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 역사의 거울 앞에서 (경향신문)

‘제국의 위안부’ 토론과 논쟁 사이
맥락 생략된 텍스트 읽기 애석
상징체계가 주입한 습관 깼으면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 토론과 논쟁에서 ‘텍스트는 컨텍스트(맥락)와 함께 읽어야 한다’는 텍스트 읽기의 기본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건 애석한 일이다. 맥락이 생략된 텍스트 읽기는 오독이나 악의적 왜곡에 이용된다. 특히 이 책처럼 민감한 사회적 주제를 담은 텍스트인 경우, 논쟁은 주제와 관련하여 이미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문화적 상징체계에 포획되어 버린다. 다들 진지하고 열띤 얼굴로 견해를 말하지만 실은 그 상징체계가 주입한 이런저런 주문을 암송할 뿐이다.

눈곱만큼이라도 유의미한 논쟁이 되려면 상징체계를 박차고 나가, 비로소 내 견해를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그 주제에 대한 나의 즉각적이고 단순명료한 반응과 판단을 의심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제국의 위안부>에서 가장 문제가 된 ‘매춘부’ ‘동지적 관계’ 등 텍스트 조각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 책의 적확한 요약이 되기도 하고, 책에 없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보수 세력은 오랜 권위주의 독재 시절을 통해 반일 정책을 표방하며 일본 극우세력과 야합하는 이중 전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그들의 겉 다르고 속 다름을 개탄하는 데 그치는 건 그들의 함정에 빠지는 일이다. 문제는 ‘반일’이라는 개념 자체의 기만성에 있다. 일제 식민지 경험은 한국 민족과 일본 민족이 아니라 일본 지배계급과 한국 민중 사이의 일이었다. 일본 민중 역시 제국주의 전쟁에 동원되고 착취당했으며, 한국의 지배계급은 일본 지배계급과 이해를 같이했다. 해방 후 지배계급으로 남은 그들은 모든 것을 민족 간의 문제로 은폐하고 기만했다.

그런 기만은 진보 세력에게도 답습된다. 한국 사회가 일본 제국주의에 이어 미 제국주의의 지배와 영향을 받게 된 건 분명한 사실이다. 진보 세력 안에서 한국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중첩된 사회’라 해석되곤 했다. 진보 운동은 ‘민족주의+진보(계급)’라는 모순적 상태를 지속해왔다. 그리고 민족주의를 계급이라는 ‘체’로 제대로 걸러내지 못함으로써 진보(계급)의 괴멸도 지속되었다. 조직노동(민주노총)이 비정규 불안정 노동이라는 노동자 계급의 보편적 현실을 외면하고, 진보정당이 분당과 합당을 반복하면서 지리멸렬해진 내적 원인도 결국 그것이다.

‘민족주의+진보’의 폐해가 얼마나 깊고 광범위한가는 ‘디아스포라’에 천착하는 재일 지식인 서경식이 박유하 비판의 물꼬를 텄다는 사실과, 한국의 진보 지식인 가운데 가장 단호한 계급적 관점을 고수해온 박노자가 이 논쟁에서만은 ‘탈계급적’ 태도로 일관한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두 사람은 박유하의 견해가 일본 우익에 봉사한다는 식의 비난과도 선을 긋지 않는다. 어떤 사회적 견해가 사회적으로 악용될 소지를 우려하는 건 필요한 일이나, 반대와 금지의 근거로 삼는 건 파시스트의 방식이다.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반공극우 세력의 주요한 탄압 논리는 ‘북한에 봉사한다’였다.

<제국의 위안부>는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으로 대변되는 기존의 위안부 문제 활동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정대협의 활동은 ‘위안부 소녀상’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소녀상이 담은 ‘순결한 소녀’라는 정체성은 사실관계와 문제의 본질을 동시에 거스른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동정녀든 창녀든 예수의 어머니이듯, 모든 생존 위안부는 ‘순결한 소녀’라는 정체성에 부합하든 안 하든 위안부 문제의 피해자다. 일본의 보상금을 받은 위안부에 대한 정대협의 부당한 태도는 위안부 운동이 생존 위안부를 위해 존재하는지, 생존 위안부들이 위안부 운동을 위해 존재하는지 되묻게 한다.

