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모타 이누히코, 박유하를 변호하다

박유하를 변호하다

요모타 이누히코

(원문: 2016-08-24, 四方田犬彦, 朴裕河を弁護する)

1

비교문학은 인문학 중에서 굉장히 효율이 나쁜 학문이다.

우선, 자국어 뿐만 아니라 복수의 외국어에 정통해 있어야 한다. 최소한 자유롭게 그 텍스트를 읽고, 학회에서 의견교환이 가능해야 한다. 자국어로 쓰여진 텍스트만을 자국 문맥의 안 쪽에서 해석하는 작업에 비하면, 훨씬 시간과 노력, 그리고 정열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비교문학이란 분야에 사람은 매혹되고 이를 연구하려 하는 것일까. 비교문학은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 것일까.

극히 간단히 말하자면, 이는 사람을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민족주의영역으로부터 해방한다는 효용을 지니고 있다. 「겐지 모노가타리」의 책 이름인 「総角」이라는 단어가, 한국에서 미혼 남성을 뜻하는 총각과 똑같은 표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일본에서 때때로 회자되는 문화순수주의란 것이 얼마나 치졸한 신화에 불과한지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조선의 이상(李箱)과 대만의 楊熾昌을 나카하라 츄야(中原中也)옆에 두고 읽는 일은, 1920년대부터 30년대에 걸쳐, 동아시아도 세계적인 문학적 전위운동의 권역 안에 있었음을 이해하는 일이다. 이것은, 어찌보면 한 나라 한 언어의 안 쪽에서 자족적인 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문학사가, 실은 타자와의 끊임없는 교류 안에서 성립한 우연한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한 나라의 문학만이 민족 고유의 본질을 표상한다는 전세기의 신화의 오류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비교문학은 우리에게 문화와 문학을 둘러싼 나르시즘적인 이야기의 바깥에 펼쳐져있는, 바람부는 황야를 지향하도록 하는 일을 가르쳐준다.

한편, 비교문학자는 때때로 생각치도 못한 편견의 희생자가 되기를 강요받게 된다. 콜롬비아 대학에서 이 학문을 가르치고 있었던 에드워드 W 사이드를 엄습한 수난이 그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대학에서 빅토르 위고와 아우에르 바흐를 독실하게 논하고 있었던 사이드는, 어떤 일을 계기로 자신의 고향인 팔레스티나 문제에 대하여 발언하기 시작했다. 몇 권의 저서가 미국의 협소한 아카데미즘의 테두리를 넘어 국제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는 엄청난 비방을 겪어야 했다. 사이드를 비난공격하고, 허무맹랑한 소문을 확산시킨 것은, 주로 유대계 미국인의 중동지역 연구자들이다. 그들은 사이드가 중동사의 학문적 연구자가 아니라고 단정하고, 아마추어에게는 팔레스티나에 대하여 논할 자격이 없다는 캠페인을 개시했다. 사이드를 공격한 것은 이스라엘인이 아니라, 주로 미국 국적을 가지고 합중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이었다. 이스라엘에는 냉정하게 그의 저서를 이해하고 그 과감한 언동에 공감하는 이란 파페(후에 이스라엘을 추방)과 같은 유대인의 중동사 전문가가 있다. 그러나 반 사이드파는, 사이드의 저서가 진실을 왜곡하는 반유대주의자라고 주장하고, 그가 팔레스티나에서 반란에 찬동하고 돌을 던지고 있는 사진을 날조하여 공공연하게 테러리스트라 불렀다. 그들 중 다수는 말할 필요도 없이 정치적 시오니즘의 찬동자이자, 국가로써의 이스라엘이 이산 유대인의 궁극적인 해결의 땅이란 신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예전에 텔아비브 대학에 재직하고 있었을 때 들은 일을 떠올렸다. 내가 아는 한,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자란 유대인들 중 다수는 팔레스티나인의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 보고, 사태의 참혹성 앞에 말문을 잃으면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반해, 미국에서 도래한 유대인들은 두 민족의 대립을 극히 관념적으로 파악하고, 팔레스티나인에 대한 상상을 초월하는 증오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광신적인 유대계 미국인 학자들의 사이드를 향한 공격성의 심층에 있는 것에 대해 막연하나마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은 이 팔레스티나 출신의 비교문학자를 자신들의 「전문영역」에서 배제하는 작업을 통하여, 합중국에 있어 때때로 희박해지기 쉬운 유대인으로써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고 싶었던 것이다. 현실의 이스라엘에 거주하지 않고, 헤브라이어도 구사할 수 없기 때문에, 거꾸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순화시켜 꿈꾸는 자에게 있어, 사이드란 자신이 유대인임을 확인시켜주는 귀중한 매개자였던 것이다.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는 먼저 한국에서 발행되고, 좀 지나서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적지 않은 일본의 지식인, 특히 일본 내에서 지배적인 우파 미디어에 대해 항상 이의를 제기해오던 지식인들에게 환영받고, 두 개의 상을 수상했다. 이 칭찬 및 수상과 동시에, 한국의 조선사 연구가들이 그녀에 대한 강한 공격을 시작했다. 또 이 책이 위안부를 모욕하고 있다는 이유로 형사소송의 대상이 된 직후부터 재일한국인의 조선사 전문가가 박유하의 저작은 근거없는 기술로 가득하다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나는 이 사태가 전문가로서의 원한이나 질투로부터, 혹은 아이덴티티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그들이 박유하를 중상모략한 한심한 사태라고는 꿈에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일본의 우파를 기쁘게 만들기 위해 「제국의 위안부」가 집필되었다는 등의 말을 그들이 만약 하였다면, 그것은 의도적으로 행해진 비열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말은 그들의 오랜 동안의 연구를 스스로 모욕하는 결과만을 남길 것이다.

