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표현의 자유’ 함부로 차지 마라 (시사IN 라이브)

장정일 소설가

표현의 자유는 악용마저 포용하는 면죄부나 방어막이 아니다. 그렇다 해도 진실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이유로 법적 책임을 부과하는 나라는 OECD 가운데 한국과 일본밖에 없다. 앞으로 화두는 명예훼손죄여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무조건 옹호해야 하는 절대 가치인가? ①마광수의 <즐거운 사라> ②마호메트를 풍자한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 ③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④아이유의 <챗셔> 앨범 표지와 ‘제제’의 가사 ⑤광주민주화항쟁을 북한 특수군이 사주한 것이라는 넷 우익의 발언은 모두 보호받아야 할 표현의 자유에 속하는 것일까? ①~④는 보호받아야 하는 표현의 자유라면서 ⑤에 대해서는 돌연 태도를 바꾸어 범죄로 규탄한다면, 그것은 절대 가치(표현의 자유)의 변덕을 폭로하는 것일까?

열거한 다섯 가지 가운데 옹호할 표현의 자유를 고른다고 해서, 이 가치가 원천적인 모순이나 한계를 지녔다고 말하면 안 된다. 예컨대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①~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법정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나섰던 자유주의자는 나머지 네 가지 사안에 대해서도 똑같은 대우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조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의 원칙(여기서는 ‘표현의 자유’)이 모든 사례에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람은 원칙을 물신화한 교조주의자이지 결코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자유주의자는 하나의 원칙에 모든 사례를 복속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개별 사례마다 자신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아이러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교조주의자들만이 ‘세트 메뉴’를 받아먹는다.

<즐거운 사라>(청하, 1992)의 지은이가 기소되었을 때, 나는 이 사안에 표현의 자유가 요청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한국 문학은 성을 이야기할 때조차 죄의식을 버리지 못하며, 죄의식을 한 자락 깔고 있어야만 문학성 있는 작품으로 대접받는다. 반면 마광수의 성문학은 한 점의 죄의식도 찾기 어려울 만큼 낙천적이고 유토피아적이다. 그의 성적 유토피아가 철저히 남성 중심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는 있지만, 나는 그의 소설이 음란으로 처벌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땅콩을 애인의 질 속에 넣어두었다가 꺼내 먹고 싶다는 기행은 조선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방중술을 베낀 것이다. 전래의 비기(秘技)에서는 땅콩이 아니라 대추였지만 말이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나는 <샤를리 에브도>를 표현의 자유로 옹호했다. 중학교 때까지 여호와의 증인이었던 나는, 현재도 여호와의 증인이 어떤 기독교보다 나은 기독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괜찮은 종교는 괜찮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종교보다 인간을 더욱 억압한다. 그런 경험을 했던 나는 모든 종교에서 크고 작은 억압을 본다. 인류 역사는 이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구로 이주한 무슬림이 약자인 것은 맞지만, 마호메트는 약자가 아니다. 내가 옹호한 것은 약한 무슬림을 조롱하는 <샤를리 에브도>가 아니라,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풍자하는 <샤를리 에브도>였다.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 2013)가 출간되었을 때부터 검찰에 기소된 지금까지 나는 이 책과 지은이에 대한 일관된 지지자다. 이 책은 지은이를 기소한 검찰이나 비판자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위안부를 ‘자발적인 매춘부’로 규정한 적이 없다. 이 책은 일제의 총칼에 ‘강제 납치된 어린 소녀’라는 고정된 위안부 상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위안부 문제의 실체를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 성격’과 연관하여 설명한다. 자발적 매춘은커녕, 이 책은 시종일관 조선인 위안부가 인신매매에 넘어간 것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제시하고 있다.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제 딴에는 ‘정치적 올바름’의 화신인 양하는 어느 진보적 문학평론가가 지은이를 향해 “제국의 편인가? 위안부의 편인가?”라고 묻는 것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천안함 폭침’의 진실을 밝히려는 과학자들을 향해 “북한 편이냐? 전사한 애국자 편이냐?”라고 윽박지르는 보수 언론과 저 문학평론가의 포악은 같다. 박유하의 책을 비난하면서 자칭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원한다는 사람들의 뇌세포는 어떠할까? 학문의 윤리는 어느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틈’을 고민하는 것이며, 진실이 생겨나는 자리도 거기다.