‘민족주의+진보’의 수렁에서 자유롭지 않은 한국의 진보적 인텔리들이 아우슈비츠의 학살자 아이히만 재판 당시, ‘민족 배신자’로 매도되면서도 ‘악의 평범성’을 설파하던 한나 아렌트를 상찬하는 건 인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 상찬이 지적 허세가 아니려면 온전하게 당시 상황에서 유대인이 되어 봐야 한다. 아렌트는 일생의 벗들에게까지 절교당해야 했다. 그런 상상 속에서 아렌트에 대한 분노가 일어난다면 그게 바로 박유하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지난 역사, 남의 역사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갖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의 역사에선 쉽지 않다.

우리는 역사의 거울 앞에서 성찰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친일 문제에 대해 단순명료한 태도를 보이는 나는, 독립이나 해방을 좇는 사람은 이미 ‘비현실적’이라 치부되던 일제강점기 후반부에 살았어도 같은 태도를 보였을까. 그것은 현재의 지배체제, 즉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내 태도로 추정될 수 있다. ‘현실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아이를 밤늦도록 학원을 돌게 한다면, 신자유주의의 다른 분파인 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유일한 사회적 희망이라 생각한다면 그 태도는 허상일 것이다.

그것은 나의 태도가 아니라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문화적 상징체계가 만들어낸 습관일 뿐이다. 우리는 그 습관을 직시하고 해체해야만 한다. 만일 누군가가 처음으로 우리의 습관을 적확하게 비판하거나 해체하려 든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진즉 해체했어야 한다며 고마워할까, 아니면 아렌트 앞의 유대인들처럼 격렬하고 집단적인 반감을 보일까. 박유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그 답을 보여준다.

원문: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역사의 거울 앞에서 (경향신문)

가라타니 고진, 박유하 씨의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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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 씨의 작업> 가라타니 고진

최근 들어 한일·중일간 긴장이 높아진 것은 일본정부가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내(일본)내 제반 문제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대외적인 긴장/대립을 이용해서 일본을 언제든 전쟁가능한 체제로 만들려 하고 있다. 따라서 위안부문제든 영토문제든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생각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내가 일본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내가 일본국민이기 때문이다. 외국의 경우는 그 나라 국민들이 (자국을) 비판할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에도 그런 이들이 많이 있다. 나는 그러한 상호간 신뢰를 바탕으로 활동해 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안되는 일이 있다.

그 점에서, 나는 적극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서서 발신하려 해 온 박유하 교수에게 주목하고 있다. 그녀의 작업은 한국에서는 친일적이라고 비난 받고 일본에서는 반일적이라고 비난 받을 것이다. 그것을 처음부터 각오하고 오랫동안 위안부문제에 천착해 온 박유하 교수에게 나는 깊은 경의를 품고 있다.

(2014 년 8 월)

<원문>

パク・ユーハ氏の仕事 柄谷行人

近年、日韓や日中間の緊張が急激に高まって来たのは、日本の政府があえてそれ を作りだそうとしているからだ。それによって、国内における諸問題を打ち消すた めである。そして、対外的な対立・緊張を利用して、日本をいつでも戦争できる体 制に変えようと図っている。したがって、従軍慰安婦問題であれ領土問題であれ、 それらを解決する気などさらさらない。

私がこのように日本の政府を批判するのは、日本の国民だからだ。外国に関し ては、その国の国民が批判するだろうと思う。実際、韓国にもそのような人達が 大勢いる。私はこうした相互的信頼にもとづいて活動してきたのである。とはい え、それだけではすまないことがある。

その点で、私は、積極的に日本と韓国の間に立って発言しようとしてきたパ ク・ユーハ氏に注目している。彼女の仕事は、韓国では親日的と非難され、日本 では反日的と非難されるだろう。そのことを最初から覚悟して、従軍慰安婦問題 に長年取り組んできた氏に、私は深い敬意を抱いている。

(2014年8月)

와카미야 요시부미, 나도 ‘우익의 대변자’라고 부르라 (동아일보)

와카미야 요시부미 (일본국제교류센터 시니어펠로, 전 아사히신문 주필)

역사교과서, 독도, 위안부 다룬 박유하 교수의 ‘화해를’ ‘제국의’
일부 한국인 “日우익 대변” 비난, “위안부 명예 훼손했다” 고소
치밀한 논리, 균형적 시각으로 한일간의 난제 해결 애쓴 朴교수의 용기와 노력 지지

원문: [와카미야의 東京小考] 나도 우익의 대변자라고 부르라 (동아일보)