어쨌거나 내가 곧바로 상기한 것이 사이드가 체험한 수난이었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박유하와 사이드는 역사가가 아니고 비교문학의 전문적 연구자였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또 박유하는 초기의 저작인 나츠메 소세키 론이나 야나기 무네요시 론이 보여주는 것처럼,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에게 이론적으로 시사받았고, 사회 속의 지배적 신화를 비판하기 위한 용기를 받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사이드가 「아마추어」라는 호칭 아래 비방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박유하도 또한 위안부 문제의 전문가가 아님에도 발언했다는 이유로 치열한 비난과 공격을 받았다.

나는 예전에 겪은 괴롭힘과 협박이 생각났다. 1995년의 일이었는데, 영화가 만들어진 지 100년이 되는 해라 NHK교육 TV가 나에게 12회 연속으로 세계영화사 프로그램을 만들어달라고 의뢰해 왔다. 나는 그에 응하여 쿠로사와 아키라나 존 포드, 펠리니 등의 이른바 세계의 명작영화를 소개해 나갔다. 다만, 최종회만은 이걸로 마지막이니 작심하고 16밀리 필름의 개인영화를 방영하기로 했다. 선택한 것은 야마타니 테츠오가 1979년에 찍은『오키나와의 할머니』란 작품이었고,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감독 소장 필름을 빌렸다. 그 작품 안에서 위안부였던 여성은, 일본이 전쟁에서 이겨줬으면 했다는 말을 반복하고, 미소라 히바리와 고바야시 아사히가 얼마나 멋졌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제와서 한국으로는 너무 부끄러워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현재의 NHK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방송은 삭제당하는 일 없이 방영되었다.

공영방송에서 16밀리 필름 영화의 일부가 2분정도 방영된 직후부터, NHK 및 당시 내가 재직하고 있었던 대학에 엄청난 항의가 왔다. 편지에는「비국민」, 「매국노」등의 표현과 함께, 한국인과 피차별 부락민을 둘러싼 갖가지 욕이 적혀있었다. 「고향인 소련으로 돌아가라」는 편지도 있었다. 나는 공포를 느끼지는 않았지만, 편지에 적힌 표현력의 저급함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어째서 모두가 균일한 어휘에 호소하는 일 밖에 못하는 것인가. 이 때의 체험이 계기가 되어 5년 후 서울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정대협이 주최하는 수요집회에 참여하고, 화과자를 가방에 가득 넣고 나눔의 집을 방문하여 위안부할머니들과 몇차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물론, 박유하에 대한 비방은 규모와 그 성격에 있어 나에 대한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고 훨씬 거대한 것이다. (그다지 좋은 말은 아니지만) 「무식」한 자들에게 의해 행해진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일정한 지식층의 손에 의해 체계적으로 전략적으로 준비된 것이다. 중상하는 이들은 위안부의 이름 아래 그녀를 형사고발하고 국민차원의 여론을 조작하여 그녀가 「대일본제국」을 변호하고 있다는 악의에 가득찬 허위선동을 이어갔다. 그녀가 한국에 거주하는 한, 고립과 위협을 느끼도록 집단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그 박해의 과격함은 일본의 어떤 독일문학자로 하여금, 아이히만을 논한 한나 아렌트의 이름을 거론하게끔 만들 만한 것이었다.

