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쯤은 일본과 대적해 보고 싶었던 조선남성의 욕망을 구체화한 영화.
220억이나 들였다는 영화 〈군함도〉를 이렇게 밖에 말할 수밖에 없다는 건 슬픈 일일 뿐 아니라 거의 재앙이다. 개봉 직후에 영화를 보러 간 적이 거의 없는 내가 이렇게 일찍 보게 된 건, 첫날에만 백만 가까운 사람이 봤다는 얘기에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역사작가(이상한 명칭이다) 심용환씨가 군함도를 옹호하느라 〈귀향〉을 비판했다가 문제가 되고 있는 듯한데, 군함도에 비하면 귀향이 백 배 낫다. 귀향에선 최소한 피해자에 대한 제작자의 아픈 마음이 느껴지고 공감 가능한 기본정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귀향에 문제가 없다는 건 아니다.)
그런데 군함도엔 과거 인간들이 행한 일에 대한 아픔, 그래서 일본인조차 감동시킬 수 있는 호소력이 없다. 그리고 그저 과거의 아픔을 성찰 없이 곧바로 오늘의 긍지로 치환시킨 21세기 대한민국의 대리만족만 있다. 제작자와 출연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곳에선 “피해자”란 오로지 관념일 뿐이고, 그렇게 형해화된 “피해자”는 쉽게 소비될 수밖에 없다.
기업위안소가 실은 유곽이었음을 보여 준다거나 우리 안의 친일파를 보여주는 부분은 진일보하려는 시도로서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우리 안의 친일파를 그저 보여주고 응징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자성이 되는 건 아니다. 우리 안의 그들을 “그들”로 그리는 한. 군함도는 여전히 일본과 조선을 대립구조로 묘사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기존영화와 다르지 않다.
이하는 눈에 띄는 문제 몇 가지.
1) 강제연행? 여전히 마구잡이식 강제연행이 중심이었던 것처럼 묘사된다. 이 문제에 대해 가장 납득 가능한 책을 쓴 도쿄대학 도노무라 교수에 의하면, 국민 총동원령에 의해 징용이 가능해진 건 사실이지만 마구잡이로 끌어가는 경우는 (있었을 수 있으나)예외적인 일이었다. 강제성을 과장/강조하지 않아도 피해를 말하는 건 가능하다.
2) 일본인이 조선인을 가혹하게 다루었을 수는 있지만, 쉽게 총살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식민지인이란 그들에게 “자원”이었으므로.
3) 징용자들과 함께 가던 여자나 소녀를 갑자기 강압적으로 끌어가 유곽으로 보내는 사태도 있기 힘든 일이다. 탄광 근처에도 기업위안소라 불리게 된 유곽이나 요리점이 있었지만 위안부와 남성징용은 동원루트 자체가 다르다.
4)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성병검사받는 설정은 (감독 말대로) 픽션으로 봐야 한다.
5)위안부 여성을 못이 박힌 판자 위에서 굴리는 장면은 북한 출신 할머니의 증언을 살린 것이겠지만, 전무후무한 이 증언은 사실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케이스다. 아편에 중독된 여성을 업주가 못이 박힌 도구로 처벌했다고 하는 얘기가 나오는 자료를 본 적이 있는데, 이 증언은 그런 체험의 기억이 만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위안부 여성에 대한 폭행은 많았지만, 남성들의 향수병을 치유하고 생산능력을 높여 줄 것으로 기대되었던 “자원”을 굳이 고문해서 훼손할 필요가 지배자에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노골적으로 훼손하는 건 어디까지나 반체제적 대상이다. 물론 예외가 없지는 않다. 문신 역시 마찬가지. 경위는 알 수 없지만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이른바 문신 할머니는 북한 출신 할머니 오로지 한 사람이다. 예외적인 케이스가 상징이 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픽션이라고 말하면서도 사실로 믿었을 가장 끔찍한 증언을 위안부 이야기에 넣은 감독의 의도는 바로 그런 의도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6) 징용자와 고용주의 대립을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쟁처럼 표현한 건 징용문제에 대한 이해 자체가 부족하다는 증거.
7) 임금을 빼돌리는 방식으로 지급하지 않은 것처럼 묘사한 것도 중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8) “군함도의 현실”이 전쟁범죄라는 이해, 그러니 기억하는 이들을 없애 버려야 한다고 일본인이 생각했을 거라는 설정이야말로 대표적 픽션. 조선인 징용은 식민지화의 결과였고, 심지어 합법화한 국민동원이었다. 죄를 추궁하고 싶다 해도 구조적으로 전쟁범죄일 수도 없거니와 이런 식의 상상은 오히려 식민지배 문제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9) 조선인의 단합 장면에서 촛불을 사용한 건 아직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촛불집회를 불러내 “민중의 힘”을 보여주려는 의식의 발로. 결국 이 영화는 과거의 영화가 아니라 현재의 생각과 체험을 과거에 투영시킨 현대영화일 뿐이다. 당사자가 철저하게 배제된.
10) 남성성을 과도하게 드러내고 있어 젠더론적으로도 문제다. 체격 좋은 소지섭은 전혀 깡패 같지 않고,키크고 잘생긴 송중기는 태양의 후예의 멋진 군인을 재연할 뿐이다. 배고프고 고달팠을 광복군은 그곳에 없다. (황정민 딸역의 캐릭터가 가장 이해 되지 않았다.)
11) “우리가 뭘 잘못했기에!”라는 조선인의 발언은 피해자 지위에 안주하는 발언이고, “고마운 줄도 모르고!”라고 외치는 악덕일본인의 발언은 피상적인 제국주의자의 표상이다. 물론 그렇게 외치는 일본인들은 오늘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일본국민 전체 속에서 분명히 소수인 그들을 끊임없이 소환해서 경계와 불신을 이어가도록 요구해 이익을 보는 건 도대체 누구인가?
12) 픽션이라는 말로 역사고증적인 추궁을 피해갈 장치를 마련해 두면서도, 마지막 엔딩자막엔 세계문화유산 설명에 징용이 설명되지 않았다는 말이 나온다. 감독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어정쩡함에 있다.
13) 각본은 류승완 감독(과 또 다른 한 사람)이었다. 욕망의 거침없는 표출이 상상력(픽션)이라는 말로 혼동된 최악의 경우. 좀 더 섬세하고 깊이 있는 상상력을 가진 작가를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상상하고 이해하는 일이란 과거를 산,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의 내면의 심연에 가닿는 일이다. 어두운 땅밑체험을 추체험한들 “오늘의 나”를 벗어나지 않는 한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쉽게 설명된 역사일수록 경계되어야 하는 이유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지만, 영화 군함도에는 “피해자”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