장정일,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시사IN)

장정일 소설가

한국과 일본은 군 위안부 숫자를 5만명에서 20만명까지 달리 추산한다. 여러 이유로 총체적 연구가 쉽지 않다. <제국의 위안부>는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려는 지은이의 강박 때문에 총체적 관점이 휘발되고 말았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대한해협이 아니라 군 위안부 문제가 놓여 있다. 실체를 발견하는 작업에서부터 해결 방안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는 경험의 소유권을 가진 피해 당사자가 엄연히 생존해 있기에 오히려 총체적 연구가 쉽지 않다. 이미 ‘일본군에 의한 조선 부녀자 강제 연행’이라는 단 한 줄로 군 위안부에 대한 상식이 완성된 터에, 그것과 다른 접근이나 그 어떤 보충도 친일파라는 지탄을 피하기 힘들다. 하지만 군 위안부의 복잡성은 아직 그 숫자마저 명확하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은 ‘20만명’설을 선호하고, 일본 연구자는 5만~7만명으로 추산하며, 만주에 주둔했던 한 일본군 병사는 “사단 군인 2만명에 50명” 정도라고 증언한다.

만주사변 이후 조선·중국·남양 군도에 일본군 300만명이 있었으니, 20만명설이 맞다면 일본군은 병사 15명당 1명의 조선인 군 위안부를 둔 게 된다. 현재도 우리나라에 주둔하는 미군 부대 근처에 반드시 기지촌이 있듯이 동서고금의 모든 군대는 병사의 성 욕망을 해결할 수단을 강구한다. 그 사실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저 수치는 정상이 아니다. 일본군은 새로운 점령지마다 현지인으로 이루어진 군 위안소를 추가한 데다, 그것도 모자라 강간을 일삼았다. 이 모든 게 사실이면, 일본은 원자폭탄이 아니라 불철주야 성폭행만 하느라 전쟁에서 진 거다. 참고로 최근 중국 연구자들은 최소 20만명의 중국인 군 위안부가 있었고, 강간을 당한 중국 부녀자의 수는 그것보다 많다고 주장한다.

20만명설은, 일제가 전쟁에 필요한 노동력을 징발하려고 만든 정신근로대와 군 위안부를 구별하지 않은 숫자다. 한국은 피해를 강조하고 일본의 야만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군 위안부의 숫자는 늘리고, 그들의 평균연령은 낮춘다. 하지만 20만명이 아닌 5만~7만명이면 일본의 야만성이 경감되고 책임이 없어지는가? 또 조선인 군 위안부의 평균연령이 25세면 10대는 아니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일제를 가리켜 인간적이었다고 할 것인가? 어느 경우든, 실체를 밝히는 것이 일본 옹호의 논리가 될 수는 없다.

일본은 고노 담화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군인들이 ‘관리’는 했지만 직접 모집하거나 영업은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해왔고, 바로 이것이 군 위안부 실체를 규명하는 가장 큰 쟁점이 되고 있다. 그러니 ①모집 ②영업 ③관리로 나누어 이 문제를 살펴보자.

①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일제 35년의 성격을 들여다봐야 한다. 2012년, 중국·인도네시아·베트남 등지에서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 연행 증거가 나오기도 했다지만, 조선은 전쟁터가 아니었다. 한·일합방이 된 1910년 이후, 조선은 일본과 형식상 한 나라가 됐다. 1등 시민인 일본인과 2등 시민인 조선인의 차이는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에게 당하는 차별보다 더 컸으면 컸지 작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조선은 행정제도와 법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군 위안부 대량 조달에는 잘 구비된 행정력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등에 업은 업자와 포주가 활동했다. 이때 취업 사기를 치러 온 업자에게 현지의 정보를 귀띔해주고 그들에게 공신력을 빌려준 장본인이 주민 사정에 밝은 면장이나 이장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강제 연행 사례가 전무하다고 뻗대는 것은 억지일 것이다.

일본군의 군 위안소 운영 여부를 따지는 ②는 상식적으로 풀이할 수 있다. 무기와 식량은 군대에 필수적이지만, 군인이 직접 총을 만들거나 땅을 갈지 않는다. 총은 방위 업체가, 쌀은 농부가 생산한다. 마찬가지로, 지역과 시기에 따라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군 위안소는 민간 업자에게 맡겨졌을 것이다.