분명 그녀는 이제까지 위안분 문제를 생애의 주제로 삼아 연구해 온 역사가는 아니다. 앞에 기술한 바와 같이 일문학연구를 중심으로 한, 일개 비교문학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녀를 「아마추어」의 이름 아래 단죄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나는 반론하고 싶다. 지식인이란 전문학자와는 다른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그것은 본래적으로 아마추어일 것을 필요조건으로 한다는 사이드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사이드는『지식인이란 무엇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마추어리즘이란, 전문가와 같이 이익이나 포상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애호정신과 억누를 수 없는 흥미에 의해 움직여서, 보다 큰 조감도를 발견하거나, 경계와 장애를 넘어 다양한 연계를 이루거나, 또는 특정한 전문분야에 얽매이지 않고 전문직이란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관념과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내가 박유하 사건을 사이드의 수난에 견주는 것이 정당하다면, 지금부터 내가 적어야 할 것은 「제국의 위안부」가 제출하고 있는 「보다 큰 조감도」에 대해서 일 것이다. 그것은 미세한 사실오인이나 자료해석의 상대성의 차원을 넘어 일본과 한국에 있어서의 내셔널리즘을 비판하면서도 일본이 과거에 행한 역사적인 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비전을 제출하는 것과 통해 있어야 한다. 내가 이 저서로부터 배운 것을 이하 기술해 두고 싶다.

2

역사적 기억에는 여러 갈래의 계층이 존재한다. 단순한 사실과 통계의 열거가 역사인식과 다르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기억과 그것을 이야기하는 목소리의 다층성에 대해 알아 두어야 한다. 특히 그것이 전쟁이나 혁명 등의 동란기의 기억일 경우, 어떠한 시점에서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능동적인, 반동적인) 평가가 가능한 것이다. 기억의 최정점에는 국가적인 기억, 즉 현정권인 체제가 승인하고 미디어에 있어 지배적일 뿐만 아니라, 교과서의 기재를 통하여 교육제도의 안 쪽에까지 깊이 파고든 스토리가 존재한다. 이 스토리는 「신성하며 범할 수 없는」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국가적 기억에 준하는 것으로, 특권적인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정형적인 언설이 존재한다. 그것은 사회에 있어 충분히 카리스마화된 인물, 신격화된 「당사자」의 증언이거나 미디어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저명인의 발언인 경우가 많다. 정형적인 언설은 항상 미디어의 함수다. 그것은 미디어에 의해 전략적으로 연출되고, 기록되고, 이데올로기적 형성물로써 공공의 장에 던져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역사라기보다는 롤랑 바르트적인 의미의 「신화」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신화가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권능의 힘은, 이 언설을 국가기억과는 별개의 의미로 사회의 지배적인 언설, 공식적이라 할 수 있는 언설로써 기능하게 하고 있다.

세번째로, 기억의 하층에 존재하며 그 시대를 살아간 이름없는 자, 잊혀진 자, 부당하게 천대받고 그 목소리에 접근하는 것이 어려워진 자들의 목소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생존 허용된(살려진) 시간」의「생존 가능했던 체험」(민코프스키)에 의한 생생한 증언이지만, 미디어를 경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논의도 승계도 없이 정형적인 기억에 의해 억압받고 있다. 지식인이나 미디어에 관련된 자들을 여과기로써 통과하지 않는 한, 이 목소리는 사람들 앞에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목소리는 그나마 곤난을 극복해나가면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하층에 존재하고 있는 최후의, 제4의 목소리보다는 나을지도 모른다. 제4의 목소리란, 문자그대로 침묵이다. 세계의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갈 것을 강요당한 서벌턴이 처하고 있는 것이, 그러한 상황이다. 그들은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야기할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다. 어떠한 계몽적인 계기를 앞에 두고도, 조개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것이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입해 보면, 최정점에 있는 국가의 언설은, 2016년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수상이 체결한 한일합의가 그 최신 버젼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일본이 10억 엔을 한국에 지불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는 에필로그까지가 곁들여진다.