<챗셔> 앨범 표지와 그 앨범에 실린 ‘제제’의 노랫말도 표현의 자유로 옹호되지 못할 게 없다. 앨범 표지는 그동안 ‘롤리타’로 소비되었던 아이유가 관음증적 삼촌·오빠들에게 보내는 반격(당신들 이런 것 좋아하잖아?)이자, 여태까지 그 역할을 즐겨 맡았던 아이유의 자기 자신에 대한 풍자(내가 이러면서 인기를 얻어왔지!)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낸 출판사는 ‘우리 제제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며 펄쩍 뛰었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콧수염을 달아준 마르셀 뒤샹의 는 루브르 박물관의 항의를 받은 바 없다. <제제>의 노랫말이 소아성애와 연관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 상상하는 것도 자유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배후에 북한 특수군이 있다고 주장하는 우익 칼럼니스트와 넷 우익은 처벌받아야 한다. 우선 이런 주장은 아무런 증거 없는 날조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주체였던 광주 시민의 평판을 고의적으로 해치려는 이런 날조는 당사자들을 북한군의 선동에 놀아난 폭도로 만든다. 또 이런 날조는 5·18을 민주화운동 기념일로 제정하고 그 가치를 기려온 민주 사회에 대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라고 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는 이처럼 개별적으로 검토되고 추인되어야 하는 것이지 악용마저 포용하는 면죄부나 방어막이 아니다.

박유하가 기소된 것은 현 정권의 국정교과서 사업이나, 국가의 탄압과 별 연관이 없다. 그가 기소된 것은 이 책으로 인해 명예가 훼손되었다는 생존 위안부 할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법은 공적 관심사와 공적 토론을 제공하는 학술 연구를 폭넓게 보호하려고 하지만, 학술 연구 가운데 특히 역사 연구는 사건이나 인물 해석을 놓고 당사자(혹은 후손)의 이익이나 명예와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그때마다 지은이가 법정으로 불려가야 한다면, 학자는 안전한 연구만 하려 할 것이고, 그들이 낸 책은 암호문이 될 것이다. 게다가 법학자 박경신이 <진실유포죄>(다산초당, 2012)에서 강도 높게 비판했듯이, 한국에 엄존하는 여러 종류의 명예훼손죄는 진실과 허위를 따지지 않고 처벌한다. 이 법에 따르면 학자들은 진실을 말하고도, 타인이 듣기 싫은 말을 했다는 명목으로 유죄를 받을 수 있다. 진실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이유로 법적 책임을 부과하는 나라는 OECD 국가 가운데 한국과 일본밖에 없다고 통탄하는 이 책을 보면, 앞으로의 화두는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명예훼손죄여야 한다.

원문: ‘표현의 자유’ 함부로 차지 마라 (장정일, 시사IN 라이브)

장정일,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시사IN)

장정일 소설가

한국과 일본은 군 위안부 숫자를 5만명에서 20만명까지 달리 추산한다. 여러 이유로 총체적 연구가 쉽지 않다. <제국의 위안부>는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려는 지은이의 강박 때문에 총체적 관점이 휘발되고 말았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대한해협이 아니라 군 위안부 문제가 놓여 있다. 실체를 발견하는 작업에서부터 해결 방안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는 경험의 소유권을 가진 피해 당사자가 엄연히 생존해 있기에 오히려 총체적 연구가 쉽지 않다. 이미 ‘일본군에 의한 조선 부녀자 강제 연행’이라는 단 한 줄로 군 위안부에 대한 상식이 완성된 터에, 그것과 다른 접근이나 그 어떤 보충도 친일파라는 지탄을 피하기 힘들다. 하지만 군 위안부의 복잡성은 아직 그 숫자마저 명확하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은 ‘20만명’설을 선호하고, 일본 연구자는 5만~7만명으로 추산하며, 만주에 주둔했던 한 일본군 병사는 “사단 군인 2만명에 50명” 정도라고 증언한다.

만주사변 이후 조선·중국·남양 군도에 일본군 300만명이 있었으니, 20만명설이 맞다면 일본군은 병사 15명당 1명의 조선인 군 위안부를 둔 게 된다. 현재도 우리나라에 주둔하는 미군 부대 근처에 반드시 기지촌이 있듯이 동서고금의 모든 군대는 병사의 성 욕망을 해결할 수단을 강구한다. 그 사실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저 수치는 정상이 아니다. 일본군은 새로운 점령지마다 현지인으로 이루어진 군 위안소를 추가한 데다, 그것도 모자라 강간을 일삼았다. 이 모든 게 사실이면, 일본은 원자폭탄이 아니라 불철주야 성폭행만 하느라 전쟁에서 진 거다. 참고로 최근 중국 연구자들은 최소 20만명의 중국인 군 위안부가 있었고, 강간을 당한 중국 부녀자의 수는 그것보다 많다고 주장한다.