③은 일본 정부가 인정한 것이다. 군대가 위안부의 위생을 직접 관리한 이유는 성병이 전력 차질을 낳기 때문이다. 국내 같으면 보건소가 했겠지만 전쟁 지역에서 그 일을 도맡아 할 기관은 군대밖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군대는 군 위안부의 이송에도 관여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① ②와 직접 연관된 정황이 미미하다고 해서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 그리고 천황(일왕)이 면죄되지는 않는다. 우선 일본군이 일본 정부에 위안부 설치를 요청했던 증거가 뻔히 나와 있다. 더욱이 애초에 일제 식민이 없었고,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군 위안소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광수나 윤치호의 친일을 단죄하는 이유

일제강점기의 조선은 저항과 협력이 공존했던 공간이다. 2등 시민이라는 차별에도 불구하고 한·일합방 이후에 태어난 가난한 계층과 여성 가운데 혹여 일본을 조국으로 착각하고 ‘동지의식’을 느낀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20여 년 넘게 일제 통치에 내면화(세뇌)된 때문이지 결코 그들의 허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견문을 넓힐 수 있었던 이광수나 윤치호의 친일을 단죄하는 것이다. 그들은 일제에 세뇌된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일본을 선택했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는 “‘강제 연행’을 하지 않았다 해도 ‘강제로 끌려가는’ 이들을 양산한 구조를 만든 것이 일본군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며, 그런 반성 위에 일본 정부가 “새로운 사죄와 보상”을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이라고는 “우리 안에도 위안부들에게 ‘사죄’해야 할 이들은 있다”라는 것 정도다. 하지만 사태를 하나로 묶고 파악하는 이런 총체적 관점은, 군 위안부를 착취한 일본군의 “하나가 아닌”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려는 지은이의 강박 때문에 휘발되고 말았다. 군 위안부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기억과는 다른 기억을 보충하겠다고 그들과 일본군 사이에 흘렀던 감정적 교류마저 나열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총체성을 흠집 내는 이런 다양성(나열)이 오해를 양산한다.

2013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 시민공원에 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부끄러웠다. 원래 저 소녀상은 미국에 있기 전, 먼저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조성된 독립공원에 세워져야 했다. 하지만 2008년 광복회를 비롯한 독립운동 유관단체들은 독립공원 내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난을 보여주는 박물관을 세우는 것은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운동을 폄하시키는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면서 박물관 건립을 저지했다. 그래서 서울 마포구 성미산에 따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지었다. 이처럼 민족의 역사는 자신의 가장 영광스럽고 순수한 기억만 보존하고 거기에 맞지 않는 것은 억압한다. 한때는 저런 잘못된 구습의 피해자였던 일본군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가 <제국의 위안부>를 놓고서는 자신과 다른 기억을 발굴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했다.

원문: 장정일의 독서일기,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시사IN)

이상엽, ‘위안부=비극의 소녀상’ 뒤집는 두 가지 시선? (프레시안)

[프레시안 books] 안세홍의 <겹겹>·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한 장의 사진이 유난히 눈길을 끈다. 안세홍의 책 <겹겹>(서해문집 펴냄)의 35쪽에 실린 사진을 찍은 사진이다. 흙바닥에 살포시 놓인 흑백 가족사진은 프레임 안의 프레임으로 존재한다. 사진이 사진을 찍을 때는 그것이 유일무이한, 복제될 수 없는 그 무엇임을 암시한다. 사진이지만 원본은 사라지고 프린트된 한 장만이 세상에 남았을 때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한 ‘아우라’라 존재한다. 그 아우라는 사진이 아름답다거나 예술적이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그것이 기록한 무엇이 개인에게든 사회에게든 대체할 수 없는 가치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로 자살골 넣은 전범기업 미쓰비시