정형적인 목소리란, 정대협과 그 주위에 있는 동반자적 역사학자들의 손에 의한 한국의 지배적인 언설을 의미한다. 위안부는 항상 민족주의적인 정신에 가득하고, 일본군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고 그들을 주장한다. 그녀들을 위안부로 만든 것은 물론 일본군이고, 모든 한국인은 모든 상황에 있어 피해자였다. 위안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고결하고, 무구하며, 모범적인 한국인이었다. 이러한 주장 아래, 목소리는 특정한 영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정대협은 자신들이 위안부의 목소리의 유일하고도 정통적인 표상자임을 자인하고 있다.

제3의 목소리는 1990년대에 차례로 나타난 종군위안부 여성들의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목소리이며, 원래는 극히 다양하고 잡다한 요소에 가득찬 것이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쉽게도 제2의 목소리, 즉 정형적인 목소리에 의해 질서가 부여되고 노이즈를 제거한 상태가 아니고선 우리 눈에 비칠 수 없다.

그러면 제4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것은 한국에서 나타나지 않은 위안부들의 기억이다. 또한 한국과는 달리 스스로 나타나는 일이 전무한 일본의 위안부들의 내면에 감춰진 기억이다. 기묘하게도, 위안부 문제를 입에 담는 자들은 주로 한국에 있어서의 문제를 논할 뿐, 방대한 수가 존재했던 일본인 위안부의 존재를 당연히 무시하고 있다. 그 원인은 그녀들의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유하는 어째서 비방의 대상이 되었는가. 간단히 말해, 그녀가 정형적이고 지배적인 목소리를 거역하고,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alternative한 또다른 목소리를, 방대한 위안부 증언집으로부터 이끌어낸다는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위안부 스토리의 절대성을 고집하는 자들의 분노를 자아낸 것은 그녀의 그러한 행동이었다.

박유하는 그녀가 말하는 「공식적인 기억」이 어떤 식으로 위안부 신화를 인위적으로 구축해 나갔는가를 면밀히 따져, 과감하게도 그 상대화를 시도했다. 이 기억=스토리가 이제까지 은폐하고 배제해 온 위안부들의 여러 목소리에 그 탐구의 눈길을 돌린 것이다. 그러면서 참조한 텍스트로 한국인과 일본인이 집필한 소설작품뿐만 아니라 한국의 영화, 만화, 에니메이션에 대해 언급하고, 한국사회의 위안부신화의 형성과정을 분석하는 단서로 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말해두건데, 이러한 작업은 어디까지나 비교문학자의 손에 의한 것이다. 그녀는 하나의 언설을 다룰 때, 그것을 절대적인 사실이 아니라, 어떠한 시점(이데올로기적인, 문화적인)으로부터 해석된 「사실」로 보고 있다. 여기서 『도덕의 계보학』의 니체를 인용하는 것은, 어쩐지 대학1학년생을 상대로 강의를 하는 것 같아 내키지 않지만, 어떠한 사실도 그 사실을 둘러싼 해석이라는 인식론적인 전제에 대한 양해 없이는 앞으로 진행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말해두겠다. 박유하란 박유하라는 해석의 의지이다. 그녀는 앞에서 내가 말한 3번째 목소리를 마주했다. 다양성을 가지고, 개인의 생애를 건 체험에 기반한 것이면서, 정형적인 지배원리 하에서는 불순한 것으로 배제당하고 잘려나간 목소리 속에 들어가, 거기서 공식기억과 상반되는 이야기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무엇이 그녀의 이러한 작업의 동기가 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위안부 문제를 보다 큰 문맥, 즉 제국주의와 가부장제를 기초로 형성되어온 동아시아의 근대국민국가체계의 문맥 안에서 인식하고, 그것을 보다 깊은 차원에서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이 거대한 비젼을 이해하지 않고, 그 저작에서의 자료적 차이를 야단스럽게 언급하고 역사실증주의자를 참칭해 봐야, 무의미한 몸짓에 그칠 뿐 그녀를 비판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 역사적이라고 보여져온 「사실」이란 늘, 특정한 이데올로기 아래 위치지어지면서 「사실」로써 정립된다는 고전적인 명제를 재확인하는 일에 불과하다.

