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하 씨 기소에 대한 항의 성명’에 불민한 나도 <저명한 문화인>에 섞여 이름을 올렸다. 성명 발표 후 여러 친구로부터 전화와 메일을 받았다. 모두 『제국의 위안부』에 비판적이고 고소의 <정의>를 확신했다. 연락을 해 준 건 나의 무지를 염려해서였던 것 같다.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만큼 박유하 씨는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편하지 않을 거라는 걸 느꼈다.
3 월 28 일 연구 집회는 논의가 맞물렸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각각의 발상의 차이를 확인했다는 건 스타트 라인으로서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늦었지만, 내가 왜 성명에 이름을 올렸는지 염려해 준 친구들에 부응하기 위해서도 여기에 써 두고 싶다.
- 위안부 할머니의 ‘명예훼손’에 대해서
‘항의 성명’에는 ‘이 책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가 훼손됐다고는 볼 수 없다’라고 쓰여져 있다. 명예가 훼손됐는지 어떤지는 당사자가 정할 문제이니, 이 표현은 문제가 될 거라고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올린 건 ‘명예훼손’이라는 말에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왜 전작 『화해를 위해서』 는 문제가 되지 않고, 『제국의 위안부』는 됐는가 하는 점이다. 고소를 한 나눔의 집 위안부 할머니들은 『제국의 위안부』의 ‘자발적 매춘’이나, 일본 병사와의 ‘동지적 관계’, ‘애국’이라고 기술한 부분에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은 『화해를 위해서』의 「위안부」 장에도 있다.
「‘매춘’을 하게 될 것을 알고 간 여성들이었건, 당시의 일본이 매춘을 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 온 여성도 당시 일본이 군대를 위한 조직을 발상했다는 점에서 그 구조적인 강제성은 결코 희석되지 않는다」(헤이본샤 라이브러리판 p90, 역자 주: 이 부분은 『화해를 위해서』 한국어판(뿌리와이파리)에서 발췌)
「그들이 ‘일본인’으로서 ‘애국’하기 위해 갔다면, 그것을 구조적으로 종용했다는 의미에서 더욱 ‘일본의 책임’이 커질 수밖에 없다」 (헤이본샤 라이브러리판 p91, 역자 주: 이 부분은 『화해를 위해서』 한국어판(뿌리와이파리)에서 발췌)
이것은 『제국의 위안부』 의 취지 그 자체이다. 왜 같은 취지이며 표현인데 『화해를 위해서』는 명예훼손을 묻지 않았을까?
아무래도 답은 단순한 것 같다. 1월에 일본에 방문한 나눔의 집 소장에 따르면 위안부 할머니들은 책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제국의 위안부』의 해당부분을 수 차례 읽어 드렸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면, 3 · 28 집회에서 양징자 씨가 발언한 것처럼, ‘거짓말과 속임수를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꿰뚫어 본’(자료집 p63)다는 그들이, 읽어주는 사람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감지하지 못했을 리 없을 것이다.
또 하나, 의문이 든 이유가 있다. 20 년 전, 모리카와 마치코 씨가 구성하고 해설한 『문옥주 버마 전선 방패 사단의 ‘위안부’였던 나 』(나시노키샤(1996), 증보 신장판(2015))는 뛰어난 여성 문제 연구서로 제 16 회 야마카와 기쿠에 상을 수상했다. 나는 수상 심사 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이 책을 추천했는데, 반대도 있었다. ‘운동의 발목을 잡는 꼴이 되지 않을까’라는 게 이유였다. 당시 운동의 주류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 의해서 ‘위안부 = 성 노예’라고 정의되어 국가 보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언급된 문옥주 씨의 ‘위안부’ 생활은 ‘성 노예’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았다.
문 씨는 일본 노래를 외우는 등 일본 병사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인기인이 되어, 랑군 시장에서 하이 칼라 옷과 보석을 구입하거나 큰 돈을 저축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일상이 비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중에서 상병 야마다 이치로와의 <사랑>은 문 씨에게 얼마나 구원이 되었을까? 그는 문 씨에게 청혼하며 조선인이어도 좋다고 했다고 한다. 고상하고, 상냥하고, 익살스럽고, 지혜로웠다고 50 년이 지난 후에도 문 씨는 거리낌없이 야마다를 칭찬한다.
