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부터 들은 얘기를 다시 맞닥뜨리고 보니, 지적퇴행의 주체는 오히려 서경식 교수쪽이 아닌가 싶다.
서교수의 이런 주장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이미 몇 번 언급한 적이 있는 듯 한데, 북한의 핵실험을 다시 만나게 된 다음날 다시 이런 기사를 접하게 되니, 실망을 넘어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본격적인 비판은 조만간 긴 글로 할 생각이지만, 한겨레를 위시한 한국의 진보층이 이런 식의 주장에 간단히 귀기울이는 현실 또한 우리 안의 지적퇴행현상으로 보인다.
이 기사의 문제를 두가지만 지적해 둔다.
1) “리버럴”이라는 단어를 번역이나 주석없이 사용한 탓에,” 강남좌파” 혹은 요즘 곧잘 지적되고 있는 “처음부터 보수인 진보”와 혼동하게 만든다. 일본에서의 “리버럴”이란 어디까지나 진보좌파를 말한다. 물론 일본 역시 “무늬만 진보” 인사가 없지 않겠으나 서교수의 비판대상이 된 이들은 대부분, 일본 진보담론을 선두에 서서 생산해 왔던 이들이다.
2)2008년 가을부터, 서경식선생은 한국의 독자를 향해 “일본 리버럴”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나의 책이 일본에서 평가받은 것이 서교수와 주변인들을 실망시킨 것이 이유라는데, 그 근원에는 1990년대 후반부터, 그러니까 이미 20년전부터 시작된 일본내 진보지식인간의 생각차이가 만든 갈등이 있다.
애초에 그 갈등은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의 갈등이었다. 동시에 급진진보와 온건진보의 갈등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사상싸움. 그런데 일본진보가 “신자유주의의 도래에 투항”했다고 이리도 쉽게 말하고 있으니 당사자들이 들으면 실소할 것이다.
냉전붕괴이후 일본의 진보좌파들은, 곧바로 갈등하기 시작했다.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40년전 학생운동시절의 급진/온건파의 싸움이 있다. 90년대 이후에도, 급진파는 오래된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일에만 집착해 왔고, 온건파는 눈앞에 놓인 새로운 정황을 정확히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필요하면 그때까지의 생각을 수정했다. 와다선생이나 우에노선생과 서경식교수의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고, 그런 식의 태도의 차이를 만든 건 내가 보기엔 사고의 유연성이다.
자신들을 중심으로 한 “혁명”이 목적이다 보니, 이들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천박한” 것으로 취급하고, “우경화”한 증거라고 주장하고, “퇴행”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 짧은 기사조차, 그 연장선상에서 일본이 위안부문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고 불신을 조장하니, 위험한 선동이 아닐 수 없다.그런데도 이런 생각이 이제 대통령도 언급하는 “국민정서”로 자리잡았으니, 한국의 보수정권 10년은 일부재일교포들한테는 결코 잃어버린 세월이 아니다.
나는 위안부문제를 “제국의 부수적 피해”라고 말하지 않았다. 서교수나 정영환교수등 재일교포들의 말을 언급된 자료의 확인없이 옮겨 쓰는 전통, 멀쩡한 사람에 관해 사실과 다른 왜곡된 정보를 흘리는 일은 이미 10년전에 한겨레 한승동 기자가 시작한 것이기는 하지만, 10년이 지나도록 똑같은 논조가 전혀 의심받고 있지 않다는 건, 한국자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의 우려는 나 한사람을 이들의 공격에서 피하게 하려는데에 있지 않다. 이들의 담론이 구조적으로 폭력을 용인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있고, 그런 “사고의 결함”이 나에 대한 물리적 폭력으로 “실제로”나타났다는 체험에 있다. 무엇보다, 그런 식의 폭력이 국가단위로 확대될 수도 있다는 공포가 조금씩 현실화되고 있다는데에 있다.
내가 이들에게 비판을 받았고, 그들이 뿌린 불신의 그물에 걸려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했던 정세판단미스를 또다시 행해 끔찍한 재앙을 만나지 않기 위해 말해두고 싶다.
일본의 진보지식인들에 대한 불신을 끊임없이 한국사회에 유포시켜온 재일교포들의 언설을, 이제부터라도 조금은 의심하고, 검토해 주었으면 좋겠다. 단언컨대, 이들은 서경식교수 정도나 그 주변 인물들에게 이런 식으로 가볍게 다루어져도 되는 사람들이 아니다.
북한의 행태가 보여 준 것처럼, 지금 평화를 위협중인 건 우파가 아니라 좌파쪽이다. 물론 북한은 이제 공산주의국가조차 넘어선, 그저 군국주의국가로 봐야 하겠지만.
배척하고 싶은 상대를 비난하는 최대수사가 고작 “우파”라는 말이라는 건, 그 자체로 우리가 여전히 냉전구도의 한가운데 있다는 걸 보여줄 뿐이다.
진보인지 보수인지의 구별보다 중요한 건, 어디에 서 있건, 이질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또 그럴 만한 유연성과 인내심이 있는지의 여부다. 그래야만 상대를 지배하거나 제거하고 싶은 욕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판과 제거욕망은, 아주 다른 차원의 것이다.
와다 교수의 선택이 가장 옳았는지 여부는 얼마든지 검토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와다교수는 늘 생각이 다른 이들의 말에 귀기울이면서, 위안부할머니와 모두를 위한 최선이 뭔지 늘 고민해 왔다는 점이다. 그런데, 와다교수를 비난했던 이들은 이질적인 의견에는 귀를 닫았고, 조롱하거나 무시했다. 지금의 북한처럼.
인간과 생명에 대한 존중이 없는 이들, 폭력을 가하거나 무기로 삼는 이들은, 더이상 진보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