3

박유하가 종래의 공식적인 위안부 신화에 내민 의문은 크게 다음 두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위안부들이 민족의식을 가진 한국인으로써 일본군에 대해 저항하는 주체인 것은 아니었다는 지적이며, 또 하나는 그녀들을 어리고 순진가련한 소녀로 표상하는 것은, 그 비참하고 굴욕적이었던 현실을 교묘히 은폐해버린다는 지적이다.

위안부들은 일본인 병사를 위해 단순히 성만을 제공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들을 고향과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잔혹한 전장에서 생명의 위험에 처한 젊은이들을 위해, 문자그대로 위안을 제공해야하는 존재였다. 위안부와 일본인 병사의 차이점은, 전자가 성을 제공한데 대해, 후자는 생명을 제공할 것을 강요당한 점일 뿐, 둘 모두 제국에 있어서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며, 대체가능한 전력에 불과했다. 박유하는 위안부의 증언 뿐만 아니라, 다양한 텍스트를 동원하면서, 위안부가 일본군에 협력하지 않느면 살아남을 수 없었던 가혹한 상황을 상상할 것을 독자에게 요구한다. 이 한구절만 읽어도, 그녀가 위안부를 매춘부라 부르고 모욕했다는기소장이 사실과 동떨어진 것이며, 명확한 악의 아래 준비된 것임이 판명된다.

박유하의 분석의 뛰어난 점은, 피식민자인 조선인 위안부가 그 내면에 있어 일본인에게 과잉되게 순응해 외지에서 때로 일본인처럼 행동한 점을 지적한 데에 있다. 이는 종래의 공식기억에서는 있어서는 안 될 사실이었다. 그러나 박유하는 그녀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러한 제국의 내면화야말로 보다 용서하지 못할 제국의 죄임을 지적하고 있다. 일본군 병사와 위안부를 강간하는/강간당하는 대립관계로써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제국주의에 강요당한 피해자로 보는 시점은 향후 역사연구에 있어 새로운 윤리적 측면을 제시할 것이다. 그것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강제연행이 조선인, 중국인에게만 행해진 것이 아니라, 나가노 현이나 야마가타 현의 농민들이 마을을 통째로 만주국 개벽에 동원당한 경우에도 해당된다는 입장과 통하고 있다.

조선인 위안부들은 치마저고리 등의 민족의상의 착용을 허가받지 못했다. 그녀들은 조금이라도 일본인에 가깝도록 이름도 일본풍으로 고치고 기모노를 착용할 것을 명령받았다. 이것은 그 모습을 한번이라도 목격한 적이 있는 한국인에게는 더할 수 없는 굴욕일 것이다.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에 건립되어 현재 한국의 곳곳에 복제가 세워진 소녀상에 대하여, 박유하가 강한 위화감을 느끼는 것은, 그 상이 현실의 위안부가 체험한 굴욕의 기억을 은폐하고, 이상화된 스테레오 타입의 만연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녀상은, 비록 한국이 아무리 일본에게 짓밟히더라도 여전히 처녀라는 신화적 믿음에 대응하는 형태로 제작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패전 후 미국에 점령당한 일본에서 하라 세츠코가「영원한 처녀」로서 숭배받고 현재도 일본을 대표하는 표상으로 위치하고 있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어째서 소녀상인 것인가. 박유하를 비난공격하는 자들은, 위안부의 평균연령이 높다는 사실에 의하면 이 조각상이 부자연스럽다는 그녀의 주장에 대하여, 어째서 이토록 눈을 부릅뜨고 반론하는 것인가. 문제는 통계자료를 둘러싼 해석의 차원에 있지 않다. 위안부가 순결한 처녀가 아니면 안 된다고 광신하고 있는 한국인의 신화 측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박유하를 떠나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역사적인 희생자를 무구한 처녀로 표상하는 일은 위안부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3·1 독립운동에서 학살된 유관순도, 북한에 납치되어 생사불명인 요코타 메구미(일본에서는「짱」이란 호칭을 붙여야 한다)도 오키나와의 동굴에서 대부분이 살해된 「히메유리 부대」의 이들도 모두 소녀였고, 그렇기에 비극의 효율적인 기호로 선전되어왔다. 이는 정치인류학적으로 동아시아 특유의 병이다. 박유하의 소녀상 비판은 전후의 일본인마저도 무의식 하에서 이 스테레오타입의 상징법에 조작되어왔다는 사실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 문제가 전쟁 특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위안부 문제의 궁극적인 원인으로써 규탄받아야 할 것은 제국주의이며, 그에 따르는 한 병사도 위안부도 마찬가지로 희생자인 것이다. 이 비젼은 일본과 한국을 영원한 대립관계에 놓고 일본측이 일방적으로 역사를 왜곡했다고 주장하는 「위안부의 대변자」의 비생산적인 내셔널리즘을 논리적으로 상대화하게끔 한다. 한국에서의 공식기억이 왜곡하여 은폐해 온 위안부의 진실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박유하가 제출한 그림의 거대함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5