이러한 문 씨의 모습에 나는 감동했다. 어떤 가혹한 상황에서도 사람은 생존 전략을 구사하고 정체성을 찾으며, 사랑을 키우는 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명예를 훼손하기는 커녕 자랑할 만한 일처럼 보인다.
- 『제국의 위안부』가 여는 것
그러나 물론 문옥주 씨의 예를 일반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이 책은 ‘위안부 문제’ 를 부정하는 논거가 되고 있다.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저금 센터 원부라는 공문서에 남은 문 씨의 다액의 군사우편 저금을 가지고 ‘역시 위안부는 막벌이 창녀다’라는 소리가 난무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염려한 대로 운동의 발목을 잡게 됐다. 나눔의 집 위안부 할머니들이 ‘명예 훼손’이라고 한 것도 이런 견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옥주 씨의 필사적인 생존 전략은 ‘위안부 문제’의 부정으로 이어지지 않고, ‘성 노예’에서 <특권적>인 일본인 ‘위안부’까지 다양한 ‘위안부’를 감싸 안는 큰 틀 ーー. 박유하 씨가 사념을 집중한 ‘제국의 위안부’라는 관점은 여기에 연결되는 게 아닐까. 3 · 28 집회에서 요시미 요시아키 씨는 업자의 책임보다 군의 책임 쪽이 무겁다고 말했다. ‘박유하 씨는 이같은 구조적인 인식이 되어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자료집 p71). 그러나 박유하 씨의 ‘제국의 위안부’는 군대도 통합 식민지 지배라는 큰 구조를 묻고 있다.
‘제국’이라는 틀을 세울 때, 영역 내의 <민족>의 경계는 모호하다. 특히 전시 하의 ‘대일본제국’은 ‘내선 일체’를 내걸고 조선반도의 ‘황민’화를 도모했다. 물론 일본인과의 사이에서 차별은 있다. 일본인 ‘위안부’와 조선인 ‘위안부’사이에도 분명한 차별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인 ‘위안부’가 ‘초센초센(조선, 조선)이라고 바보 취급 하지마, 텐노헤이카(천황폐하)는 같다’라고 대꾸 못할 건 아니었다.
<민족>의 경계는, 젠더 관점을 넣어 보면 더욱 까다로워진다. 1925 년의 보통 선거법은 여성을 배제했지만, ‘내지’거주 식민지 남성은 참정권을 받았다. 참정권은 ‘권리 중의 권리’이며, <국민> 권리 중 가장 큰 권리라고 한다면, 일본 여성은 <국민>이 아니었지만, 재일 조선 남성은 <국민>이었던 것이다. ‘제국’에게 식민지 가부장제 이용이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패전으로 인한 ‘제국’의 해체로, 그것은 역전됐다. 일본 여성은 <국민>으로, 식민지 남성은 <비국민>으로. <민족>의 경계가 전면에 드러난 것이다. 올해 4 월 매스 미디어는 ‘여성 참정권 70 년’을 보도했지만, 동일한 선거법 개정으로 식민지 남성이 참정권을 박탈당한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하려고 하지 않았다.
헌데 ‘위안부’에 맞추면 <민족>의 차이보다도 젠더의 문제가 된다. 가혹한 전선에서는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군 병사의 <민족>을 넘은 ‘동지적 관계’가 성립해도 전후의 처우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일본군 병사는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지고, 살아 남으면 연금도 지급된다. 그러나 ‘위안부’는 연금은 커녕 <더러운 여자>로 낙인찍혀 가족과 고향조차 잃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일본인 ‘위안부’도 마찬가지다. 미와 아키히로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노래부르고 있다. 「싸움에 지고 돌아 가면 나라 사람들에게/훈장 대신 침을 맞고/손가락질 당하고, 험담을 듣고/ (생략) /대일본제국 만세 만세 만세 “(「조국과 여자들」)
『제국의 위안부』는 <민족>과 젠더가 착종하는 식민지 지배라는 큰 틀에서 국가 책임을 묻는 길을 열었다. 3 · 28 집회에서 역사학 분야로부터 실증주의적 비판이 잇따랐는데, 물론 그 점에는 이론상에서도 실천상에서도 많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니시 마사히코 씨가 말한대로, 이 책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그 앞에 열리는 문제를 함께 단련해 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