이 사진은 중국 훈춘시 동닝에서 홀로 살아가는 이수단(91) 할머니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유일한 가족사진이다. 고향이 평양인 할머니는 이 사진을 북조선과 서신 왕래가 가능했던 70년대 초 전달받았지만 73년을 마지막으로 주소불명으로 연락이 끊어졌다. 사진을 보건대 1940년 할머니가 평양을 떠나오던 그해쯤 찍힌 사진이다. 할머니는 19살에 동네 처녀 3명과 함께 군복 입고 칼을 찬 일본의 앞잡이에게 “돈도 주고 옷도 주고, 밥해주는 허드렛일을 하는 줄 알고” 만주로 끌려왔다. 하지만 실상은 제국 군인들을 몸으로 위안하는 것이었다. “하루에 군인 8명 내지 10명 정도 받았어.” 할머니는 일본인 부부가 운영하는 아청위안소에서 군표를 받으며 일본군의 위안부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으며 살았다. 그리고 중국에 남았다. 이 책에는 이수단 할머니와 같은 처지의 여성 8명에 대한 이야기가 사진과 글로 세밀하게 기록돼 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처음 만난 건 1996년이었다. 그때 한 잡지의 사진 화보 취재를 위해 할머니들이 있는 ‘나눔의 집’을 찾았다. 그 뒤로 17년 동안 전국에 계시는 할머니들을 만났다. 처음엔 할머니들의 낯가림이 심했다. 하지만 점차 가까워지면서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는 할머니들의 고통과 한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2001년부터는 중국에 살고 있는 할머니들과도 만났다. 나라 없이 떠도는 그들의 비참한 실상은 과거의 삶을 그대로 연장시키고 있었다. 그런 할머니들을 보며 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우선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사진으로 그들의 존재를 알리자고 결심했다.”

사진가 안세홍(41)씨는 두 달 전 일본에서 포토에세이집 <겹겹>을 출간했다. 한 달 사이 한국에서도 동명의 책을 낸 것이다. 17년 가까이 진행된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작업이 봇물처럼 터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대표적인 전범기업인 미쓰비시 덕이었다.

개인이 쌓아올린 작은 아카이브

올해 도쿄 긴자의 니콘 살롱에서는 안세홍의 사진전 <겹겹>이 예정되어 있었다. 안 씨는 이곳에 초대전을 신청했고 저명한 일본 사진가와 평론가로 구성된 위원회는 1월 그 요청을 승낙했다. 하지만 5월쯤 니콘 살롱은 일방적으로 취소 통지를 했다. 여러 차례 대화를 요구했지만 묵살 당했다. 결국 도쿄지방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하기에 이르렀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전시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이 사태에 배경에는 미쓰비시가 있었다. 니콘은 한반도 강점의 첨병 역할을 했던 전범기업 미쓰비시의 계열사였다. 그들은 일본 군국주의의 치부를 드러내기 싫었던 것이다. 결국 도쿄 전시는 우익들의 반대집회 속에서 어렵게 진행되긴 했지만, 미쓰비시 그룹과 니콘은 사진전을 계속해서 훼방하고 있다. 올 9월에 열기로 예정돼 있던 오사카 니콘 살롱 전시 역시 장소 제공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로 인해 안 씨의 사진전은 미국 의 주요 뉴스로 취급됐고 미국에서도 동명의 사진전을 열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출판도 급물살을 타 일본어판에 이어 한국어판도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안 씨는 “도쿄 니콘 살롱 전시는 2주 동안 7900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대부분 일본인이었는데 20, 30대가 관람객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이들은 위안부에 대해 잘 몰랐는데 사진을 통해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고, 앞으로 자신이 어떤 실천을 하면 좋을지도 물었다. 사진전이 일본 곳곳에서 계속 이어진다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데 큰 힘이 되리라는 희망을 체험했다”고 이야기한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개인이 이룰 수 있는 최대한의 ‘아카이브’다. 책에 담긴 글 사진 모두 작가의 감정이 억제되어 있다. 애초 정신대문제연구소와 함께 이루어진 기록 작업에서 출발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후 진행된 개인적인 작업도 이 선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글은 모두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클로즈업이 절제된 사진들은 인물의 감정을 곧바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은 포토에세이라는 대중성을 표방해도 역사 연구자들을 위한 1차 사료의 역할까지 훌륭히 해내고 있다.

기억과 망각으로서의 ‘소녀상’

사진은 프레임이라는 공간의 제약과 조작 가능하다는 어두운 약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탄생에서 지금까지 ‘증거’하는 역할을 잘 수행해 왔다. 사진에 담긴 정보는 미약하나마 표면의 진실을 담았고 사진가는 양심이라는 망점을 새겼다. 하지만 인간의 뇌에 입력된 기억은 그다지 디테일하지 못하다. 필요에 따라 출력되고 일부는 지워진 채, 일부는 왜곡된 채 떠오른다.