20만명설은, 일제가 전쟁에 필요한 노동력을 징발하려고 만든 정신근로대와 군 위안부를 구별하지 않은 숫자다. 한국은 피해를 강조하고 일본의 야만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군 위안부의 숫자는 늘리고, 그들의 평균연령은 낮춘다. 하지만 20만명이 아닌 5만~7만명이면 일본의 야만성이 경감되고 책임이 없어지는가? 또 조선인 군 위안부의 평균연령이 25세면 10대는 아니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일제를 가리켜 인간적이었다고 할 것인가? 어느 경우든, 실체를 밝히는 것이 일본 옹호의 논리가 될 수는 없다.

일본은 고노 담화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군인들이 ‘관리’는 했지만 직접 모집하거나 영업은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해왔고, 바로 이것이 군 위안부 실체를 규명하는 가장 큰 쟁점이 되고 있다. 그러니 ①모집 ②영업 ③관리로 나누어 이 문제를 살펴보자.

①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일제 35년의 성격을 들여다봐야 한다. 2012년, 중국·인도네시아·베트남 등지에서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 연행 증거가 나오기도 했다지만, 조선은 전쟁터가 아니었다. 한·일합방이 된 1910년 이후, 조선은 일본과 형식상 한 나라가 됐다. 1등 시민인 일본인과 2등 시민인 조선인의 차이는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에게 당하는 차별보다 더 컸으면 컸지 작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조선은 행정제도와 법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군 위안부 대량 조달에는 잘 구비된 행정력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등에 업은 업자와 포주가 활동했다. 이때 취업 사기를 치러 온 업자에게 현지의 정보를 귀띔해주고 그들에게 공신력을 빌려준 장본인이 주민 사정에 밝은 면장이나 이장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강제 연행 사례가 전무하다고 뻗대는 것은 억지일 것이다.

일본군의 군 위안소 운영 여부를 따지는 ②는 상식적으로 풀이할 수 있다. 무기와 식량은 군대에 필수적이지만, 군인이 직접 총을 만들거나 땅을 갈지 않는다. 총은 방위 업체가, 쌀은 농부가 생산한다. 마찬가지로, 지역과 시기에 따라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군 위안소는 민간 업자에게 맡겨졌을 것이다.

③은 일본 정부가 인정한 것이다. 군대가 위안부의 위생을 직접 관리한 이유는 성병이 전력 차질을 낳기 때문이다. 국내 같으면 보건소가 했겠지만 전쟁 지역에서 그 일을 도맡아 할 기관은 군대밖에 없었다. 그뿐 아니라, 군대는 군 위안부의 이송에도 관여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① ②와 직접 연관된 정황이 미미하다고 해서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 그리고 천황(일왕)이 면죄되지는 않는다. 우선 일본군이 일본 정부에 위안부 설치를 요청했던 증거가 뻔히 나와 있다. 더욱이 애초에 일제 식민이 없었고,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군 위안소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광수나 윤치호의 친일을 단죄하는 이유

일제강점기의 조선은 저항과 협력이 공존했던 공간이다. 2등 시민이라는 차별에도 불구하고 한·일합방 이후에 태어난 가난한 계층과 여성 가운데 혹여 일본을 조국으로 착각하고 ‘동지의식’을 느낀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20여 년 넘게 일제 통치에 내면화(세뇌)된 때문이지 결코 그들의 허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견문을 넓힐 수 있었던 이광수나 윤치호의 친일을 단죄하는 것이다. 그들은 일제에 세뇌된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일본을 선택했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는 “‘강제 연행’을 하지 않았다 해도 ‘강제로 끌려가는’ 이들을 양산한 구조를 만든 것이 일본군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며, 그런 반성 위에 일본 정부가 “새로운 사죄와 보상”을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이라고는 “우리 안에도 위안부들에게 ‘사죄’해야 할 이들은 있다”라는 것 정도다. 하지만 사태를 하나로 묶고 파악하는 이런 총체적 관점은, 군 위안부를 착취한 일본군의 “하나가 아닌”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려는 지은이의 강박 때문에 휘발되고 말았다. 군 위안부에 대한 천편일률적인 기억과는 다른 기억을 보충하겠다고 그들과 일본군 사이에 흘렀던 감정적 교류마저 나열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총체성을 흠집 내는 이런 다양성(나열)이 오해를 양산한다.

