을 납치한 북한 때리기 등입니다. 분명, 그들이 말하는 대로전후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고 식민지를 만든 천황제를 청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현대일본이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이 청산되기는커녕 재일교포를 포함한 혐한스피치가 문제시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것만 본다면 이들의 전후관이 옳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논리라면, 천황제가 폐지되지 않는 한 한일 간의 화해는 불가능하다 는 결론이 나옵니다. 국민간의 화해-감정적인 신뢰회복 문제를, 천황이라는 시스템문제로 환치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국민들 간의 화해가 천황의 존재여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케 하는 지극히 가부장적인 사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설사 현 천황이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다 해도 국민들이 그에 따라 불신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되면 소수 정치가의 생각에 모든 국민이 휘둘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간의 한일 갈등은 바로 이러한 생각에 바탕 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한 두 명이 식민지 지배 사죄에 부정적인 말을 하면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나라전체가 대립하는 소모적인 정황이 반복되어 왔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천황제 유지는 실은 일본의 전쟁금지헌법9조와 맞바꾸어진 것입니다.(小関)

그러나 전후 일본에 대한 불신을 담아 한 재일교포학자는 일본사회에 가장

비판적인 일본의 진보지식인들조차 비판하고 일본을 전부정합니다. 일부재일교 포의 인식이 한겨레 독자들에게 공유되고 전파되면서 일본에 대한 불신을 심고, 전후일본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전달하려 한‘화해를 위해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확산된 것은, 그런 식의 일본불신의 확산과 궤를 같이 합니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한국의 일본관은 일본의 재일교포에 의해 만들어진 부분이 큽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① 지배-가부장적 사고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지만, ‘화해를 위해서’가 비판받게 된 것은 제가 재일교포의 가부장제비판을 한 이후부터입니다. 그리고 이후 한국에서도 『제국 의 위안부 비판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 위안부 문제연구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남성학자였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일정치의 주역은 체제의 중심에 있어 왔던 그들—남성들이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제국 의 위안부나 『화해를 위해서』는 아버지와 오빠의 허락을 얻지 않고 일본과 연애를 시작한 누이이자 딸 같은 존재입니다. 이들의 분노는 자신들의 지휘권을 벗어난 여성에 대한 분노입니다.

물론, 위안부의 연애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화해를 위해서’를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이라고 규정하고 마치 국가야합주의이 거나 위험한 스파이의 시도로 간주하도록 만드는 시선은 다름 아닌 가부장적 시선입니다. 그 책들이 ‘민족’의 것으로 지켜져야 하는 소녀이미지를, 혹은 어머니의 이미지를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고발은 반대한다’면서도 침묵하는 일로 고발에 동조한 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매춘’, ‘동지’라는 단어를 그들이 특별히 불편해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반체제를 표방하는 진보세 력이 ‘국가의 힘’을 빌어 처벌하려 하는 모순이 일어나는 이유도 그런 심리기제의 결과입니다. 한 지방시장이 저를 수천 명의 군중에게 ‘친일파’라는 딱지를 붙여 먹잇감으로 던져주고 난도질 하는 일이 발생한 것도 마찬가지 구도 속의 일입니 다.

소녀에 대한 집착은 가부장제적 한국사회의순결성에 대한 욕망을 말해 줍니 다. 또한 매춘에 대한 차별의식을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소녀상을 통해 지켜지는 것은 위안부가 아니라 ‘한국인’의 순결성 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인’의 긍지를 위한 것입니다. 지배당했던 자신—유린되었던 자신을 소거시키고 싶은 욕망의 발로입니다. 즉 한 번도 강간당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상상이 소녀상을 욕망케 하는 것입니다. 가부장제적 의식은 자신의 순결성과 순혈성을 상정하고 ‘한국’이라는 고유명 을 움직이지 않는 아이덴티티로 호명합니다. 그건 ‘일본’ 에 대적할 아이덴티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사고가 주도적인 상황에서는 국제결혼 한 이들은 목소리를 낼 수가 없습니다. 혼혈인들은 목소리를 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근대국가는 그런 순혈주의에 근거하여 가부장제를 지탱하고 소수자를 소외시켜 왔습니다. ‘일본인’, ‘한국인’의 순수성을 벗어나는 아이덴티티를, 잡종으로 취급하고 변방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중앙중심주의를 지탱하

고 내셔널 아이덴티티를 재생산해 왔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의식은 천황제를 신봉하는 일본우파와 같은 의식이라는 점입니

다. 비판자들이 곧잘 ‘싫으면 떠나라!’라고 말하는 의식은 그런 의식의 발로입니 다. 그들에겐 하나의 공동체는 균질한 공동체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일본에서 재일교포를 소외시키는 사고와 동일한, ‘혐한스피치’와 다를 바 없는 폭력적 사고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고는 가부장제적 지배의식이 만듭니다.