“소녀상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저항하고 싸우는 소녀’의 모습이야말로 한국인 자신과 오버랩시키고 싶어 하는 아이덴티티로 이상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소녀상이 한복을 입고 있는 것은 실상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지만, 리얼리티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위안부’를 바람직한 ‘민족의 딸’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조선인 위안부는 ‘국가’를 위해서 동원되었고 일본군과 함께 전쟁에 이기고자 그들을 보살피고 사기를 진작한 이들이기도 했다. 대사관 앞 소녀상은 그녀들의 그런 모습을 은폐한다.”

참으로 불편한 이 이야기는 박유하 세종대학교 일문과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 펴냄)에 등장한다. “소녀상으로 대표되는 ’20만 명 소녀 강제 연행’이 상식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20만’은 한국과 일본을 합한 정신대 숫자를 위안부로 오해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위안부는 예를 들면 일본군이 점령지에서 모집한 위안부들과 다른 대우를 받았다. 네덜란드인 강제 연행이나 중국인 강간 등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조선인 위안부에 일반화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피해에 얹혀 가는 것이다.”

이미 출간 후 격렬한 논쟁을 예고할만한 대목이다. 게다가 이 책은 논쟁 대상을 위안부 할머니들의 대변인 역할을 자임해 온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로 삼고 있다. 박 교수는 정대협이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보다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박 교수는 정대협이 “저항하는 위안부’의 이미지와 ‘사죄하지 않는 일본’의 이미지를 만들었지만, 이에 어긋나는 다양한 양상은 외면한다”고 지적한다. 또 정대협의 주요한 요구인 일본의 법적 배상, 국회 결의를 통한 사죄와 배상은 사실상 실현 가능성이 없고 요구할 근거도 불충분하다면서 “반제국의 의미를 가졌던 저항이 그곳에서는 어느새 민족권력화 되어 있었다”고 까지 말한다.

이에 대해 윤미향 정대협 대표는 “그는 일본의 양심 있는 지식인조차 취급하지 않는 사람”이라며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으며, 윤정옥 전 정대협 대표는 “박 교수가 일본 우익의 흐름에 맞는 얘기를 하고 있다”며 강하게 우려했다고 한 언론사는 전한다. 전면전 양상이다. 게다가 소위 진보적인 언론에선 이 책에 대한 논의가 별로 없었던 데 비해 보수 언론에서는 자세한 인터뷰까지 하며 지면을 할애하는 것을 보면, 식민지 근대화론자들과 궤를 같이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은 충분히 설득력 있다. 하지만 책의 저자는 이 책의 의미를 좀 더 돌아볼 것을 요구한다.

“자신을 위한 집도 땅 한 뼘도 없이 몸담을 곳을 찾아 이동을 당하거나 선택하는 것은 늘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들이었다. 빈곤이 고향을 떠나도록 그들의 등을 떠밀었고,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이 위안부가 되었다. 가난한 이들은 경제적 자립을 할 만한 문화자본(교육)과 사회안전망을 갖지 못한 탓에 다른 직업을 못 찾고 자신의 신체(장기, 피, 성)를 팔게 된다.” 박 교수는 위안부 문제가 민족의 문제라기보다는 국가와 자본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 시스템은 단지 일본 제국주의의 산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일본과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기지 주변의 기지촌으로 확장된다고 본다. 그곳의 조선족, 러시아, 필리핀, 페루 여성은 이러한 시스템의 희생자들인 것이다. 하지만 정대협의 민족주의적인 요구인 ‘국회입법에 의한 국가배상’만 고집하면서 일본 진보진영의 침묵과 우익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악마’를 깨웠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의 충돌이다.

