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소설가
표현의 자유는 악용마저 포용하는 면죄부나 방어막이 아니다. 그렇다 해도 진실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이유로 법적 책임을 부과하는 나라는 OECD 가운데 한국과 일본밖에 없다. 앞으로 화두는 명예훼손죄여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무조건 옹호해야 하는 절대 가치인가? ①마광수의 <즐거운 사라> ②마호메트를 풍자한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 ③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④아이유의 <챗셔> 앨범 표지와 ‘제제’의 가사 ⑤광주민주화항쟁을 북한 특수군이 사주한 것이라는 넷 우익의 발언은 모두 보호받아야 할 표현의 자유에 속하는 것일까? ①~④는 보호받아야 하는 표현의 자유라면서 ⑤에 대해서는 돌연 태도를 바꾸어 범죄로 규탄한다면, 그것은 절대 가치(표현의 자유)의 변덕을 폭로하는 것일까?
열거한 다섯 가지 가운데 옹호할 표현의 자유를 고른다고 해서, 이 가치가 원천적인 모순이나 한계를 지녔다고 말하면 안 된다. 예컨대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①~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법정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나섰던 자유주의자는 나머지 네 가지 사안에 대해서도 똑같은 대우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조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의 원칙(여기서는 ‘표현의 자유’)이 모든 사례에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사람은 원칙을 물신화한 교조주의자이지 결코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자유주의자는 하나의 원칙에 모든 사례를 복속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개별 사례마다 자신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아이러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교조주의자들만이 ‘세트 메뉴’를 받아먹는다.
<즐거운 사라>(청하, 1992)의 지은이가 기소되었을 때, 나는 이 사안에 표현의 자유가 요청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한국 문학은 성을 이야기할 때조차 죄의식을 버리지 못하며, 죄의식을 한 자락 깔고 있어야만 문학성 있는 작품으로 대접받는다. 반면 마광수의 성문학은 한 점의 죄의식도 찾기 어려울 만큼 낙천적이고 유토피아적이다. 그의 성적 유토피아가 철저히 남성 중심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는 있지만, 나는 그의 소설이 음란으로 처벌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땅콩을 애인의 질 속에 넣어두었다가 꺼내 먹고 싶다는 기행은 조선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방중술을 베낀 것이다. 전래의 비기(秘技)에서는 땅콩이 아니라 대추였지만 말이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나는 <샤를리 에브도>를 표현의 자유로 옹호했다. 중학교 때까지 여호와의 증인이었던 나는, 현재도 여호와의 증인이 어떤 기독교보다 나은 기독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괜찮은 종교는 괜찮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종교보다 인간을 더욱 억압한다. 그런 경험을 했던 나는 모든 종교에서 크고 작은 억압을 본다. 인류 역사는 이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구로 이주한 무슬림이 약자인 것은 맞지만, 마호메트는 약자가 아니다. 내가 옹호한 것은 약한 무슬림을 조롱하는 <샤를리 에브도>가 아니라,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풍자하는 <샤를리 에브도>였다.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 2013)가 출간되었을 때부터 검찰에 기소된 지금까지 나는 이 책과 지은이에 대한 일관된 지지자다. 이 책은 지은이를 기소한 검찰이나 비판자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위안부를 ‘자발적인 매춘부’로 규정한 적이 없다. 이 책은 일제의 총칼에 ‘강제 납치된 어린 소녀’라는 고정된 위안부 상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위안부 문제의 실체를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 성격’과 연관하여 설명한다. 자발적 매춘은커녕, 이 책은 시종일관 조선인 위안부가 인신매매에 넘어간 것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제시하고 있다.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제 딴에는 ‘정치적 올바름’의 화신인 양하는 어느 진보적 문학평론가가 지은이를 향해 “제국의 편인가? 위안부의 편인가?”라고 묻는 것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천안함 폭침’의 진실을 밝히려는 과학자들을 향해 “북한 편이냐? 전사한 애국자 편이냐?”라고 윽박지르는 보수 언론과 저 문학평론가의 포악은 같다. 박유하의 책을 비난하면서 자칭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원한다는 사람들의 뇌세포는 어떠할까? 학문의 윤리는 어느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틈’을 고민하는 것이며, 진실이 생겨나는 자리도 거기다.
<챗셔> 앨범 표지와 그 앨범에 실린 ‘제제’의 노랫말도 표현의 자유로 옹호되지 못할 게 없다. 앨범 표지는 그동안 ‘롤리타’로 소비되었던 아이유가 관음증적 삼촌·오빠들에게 보내는 반격(당신들 이런 것 좋아하잖아?)이자, 여태까지 그 역할을 즐겨 맡았던 아이유의 자기 자신에 대한 풍자(내가 이러면서 인기를 얻어왔지!)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낸 출판사는 ‘우리 제제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며 펄쩍 뛰었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콧수염을 달아준 마르셀 뒤샹의 는 루브르 박물관의 항의를 받은 바 없다. <제제>의 노랫말이 소아성애와 연관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 상상하는 것도 자유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배후에 북한 특수군이 있다고 주장하는 우익 칼럼니스트와 넷 우익은 처벌받아야 한다. 우선 이런 주장은 아무런 증거 없는 날조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주체였던 광주 시민의 평판을 고의적으로 해치려는 이런 날조는 당사자들을 북한군의 선동에 놀아난 폭도로 만든다. 또 이런 날조는 5·18을 민주화운동 기념일로 제정하고 그 가치를 기려온 민주 사회에 대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라고 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는 이처럼 개별적으로 검토되고 추인되어야 하는 것이지 악용마저 포용하는 면죄부나 방어막이 아니다.
박유하가 기소된 것은 현 정권의 국정교과서 사업이나, 국가의 탄압과 별 연관이 없다. 그가 기소된 것은 이 책으로 인해 명예가 훼손되었다는 생존 위안부 할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법은 공적 관심사와 공적 토론을 제공하는 학술 연구를 폭넓게 보호하려고 하지만, 학술 연구 가운데 특히 역사 연구는 사건이나 인물 해석을 놓고 당사자(혹은 후손)의 이익이나 명예와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그때마다 지은이가 법정으로 불려가야 한다면, 학자는 안전한 연구만 하려 할 것이고, 그들이 낸 책은 암호문이 될 것이다. 게다가 법학자 박경신이 <진실유포죄>(다산초당, 2012)에서 강도 높게 비판했듯이, 한국에 엄존하는 여러 종류의 명예훼손죄는 진실과 허위를 따지지 않고 처벌한다. 이 법에 따르면 학자들은 진실을 말하고도, 타인이 듣기 싫은 말을 했다는 명목으로 유죄를 받을 수 있다. 진실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이유로 법적 책임을 부과하는 나라는 OECD 국가 가운데 한국과 일본밖에 없다고 통탄하는 이 책을 보면, 앞으로의 화두는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명예훼손죄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