② 공포-면죄/의심

다른 모습들을 보려하는 시도가 그저 일본의 책임을 희석시키는 ‘물 타기’로 규탄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성’의 문제인 한 그 첫 번째 책임은 ‘남성’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고유명에만 책임을 집중시키 는 방식은 계급과 젠더책임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가부장제적 사고를 가진 이들이 민중과 국가의 힘을 빌려 탄압에 나섰던 것은 그런 구조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런 행위는, 민간인과 국가에 의해 자신의 삶을 빼앗기고 그저 일본인남 성의 비호라도 있어야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위안부에 대한 남성/국가의 거부감과 궤를 같이 합니다.

업자나 남성의 책임을 부정하고 ‘구조적인 악과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서경식, 104)라고 간주하는 발언은 일본-거대악, 조선-소악으 로 간주하는 일로 ‘소악’을 면죄합니다. 다른 책임을 보는 일이 ‘일본을 면죄’한다 는 생각은, 그렇게 다른 책임—소악의 책임을 은폐합니다. 그렇게 책임주체를 고정시켜 ‘피해자’라는 이름의 ‘무책임체계’를 만듭니다.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한 남성학자들이 한결같이 ‘위험’하다는 표현을 썼던 것은 그런 의식의 발로입니다. 그 때문에, 이 책이 순수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의도가 있고 그를 위한 치밀한 전략에 의거해 쓰인 것이라는 식의 주장을 하게 됩니다. 반복적으로 『제국의 위안부』나 『화해를 위해서』의 기술이 ‘레토릭’, ‘전략’이 담긴 표현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도 공동체의 규범을 어긴자로 보이도록 하는 배제전략입니다.

③ 저항이라는 이름의 폭력

문제는 이러한 사고가 폭력을 지탱하는 구조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한 재일교포는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는 나머지, 9/11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이는 태도까지 취합니다.(서경식, 『언어의 감옥에서』) 말하자면 그자신이 부당하다 고 생각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저항이라는 명목으로 폭력을 용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용인되는 한 세상에서 폭력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일본 전후에 대한, ‘이어지는 식민지주의’라는 이름의 불신은 결국 ‘저항’이라는 이름의 ‘이어지는 폭력주의’를 생산합니다.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저항처럼 보인 비판과 고발이, 국가를 동원한 폭력에 그치지 않고, 군중들의 적개심이라는 폭력을 불러일으키려 했던 것도 그 연장선상의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저항’이라는 기제를 용인케 했던 ‘서벌턴’의 의미도 다시 재고되어야 합니다. 피해자의식은 하층계급은 고정되어 있지 않은데도 고정된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고, ‘저항’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허용합니다. 일본에 대한 무차별적/폭력적인 발언이 허용되는 것도 그런 구조 속의 일입니다. 이제 피해자 도 강자가 될 수 있다는 점, 서벌턴의 위치성도 전도될 수 있다는 점도 인식되어야 합니다.

하나의 고유명에 의거해 민족/국가 대립을 강조하는 일로 여성들에 대한 착취를 덮고 ‘민족’의 딸이 되기를 요구하는 가부장적 담론—지배와 저항과 공포의 담론은 폭력을 막지 못합니다. 혼혈과 변방의 사고를 억압하고 모두가 똑같은 ‘일본인’, 혹은 ‘한국인’이 되어 대립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틀에서 벗어나는 시도에 대해서는 마녀사냥적인 배제를 촉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역사를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총체적으로 기억해야 합니 다.

‘예외/단편/파편’등의 단어로 존재한 기억을 소수화하고 억압하지 않아야 합니다. 차별과 억압이 중심인 공간에서의 ‘다른’ 기억은 대세에 저항했다는 의미에서 오히려 기억해야 하고 이어받아야 할 하나의 ‘정신’입니다.

동시에, 중심적인 다수의 체험도 기억되어야 합니다. ‘아시아여성기금의 기금 의 망각’은 기억의 소거입니다. 한국인에게 사죄했던 이들을, 그들이 ‘국가’를 대변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그들의 마음을 역사에서 배제한 폭력입니다. 그 결과로 일본인의 다수의 선한 마음은한국인의 기억에서 무시되고 소거되었습니 다. 그들은 ‘아직 전쟁을 기억하던 이들이 많았던 시대의 중심기억’이기도 했습니 다. 그들이야 말로 ‘전후일본’을 대표하는 이들이었고 그것이 바로, 그들이 기억되어야할 이유입니다. 최근 십여 년의 혐한은 더 젊은 층이 중심입니다. 전쟁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의 기억보다 전쟁과 지배를 기억하는 이들의 기억이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선택적인 기억을 강요하거나 은폐하는 ‘기억의 정치학’을 넘어서서, 있는 그대로의 과거와 마주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해든 협력이든, 봉인된 기억을 보는 일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시도야 말로 오히려 과거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보다 명확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이덴티티는 하나가 아니고, 동시에 용서와 비판의 대상을 보다 구체화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거부는, 우리를 언제까지고 트라우마를 안은 허약한 자아로 살아가도록 만듭니다.

한일협정 50년, 해방 70년을 맞는 금년, 더 늦기 전에, 한일이 함께하는 그런 새로운 시작이 필요합니다.

출처: 동아시아 화해와 평화의 목소리 심포지엄 – 역사를 마주하는 방식
일시: 2015년 6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