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적 민족주의의 폭력
일국의 총리 후보자의 역사관이 문제가 되어 그렇지 않아도 월드컵을 앞두고 서서히 끓어오르던 값싼 민족주의에 다시금 불이 붙었다. 그리고 그 불똥은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세종대 박유하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로 튀었다. 박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을 지원하고 있는 특정 단체에 의한 ‘정의’의 독점을 우려하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단초로써 우리가 보고 들으려 하지 않는, 혹은 감히? 언급하려 하지 않았던 종군위안부의 다양한 층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에 박 교수에 의해 비판을 받은 지원단체는 자기들과 음으로 양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적, 물적 네트워크를 총동원하며 박 교수를 ‘친일’, ‘반민족주의자’라는 프레임에 가두려 하는 폭력적 여론 몰이에 열을 올리고 있다.
박유하 교수는 지금까지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 『화해를 위해서』 로 대표되는 다양한 저작물과 활발한 학술활동을 통해 우리가 보고 들으려 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 학자적 양심을 갖고 이를 직시해 왔다. 이는 한일 양국의 특정적이며 부정적인 대결과, 해묵은 갈등 구조의 해소, 나아가서는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구축을 위한 학자로서의 양심과 사회적 책임감에 기인하고 있음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진실이라 믿어 왔던 기억의 다른 한편에 또 다른 진실이 숨어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기에는 일제 식민지배 36년 동안에 우리가 겪어야만 했던 고통과 민족 자존감의 상처가 너무나도 크고 깊다는 것 또한 안다. 결과적으로 식민통치 기간 동안 앓아야 했던 다양한 정신적 외상은 ‘민족적’ ‘민족주의’적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하며 오랜 세월 역사의 한 쪽 면만을 바라보게 만드는 절대 담론을 형성해 왔다. 그리고 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다른 목소리를 내는 학자들에게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시련과 핍박이 가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교수는 ‘민족주의적’ 담론 형성과정에 파묻혀 버린 할머니들의 또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주장하고, 자기 검증과 내적 성찰보다는 이를 전국민적 저항운동으로 변질시키며 정치권력화되어 가는 특정단체의 ‘정의’의 독점을 우려한다. 나 또한 박 교수의 이러한 우려에 깊이 동감한다. ‘정의’의 독점은 필시 폭력으로 이어지고, 폭력은 자유로운 사고를 질식시키며 학자들의 다양한 관점과 해석의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차단해 버리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박 교수의 글에 대해 ‘문학적 상상력’ 이나 ‘감수성’으로 역사를 파악하려 한다며 이를 폄하한다. 비록 위안부에 참가한 여성들 중에 자발적 참여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또한 ‘부당한 제국성’ ‘제국의 숨은 의도’라 하며 박 교수의 역사인식의 결여를 지적한다. 나 또한 미시적 가지들에 집착하는 일문학의 연구방법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역사학자들의 이러한 지적에 공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러나 역사학이 어떠한 방법론에 의해 지탱되어지고 있는 학문 분야인가. 멸치조차 회를 뜨려 드는, 초 울트라 미시적 연구 방법론에 의해 성립되는 실증주의, 사료 지상주의의 학문 분야가 아니던가. 무엇보다도 역사는 지구상 가장 오래된 문학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박유하 교수가 문제 삼고 있는 다층적 기억을 거북하다 하여 이를 애써 외면하며 ‘부당한 제국성’이라는 거대 담론만을 고집한다면 일제식민통치 기간 동안 깊어지고, 해방 이후 반복 재생되고 있는 정신적 외상에 대한 치유는 앞으로도 영원히 요원할 수밖에 없다. 학자가 어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들을 수 있겠는가. 학자로서의 양심과 자유로운 학문 탐구마저 ‘민족’ ‘민족주의’라는 이 땅의 ‘절대선’으로 재단하려 드는 ‘정의’의 독점에서 오는 ‘폭력’을 나는 경계한다. 또한 현재 벌어지고 있는 파시즘적 민족주의에 기인하는 인민재판식 마녀사냥을 나는 비판한다. 나는 민족주의라는 감성을 자극하며 한일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는 일부 단체들의 절대 권력화에 반대한다. 무엇보다도 학자의 자유로운 연구를 용인하지 않는 이 사회의 천박함에 절망한다.
이권희(단국대학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