2013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 시민공원에 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부끄러웠다. 원래 저 소녀상은 미국에 있기 전, 먼저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조성된 독립공원에 세워져야 했다. 하지만 2008년 광복회를 비롯한 독립운동 유관단체들은 독립공원 내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난을 보여주는 박물관을 세우는 것은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운동을 폄하시키는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면서 박물관 건립을 저지했다. 그래서 서울 마포구 성미산에 따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지었다. 이처럼 민족의 역사는 자신의 가장 영광스럽고 순수한 기억만 보존하고 거기에 맞지 않는 것은 억압한다. 한때는 저런 잘못된 구습의 피해자였던 일본군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가 <제국의 위안부>를 놓고서는 자신과 다른 기억을 발굴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했다.

원문: 장정일의 독서일기, 그 소식에 나는 부끄러웠다 (시사IN)

장정일, 일본 ‘국민 작가’의 숨은 국가주의 (시사IN)

장정일 소설가

박유하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 서평

저자는 나쓰메 소세키가 어떤 세계관과 시대상을 통해 국민 작가로 등극하게 되었는지 분석함으로써, 그것이 한갓 국가 이데올로기의 동조자에게 허여되는 칭호임을 밝힌다.

나쓰메 소세키는 ‘하루에 세 편씩 논문이 나온다’고 할 만큼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다. 나쓰메 소세키가 이처럼 일본인의 주목과 사랑을 받게 된 것은 그가 차지한 ‘국민 작가’라는 부동의 자리 때문이다. <나의 개인주의>(책세상 펴냄, 2004년)라는 제목의 나쓰메 소세키 강연집을 편역했던 한국 역자의 약력에 적힌 “일본의 국민 작가로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를 중심으로 일본 근대문학을 연구하고 있다”라는 문장은 더하거나 뺄 게 없는 그의 위상을 보여준다.

박유하의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문학동네 펴냄, 2011년)는 보유 격의 논문 몇 편을 빼고는 통째 나쓰메 소세키를 분석한다. 지은이는 이 책 전체를 나쓰메 소세키가 창안한 ‘자기 본위(개인주의)’를 해명하는 데 바쳤다. 그 전에 언제부터인가 당연시된 ‘국민 작가’라는 용어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우리는 ‘국민 가수’ ‘국민 배우’ ‘국민 투수’에다 ‘국민 여동생’까지 있으니, 국민 작가도 있는 줄 안다. 하지만 ‘국민 문학’이 문학사나 이론서에 등재된 것인 데 반해, 국민 작가는 문학을 설명하는 보편 용어가 못된다.

국민 작가라는 용어를 여기저기서 접하다보니, 일반 독자는 물론이고 전문적인 연구자들까지 저 용어가 근대문학이 발생한 모든 나라에 으레 있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문제는 국민 작가에 해당하는 영미(英美)·프랑스·독일·러시아·스페인어권의 대응어나 개념이 있느냐, 없느냐 따위가 아니다. 진짜 곤혹스러운 것은 저 용어를 통해 근대문학을 고민해보겠다는 비평가가 곧바로 ‘국민 작가를 가지지 못한 나라는 근대문학에 미달한 나라’라는 성급한 단정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이런 억견에 대해서는 국민 작가가 일본에서만 쓰이는 그들만의 역사적이고 특수한 맥락의 산물이라는 것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

메이지 유신으로 갱신된 일본은 서양으로부터 근대적 헌법·군대·교육·의료 체계 등을 모방하면서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라는 식의 문화적 상징물마저 갈구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무슨 공식처럼 외우고 있는 ‘영국=셰익스피어’ ‘프랑스=위고’ ‘독일=괴테’ ‘러시아=푸시킨’ 따위 믿거나 말거나 한 상식에는 어서 서양을 따라 잡아야겠다는 일본의 문화적 후진성이 상당히 투영되어 있다. 한국 비평가가 일본의 전근대성에서 생겨난 국민 작가를 근대문학의 발달을 가늠하는 기준인 양 받아들이는 것은, 이만저만한 촌극이 아니다. 메이지 시기의 일본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국민 작가를 주조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이고 특수한 맥락이 있었다면, 당연히 우리나라에도 국민 작가가 만들어질 수 없었던 역사적이고 특수한 맥락이 있었다. 그것을 무시하면, 문학 연구라는 이름을 빙자한 또 다른 식민 잔재에 지나지 않는다.