박유하는「제국의 위안부」마지막 부분에서 정창화가 1965년에 감독한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 』라는 영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책 중 영화에 대한 언급이 있는 유일한 곳이다. 무대는 미얀마의 일본군 주둔지이다. 조선인 위안부 여성이, 그녀가 배치된 「친일파」학도병 장교에게 말을 건다. 자신은 간호사가 된다고 듣고 이 곳에 속아서 왔다. 당신은 아직 일본제국주의가 신사적이라고 믿고 있는가라고 그녀는 말한다. 이 장면으로부터 판명되는 것은, 영화가 제작된 1960년대에는 한국인은 위안부를 둘러싼 90년대에 확립된 공식적 기억과는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위안부는 모든 비참함의 근원에 일본제국주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은 강제연행의 결과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는 (오늘날, 「예술적 영화」범주 안에 들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의 영화연구가가 이에 대해 언급하는 일은 없지만) 이렇게 강제연행의 신화가 집합적 기억으로서 인위적으로 형성되기 이전의, 일반한국인의 역사인식을 알기 위한 귀중한 자료로 존재하고 있다.

박유하가 한국의 B급 영화를 언급하였기에, 영화사가인 나는, 그 후의 한국영화가 어떤 식으로 종군위안부를 그려왔는지를 일본영화와 비교하면서 보충적으로 기술해두려고 한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80년에 걸쳐, 몇 편의 위안부 영화가 제작되었다. 1974년 시점에서 나봉한 감독(불명)에 의해『여자 정신대』라는 작품이 촬영되었다. 필름은 남아있지 않고, 영화연구가인 최성구 씨가 최근 발굴한 신문광고를 통해서만 간신히 그 존재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영어 제목을 Bloody sex라 하며「위안부 8만명의 통곡. 영화 역사상 최대의 충격을 가진 문제의 대하 드라마」라는 선전문구가 기재되어있다.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는 여성의 나체를 포함한 에로틱한 영화표현은 엄격한 검열 대상이였다. 때문에 제작자와 감독은 일본군은 역사적 만행을 규탄한다는 도덕적 구실 아래, 에로틱한 묘사를 듬뿍 담은 필름을 제작한다는 발상을 했다. 한국인에 의한 강간장면은 안 되지만, 일본의 광기의 군대가 강간을 한다면 역사적 사실로써 표상이 용서받는다는 한국인의 민족감정을 역으로 이용한 제작 자세를 알 수 있다.

내가 실제로 한국의 극장에서 볼 수 있었던 위안부 영화는 이상언감독의 『종군위안부』다. 1980년대 초반 일이었다. 이 감독은 야구선수 장훈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은 사람으로, 필모그래피를 참고하면, 아마도 소재를 고르지 않고 주문에 따라 감독하는 사람인 듯하다. 『종군위안부』는 호평이었기 때문에 시리즈화 되었다고 들었다. 제작의도는 『여자 정신대』의 연장선상에 있다. 조선인의 무고한 처녀들이 납치되어 위안소에 갇혀, 밤낮으로 일본군인에게 강간당한다. 그러나 영화 도중부터는 일본인 병사라는 사실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면서, 단순한 남녀의 성행위만이 몇 번이고 이어진다. 이러한 영화가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규탄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제작된 것은, 아마도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는 지식인들이 자국의 영화라는 미디어를 철저히 경시하여, 그 존재를 모르거나, 학문적 대상으로 논할 가치가 없다고 경시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식민지화 시대를 포함하여) 자국의 영화를 분석적으로 연구하려는 기운이 높아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위안부를 소재로 한 영화가 논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해방 후의 한국에 공식적인 기억이 존재하고, 위안부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기억이 형성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한국영화사도 공식적 기억을 만들어왔다. 거기서는 다큐멘터리「나눔의 집」이 모범적 작품으로써 선전되는 일은 있어도, 아마도 그보다 훨씬 많은 관객을 동원했을 『여자 정신대』를 비롯한 위안부 영화는 결코 언급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급해서는 안 되는, 치욕의 영화인 것이다.

