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동 할머니를 생각한다 2

정대협의 발표자료엔 위안소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따라서 여기선 증언집만 사용한다.

2. 위안소생활

<증언집>

“우리를 데려간 일본남자와 조선인남자가 사복을 입고 문 앞에서 우리를 감시했다.”

“관리인은 우리를 부산에서부터 인솔했던 한국인이었다. 그는 일본 군복을 입고 계급장은 달지 않고 있었다.”

“관리인은 전쟁이 끝나면 큰 돈을 주겠다고 우리에게 말하곤 했다. 저렇게 큰 집을 살 만큼의 돈을 주겠다고 바깥의 큰 건물을 가리켰다.”

“한국에서부터 같이 간 일본사람과 조선 사람이 계속 우리를 데리고 다녔다.”
“싱가포르에서 몇달 있다가 수마트라로,인도네시아로 말레이지아로 자바로 우리는 계속 이동했다.”

“나는 어느 곳에서건 특별히 정을 준 사람은 없었다. 얼굴이 익을 만 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했으니 정들 사이도 없었고, 나는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일본이 이겨야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일본이 승전하기를 빌기도 했다.”

“우리는 일본인 여자들과는 말도 하지 않고 우리끼리만 어울려 다녔다. “

“위안부 시절 내 이름은 가네무라 후유코라고 하기도 했고, 요시코라고도 했다. 모두 군인들이 지어줬다.”

“관리인은 처음부터 같이 다녔던 일본에서 자란 40대 한국인이었는데 우리는 이사람을 ‘니상(오빠)’이라고 불렀다. 이 사람은 마음에 드는 위안부를 골라 데리고 자기도 했으며, 위안부들이 말을 안 들으면 막 때리고 욕도 했다. “

<박유하 해설>

여기서는 관리인들이(업자)”군복”을 입고 있었다고, 보다 명확하게 표현된다. “군인이 나타나 끌고 갔다”는 증언을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일본인들도 있는데 , 대개는 이러한 경우일 것으로 추정 가능하다.

업자는 ‘위안부’에게 지급해야 할 돈을 데려오면서 지불한 빚으로 충당시킨 경우가 많았다. 다만, 꼬박꼬박 대신 저금해 준 경우도 있었으니 이 부분은 일괄적으로 말하기 힘들다.

김할머니는 이 때 “이동”했다고 표현한다. 물론 이 때의 인솔자는 업자들이다. 군부의 요청을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 “이동”은 경제논리로 이루어졌다.

“정을 준”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오히려 정을 주고 받는 정황이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할머니의 경우 15세에 갔으니 어렸기 때문일 수 있다. 일본군과의 관계는 나이와 일본어 능력이 크게 좌우한 듯 하다.

일본을 좋아해서든 아니든 “일본의 승전”을 빌었다는 것은 “일본”이 구조적으로 “적”의 관계가 아니었음을 말한다.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 역시(위계관계가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일본군 위안부”의 첫번째 대상은 일본인여성이었다.
조선인들과 잘 어울리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지만, 민족적차별은 똑같은 일에 동원된 여성들 사이에도 존재했다.

조선인을 포함한 업자들이 위안부와 ”자기도”했다는 건, “업자”가 그저 일본군의 명령으로 관리했을 뿐이라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 상상이자 희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선 간단히 기술되고 있지만, 위안부들의 몸에 잔혹한 폭행을 가한 주체들은 압도적으로 업자였다. “성노예”들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군인들 또한 때로 폭행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규율로 금지되었고, 어길 경우 무겁지 않았어도 처벌받았다.

위안부들은, 군인들의 부당한 행위를 ‘헌병’에게 호소할 수 있었다.

문옥주 할머니는 칼로 위협하는 군인과 싸우다가 상대를 죽였는데, 재판에서 무죄를 받기도 했다.