민족주의 탈피와 세계적 시각

이러한 박 교수의 담론은 민족을 ‘근대 상상의 공동체’라고 보는 탈민족주의 사관과도 연결된다. 당대의 기록은 당대인의 눈으로 본다. 오늘의 가치로 과거의 문제를 재해석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는 국사를 한국사로 대체할 것을 요구한 임지현 교수나 한국사에서 요동을 분리해 새롭게 고대사를 볼 것을 요구한 김한규 교수의 담론과도 맥을 같이한다. 박 교수는 친일적인 식민지 근대화론자들과도 이석기 유의 주체사상파에 부화뇌동하는 민족 모순의 진보론자들과도 다른 방향에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박 교수는 이야기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아베 정부를 설득해야 한다. 설득할 수 있다고 본다. 먹혀 들어갈 논리를 제시해야 한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법적 해결이 끝났다고 일본 정부에서 말하면 식민지 지배 사죄 의식이 없었다는 문제를 지적해야 하고, 그에 대해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으로 끝났다고 하면 한국에서 반발해 그 사죄가 충분히 수용되지 않았다는 점을 이야기해야 한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는 충분히 문제를 해결할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안세홍 씨가 <겹겹>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연구할 ‘아카이브’를 던졌다면 박유하 교수는 그것을 겹겹이 꿰어 ‘맥락’을 만든 것이다. 우리가 문제를 풀 단 하나의 길만 알고 있다면 위안부를 만들었던 저들의 길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이 책들은 우리에게 다양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원문: ‘위안부=비극의 소녀상’ 뒤집는 두 가지 시선?  (프레시안, 이상엽)

『제국의 위안부』 – 발간 직후 신문사 서평 및 인터뷰 모음

서평

인터뷰

장정일, 일본 ‘국민 작가’의 숨은 국가주의 (시사IN)

장정일 소설가

박유하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 서평

저자는 나쓰메 소세키가 어떤 세계관과 시대상을 통해 국민 작가로 등극하게 되었는지 분석함으로써, 그것이 한갓 국가 이데올로기의 동조자에게 허여되는 칭호임을 밝힌다.

나쓰메 소세키는 ‘하루에 세 편씩 논문이 나온다’고 할 만큼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다. 나쓰메 소세키가 이처럼 일본인의 주목과 사랑을 받게 된 것은 그가 차지한 ‘국민 작가’라는 부동의 자리 때문이다. <나의 개인주의>(책세상 펴냄, 2004년)라는 제목의 나쓰메 소세키 강연집을 편역했던 한국 역자의 약력에 적힌 “일본의 국민 작가로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를 중심으로 일본 근대문학을 연구하고 있다”라는 문장은 더하거나 뺄 게 없는 그의 위상을 보여준다.

박유하의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문학동네 펴냄, 2011년)는 보유 격의 논문 몇 편을 빼고는 통째 나쓰메 소세키를 분석한다. 지은이는 이 책 전체를 나쓰메 소세키가 창안한 ‘자기 본위(개인주의)’를 해명하는 데 바쳤다. 그 전에 언제부터인가 당연시된 ‘국민 작가’라는 용어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우리는 ‘국민 가수’ ‘국민 배우’ ‘국민 투수’에다 ‘국민 여동생’까지 있으니, 국민 작가도 있는 줄 안다. 하지만 ‘국민 문학’이 문학사나 이론서에 등재된 것인 데 반해, 국민 작가는 문학을 설명하는 보편 용어가 못된다.

국민 작가라는 용어를 여기저기서 접하다보니, 일반 독자는 물론이고 전문적인 연구자들까지 저 용어가 근대문학이 발생한 모든 나라에 으레 있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문제는 국민 작가에 해당하는 영미(英美)·프랑스·독일·러시아·스페인어권의 대응어나 개념이 있느냐, 없느냐 따위가 아니다. 진짜 곤혹스러운 것은 저 용어를 통해 근대문학을 고민해보겠다는 비평가가 곧바로 ‘국민 작가를 가지지 못한 나라는 근대문학에 미달한 나라’라는 성급한 단정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이런 억견에 대해서는 국민 작가가 일본에서만 쓰이는 그들만의 역사적이고 특수한 맥락의 산물이라는 것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

메이지 유신으로 갱신된 일본은 서양으로부터 근대적 헌법·군대·교육·의료 체계 등을 모방하면서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라는 식의 문화적 상징물마저 갈구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무슨 공식처럼 외우고 있는 ‘영국=셰익스피어’ ‘프랑스=위고’ ‘독일=괴테’ ‘러시아=푸시킨’ 따위 믿거나 말거나 한 상식에는 어서 서양을 따라 잡아야겠다는 일본의 문화적 후진성이 상당히 투영되어 있다. 한국 비평가가 일본의 전근대성에서 생겨난 국민 작가를 근대문학의 발달을 가늠하는 기준인 양 받아들이는 것은, 이만저만한 촌극이 아니다. 메이지 시기의 일본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국민 작가를 주조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이고 특수한 맥락이 있었다면, 당연히 우리나라에도 국민 작가가 만들어질 수 없었던 역사적이고 특수한 맥락이 있었다. 그것을 무시하면, 문학 연구라는 이름을 빙자한 또 다른 식민 잔재에 지나지 않는다.