그렇다 한들 내가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에로영화를 한국의 남성 관객들은 어떤 마음으로 보고 있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그들은 남성으로서 일본군 병사 측에 동일화하여, 여성을 강간하는 유사쾌락을 얻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같은 한국인으로서 강간당하는 여성 측에 마조히스틱하게 감정이입하여 보고 있었던 것인가.

어느 쪽이던 간에, 여기서 시각적으로도 스토리적으로도 얻어지는 쾌락은 도착적이다. 예전에 상해의 길거리를 산보하고 있을 때, 짐차 위에 「남경대도살(중국에서는「학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에 대한, 선정적인 표지의 책이 쌓아 올려져 있는 것을 보고, 극히 복잡한 심경이 되었던 일이 떠오른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잔혹행위에 관한 포르노그래피였다. 아마도 이러한 예는 세계 여러 곳에 존재할 것이다. 그것을 분석하는 것은 역사학이 아니라 미디어의 사회심리학이다. 사람은 어째서 스스로의 민족의 피해자를 주제로 한 포르노그래피에 쾌감을 느끼고, 그것을 상품화해 왔는가.

나는 예전에 쿠로사와 아키라부터 스즈키 세이쥰, 그리고 8미리 필름의 야마타니 테츠오가 조선인 종군위안부를 스크린에 표상하려고 어떤 식으로 노력해왔는지를 조사한 적이 있다(요모다 이누히코「리코우란과 위안부, 『리코우란과 하라세츠코』). GHQ에 의한 검열 하였음에도, 쿠로사와는 타니구치 센키치와 팀을 짜서 타무라 야스지로의『춘부전』을 영화로 만들려고 기획했고, 매번 각본이 허가를 받지 못해 되돌려 보내졌다. 이 기획은 타니구치가 조선인 위안부를 일본인 위안단의 여성가수로 치환함으로써 『새벽의 탈주』를 감독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쿠로사와의 정의감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닛카츠의 스즈키세이쥰은 그들의 좌절을 전제로, 1965년 드디어 노가와 유미코 주연으로 『춘부전』의 영화화에 성공한다. 거기에는 주인공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조선인 위안부가 등장한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지만, 주인공 남녀가 절망하여 죽은 사실을 알고는 처음으로 입을 열어 「일본인은 항상 죽을려고 한다. 밟혀도 차여도 살아가야 한다. 살아가는 것이 훨씬 힘들다. 죽는 건 비겁하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중요한 배역이고 중요한 대사다. 세이쥰은 그녀를 어떠한 비참한 상황에 있어서도 주체성을 잃지 않고 세계를 투철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일본에서 이상을 가진 영화인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위안부 문제와 진지하게 맞서려 하고 있었을 때, 한국의 영화인은 이를 단순한 에로 영화의 소재로 밖에 보려하지 않았다. 이 낙차는 크다. 한국의 연구가 중에서 이 문제에 답해줄 사람은 있을까.

6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을 시대의 일이다. 상해에서는 국민당의 테러가 횡행하고 있었다. 한 때 루쉰의 동생이, 아무리 개가 밉더라도 물에 빠진 개를 때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도 이를 지지하여, 중국인에게는 옛날부터 페어 플레이의 정신이 결여되었다고 논했다. 개와 싸우기 위해서는 개와 대등한 입장에 서서 싸워야 하고, 곤경에 처한 개를 공격하는 것은 비겁하다는 생각이다.

루쉰은 불같이 화를 냈다. 물에 빠졌더라도 나쁜 개는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게 사람을 무는 개라면 육지에 있건 물 속에 있건 상관없다.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 중국에는 물에 떨어진 개를 동정해서 용서해줬기 때문에 나중에 그 개한테 잡아 먹힌다는 이야기가 많이 존재하지 않는가. 물에 빠졌을 때가 좋은 기회가 아닌가.