‘없다’는 이미 ‘있다’는 전제를 수긍한다. 따라서 ‘있다’를 거부하며 ‘없다’를 주장하고 싶은 사람은 항상 ‘있다, 그러나 어떻게 있게 되었다’를 통해, 만들어진 기원을 폭로하고 허물어야 한다. 말하자면 이런 전복은 외국인을 위한 일본의 어느 역사 교과서가 러·일전쟁을 전후로 한 일본의 아시아 지역으로의 무력 진출을 기술하면서 “이와 같은 일본 정부의 방식에 대해 반대한 것은 사회주의자나 나쓰메 소세키, 요사노 아키코 등의 문인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에 의문을 표하는 작업이다. 위의 인용에서 문제가 되는 천황제(일왕제)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했던 사회주의 작가의 막대한 고난과 희생은 익명으로 표시되는 대신, 당대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했던 정도의 천황제와 제국주의에 대한 아리송한 회의를 토로했을 뿐인 나쓰메 소세키가 마치 일본의 양심이었던 양 제시되는 일이다.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해서는 입 닫아

나쓰메 소세키는 어떤 기준에서 국민 작가가 되어 교과서를 오르내리고, 여타의 작가는 문학사에서조차 난외로 처리되어야 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의문 없이 마치 자연인 양 국민 작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국가 만들기’와 ‘국가 비판’을 양축으로 했던 근대문학의 임무 가운데 저항성(국가 비판)을 거세하는 일이다. 박유하의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는 나쓰메 소세키가 어떤 세계관과 시대상을 통해 국민 작가로 등극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함으로써, 그것이 한갓된 국가 이데올로기의 동조자 내지 제조자에게 허여되는 칭호라는 것을 밝힌다.

일본의 근현대 작가와 평론가는 물론이고 이른바 패전 이후 일본의 진보 지식인에게까지 나쓰메 소세키가 추앙받게 된 데에는, 그가 펼쳤던 문명론과 개인주의 언설이 큰 몫을 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서구를 발달한 문명(과학·기술) 세계로 간주하고, 일본을 문명 세계에 위협받지만 그보다 뛰어난 문화(정신)를 가진 나라라고 여겼다. 문명과 문화를 양극단으로 나누는 이런 대립 구도는 프랑스 혁명 전후로 줄곧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독일 지식인이 프랑스에 대항하고자 만든 일종의 정신승리법이면서, 누군가로부터 침략받고 있다는 유사 식민지적 공포를 통해 민족주의를 동원하는 기제였다. 그렇게 저장된 독일과 일본의 민족주의는 머지않아 제국주의로 진화했다.

나쓰메 소세키는 항상 서양에 대항해서는 일본 문화를 내세웠지만, 조선이나 중국보다 앞서 문명화된 일본이 두 나라를 침범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의 문명론은 흔히 자기 본위라고 부르는 개인주의 옹호와 결합되어, 국가주의와 물질문명에 저항했던 것으로 예찬된다. 하지만 그의 모든 대표작을 분석한 이 책에 따르면, 나쓰메 소세키의 개인주의는 항상 국가나 사회 질서의 한 분모로서만 존재했다. 또 한번 그의 동서문명론을 끄집어내자면, 서양이 도전과 투쟁을 통해 불평등을 뒤집는 문명이었던 반면 동양은 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어야 했다.

이 책은 나쓰메 소세키가 등식화한 ‘문명/문화/자연’ 사이의 각축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있다. 잠시 요약했던 것처럼 나쓰메 소세키는 서양을 문명의 총화로 보고, 그 독을 해독할 수 있는 자리에 일본 문화를 올려놓았다. 여기에 책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계몽되어야 할 여성이 자연으로 등장한다. 메이지 시기와 같은 국민국가 탄생기에 자연과 동급으로 취급된 여성은 문명과 문화의 담지자인 남성에 의해 길들여져야 했다. 이런 분석을 통해 지은이는 다시 한번, 나쓰메 소세키의 개인주의가 철저히 근대국가의 기획을 거들었던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것이 지은이가 파헤친 국민 작가의 본모습이다.

원문: [장정일의 독서일기] 일본 ‘국민 작가’의 숨은 국가주의 (시사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