‘없다’는 이미 ‘있다’는 전제를 수긍한다. 따라서 ‘있다’를 거부하며 ‘없다’를 주장하고 싶은 사람은 항상 ‘있다, 그러나 어떻게 있게 되었다’를 통해, 만들어진 기원을 폭로하고 허물어야 한다. 말하자면 이런 전복은 외국인을 위한 일본의 어느 역사 교과서가 러·일전쟁을 전후로 한 일본의 아시아 지역으로의 무력 진출을 기술하면서 “이와 같은 일본 정부의 방식에 대해 반대한 것은 사회주의자나 나쓰메 소세키, 요사노 아키코 등의 문인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에 의문을 표하는 작업이다. 위의 인용에서 문제가 되는 천황제(일왕제)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했던 사회주의 작가의 막대한 고난과 희생은 익명으로 표시되는 대신, 당대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했던 정도의 천황제와 제국주의에 대한 아리송한 회의를 토로했을 뿐인 나쓰메 소세키가 마치 일본의 양심이었던 양 제시되는 일이다.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해서는 입 닫아

나쓰메 소세키는 어떤 기준에서 국민 작가가 되어 교과서를 오르내리고, 여타의 작가는 문학사에서조차 난외로 처리되어야 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의문 없이 마치 자연인 양 국민 작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국가 만들기’와 ‘국가 비판’을 양축으로 했던 근대문학의 임무 가운데 저항성(국가 비판)을 거세하는 일이다. 박유하의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는 나쓰메 소세키가 어떤 세계관과 시대상을 통해 국민 작가로 등극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함으로써, 그것이 한갓된 국가 이데올로기의 동조자 내지 제조자에게 허여되는 칭호라는 것을 밝힌다.

일본의 근현대 작가와 평론가는 물론이고 이른바 패전 이후 일본의 진보 지식인에게까지 나쓰메 소세키가 추앙받게 된 데에는, 그가 펼쳤던 문명론과 개인주의 언설이 큰 몫을 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서구를 발달한 문명(과학·기술) 세계로 간주하고, 일본을 문명 세계에 위협받지만 그보다 뛰어난 문화(정신)를 가진 나라라고 여겼다. 문명과 문화를 양극단으로 나누는 이런 대립 구도는 프랑스 혁명 전후로 줄곧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독일 지식인이 프랑스에 대항하고자 만든 일종의 정신승리법이면서, 누군가로부터 침략받고 있다는 유사 식민지적 공포를 통해 민족주의를 동원하는 기제였다. 그렇게 저장된 독일과 일본의 민족주의는 머지않아 제국주의로 진화했다.

나쓰메 소세키는 항상 서양에 대항해서는 일본 문화를 내세웠지만, 조선이나 중국보다 앞서 문명화된 일본이 두 나라를 침범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의 문명론은 흔히 자기 본위라고 부르는 개인주의 옹호와 결합되어, 국가주의와 물질문명에 저항했던 것으로 예찬된다. 하지만 그의 모든 대표작을 분석한 이 책에 따르면, 나쓰메 소세키의 개인주의는 항상 국가나 사회 질서의 한 분모로서만 존재했다. 또 한번 그의 동서문명론을 끄집어내자면, 서양이 도전과 투쟁을 통해 불평등을 뒤집는 문명이었던 반면 동양은 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어야 했다.

이 책은 나쓰메 소세키가 등식화한 ‘문명/문화/자연’ 사이의 각축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있다. 잠시 요약했던 것처럼 나쓰메 소세키는 서양을 문명의 총화로 보고, 그 독을 해독할 수 있는 자리에 일본 문화를 올려놓았다. 여기에 책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계몽되어야 할 여성이 자연으로 등장한다. 메이지 시기와 같은 국민국가 탄생기에 자연과 동급으로 취급된 여성은 문명과 문화의 담지자인 남성에 의해 길들여져야 했다. 이런 분석을 통해 지은이는 다시 한번, 나쓰메 소세키의 개인주의가 철저히 근대국가의 기획을 거들었던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것이 지은이가 파헤친 국민 작가의 본모습이다.

원문: [장정일의 독서일기] 일본 ‘국민 작가’의 숨은 국가주의 (시사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