무서운 말이다. 항상 국민당 정권으로부터 목숨을 위협받고, 친구와 제자를 차례로 암살당한 지식인만이 입에 담을 수 있는 증오에 가득찬 말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나는 이 생각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과연 그를 둘러싼 상황은 가혹했다. 그렇다고 적에 대해 치열한 증오를 퍼붓고, 그 멸망을 바라는 것만으로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을까. 내가 이런 식으로 기술하는 것은, 70년대 신좌익의 각 계파가 서로를 죽여온 것을 비교적 가까이서 봐왔기 때문이다. 나는 존경하는 「아큐정전」의 작가에 거스르고 말하고 싶다. 지금이야말로 개를 물에서 건져내어 페어플레이를 실천할 때이다. 적어도 증오의 쇠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1930년대의 상해로부터 2000년대의 서울과 동경까지, 사람들은 무엇을 해 온 것일까.

모두가 물에 떨어진 개를 재빨리 발견하고, 즉시 무서운 정열을 발휘하여 물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개에게 돌을 던져왔다. 그들은 만약 개가 평소처럼 지상을 거닐고 있었더라면 너무나 무서워 결코 돌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맘껏 욕설을 퍼붓고 돌을 던져도 자신의 안전이 확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태도가 돌변했다. 여기에 순수한 증오가 존재한다. 그러나 루쉰의 경우와 달리, 그 증오에는 필연적인 동기가 없다. 그것은 집단 히스테리라 불린다.

박유하가 종군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저작을 한국에서 출간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냉정히 생각해보자. 엉성하고 자의적인 인용을 근거로 형사소송이 이루어지고, 그녀는 위안부 한사람한사람에게 고액의 위자료를 지불할 것을 명령받았다. 뿐만 아니라, 근무하고 있는 대학의 급료를 압류당하고, 인터넷 상의 비난/협박은 물론이고, 신체안전에서도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글자 그대로, 심리적으로 생명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바로 그 때이다. 한국인과 재일한국인에 의해 치열한 공격이 개시된 것은. 그야말로 물에 빠진 개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다.

그들의 일부는, 일본에서 박유하가 높이 평가되고 적지 않은 지식인이 그 저작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 것을 의문시하고, 야유하며, 그 「섬멸」을 바라며 행동하고 있다. 박유하가 위안부의 증언자료를 자의적으로 해석,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녀가 이 문제에 대해 영원히 입을 닫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박유하를 지지하는 자들은 그녀가 한국에서 입은 법적 수난과 사회적 제재를 먼저 해결하고, 공평한 의논의 장의 성립을 기다려 대일본제국의 죄와 피식민자의 상황에 대해 토의 탐구를 개시해야 한다고 우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반해, 지지자를 비난하는 측은 승리/패배의 차원에서 목소리를 높여 선동을 계속하여, 사정에 밝지 못한 일본의 언론에 호소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승리」를 획득했을 때, 그들은 무엇을 얻게 되는 것일까. 위안부 문제에 성실한 관심을 보여온 일본 지식인의 대다수는 이를 계기로 문제에 대한 무관심을 표명하게 될 것이다. 이 문제를 식민지 지배와 여성의 인권유린의 문제로 보려하는 사람들이 일제히 후퇴해 버렸을 때, 일본의 여론 속에 남는 것은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고, 식민지 지배를 긍정적으로 찬양하는 우파담론 뿐이다. 현재조차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이 우파의 선동에 의해 「혐한」주의자는 지금 이상으로 암약하고, 더더욱 심한 헤이트 스피치의 폭풍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의 상호양해는, 아무리 양국 정부가 금전적인 보상에 의한 합의에 달했다고 하더라도, 그와는 관계없이 지금까지 이상으로 곤란하고 뒤죽박죽이 될 뿐이다. 박유하가 과감히 제시를 시도한 「보다 큰 조감도」와 한국의 공식적 기억의 상대화가 배제되었을 때, 발생하는 것이 이러한 사태임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박유하의 비판자들에게 연구자로서의 페어 플레이 정신이 있다면, 먼저 한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법적인 조치에 항의하고, 그 해결을 기다려 진지한 토론에 들어가야 하는게 아닐까. 인간은 집단 히스테리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냉정히 사물의 순서를 생각해야 한다.

물에 빠진 개에게 돌을 던지지 말라. (번역-오경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